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고려시대 양주의 읍치 이동에 관한 연구
이용수 562
- 영문명
- Research on Transfer of the Center City of Yangju in the Koryo Period
- 발행기관
-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 저자명
- 이기봉(Ki-Bong Lee)
- 간행물 정보
- 『문화역사지리』제23권 제3호, 91~103쪽, 전체 13쪽
- 주제분류
- 사회과학 > 지리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1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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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양주의 읍치는 1067년(문종 21)에 양주가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될 때 서울특별시 광진구의 광장동 지역에서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의 도심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 이유는 고려시대에는 수도의 입지와 건설에 가장 중요한 원리로서 풍수를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1067년 이후 양주의 읍치는 왕이 4개월씩 옮겨가면서 정치를 수행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관념 때문에 만들어진 세 개의 수도 중 하나로 건설 되었다. 1067년 이전에 양주의 읍치가 광진구의 광장동 지역에 있었던 이유는 중소규모의 단기전에 강하고 고을 대부분의 지역이 한눈에 조망되는 아차산성에 읍치의 중심지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영문 초록
In 1067 the Center City of Yangju(楊州), Gyeonggi Province had its status raised to Namgyeong(南京, Southern Capital) and moved to Seoul’s downtown area which was regarded as one of the best places in terms of feng-shui(風水) among the neighborhoods of Gwangjang-dong, Gwangjin-gu, Seoul. The reason is that fengshui played the most important role in placing and locating a capital city in the Koryo(高麗) Period. The Center City of Yangju became one of 3 capitals which had ideological notion that the King had to conduct the affairs of state by moving to other capitals after staying 4 months in one of them. The reason why the Center City of Yangju
was in Gwangjang-dong, Gwangjin-gu before 1067 was the fact that pivotal functions of the city were in the
Acha-Mountain Fortress(阿且山城), which is very well fitted for a short-term warfare of small-to-medium scale
and oversees most areas of the neighborhood at a glance.
목차
요약
Abstract
1. 머리말
2. 양주의 읍치 이동에 대한 김정호의 인식 검토
3. 『삼국사기』에 기록된‘양주옛터’의 위치
4. 남경으로의 승격과 양주 읍치의 이동
5. 마무리
註
참고문헌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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