학술논문
용인 할미산성과 주변 신라 유적과의 관계 검토
이용수 28
- 영문명
- A Review of Halmi Fortress in Yongin and the Relationship with Surrounding Relics of Silla Kingdom
- 발행기관
- 개인저작물
- 저자명
- 황보경(HwangBo, Kyung)
- 간행물 정보
- 『개인저작물 - 인문』62호, 77~109쪽, 전체 33쪽
- 주제분류
- 인문학 > 역사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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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할미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6세기 중반부터 후반사이에 마북동 일대로 진출한 신라인들이 취락을 형성하였고, 보정동에 고분을 조영하였으며, 도로도 개설하여 교통로를 확보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은 당항성[당성]과 남천주를 연결되는 동 서 교통로와 탄천을 따라 한강유역까지 이르는 남 북 교통로를 개척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 아래 구축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점차 탄천과 마북천을 따라 취락과 생산시설이 본격적으로 조성되면서 할미산성의 전략적 가치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7세기 초~중반 한강 이북이나 이남지역이 어느 정도 안정화 되면서 할미산성의 군사적 비중은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7세기 중후반이나 8세기 초에 정세변화로 인해 할미산성을 대체할만한 성이 필요함에 따라 석성산성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용인지역에 할미산성을 먼저 축조하고 활용한 반면, 석성산성에서 확인된 남북국시대 신라가 쌓은 성벽과 유물로 보아 할미산성보다 늦은 시기에 축성내지 수축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사용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해 보았는데, 중요한 것은 석성산성이 할미산성보다 잣고개를 통제하기가 용이할 뿐 아니라, 주변 지역 특히 서쪽과 남쪽에 대한 시야 확보가 넓어 감제하기가 용이하는 점이다. 그리고 성돌 확보가 쉽고, 철기 제작기법이 발달한 점도 감안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할미산성 주변에서 조사된 취락은 마북동 취락유적이 대표적인 가운데, 그 주위에서 주거지와 수혈, 수전, 도로, 매납유구 등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자료로 보아 당시의 신라인들은 수전경작 등의 농경생활을 했고, 슬래그와 미상의 철제품 그리고 철촉과 소찰 등으로 보아 무기류나 공구류 등을 생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도로유구와 차관, 재갈 등의 유물로 볼 때, 마북동 취락유적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방향의 ‘十’자형 교차로를 확보 및 개척하여 할미산성과 태봉산성 방향, 죽전방향 등으로의 왕래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또한, 할미산성 운영시기 동안 마북동 취락유적이 동시기에 같은 토기와 철기 등의 유물을 공유하였고, 탄천 동편의 마북동 중세취락과 청덕동 쪽에도 점차 취락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토기를 매납한 유구로 보아 신라인들이 땅이나 산, 물에 대해 고유의 제의행위를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고분은 보정동 고분군 외에도 마북동, 청덕동, 역북동, 언남동 등에서도 발굴되었지만, 대규모로 군집된 곳은 보정동 뿐이다. 보정동 고분군에서는 횡구식 석실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두침석 사용과 배장곽, 호석, 제의유구의 존재 및 부장 토기에 대한 훼기가 확인되었으며, 추가장이 이루어졌다는 점도 파악되었다. 석실묘의 구조와 매장수법 등으로 보아 오랫동안 조영되었다는 점과 특정지역에서 옮겨온 집단이 축조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토기와 철기 유물 외에 귀금속 등의 위세품이 출토되지 않아 피장자 신분이 높지 않다고 여겨지며, 향후 고분군 정상부 쪽에 대한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영문 초록
In the surrounding area of Halmi Fortress, people of the Silla Kingdom who had advanced to the Mabuk-dong area during the mid to late 6th century formed villages and created tombs in Bojeong-dong. They built roads and secured transportation routes as well. It is assumed that such efforts were made for the purpose of opening and maintaining the east-west transportation route connecting Dangseong in Hwaseong and Namcheonju and the south-north route reaching the basin of Han River along the Tancheon Stream. As the villages and production facilities had been created in full scale along the Tancheon Stream and Mabukcheon Stream, the strategical value of Halmi Fortress were sustained. However, it seemed that the military role of Halmi Fortress was reduced during the early and the mid of the 7th century. There was a necessity for another fortress to substitute the military role due to the gradual changes in the situation and it was assumed that Seokseong Fortress replaced the role.
While the Silla Dynasty built Halmi Fortress and utilized it earlier, Seokseong Fortress was assumed to be built later time or utilized less. There are two hypotheses about the time that used the Fortresses. The important things lie in that Seokseong Fortress was easier to control the mountain pass and provided a larger field of view for vigilance than Halmi Fortress. It was also assumed that Seokseong Fortress was easier to get stones for the fortress construction and had the advanced production skills for iron tools.
Villages in Mabuk-dong are the representative relics excavated around the Halmi Fortress. There found residential sites, pits, paddy fields, roads, buried remains, etc. People of Silla Kingdom lived agricultural life through farming on the paddy fields. Seen from slags, unknown iron things, iron arrowheads, metal scales, etc., it is assumed that irons such as weaponry and tools had been made. In addition, based on the relics including roads, tea kettles, and gags, it is considered that cross-shaped roads connecting the four directions was secured and developed so that traffic toward Halmi Fortress, Taebong Fortress, and Jukjeon could be provided. It is also understood that Halmi Fortress and villages in Mabuk-dong shared the same kinds of earthenware and ironware during the same period and the villages also were formed around the east part of Tancheon Stream. The buried earthenware indicated that people of Silla Kingdom performed their inherent ritual services toward land, mountains, and water.
In the tombs of Bojeong-dong, there found a lot of side-open stone-chamber tombs. It was also confirmed the use of stone pillows, small extra stone coffins(Baejangkwak), guiding stones around the tombs, clothing for ritual services, and intentional damages on the buried relics. It was also found that additional burial had been done therein.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할미산성 주변 신라 유적 현황
Ⅲ. 할미산성과 주변 유적과의 관계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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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 할미산성과 주변 신라 유적과의 관계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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