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문명
- The War and Military Mobilization of Baekje History
- 발행기관
- 북악사학회
- 저자명
- 이재준(Jae-joon Lee)
- 간행물 정보
- 『북악사론』제22집, 41~79쪽, 전체 39쪽
- 주제분류
- 인문학 > 역사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2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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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백제사 속 전쟁기록은 약 125회가 분석되었으며, 부흥전쟁까지 고려하면 153회가 된다. 전쟁을 위해서는 군사 동원이 필수였고, 그 범주에는 축성·대열·전렵·농업·외교 등도 포함한다.
한성 도읍기는 군사동원을 통한 전쟁이 약 77회가 있었다. 초기에는 국왕 아래 거수층이 참여하는 명망군 단계였으며, 군사동맹체인 부병 단계를 거쳐 근초고왕 때인 4세기 중엽에 개병제 혹은 징병제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3만여 명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아신왕 때는 왜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또한 군사 동원의 한 축인 대열은 4회가 있었으며 근초고왕 때는 전부 황색기를 사용하여 국왕의 전 부병 통제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군사 훈련의 일환인 전렵은 25회나 실시되었으며, 군량 동원을 위해 농업 장려와 제방 공사 등도 실시되었다.
웅진 도읍기는 한성 함락에 의한 긴급한 천도 특성상 축성 기사가 많았으며,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왕권 강화와 군사 훈련 차원의 전렵은 10여 차례로 많았다. 동성왕 이후 약 13회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무령왕은 여러 차례 고구려에 이겼다고 양나라에 표를 올려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잦은 전쟁과 군사 동원 등으로 백성들의 유민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사비 도읍기는 한성·웅진 기간 대비 전쟁이 많았다. 그 이유는 상실한 한강 유역 회복과 성왕의 전사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추정된다. 많을 때는 약 4만여 명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큰 규모의 전쟁에도 동원 기록이 없다. 특히 18만 명이나 되는 나당연합군 침공에도 백제군은 약 2만여 명밖에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당시 백제의 동원 가능한 병력은 6만에서 10만 명까지였다. 추정하건대 백제는 최대 위기의 전쟁에 약 6만 명 이상의 군사를 동원하였다. 백제가 항복한 후 백제 부흥을 위해 3년 4개월간 전쟁을 이어간 3만여 명은 나당의 침공 징후를 알고 동원되어, 당군의 양공 작전에 속아, 당진 방면으로 조기 투입되었던 병력이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데 인력 동원이 주가 되지만 군사 동원은 군량 동원을 위한 농업도 장려해야 했고 축성 동원은 물론 훈련을 위한 전렵 동원 등 다양하였다. 백제인들이 군사 동원에 응하는 자세로 국가에 대한 충성과 효, 그리고 의리 등이 내면화 되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영문 초록
Baekje fought about 125 wars. Considering the Revival War, it was 153. Military mobilization was essential for the war.
About 77 wars were fought in the Hanseong town period. It was initially at the stage of a prestigious army in which the king's great class participated. The national conscription system or conscription system began in the mid-fourth century during the reign of King Geunchogo after going through the military alliance stage. During the reign of King Asin, he received support from the Japanese. In addition, agricultural promotion and embankment construction were carried out to mobilize the military, which is one of the pillars of military mobilization. There were also 25 military training events to move the mobilized soldiers under the command system.
Woongjin Doeupgi had many articles of construction. He conducted more than 10 wars to strengthen royal authority and train military. After King Dongseong, he won about 14 wars. King Muryeong voted for both countries and declared himself a power again. However, frequent wars and military mobilization led to the phenomenon of people's liberation.
The Sabi town period fought many wars. It was because of the restoration of the Han River basin and retaliation for the fallen king. It also mobilized about 40,000 troops, but only about 20,000 Baekje troops were able to mobilize despite the invasion of the Nadang Combined Forces. Baekje could mobilize between 60,000 and 100,000 troops. Baekje mobilized 60,000 troops. They fought for three years and four months for Baekje's revival after the Tang army was deceived by anti-aircraft operations and sent early troops to Dangjin.
Manpower mobilization is the main focus of military mobilization, but agriculture for military mobilization should also be encouraged, and not only for building but also for training should be mobilized. It was the internalization of loyalty, filial piety, and loyalty to the state in response to the military mobilization of the Baekje people.
목차
Ⅰ. 머리말
Ⅱ. 한성 도읍기 전쟁과 군사 동원
Ⅲ. 웅진 도읍기 전쟁과 군사 동원
Ⅳ. 사비 도읍기 전쟁과 군사 동원
Ⅴ.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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