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26
2025년 02월 2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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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9791191146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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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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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중국 최초의 임금인 황제(黃帝)부터 무제에 이르는 역사를 인물 별로 나누어 쓴 <사기> 130권은 형식으로나 내용으로나 획기적인 역사책이다. 이런 형식을 기전체(紀傳體)라고 하는데, 연대순으로 써가는 편년체(編年體)와 함께 역사 기록 방법의 하나이다.
<사기>의 가장 큰 특색은 역대 중국 정사의 모범이 된 기전체(紀傳體)의 효시로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연표인 표(表) 10편, 역대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書) 8편, 제후왕을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 30편, 공명을 세운 사람들의 전기 열전(列傳) 70편 등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마천은 서문(태자공자서)을 통하여 <사기> 전체의 내용을 간략하게 알 수 있게 했다. 이편을 둘로 나누어 전반부는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의 아들 사마천의 집안 내력과 사기를 집필하게 된 동기 등을 기록하고, 후반부는 <사기> 130편에 대하여 각 편을 기록하게 된 동기를 기록하고, <사기>를 저작하게 된 동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황제(黃帝)부터 태초(太初) 연간에 이르기까지 총 130편에 526,500자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였다.
또 사마천이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서 이광의 손자 이릉(李陵)이 흉노를 토벌하러 나갔다가 흉노에게 항복하자, 사마천이 무제(武帝)에게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宮刑)을 당하게 된 사실을 말하였다.
사기는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112.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 | 79
권 113. 남월열전南越列傳 | 148
권 114. 동월열전東越列傳 | 181
권 115. 조선열전朝鮮列傳 | 199
권 116.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 214
사기 26
史記
열전列傳
10
사마천
우리고전연구회 역
차 례
권 111.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 6
권 112.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 | 79
권 113. 남월열전南越列傳 | 148
권 114. 동월열전東越列傳 | 181
권 115. 조선열전朝鮮列傳 | 199
권 116.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 214
권 111.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이편은 한나라의 장군 위청(衛青)과 곽거병(霍去病) 및 두 장군의 부장(副將)들에 대한 합전이다. 위청과 위청의 조카 곽거병은 한무제(漢武帝) 때 흉노를 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위청(衛靑)은 전한의 장군으로 자는 중경(仲卿), 평양현(平陽縣) 사람이다. 작위는 장평후(長平侯)다. 누나는 무제의 황후 무사황후(위자부)이다. 하급 관리인 아버지 정계(鄭季)와 평양후의 첩 위온(衛媼)의 사생아로 태어나 평양후의 집에 가인으로 있다가 평양후의 기사가 되어 평양공주를 모셨다. 출세한 이후에는 평양공주와 결혼했다. 생질 곽거병과 함께 무제 때 흉노를 일곱 차례 물리쳐 관직이 대사마(大司馬)와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1)
위청(衛青) (1)
大將軍衛青者(대장군위청자) 平陽人也(평양인야) 其父鄭季(기부정계) 為吏(위리) 給事平陽侯家(급사평양후가) 與侯妾衛媼通(여후첩위온통) 生青(생청) 青同母兄衛長子(청동모형위장자) 而姊衛子夫自平陽公主家得幸天子(이자위자부자평양공주가득행천자) 故冒姓為衛氏(고모성위위씨) 字仲卿(자중경) 長子更字長君(장자경자장군) 長君母號為衛媼(장군모호위위온) 媼長女衛孺(온장녀위유) 次女少兒(차녀소아) 次女即子夫(차녀즉자부) 後子夫男弟步廣皆冒衛氏(후자부남제보광개모위씨)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은 평양현(平陽縣) 사람이다.
그의 부친 정계(鄭季)는 관리가 되어 평양후(平陽侯) 平陽侯(평양후) : 조수(曹壽)를 말한다.
조수(曹壽)의 집에서 일하다가 평양후의 첩 위온(衛媼)과 사통하여 아들 청(靑)을 낳았다. 위청의 동복형은 위장자(衛長子)이고, 동복누이 위자부(衛子夫) 衛子夫(위자부) : 무사황후 위씨(武思皇后 衛氏). 전한 무제의 두 번째 황후이다.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던 위자부는 한무제(漢武帝)의 누이 평양공주(平陽公主)의 집 가녀(歌女)였는데, 한무제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 한무제의 총애를 받게 된 위자부를 왕비 진황후(陳皇后) 진아교가 무척 질투했다. 진아교의 질투로 고생하였던 위자부는 한무제가 후궁과 궁녀들을 출궁시킬 때 자신도 출궁시켜 달라고 울면서 간청하였고, 한무제는 그를 더욱 가련히 여겼다. 그 뒤 진아교와 그의 친정어머니 관도공주가 짜고 위자부의 오라비 위청(衛淸)을 죽이려다가 발각되자, 무제는 진아교를 폐출하고 위자부를 황후에 앉혔다. 위자부는 세 딸 위장공주, 제읍공주, 양석공주를 낳고 아들 여태자 유거를 두었다. <사기 세가 권 49. 외척세가-위황후>
가 평양공주(平陽公主) 平陽公主(평양공주) : 平陽公主 유씨(劉氏). 전한 경제와 효경황후 왕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한무제의 누나이다. 위자부는 올케인 동시에 시누이가 된다.
를 모시다가 천자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위청도 위(衛)를 성으로 삼았다. 위청의 자(字)는 중경(仲卿)이다.
위장자는 자를 장군(長君)으로 바꿨다. 장군의 어머니는 위온이었다. 위온의 장녀는 위유(衛孺), 차녀는 소아(少兒), 삼녀(三女)가 바로 자부(子夫)였다. 후일 위자부의 남동생 보(步)와 광(廣)도 冒(모) : 가장하다. 사칭하다. 위청의 생부는 정계(鄭季)이나 위청이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성을 사용했다.
위(衛)를 성으로 삼았다.
青為侯家人(청위후가인) 少時歸其父(소시귀기부) 其父使牧羊(기부사목양) 先母之子皆奴畜之(선모지자개노축지) 不以為兄弟數(불이위형제수) 青嘗從入至甘泉居室(청상종입지감천거실) 有一鉗徒相青曰(유일겸도상청왈) 貴人也(귀인야) 官至封侯(관지봉후) 青笑曰(청소왈) 人奴之生(인노지생) 得毋笞罵即足矣(득무태매즉촉의) 安得封侯事乎(안득봉후사호)
위청은 평양후의 하인으로 지내다 소년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고, 그의 부친은 위청에게 양을 치게 했다. 본처 先母(선모) : 정계(鄭季)의 본부인.
의 자식들은 그를 머슴으로 취급하며 奴畜之(노축지) : 위청을 하인으로 취급하다.
형제로 치지 않았다.
위청은 이전에 어떤 사람을 따라 감천궁(甘泉宮)에 있는 감옥 居室(거실) : 보궁(保宮). 범죄를 저지른 관원과 그 가족을 가두는 감옥.
에 간 적이 있었는데, 목에 칼을 쓴 죄인 鉗徒(겸도) : 목에 칼을 쓴 죄인.
한 사람이 위청의 관상을 보고 말했다.
“귀인이 될 상으로 벼슬은 제후가 될 것이다.”
위청은 웃으며 말했다.
“남의 집 종으로 태어났으니, 매 맞지 않고 욕이나 안 먹으면 그걸로 족한데, 어찌 제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青壯(청장) 為侯家騎(위후가기) 從平陽主(종평양주) 建元二年春(건원이년춘) 青姊子夫得入宮幸上(청자자부득입궁행상) 皇后(황후) 堂邑大長公主女也(당읍대장공주녀야) 無子(무자) 妒(투) 大長公主聞衛子夫幸(대장공주문위자부행) 有身(유신) 妒之(투지) 乃使人捕青(내사인포청) 青時給事建章(청시급사건장) 未知名(미지명) 大長公主執囚青(대장공주집수청) 欲殺之(욕살지)
위청은 장년이 되자, 평양후 집안의 기사(騎士)가 되어 평양공주를 섬겼다.
건원(建元) 2년(기원전 139년) 建元二年(건원이년) : 기원전 139년. 건원(建元)은 한무제(漢武帝)의 첫 번째 연호이다.
봄, 위청의 누이 위자부가 입궁해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황후는 당읍후(堂邑候)의 부인 대장공주(大長公主) 堂邑大長公主(당읍대장공주) : 한문제(漢文帝)의 장녀(長女). 즉 한무제의 고모 유표(劉嫖)를 말하며, 당읍후(堂邑侯) 진오(陳午)에게 시집갔으므로 당읍대장공주(堂邑大長公主)라 한 것이다. 황제의 고모를 대장공주(大長公主)라 한다.
의 딸 진아교(陳阿嬌) 阿嬌(아교) : 한무제(漢武帝)의 왕비 진황후(陳皇后)의 아명(兒名). 무제가 어렸을 때 어린 궁녀 진아교를 보고, 만약 진아교에게 장가들면 금으로 집을 지어 그 속에 가두어 두겠다고 했으나, 진아교는 황후가 된 뒤 오만하고 질투가 심한 데다 아들이 없어 장문궁에 유폐되었다가 폐비가 되었다. <전당시 妾薄命(첩박명 : 박복한 첩) - 이백(李白)> 참고
였다.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하여 후궁에게 질투가 심했다.
대장공주는 위자부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幸上(행상) : 황제의 총애를 받다.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질투가 나서 위청을 체포하게 했다.
위청은 그때 건장궁(建章宮)에서 직무를 맡고 있었는데,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다.
대장공주는 위청을 잡아 가두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
其友騎郎公孫敖與壯士往篡取之(기우기랑공손오여장사왕찬취지) 以故得不死(이고득불사) 上聞(상문) 乃召青為建章監(내소청위건장감) 侍中(시중) 及同母昆弟貴(급동모혼제귀) 賞賜數日閒累千金(상사수일간루천금) 孺為太仆公孫賀妻(유위태복공손하처) 少兒故與陳掌通(소아고여진장통) 上召貴掌(상소귀장) 公孫敖由此益貴(공손오유차익귀) 子夫為夫人(자부위부인) 青為大中大夫(청위태중대부)
위청의 친구 기랑(騎郎) 공손오(公孫敖)가 장사(壯士)들과 함께 건장궁의 감옥으로 쳐들어가 위청을 구해 주었다. 篡取(찬취) : 빼앗다. 강탈하다.
그래서 위청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위청을 불러 건장궁의 궁감(宮監) 겸 시중(侍中)으로 임명하고, 그의 동복형제들도 모두 귀한 신분이 되었다. 황제가 며칠 동안 이들에게 내린 하사금이 수천 금에 이르렀다.
위청의 맏누이 위유(衛孺)는 태복(太僕) 공손하(公孫賀)의 아내가 되었다. 둘째 누이 위소아(衛少兒)는 원래 진장(陳掌)과 사통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진장을 불러 높은 지위에 올려 주었다. 공손오는 위청을 구해 준 일로 더 높은 지위에 올랐다. 위자부는 부인(夫人) 부인(夫人) : 황제의 소첩.
이 되었고, 위청은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되었다.
元光五年(원광오년) 青為車騎將軍(청위거기장군) 擊匈奴(격흉노) 出上谷(출상곡) 太仆公孫賀為輕車將軍(태복공손하위경거장군) 出雲中(출운중) 大中大夫公孫敖為騎將軍(태중대부공손오위기장군) 出代郡(출대군) 衛尉李廣為驍騎將軍(위위이광위효기장군) 出雁門(출안문) 軍各萬騎(군각만기) 青至蘢城(청지용성) 斬首虜數百(참수로수백) 騎將軍敖亡七千騎(기장군오망칠천기) 衛尉李廣為虜所得(위위이광위로소득) 得脫歸(득탈귀) 皆當斬(개당참) 贖為庶人(속위서인) 賀亦無功(하역무공)
원광(元光) 5년(기원전 130년) 元光五年(원광오년) : 기원전 130년. 원광(元光)은 한무제(漢武帝)의 두 번째 연호.
위청은 거기장군(車騎將軍) 車騎將軍(거기장군) :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청(衛靑)이 흉노를 공격하였으며, 상곡군(上谷郡)에서 출정하여 용성(龍城)에서 흉노를 물리쳤다. 이때 장군 이광(李廣)은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고, 공손오(公孫敖)는 많은 병사를 잃었다. 그들은 모두 마땅히 참수당해야 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사기 권 108.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이 되어 흉노(匈奴)를 정벌하기 위해 상곡(上谷)에서 출병하였다. 태복 공손하는 경거장군(輕車將軍)이 되어 운중(雲中)에서 출병하였고, 태중대부 공손오는 기장군(騎將軍)이 되어 대군(代郡)에서 출병하였고, 위위(衛尉) 이광(李廣)은 효기장군(驍騎將軍)이 되어 안문(雁門)에서 출병했는데, 각 군대는 기병 1만 명으로 편성되었다.
위청은 용성(蘢城)으로 진격해 참수한 斬首虜(참수로) : 흉노를 참수하다. 虜는 흉노(匈奴)
흉노의 수가 수백 명에 달했다.
기장군 공손오는 기병 7천 명을 잃고, 위위(衛尉) 이광은 적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탈출해 돌아왔다. 이 두 사람의 죄는 모두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공손하는 전공이 없었다.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2)
위청(衛青) (2)
이 장은 한무제 때(기원전 128년) 위청이 거기장군이 되어 북쪽 흉노를 정벌하여 대장군이 되는 과정과 흉노와 싸워 거둔 공적에 대해 포상하는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元朔元年春(원삭원년춘) 衛夫人有男(위부인유남) 立為皇后(입위황후) 其秋(기추) 青為車騎將軍(청위거기장군) 出雁門(출안문) 三萬騎擊匈奴(삼만기격흉노) 斬首虜數千人(참수로수천인) 明年(명년) 匈奴入殺遼西太守(흉노입살요서태수) 虜略漁陽二千餘人(노략어양이천여인) 敗韓將軍軍(패한장군군) 漢令將軍李息擊之(한령장군이식격지) 出代(출대) 令車騎將軍青出雲中以西至高闕(영거기장군청출운중이서지고궐)
원삭(元朔) 元朔(원삭) : 한무제(漢武帝)의 세 번째 연호.
원년(기원전 128년) 봄, 위부인(衛夫人) 衛夫人(위부인) : 위자부(衛子夫).
이 사내아이를 출산하고 황후가 되었다.
그해 가을, 위청은 거기장군(車騎將軍) 車騎將軍(거기장군) : 지위가 상경(上卿)에 해당하며, 경사(京師)의 수비와 사이(四夷)에 대한 방어를 담당하였다.
이 되어 안문(鴈門)에서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해 수천 명을 참수하였다.
다음 해, 흉노가 침입해 요서(遼西)태수를 살해하고, 어양(漁陽) 백성 2천여 명을 약탈하고, 한안국(韓安國) 장군의 군사를 격파했다.
이에 한나라는 장군 이식(李息)에게 흉노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려 대군(代郡)에서 출병하도록 하고, 거기장군 위청은 운중(雲中)에서 출병해 서쪽으로 고궐(高闕)까지 진격하게 했다.
遂略河南地(수략하남지) 至于隴西(지우롱서) 捕首虜數千(포수로수천) 畜數十萬(축수십만) 走白羊樓煩王(주백양누번왕) 遂以河南地為朔方郡(수이하남지위삭방군) 以三千八百戶封青為長平侯(이삼천팔백호봉청위장평후) 青校尉蘇建有功(청교위소건유공) 以千一百戶封建為平陵侯(이천일백호봉건위평릉후) 使建筑朔方城(사건축삭방성) 青校尉張次公有功(청교위장차공유공) 封為岸頭侯(봉위안두후)
위청의 군대는 하남(河南) 지역을 빼앗고, 농서(隴西)에 이르러서는 흉노 수천 명을 생포하고, 가축 수십만 마리를 노획하고, 백양왕(白羊王)과 누번왕(樓煩王)을 쫓아냈다.
한나라는 마침내 하남지역에 삭방군(朔方郡)을 설치했다.
위청에게 3천8백 호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장평후(長平侯)로 봉했다.
위청의 부하 교위(校尉) 소건(蘇建)에게도 공이 있어 1천1백 호를 식읍으로 주며 평릉후(平陵侯)로 봉했다. 소건에게 삭방성(朔方城)을 축조하게 했다.
위청의 교위 장차공(張次公)도 공이 있어 안두후(岸頭侯)로 봉했다.
天子曰(천자왈) 匈奴逆天理(흉노역천리) 亂人倫(난인륜) 暴長虐老(폭장학로) 以盜竊為務(이도절위무) 行詐諸蠻夷(행사제만이) 造謀藉兵(조모차병) 數為邊害(삭위변해) 故興師遣將(고흥사견장) 以征厥罪(이정궐죄) 詩不云乎(시불운호) 薄伐玁狁(박벌험윤) 至于太原(지우태원) 出車彭彭(출거방방) 城彼朔方(성피삭방) 今車騎將軍青度西河至高闕(금거기장군청도서하지고궐) 獲首虜二千三百級(획수로이천삼백급) 車輜畜產畢收為鹵(거치축산필수위로) 已封為列侯(이봉위렬후) 遂西定河南地(수서정하남지) 按榆谿舊塞(안유계구새) 絕梓領(절재령) 梁北河(양북하) 討蒲泥(토포니) 破符離(파부리) 斬輕銳之卒(참경예지졸) 捕伏聽者三千七十一級(포복청자삼천칠십일급) 執訊獲丑(집신획축) 驅馬牛羊百有餘萬(구마우양백유여만) 全甲兵而還(전갑병이환) 益封青三千戶(익봉청삼천호)
천자가 말했다.
“흉노는 하늘의 도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어지럽혀 윗사람을 능멸하고 노인들을 학대하며 도적질을 일삼고, 여러 만이국(蠻夷國)을 속이고 음모를 꾸며 造謀(조모) : 음모를 꾸미다.
그들의 병력을 빌려 자주 변경 지방을 침략했으므로, 군사를 일으켜 장수를 파견하여 흉노의 죄를 응징하였다.
<시경(詩經)>에도 말하지 않았는가. ‘험윤(玁狁)을 쳐부수어 태원(太原)에 이르렀다.’ 薄伐獫狁(박벌험윤) :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나오는 시이다. 薄伐玁狁 至于大原 <詩經 小雅 彤弓之什 六月> 薄伐은 토벌하다. 獫狁은 흉노를 말하며 한나라 이후에 흉노라고 불렸다.
, ‘수많은 수레를 내어, 저 북방에 성을 쌓았네.’ 出車彭彭(출거방방) :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나오는 시이다. 出車彭彭 旂旐央央 天子命我 城彼朔方 <詩經 小雅 鹿鳴之什 出車>
라고 했다.
지금 거기장군 위청이 서하(西河)를 건너 고궐(高闕)까지 진격하여 흉노 2천3백 명을 참수했고, 級(급) : 수급(首級).
전차와 군수품 수레 및 가축을 노획하였다. 이에 위청을 열후(列侯)로 봉한 후 서쪽 하남지역을 평정하게 하였다.
위청은 유계(楡谿) 榆谿(유계) 梓領(재령) 符離(부리) : 요새 명. 梓領(재령)은 梓嶺과 통한다.
의 옛 요새를 순시하고 재령(梓嶺)을 가로질러 북하(北河)에 다리를 놓고, 포니(蒲泥) 蒲泥(포니) : 부족(部族) 수령(首領)의 이름.
를 토벌하고 부리(符離)를 격파했으며, 흉노의 정예 병사들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정찰병 伏聽者(복청자) : 적군의 정찰병.
이 3,071명이었고, 포로를 심문해 적군을 잡아들이고 獲丑(획축) : 馘丑과 통한다. 적의 귀를 잘라 공훈을 계산함. 丑은 적을 경멸하는 칭호.
1백여 만 마리의 말, 소, 양을 몰아오고 군대를 보전하여 귀환했다. 이에 위청에게 3천 호의 식읍을 더하여 봉해주노라.”
其明年(기명년) 匈奴入殺代郡太守友(흉노입살대군태수우) 入略鴈門千餘人(입략안문천여인) 其明年(기명년) 匈奴大入代定襄上郡(흉노대입대정양상군) 殺略漢數千人(살략한수천인)
이듬해, 흉노가 침입해 대군(代郡)의 태수 공우(共友) 太守友(태수우) : 태수 공우(共友).
를 살해하고, 안문을 침입해 백성들 1천여 명을 약탈했다.
그 이듬해(기원전 125년) 明年(명년) : 원삭(元朔) 4년. 기원전 125년.
흉노는 대군(代郡), 정양(定襄), 상군(上郡)을 대거 침입해 한나라 백성 수천 명을 죽이거나 약탈하였다.
其明年(기명년) 元朔之五年春(원삭지오년춘) 漢令車騎將軍青將三萬騎(한령거기장군청장삼만기) 出高闕(출고궐) 衛尉蘇建為游擊將軍(위위소건위유격장군) 左內史李沮為彊弩將軍(좌내사이저위강노장군) 太仆公孫賀為騎將軍(태복공손하위기장군) 代相李蔡為輕車將軍(대상이채위경거장군) 皆領屬車騎將軍(개령속거기장군) 俱出朔方(구출삭방) 大行李息岸頭侯張次公為將軍(대행이식안두후장차공위장군) 出右北平(출우북평) 咸擊匈奴(함격흉노)
그 이듬해 원삭 5년(기원전 124년) 봄, 한나라 조정에서는 거기장군 위청에게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궐에서 출병토록 명령을 내리고, 위위 소건을 유격장군(遊擊將軍), 좌내사(左內史) 이저(李沮)를 강노장군(彊弩將軍), 태복 공손하를 기장군(騎將軍), 대(代)나라의 재상 이채(李蔡)를 경거장군으로 삼아 거기장군 위청에게 모두 예속시키고, 삭방에서 출병하도록 하였다. 대행(大行) 이식(李息)과 안두후 장차공(張次公)을 장군으로 삼아 우북평(右北平)에서 출병해 흉노를 공격하도록 했다.
匈奴右賢王當衛青等兵(흉노우현왕당위청등병) 以為漢兵不能至此(이위한병불능지차) 飲醉(음취) 漢兵夜至(한병야지) 圍右賢王(위우현왕) 右賢王驚(우현왕경) 夜逃(야도) 獨與其愛妾一人壯騎數百馳(독여기애첩일인장기수백치) 潰圍北去(궤위북거) 漢輕騎校尉郭成等逐數百里(한경기교위곽성등축수백리) 不及(불급) 得右賢裨王十餘人(득우현비왕십여인) 眾男女萬五千餘人(중남녀만오천여인) 畜數千百萬(축수천백만) 於是引兵而還(어시인병이환) 至塞(지새) 天子使使者持大將軍印(천자시사자지대장군인) 即軍中拜車騎將軍青為大將軍(즉군중배거기장군청위대장군) 諸將皆以兵屬大將軍(제장개이병속대장군) 大將軍立號而歸(대장군립호이귀)
이때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은 위청 등의 대군을 맞으면서, 한나라 병사들이 자신이 머무는 곳까지는 올 수 없으리라 여겨 술에 취해 있었다.
한나라 군사들이 한밤중에 진격해 우현왕을 포위하자, 우현왕은 놀라 야음을 틈타 도망쳤는데, 애첩 하나와 건장한 기병 수백 명만 데리고 말을 달려 포위를 뚫고 潰圍(궤위) : 포위망을 뚫다.
북쪽으로 달아났다.
한나라의 경기교위(輕騎校尉) 곽성(郭成) 등이 수백 리를 추격했으나 우현왕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러나 위청은 이 전투에서 우현왕의 비왕(裨王) 裨王(비왕) : 소왕(小王). 작은 나라의 왕.
10여 명과 남녀 1만 5천여 명, 가축 수백만 마리를 노획하고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위청이 요새에 도착하자, 천자는 사자에게 대장군의 인수(印綬)를 들려 보내 군중에서 즉시 거기장군 위청을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했다. 장수들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대장군에게 귀속했고, 대장군 위청은 대장군의 관호(官號)를 세우고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天子曰(천자왈) 大將軍青躬率戎士(대장군청궁솔융사) 師大捷(사대첩) 獲匈奴王十有餘人(획흉노왕십유여인) 益封青六千戶(익봉청육천호) 而封青子伉為宜春侯(이봉청자항위의춘후) 青子不疑為陰安侯(청자불의위음안후) 青子登為發干侯(청자등위발간후)
천자가 위청에게 말했다.
“대장군 위청은 몸소 군대를 이끌고 躬率(궁솔) : 몸소 군대를 거느리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흉노왕 10여 명을 사로잡는 공을 세웠으니, 6천 호를 더하여 봉하노라.”
그리고 위청의 아들들 위항(衛伉)을 의춘후(宜春侯)에, 위불의(衛不疑)를 음안후(陰安侯)에, 위등(衛登)을 발간후(發干侯)에 각각 봉했다.
青固謝曰(청고사왈) 臣幸得待罪行閒(신행득대죄행간) 賴陛下神靈(뇌폐하신령) 軍大捷(군대첩) 皆諸校尉力戰之功也(개제교위력전지공야) 陛下幸已益封臣青(폐하행이익봉신청) 臣青子在繦緥中(신청자재강보중) 未有勤勞(미유근로) 上幸列地封為三侯(상행렬지봉위삼후) 非臣待罪行閒所以勸士力戰之意也(비신대죄행간소이권사력전지의야) 伉等三人何敢受封(항등삼인하감수봉)
그러자 위청은 단호히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요행히 종군 도중 行間(행간) : 행오(行伍) 사이. 즉 군대 가운데.
관직에 임명되었고, 폐하의 신령하심에 힘입어 흉노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교위들이 힘껏 싸운 공로였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황공하게도 이미 신에게 식읍을 늘려 주셨습니다.
신의 자식들은 아직 강보 繦緥(강보) : (어린아이의) 포대기. 아직 어려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뜻.
에 싸여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했는데, 황공하게도 황제께서 땅을 나누어 주시고 세 아들을 열후에 봉해주셨습니다.
이는 신이 대장으로 임명되고 종군하여 병사들을 독려하며 힘껏 싸우게 한 본의가 아닙니다.
위항 등 세 아들이 후(侯)로 봉해지는 걸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天子曰(천자왈) 我非忘諸校尉功也(아비망제교위공야) 今固且圖之(금고차도지) 乃詔御史曰(내조어사왈) 護軍都尉公孫敖三從大將軍擊匈奴(호군도위공손오삼종대장군격흉노) 常護軍(상호군) 傅校獲王(부교획왕) 以千五百戶封敖為合騎侯(이천오백호봉오위합기후) 都尉韓說從大將軍出窳渾(도위한열종대장군출유혼) 至匈奴右賢王庭(지흉노우현왕정) 為麾下搏戰獲王(위휘하박전획왕) 以千三百戶封說為龍頟侯(이천삼백호봉열위용액후) 騎將軍公孫賀從大將軍獲王(기장군공손하종대장군획왕) 以千三百戶封賀為南窌侯(이천삼백호봉하위남교후) 輕車將軍李蔡再從大將軍獲王(경거장군이채재종대장군획왕) 以千六百戶封蔡為樂安侯(이천육백호봉채위락안후) 校尉李朔(교위이삭) 校尉趙不虞(교위조불우) 校尉公孫戎奴(교위공손융노) 各三從大將軍獲王(각삼종대장군획왕) 以千三百戶封朔為涉軹侯(이천삼백호봉삭위척지후) 以千三百戶封不虞為隨成侯(이천삼백호봉불우위수성후) 以千三百戶封戎奴為從平侯(이천삼백호봉융노위종평후) 將軍李沮李息及校尉豆如意有功(장군이저이식급교위두여의유공) 賜爵關內侯(사작관내후) 食邑各三百戶(식읍각삼백호) 其秋(기추) 匈奴入代(흉노입대) 殺都尉朱英(살도위주영)
이에 천자가 말했다.
“짐이 교위들의 공로를 잊은 게 아니며, 이제 그들의 본래 공로를 고려하고자 固且圖之(고차도지) : 지금 본래 그들의 공로를 고려하다. 固는 본래, 且는 ~하려 하다. 圖는 고려하다.
하오.”
그러고는 어사(御史)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호군도위(護軍都尉) 공손오는 대장군을 따라 세 차례 흉노를 공격함에 항상 군대를 호위하고 교위 校(교) : 오백 명에 1명의 교위가 있었다.
를 거느리고 흉노의 왕을 사로잡았으니, 이에 식읍 1천5백 호를 하사하고 합기후(合騎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를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구성하였다.
사마천은 <본기(本紀)> 12권에서 “제왕들이 일어나게 된 자취를 살폈는데, 그 처음과 끝을 탐구하고 그 흥망성쇠를 보되 사실에 근거하여 논하고 고찰하여 삼 대 이상은 간략하게 추정하고, 진나라와 한나라는 상세하게 기록하되, 위로는 황제 헌원(軒轅)으로부터 아래로는 지금(孝武本紀第十二효무본기제십이)에 이르기까지 12편의 본기(本紀)로 저술하고, 종류별로 배열하였다.
<표(表)> 10권에서는 본기(本紀)에 나오는 제왕과 제후들의 흥망을 연표(年表)로 정리하였다. 사마천은 ‘세대가 다른 일이 같은 시기에 일어나고, 발생한 연대의 차이가 분명치 않은 사건들이 있으므로, 10편의 표(表)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서(書)> 8권에서 사마천은 ‘예악(禮樂)의 증감, 율력(律曆)의 개역, 병법의 권모술수와 산천의 귀신, 하늘과 인간과의 관계 등에 관하여, 그 성패와 변화를 살피기 위해 8편의 서(書)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세가(世家)> 30권에서는 분봉한 국가의 군주나 제후들, 혹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사적 및 사회에 특출한 재능을 보인 인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사마천은 ‘28수(宿)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수레바퀴 살 30개가 바퀴통에 모여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처럼, 제왕을 보필하는 팔다리와 같은 신하들을 이에 빗대어, 충신으로서 도를 행하여 군주를 받드는 모습을 30편의 세가(世家)로 지었다.’라고 하였다.
사마천은 <열전(列傳)> 70권에 대해서, ‘정의롭게 행동하고 자잘한 일에 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세상에 공명을 세운 사람들에 대해 70편의 열전(列傳)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서평
Epub은 한자의 덧말 쓰기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아, 한자 옆에 훈을 달았다. <사기>를 이해하는 데에, 특히 한자 읽기에 큰 보탬이 되리라 기대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13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사기의 기전체 서술은 역사의 줄기를 제대로 더듬어 갈 수 있게 안배하고 있다.
특히 <표> 10권은 연도별로 일어난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하여 역사적 사실을 알아볼 수 있게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자료의 방대함에 새삼 놀라게 된다.
《사기》는 중국 전한 왕조인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저술한 중국의 역사서로, 중국 이십사사의 하나이자 정사의 으뜸으로 꼽힌다.
본래 사마천 자신이 붙인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으나, 후한 말기에 이르러 《태사공기(太史公記)》로도 불리게 되었고, 이 ‘태사공기’의 약칭인 ‘사기’가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서, 그 서술 범위는 전설상 오제(五帝)의 한 사람이었다는 요(기원전 22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 말의 전한 무제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 서술 방식은 후대 중국의 역사서, 특히 정사를 기술하는 방식의 전범(典範)이 되었고, 유려한 필치와 문체로 역사서로서의 가치 외에 문학으로서도 큰 가치를 가진 서적으로 평가받는다.
《사기》의 내용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바로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也非也)’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늘의 도리, 즉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기》 열전에서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의인(義人)이 틀림없는 백이와 숙제가 아사(餓死)라는 초라한 죽음을 맞은 데에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서는 사마천 자신이 과거 친구이자 이릉의 불가피한 항복을 변호했던 올바른 행동을 하고도 궁형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데 대한 비통함이 깔려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사기》의 기술은 유교 사상이 주가 되는 와중에 다른 사상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을 추구한다는 역사서 편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역사 서술을 위한 간결하면서도 힘찬 문장은 ‘문성(文聖)’ 또는 ‘백전노장의 군대의 운용’과 같은 것이라 하여 격찬받았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 면에서는 정사로서 기술된 당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는 섬세한 기술로 당시의 생활이나 습관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서〉(書)의 내용은 전한 시대의 세계관이나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에 관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또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이나 서역에 관한 기술도 현재 알려진 지리와 유적 발굴 등에서 판명된 당시 상황과의 정합성이 높고, 이러한 지방의 당시를 알기 위한 귀중한 단서가 되고 있으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에 근위병 3천 인의 인형을 묻었다’는 기술에 대해서도, 시안시 교외의 병마용갱 발견으로 그 정확성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이 책이 경쟁 시대에 살아가는 당신의 새로운 무기를 연마하고 개발하는 데 사용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작가정보
저자(글) 사마천
사마천司馬遷
⁃ BC145년 : 중국 섬서성 용문시하양에서 태어났다.
⁃ 기원전 139년 : 아버지 사마담이 천문 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이 되어 무릉에거주하였다.
⁃ BC126년 : 아버지의 도움으로 2년간 천하를 여행했다.
⁃ BC124년 : 낭중(황제의 시종)이 되어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 BC110년 :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자신이 시작한 <사기>를 완성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 BC108년 : 태사령이 되어서 한무제를 수행하며 장성 일대와 하북, 요서 지방을 여행하였다. 이 여행을 통해 <사기>를 쓰는 데 필요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였다.
⁃ BC104년 : <사기>를 쓰기 시작했다.
⁃ BC99년 : 흉노와의 전쟁에서 투항한 이릉(李陵)장군을 두둔하다 황제의 노여움을 사 사형당할 처지에 놓였다. 사형을 피하는 방법은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치욕적인 궁형 대신 사형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궁형을 선택하였다.
⁃ BC95년 : 황제의 용서를 받고, 환관 중 최고 직책인 중서령이 되었다.
⁃ BC91년 : <사기>를 완성하였다.
⁃ BC86년 : 세상을 떠났다.
번역 우리고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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