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23
2025년 02월 2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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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 정보 ePUB (6.19MB)
- ISBN 9791191146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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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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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중국 최초의 임금인 황제(黃帝)부터 무제에 이르는 역사를 인물 별로 나누어 쓴 <사기> 130권은 형식으로나 내용으로나 획기적인 역사책이다. 이런 형식을 기전체(紀傳體)라고 하는데, 연대순으로 써가는 편년체(編年體)와 함께 역사 기록 방법의 하나이다.
<사기>의 가장 큰 특색은 역대 중국 정사의 모범이 된 기전체(紀傳體)의 효시로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연표인 표(表) 10편, 역대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書) 8편, 제후왕을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 30편, 공명을 세운 사람들의 전기 열전(列傳) 70편 등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마천은 서문(태자공자서)을 통하여 <사기> 전체의 내용을 간략하게 알 수 있게 했다. 이편을 둘로 나누어 전반부는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의 아들 사마천의 집안 내력과 사기를 집필하게 된 동기 등을 기록하고, 후반부는 <사기> 130편에 대하여 각 편을 기록하게 된 동기를 기록하고, <사기>를 저작하게 된 동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황제(黃帝)부터 태초(太初) 연간에 이르기까지 총 130편에 526,500자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였다.
또 사마천이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서 이광의 손자 이릉(李陵)이 흉노를 토벌하러 나갔다가 흉노에게 항복하자, 사마천이 무제(武帝)에게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宮刑)을 당하게 된 사실을 말하였다.
사기는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96.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 61
권 97. 역생육고열전酈生陸賈列傳 | 107
권 98. 부근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 | 156
권 99.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 171
권 100.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 207
사기 23
史記
열전列傳
7
사마천
우리고전연구회 역
차 례
권 95. 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 | 6
권 96.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 61
권 97. 역생육고열전酈生陸賈列傳 | 107
권 98. 부근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 | 156
권 99.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 171
권 100.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 207
권 95. 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
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은 번쾌(樊噲), 역상(酈商), 등공(滕公) 하후영(夏侯嬰), 관영(灌嬰) 네 사람의 합전(合傳)이다. 이 네 사람은 유방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운 장수들이며, 미천한 신분이었다가 진나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 영웅이 된 게 공통점이다. 이편에서는 주로 네 사람의 공적을 기술하고 있다.
번쾌(樊噲)는 패현(沛縣) 출신으로 원래 개고기를 파는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유방(劉邦)이 군사를 일으킬 때 무장으로서 용맹을 떨쳐 공을 세웠다. 홍문(鴻門)의 연회에서 유방이 항우(項羽)에게 살해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유방을 구해내었다. 유방이 즉위한 뒤 좌승상(左丞相) 상국(相國)이 되었고, 그 후 여러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무양후(舞陽侯)로 봉해졌다.
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 (1)
번쾌(樊噲) (1)
舞陽侯樊噲者(무양후번쾌자) 沛人也(패인야) 以屠狗為事(이도구위사) 與高祖俱隱(여고조구은)
무양후(舞陽候) 번쾌(樊噲)는 패현(沛縣) 사람이다.
개 도살을 생업으로 하면서 為事(위사) : 생업으로 하다. 생계를 꾸려 나가다.
유방(劉邦) 高祖(고조) : 유방(劉邦)을 말한다. 자는 계(季), 묘호(廟號)는 원래 태조(太祖)인데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고조(高祖)라 칭한 뒤로 통칭이 되었다. 황제가 되기 전에는 한왕(漢王)으로, 황제가 된 뒤에는 고조(高祖)로 표현하였다.
과 함께 은둔하고 있었다.
初從高祖起豐(초종고조기풍) 攻下沛(공하패) 高祖為沛公(고조위패공) 以噲為舍人(이쾌위사인) 從攻胡陵方與(종공호릉방여) 還守豐(환수풍) 擊泗水監豐下(격사수감풍하) 破之(파지) 復東定沛(부동정패) 破泗水守薛西(파사수수설서) 與司馬夷戰碭東(여사마이전탕동) 卻敵(각적) 斬首十五級(참수십오급) 賜爵國大夫(사작국대부) 常從(상종) 沛公擊章邯軍濮陽(패공격장한군복양) 攻城先登(공성선등) 斬首二十三級(참수이십삼급) 賜爵列大夫(사작렬대부)
처음에 번쾌는 유방을 따라 從(종) : 본문 중에서는 유방(劉邦)을 따라가다(동행하다)는 의미.
풍현(豊縣)에서 군사를 일으켜 패현(沛縣)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유방은 패공(沛公) 沛公(패공) : 한고조(漢高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칭호. 유방(劉邦).
이 되자, 번쾌를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패공을 따라 호릉(胡陵)과 방여(方輿)를 공격하고 돌아오다가 풍현성(豊縣城)을 지키면서, 사수군(泗水郡) 군감(郡監)을 풍현성 아래에서 격파했다. 다시 동쪽으로 패현을 평정하고, 설현(薛縣) 서쪽에서 사수(泗水) 군수(郡守)의 군대를 격파했다. 장한의 부하 사마이(司馬夷)와 탕현(碭縣) 동쪽에서 전투해 적을 물리치고, 적군 15명을 참수하고 국대부(國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늘 패공을 따라다녔으며, 패공이 복양현(濮陽縣)에서 장한(章邯)의 군대를 공격할 때, 성에 가장 먼저 올라가 공략하고 적군 23명을 참수해 열대부(列大夫)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復常從(부상종) 從攻城陽(종공성양) 先登(선등) 下戶牖(하호유) 破李由軍(파이유군) 斬首十六級(참수십육급) 賜上閒爵(사상간작) 從攻圍東郡守尉於成武(종공위동군수위어성무) 卻敵(각적) 斬首十四級(참수십사급) 捕虜十一人(포로십일인) 賜爵五大夫(사작오대부) 從擊秦軍(종격진군) 出亳南(출박남) 河閒守軍於杠里(하간수군어강리) 破之(파지) 擊破趙賁軍開封北(격파조분군개봉북) 以卻敵先登(이각적선등) 斬候一人(참후일인) 首六十八級(수육십팔급) 捕虜二十七人(포로이십칠인) 賜爵卿(사작경)
항상 패공을 따르며 성양현(城陽縣)을 공략할 때도 또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갔다. 호유향(戶牖鄕)을 함락시키고, 이유(李由)의 군사를 격파하고 적군 16명을 참수한 공로로 상간작(上間爵)의 벼슬을 받았다. 패공을 따라 성무현(成武縣)에서 동군(東郡)의 군수와 군위를 포위하고 적을 공격해 물리쳤으며, 적군 14명을 참수하고, 포로 11명을 잡아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패공을 따라 진(秦)나라의 군사를 공격하고, 박(亳) 남쪽으로 나아갔다. 강리(杠里)에 주둔하고 있던 하간군(河間郡) 군수의 군대를 격파했다. 개봉(開封)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조분(趙賁)의 군대를 격파해 적을 물리치고, 먼저 성에 올라가 척후병 한 명과 적군 68명의 머리를 베고, 27명의 포로를 잡아 경(卿)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從攻破楊熊軍於曲遇(종공파양웅군어곡우) 攻宛陵(공완릉) 先登(선등) 斬首八級(참수팔급) 捕虜四十四人(포로사십사인) 賜爵封號賢成君(사작봉호현성군) 從攻長社轘轅(종공장사환원) 絕河津(절하진) 東攻秦軍於尸(동공진군어시) 南攻秦軍於犨(남공진군어주) 破南陽守齮於陽城(파남양수의어양성) 東攻宛城(동공완성) 先登(선등) 西至酈(서지력) 以卻敵(이각적) 斬首二十四級(참수이십사급) 捕虜四十人(포로사십인) 賜重封(사중봉) 攻武關(공무관) 至霸上(지패상) 斬都尉一人(참도위일인) 首十級(수십급) 捕虜百四十六人(포로백사십육인) 降卒二千九百人(항졸이천구백인)
패공을 따라 곡우(曲遇)에 주둔하고 있던 양웅(楊熊)의 군대를 격파했다. 완릉(宛陵)을 공격할 때 가장 먼저 성에 올라 적군 8명을 참수하고, 44명의 포로를 잡아 현성군(賢成君)의 봉호를 하사받았다. 패공을 따라 장사(長社)와 환원(轘轅)을 공격하고 황하의 나루를 봉쇄했으며, 동쪽으로 시(尸)에 주둔하고 있던 진(秦)나라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남쪽으로 주(犨)에 주둔하고 있던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남쪽으로 양성현(陽城縣)에 있던 남양군(南陽郡) 군수 여의(呂齮)를 격파했다. 동쪽으로 완현성(宛縣城)을 공격했는데,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갔다. 서쪽으로 역현(酈縣)에 이르러 적을 물리치고, 적군 24명을 참수하고, 포로 40명을 잡아 추가로 녹봉을 받았다. 무관(武關)을 공격하고, 패상(覇上)에 이르러 도위(都尉) 1명과 적군 10명의 목을 베고 포로 46명을 잡고, 병사 2천9백 명을 항복시켰다.
項羽在戲下(항우재희하) 欲攻沛公(욕공패공) 沛公從百餘騎因項伯面見項羽(패공종백여기인항백면견항우) 謝無有閉關事(사무유폐관사) 項羽既饗軍士(항우기향군사) 中酒(중주) 亞父謀欲殺沛公(아보모욕살패공) 令項莊拔劍舞坐中(영항장발검무좌중) 欲擊沛公(욕격패공) 項伯常[肩屏]蔽之(항백상[견병]폐지) 時獨沛公與張良得入坐(시독패공여장량득입좌) 樊噌在營外(번쾌재영외) 聞事急(문사급) 乃持鐵盾入到營(내지철순입도영) 營衛止噲(영위지쾌) 噲直撞入(쾌직당입) 立帳下(입장하)
항우(項羽)가 희하(戱下)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패공을 공격하려고 했다.
패공은 기마병 1백여 명을 대동하고 항백(項伯) 항백(項伯) : 진(秦)나라 말기 하상(下相) 사람. 항우(項羽)의 숙부로, 이름은 전(纏), 백(伯)은 자다. 일찍이 죄를 지었는데, 장량(張良)이 구해주었다. 항우(項羽)를 따라 병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고, 초좌영윤(楚左令尹)이 되었다.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에 들어온 뒤 범증(范增)의 계책에 따라 홍문연(鴻門宴)에서 항장(項莊)이 검무(劍舞)를 추면서 유방(劉邦)을 죽이려고 했다. 그가 전날 밤에 이 사실을 장량에게 알려주고, 당일 항장과 함께 춤을 추면서 몸으로 막아 유방이 달아나도록 도왔다. 나중에 고조 7년(기원전 200) 사양후(射陽侯)에 봉해지고, 유씨(劉氏) 성을 받았다.
을 통해서 항우를 만나 함곡관(函谷關)을 봉쇄하지 閉關事(폐관사) : 유방이 함양으로 진입한 이후 관중의 왕이 되려고 군사를 보내 함곡관을 지키게 했다. 항우는 진나라의 땅을 공략하여 평정했으나 함곡관은 수비병이 지키고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또 패공이 이미 함양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자, 항우는 크게 노하여 당양군에게 함곡관을 공격하게 했다. 항우가 함곡관으로 들어가 희수 서쪽에 이르렀다. 패공은 패상(覇上)에 주둔하고 있어 항우와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기 권 7. 항우본기(項羽本紀)>
않겠다고 사죄했다.
항우가 병사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술자리가 무르익자, 범증(亞父) 亞父(아보) : 항우의 군사고문 범증(范增)의 존칭. 항우가 평소 그를 존경하여 숙보(叔父)와 비슷한 말로 ‘亞父(아보)’라 불렀다. 홍문(鴻門)에서 항우(項羽)가 유방(劉邦)을 불러 잔치를 벌였을 때, 범증(范增)은 항우의 삼촌 항장(項莊)을 사주하여, 술자리에서 칼춤을 추다가 기회를 엿보아 유방을 찔러 죽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번쾌가 이를 알고 뛰어 들어와 큰소리치는 바람에 유방은 죽음을 면하였다.
이 패공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며, 항장(項莊)에게 명을 내려 좌중에서 칼춤을 추다가 項莊拔劍舞坐中(항장발검무좌중) : 항장(項莊)이 검을 뽑아 일어나 춤을 추자, 항백(項伯) 또한 검을 뽑아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 항상 몸으로 패공(沛公) 유방을 좌우에서 엄호하여 항장(項莊)이 유방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通鑑節要 卷之四 漢紀>
패공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항백이 항상 패공을 엄호(어깨로 막고)하고 있었다. 당시 패공과 장량(張良)만 연회에 참석해 있었고, 번쾌는 군영 밖에 있다가 사태가 급박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 철 방패를 들고 군영 안으로 뛰어들었다. 군영의 보초가 번쾌를 저지하자, 번쾌가 곧장 돌진해 장막 아래에 섰다.
項羽目之(항우목지) 問為誰(문위수) 張良曰(장량왈) 沛公參乘樊噲(패공참승번쾌) 項羽曰(항우왈) 壯士(장사) 賜之卮酒彘肩(사지치주체견) 噲既飲酒(쾌기음주) 拔劍切肉食(발검절육식) 盡之(진지) 項羽曰(항우왈) 能復飲乎(능부음호) 噲曰(쾌왈) 臣死且不辭(신사차불사) 豈特卮酒乎(기특치주호) 且沛公先入定咸陽(차패공선입정함양) 暴師霸上(폭사패상) 以待大王(이대대왕) 大王今日至(대왕금일지) 聽小人之言(청소인지언) 與沛公有隙(여패공유극) 臣恐天下解(신공천하해) 心疑大王也(심의대왕야)
항우가 그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장량이 말했다.
“패공을 경호하는 번쾌(樊噲)라는 자입니다.”
항우가, “장사로다.” 하며 술 한 대접과 돼지 넓적다리 卮酒彘肩(치주체견) : 큰 술잔과 돼지 넓적다리. 卮는 고대 바닥이 둥근 술잔. 彘는 돼지.
를 하사했다.
번쾌는 술을 다 마신 뒤 칼을 뽑아 고기를 잘라서 다 먹어 치웠다.
항우가 물었다.
“더 마실 수 있는가?”
번쾌가 대답했다.
“신은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 대접을 마다하겠습니까! 패공께서 먼저 국경을 넘어 함양(咸陽)을 평정했지만, 군사들을 패상에 노숙시키면서 暴師(폭사) : 군대가 비바람과 햇빛을 받음을 말한다. 暴은 曝과 같다.
대왕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대왕께서는 오늘 도착해 소인배들의 말을 듣고 패공과의 사이에 틈을 만들고 계십니다. 신은 이 일로 천하가 분열되어 사람들이 대왕을 의심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項羽默然(항우묵연) 沛公如廁(패공여측) 麾樊噲去(휘번쾌거) 既出(기출) 沛公留車騎(패공류거기) 獨騎一馬(독기일마) 與樊噲等四人步從(여번쾌등사인보종) 從閒道山下歸走霸上軍(종간도산하귀주패상군) 而使張良謝項羽(이사장량사항우) 項羽亦因遂已(항우역인수이) 無誅沛公之心矣(무주패공지심의) 是日微樊噲奔入營譙讓項羽(시일미번쾌분입영초양항우) 沛公事幾殆(패공사기태)
항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패공이 변소로 가면서 손짓으로 번쾌를 불러내었다. 군영을 벗어나자, 패공은 수레와 기병들을 남겨둔 채 혼자 말을 탔고, 번쾌 등 네 사람은 걸어서 뒤를 따랐다. 산 아래 샛길을 따라 패상의 군영으로 도망쳐 온 뒤, 장량이 항우에게 사과하게 했다.
항우도 흡족하여 패공을 죽이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이날 번쾌가 군영에 달려들어 항우를 꾸짖지 않았다면, 패공의 대업은 위태로웠을 것이다.
明日(명일) 項羽入屠咸陽(항우입도함양) 立沛公為漢王(입패공위한왕) 漢王賜噲爵為列侯(한왕사쾌작위렬후) 號臨武侯(호임무후) 遷為郎中(천위랑중) 從入漢中(종입한중)
다음날, 항우는 함양에 입성하여 함양을 도륙하고, 패공을 한왕(漢王)으로 세웠다.
한왕은 번쾌에게 열후(列候)의 작위를 내리고 임무후(臨武侯)라고 했다. 그 후 번쾌는 낭중(郎中)으로 승진했고, 한왕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들어갔다.
還定三秦(환정삼진) 別擊西丞白水北(별격서승백수북) 雍輕車騎於雍南(옹경거기어옹남) 破之(파지) 從攻雍斄城(종공옹태성) 先登(선등) 擊章平軍好畤(격장평군호치) 攻城(공성) 先登陷陣(선등함진) 斬縣令丞各一人(참현령승각일인) 首十一級(수십일급) 虜二十人(노이십인) 遷郎中騎將(천랑중기장)
한왕은 회군해 삼진(三秦)을 평정했고, 번쾌는 단독으로 백수(白水) 북쪽에서 서현(西縣) 현승(縣丞)의 군대를 공격했으며, 옹현(雍縣) 남쪽에서 옹왕(雍王) 雍王(옹왕) : 진나라 조고(趙高)의 박해(迫害)를 피해 장한(章邯)은 병사들을 이끌고 항우(項羽)에게 투항하였으며, 항우(項羽)는 장한(章邯)을 옹왕(雍王)으로 삼았다. 雍은 옹현(雍縣).
의 경전차와 경기병을 격파했다. 한왕을 따라 옹현과 태성(斄城)을 공격했을 때,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갔다. 호치현(好畤縣)에서 장평(章平)의 군대를 공격할 때, 성을 공격하고 가장 먼저 올라가 진지를 함락시켰고, 현령과 현승 각각 한 사람을 포함해 적군 11명을 참수하고, 포로 20명을 잡아서 낭중기장(郎中騎將)으로 승진했다.
從擊秦車騎壤東(종격진거기양동) 卻敵(각적) 遷為將軍(천위장군) 攻趙賁(공조분) 下郿槐裏柳中咸陽(하미괴리류중함양) 灌廢丘(관폐구) 最(최) 至櫟陽(지력양) 賜食邑杜之樊鄉(사식읍두지번향) 從攻項籍(종공항적) 屠煮棗(도자조) 擊破王武程處軍於外黃(격파왕무정처군어외황) 攻鄒魯瑕丘薛(공추노하구설) 項羽敗漢王於彭城(항우패한왕어팽성) 盡復取魯梁地(진복취노양지)
번쾌는 한왕을 따라 양향(壤鄕) 동쪽에서 진(秦)나라의 전차와 기마병을 공격해 적을 물리치고 장군으로 승진했다. 진나라 장수 조분(趙賁)을 공격해 미(郿), 괴리(槐里), 유중(柳中), 함양(咸陽)을 함락시켰다. 폐구(廢丘)를 수몰시킨 것은 번쾌의 최고 공적이었다. 灌廢丘(관폐구) 最(최) : 기원전 205년 한군(漢軍)의 기습에 패한 장한(章邯)은 폐구(廢丘 : 지금의 陝西省 興平)로 물러나 성(城)을 굳게 지켰으나, 아우 장평(章平)이 사로잡히고, 한군(漢軍)이 강물을 끌어들여 수공(水攻)을 가해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양(櫟陽)에 이르러 식읍으로 두현(杜縣) 번향(樊鄕)을 받았다. 한왕을 따라 항우를 공격해 자조(煮棗) 땅을 도륙하였다. 외황현(外黃縣)에서 왕무(王武)와 정처(程処)의 군대를 격파했다. 추(鄒), 노(魯), 하구(瑕丘), 설(薛)을 공략했다.
항우는 팽성(彭城)에서 한왕을 무찌르고 노(魯)와 양(梁)을 수복했다.
噲還至滎陽(쾌환지형양) 益食平陰二千戶(익식평음이천호) 以將軍守廣武(이장군수광무) 一歲(일세) 項羽引而東(항우인이동) 從高祖擊項籍(종고조격항적) 下陽夏(하양하) 虜楚周將軍卒四千人(노초주장군졸사천인) 圍項籍於陳(위항적어진) 大破之(대파지) 屠胡陵(도호릉)
번쾌는 형양(滎陽)으로 돌아와 식읍으로 평음(平陰)의 2천 호(戶)를 더 받았고, 장군으로서 광무산(廣武山)을 지켰다.
1년 뒤, 항우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한왕을 따라 항우를 공격해 양하현(陽夏縣)을 함락시키고, 초(楚)나라 주장군(周將軍) 楚周將軍(초주장군) : 주은(周殷)을 말한다. 주은은 초나라에 반기를 들고, 구강의 병력을 바쳐 한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쳐 해하(垓下)에서 격파하였으므로, 초나라 주장군이라 한 것이다.
의 군사 4천 명을 사로잡았다. 진현(陳縣)에서 항우를 포위해 대파했다. 호릉(胡陵)을 도륙했다.
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 (2)
번쾌(樊噲) (2)
번쾌가 죽은 뒤 그의 아들 번항(樊伉)이 그의 작위와 식읍을 물려받았는데, 권세를 믿고 세도를 부리다가 여씨(呂氏) 세력들이 제거당할 때 어머니 여수(呂須)와 함께 피살되었다.
項籍既死(항적기사) 漢王為帝(한왕위제) 以噲堅守戰有功(이쾌견수전유공) 益食八百戶(익식팔백호) 從高帝攻反燕王臧荼(종고제공반연왕장도) 虜荼(노도) 定燕地(정연지) 楚王韓信反(초왕한신반) 噲從至陳(쾌종지진) 取信(취신) 定楚(정초) 更賜爵列侯(경사작렬후) 與諸侯剖符(여제후부부) 世世勿絕(세세물절) 食舞陽(식무양) 號為舞陽侯(호위무양후) 除前所食(제전소식) 以將軍從高祖攻反韓王信於代(이장군종고조공반한왕신어대)
항우가 죽은 뒤 한왕(漢王) 유방은 황제가 되었고, 번쾌는 견고한 수비와 전공(戰功)으로 8백 호의 식읍을 더 받았다. 번쾌는 고조를 따라 반란을 일으킨 연왕(燕王) 장도(藏荼) 燕王臧荼(연왕장도) : 한왕 5년(기원전 202년) 겨울에 고조가 항우를 격파한 후 노관을 별장(別將)으로 삼아 유고(劉賈)와 함께 임강왕(臨江王) 공위(共尉)를 격파했다. 7월에 돌아와 고조를 따라 연왕(燕王) 장도(藏荼)를 공격하자 장도가 항복했다. <사기 권 93.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를 공격해 사로잡고 연(燕)을 평정했다. 초왕(楚王) 한신(韓信)이 반란이 일으키자, 反韓王信(반한왕신) : 한왕(韓王) 한신(韓信)은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한(漢)나라의 고조 유방에 의해 한왕(韓王)으로 봉해졌으나 흉노와 화친하려고 한 것에 오해받자, 흉노의 군대를 이끌고 한(漢)나라의 변경을 쳐들어왔다. <사기 권 93.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번쾌는 고조를 따라 진(陳)에 도착해 한신을 체포하고 초나라를 평정했다.
한왕은 다시 열후의 작위를 하사하고, 제후의 부절(符節)을 주어 대대로 세습하게 했으며, 무양현(舞陽縣)을 식읍으로 주고 무양후(舞陽侯)라고 부르고, 이미 책봉했던 식읍은 해제했다.
번쾌는 장군으로서 고조를 따라 대(代)에서 모반을 일으킨 한왕(韓王) 신(信)을 공격했다.
自霍人以往至雲中(자곽인이왕지운중) 與絳侯等共定之(여강후등공정지) 益食千五百戶(익식천오백호) 因擊陳豨與曼丘臣軍(인격진희여만구신군) 戰襄國(전양국) 破柏人(파백인) 先登(선등) 降定清河常山凡二十七縣(항정청하상산범이십칠현) 殘東垣(잔동원) 遷為左丞相(천위좌승상)
강후(絳侯) 絳侯(강후) : 주발(周勃). 전한 초기의 무장이자, 유방의 부하. 패현 사람으로 유방 궐기 후 함께하여 진나라 정벌에 공을 세워서 강후(絳侯)에 봉하여졌다.
등과 함께 곽인(霍人)에서 운중(雲中)으로 가면서 대(代)를 평정해, 식읍 5백 호를 더 받았다.
진희(陳豨) 陳豨(진희) : 고조 10년(기원전 197년) 한신(韓信)과 모반을 도모하여 왕황(王黃), 만구신(曼丘臣) 등과 반란을 일으키고 대왕(代王)으로 자칭하였다. 고제의 친정(親征)으로 진압되었다. <사기 권 93. 한신노관열전>
와 만구신(曼丘臣)의 군대를 공격한 것 때문에 양국현(蘘國縣)에서 전쟁했고, 백인현(柏人縣)을 격파할 때는 가장 먼저 성에 올라 청하(淸河)와 상산(常山) 등 모두 27개의 현을 함락시켜 평정했고, 동원현(東垣縣)을 멸하여 좌승상(左丞相)으로 승진했다.
破得綦毋卹尹潘軍於無終廣昌(파득기무앙윤반군어무종광창) 破豨別將胡人王黃軍於代南(파희별장호인왕황군어대남) 因擊韓信軍於參合(인격한신군어삼합) 軍所將卒斬韓信(군소장졸참한신) 破豨胡騎橫谷(파희호기횡곡) 斬將軍趙既(참장군조기) 虜代丞相馮梁(노대승상풍량) 守孫奮(수손분) 大將王黃(대장왕황) 將軍(장군) [太卜]太仆解福等十人([태복]태복해복등십인)
무종(無終)과 광창(廣昌)에서 기무앙(綦毋卬)과 윤반(尹潘)의 군대를 격파했다. 대(代)의 남쪽에서 진희의 부대장인 흉노족(匈奴族) 왕황(王黃)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기세로 삼합(參合)에서 한신의 군대를 공격했다. 번쾌 휘하의 장졸이 한왕(漢王) 한신을 참수하고, 軍所將卒斬韓信(군소장졸참한신) : 한왕(韓王) 한신은 기원전 196년 봄 다시 흉노의 기병을 이끌고 삼합(參合)을 점령했으나, 시무(柴武)가 이끄는 한나라 군대에 패하고 붙잡혀 참수되었다. <사기 권 93. 한신노관열전>
횡곡(橫谷)에서 진희의 흉노 기마병을 공격해 장군 조기(趙旣)를 참수했으며, 대(代)의 승상 풍량(馮梁), 군수 손분(孫奮), 대장군 왕황(王黃), 장군 태복(太僕) 해복(解福) 등 10명을 생포했다.
與諸將共定代鄉邑七十三(여제장공정대향읍칠십삼) 其後燕王盧綰反(기후연왕노관반) 噲以相國擊盧綰(쾌이상국격노관) 破其丞相抵薊南(파기승상저계남) 定燕地(정연지) 凡縣十八(범현십팔) 鄉邑五十一(향읍오십일) 益食邑千三百戶(익식읍천삼백호) 定食舞陽五千四百戶(정식무양오천사백호) 從(종) 斬首百七十六級(참수백칠십육급) 虜二百八十八人(노이백팔십팔인) 別(별) 破軍七(파군칠) 下城五(하성오) 定郡六(정군육) 縣五十二(현오십이) 得丞相一人(득승상일인) 將軍十二人(장군십이인) 二千石已下至三百石十一人(이천석이하지삼백석십일인)
번쾌는 장군들과 함께 대(代)의 73개 향읍(鄉邑)을 평정했다. 그 후 연왕(燕王) 노관(盧綰) 盧綰(노관) : 패국(沛國) 풍읍(豊邑) 사람으로 유방(劉邦)과 같은 날 태어난 동향인으로 유방의 총애를 받았다. 초한 전쟁 때 태위(太尉)가 되었고 장안후(長安侯)에 봉해졌다. 후에 유방을 따라 연왕(燕王) 장도(藏荼)를 격파하여 연왕(燕王)으로 봉해졌다. 고제(高帝) 12년(기원전 195) 진희(陳豨)가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일으켜 진희를 공격하고, 흉노와 연대하려는 진희의 계획을 방해하려다가 오히려 흉노와의 연대를 도왔는데, 이 일이 알려지자, 흉노로 도망하였다. 흉노가 동호(東胡) 노왕(盧王)으로 삼았으나 1년여 만에 흉노에서 죽었다. <사기 권 93.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이 반란을 일으키자, 번쾌는 재상의 신분으로 노관을 공격해 계현(薊縣) 남쪽에서 승상 저(抵)를 격파하고, 연(燕)을 평정하니, 모두 18현과 51개 향읍이었다. 1,300호의 식읍을 더 받아 무양현(舞陽縣)의 식읍은 모두 5,400호가 되었다.
번쾌는 고조를 따라 적군 176명을 참수하고 288명을 생포했다. 단독으로 7개의 군대를 격파하고, 5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6개 군과 52현을 평정해 승상 1명, 장군 12명, 2천 석(石)에서 3백 석까지의 관리 11명을 체포했다.
噲以呂后女弟呂須為婦(쾌이여후녀제여수위부) 生子伉(생자항) 故其比諸將最親(고기비제장최친)
번쾌는 여후(呂后) 呂后(여후) : 전한(前漢)의 시조 유방(劉邦)의 황후. 이름은 치(稚), 자는 아후(娥姁), 고후(高后)로도 불린다. 유방이 죽은 뒤 실권을 잡았다.
의 여동생 女弟(여제) : 누이동생.
여수(呂嬃)를 아내로 맞이해 아들 항(伉)을 낳았기 때문에, 다른 여러 장군에 비해 고조와 가까웠다.
先黥布反時(선경포반시) 高祖嘗病甚(고조상병심) 惡見人(오현인) 臥禁中(와금중) 詔戶者無得入群臣(조호자무득입군신) 群臣絳灌等莫敢入(군신강관등막감입) 十餘日(십여일) 噲乃排闥直入(쾌내배달직입) 大臣隨之(대신수지) 上獨枕一宦者臥(상독침일환자와)
앞서 경포(黥布) 黥布(경포) : 유방(劉邦)을 도와 전한을 세운 장군이다. 한(漢)나라가 세워진 뒤 한신(韓信)과 팽월(彭越) 등 개국공신들이 하나하나 피살되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강남으로 달아났다가 장사왕(長沙王)에게 유인되어 주살(誅殺) 당했다. <史記 권 91. 경포열전(黥布列傳)>
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조는 한동안 병이 깊어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고 궁중에서 누워있었으므로, 호위병을 불러 군신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명령하였다. 그래서 강후(絳侯)와 관영(灌嬰) 絳灌(강관) :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관영(灌嬰). 周勃(주발) : 전한 초기의 무장이자, 유방의 부하이다. 패현 사람이다. 유방 궐기 후 함께하여 진나라 정벌에 공을 세워서 강후(絳侯)에 봉하여졌다. 灌嬰(관영) : 전한 초기 저양(雎陽) 사람. 젊었을 때는 비단이나 명주를 파는 일로 업을 삼았다. 진(秦)나라 말 전쟁 중에 중연(中涓)으로 유방(劉邦)을 따라 탕(碭)에서 일어나 입관(入關)한 뒤 집규(執珪) 작위를 받고 창문후(昌文侯)로 불렸다.
등은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10여 일이 지나자, 번쾌가 궁중의 문을 열어젖히고 排闥(배달) : 문을 밀어 열다. 확 안겨 오다. 闥(달)은 문(門).
곧바로 들어갔고, 대신들이 뒤를 따랐다. 고조는 홀로 환관 하나를 데리고 누워있었다.
噲等見上流涕曰(쾌등현상류체왈) 始陛下與臣等起豐沛(시폐하여신등기풍패) 定天下(정천하) 何其壯也(하기장야) 今天下已定(금천하이정) 又何憊也(우하비야) 且陛下病甚(차폐하병심)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를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구성하였다.
사마천은 <본기(本紀)> 12권에서 “제왕들이 일어나게 된 자취를 살폈는데, 그 처음과 끝을 탐구하고 그 흥망성쇠를 보되 사실에 근거하여 논하고 고찰하여 삼 대 이상은 간략하게 추정하고, 진나라와 한나라는 상세하게 기록하되, 위로는 황제 헌원(軒轅)으로부터 아래로는 지금(孝武本紀第十二효무본기제십이)에 이르기까지 12편의 본기(本紀)로 저술하고, 종류별로 배열하였다.
<표(表)> 10권에서는 본기(本紀)에 나오는 제왕과 제후들의 흥망을 연표(年表)로 정리하였다. 사마천은 ‘세대가 다른 일이 같은 시기에 일어나고, 발생한 연대의 차이가 분명치 않은 사건들이 있으므로, 10편의 표(表)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서(書)> 8권에서 사마천은 ‘예악(禮樂)의 증감, 율력(律曆)의 개역, 병법의 권모술수와 산천의 귀신, 하늘과 인간과의 관계 등에 관하여, 그 성패와 변화를 살피기 위해 8편의 서(書)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세가(世家)> 30권에서는 분봉한 국가의 군주나 제후들, 혹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사적 및 사회에 특출한 재능을 보인 인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사마천은 ‘28수(宿)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수레바퀴 살 30개가 바퀴통에 모여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처럼, 제왕을 보필하는 팔다리와 같은 신하들을 이에 빗대어, 충신으로서 도를 행하여 군주를 받드는 모습을 30편의 세가(世家)로 지었다.’라고 하였다.
사마천은 <열전(列傳)> 70권에 대해서, ‘정의롭게 행동하고 자잘한 일에 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세상에 공명을 세운 사람들에 대해 70편의 열전(列傳)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서평
Epub은 한자의 덧말 쓰기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아, 한자 옆에 훈을 달았다. <사기>를 이해하는 데에, 특히 한자 읽기에 큰 보탬이 되리라 기대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13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사기의 기전체 서술은 역사의 줄기를 제대로 더듬어 갈 수 있게 안배하고 있다.
특히 <표> 10권은 연도별로 일어난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하여 역사적 사실을 알아볼 수 있게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자료의 방대함에 새삼 놀라게 된다.
《사기》는 중국 전한 왕조인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저술한 중국의 역사서로, 중국 이십사사의 하나이자 정사의 으뜸으로 꼽힌다.
본래 사마천 자신이 붙인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으나, 후한 말기에 이르러 《태사공기(太史公記)》로도 불리게 되었고, 이 ‘태사공기’의 약칭인 ‘사기’가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서, 그 서술 범위는 전설상 오제(五帝)의 한 사람이었다는 요(기원전 22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 말의 전한 무제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 서술 방식은 후대 중국의 역사서, 특히 정사를 기술하는 방식의 전범(典範)이 되었고, 유려한 필치와 문체로 역사서로서의 가치 외에 문학으로서도 큰 가치를 가진 서적으로 평가받는다.
《사기》의 내용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바로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也非也)’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늘의 도리, 즉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기》 열전에서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의인(義人)이 틀림없는 백이와 숙제가 아사(餓死)라는 초라한 죽음을 맞은 데에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서는 사마천 자신이 과거 친구이자 이릉의 불가피한 항복을 변호했던 올바른 행동을 하고도 궁형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데 대한 비통함이 깔려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사기》의 기술은 유교 사상이 주가 되는 와중에 다른 사상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을 추구한다는 역사서 편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역사 서술을 위한 간결하면서도 힘찬 문장은 ‘문성(文聖)’ 또는 ‘백전노장의 군대의 운용’과 같은 것이라 하여 격찬받았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 면에서는 정사로서 기술된 당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는 섬세한 기술로 당시의 생활이나 습관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서〉(書)의 내용은 전한 시대의 세계관이나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에 관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또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이나 서역에 관한 기술도 현재 알려진 지리와 유적 발굴 등에서 판명된 당시 상황과의 정합성이 높고, 이러한 지방의 당시를 알기 위한 귀중한 단서가 되고 있으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에 근위병 3천 인의 인형을 묻었다’는 기술에 대해서도, 시안시 교외의 병마용갱 발견으로 그 정확성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이 책이 경쟁 시대에 살아가는 당신의 새로운 무기를 연마하고 개발하는 데 사용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작가정보
저자(글) 사마천
사마천司馬遷
⁃ BC145년 : 중국 섬서성 용문시하양에서 태어났다.
⁃ 기원전 139년 : 아버지 사마담이 천문 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이 되어 무릉에거주하였다.
⁃ BC126년 : 아버지의 도움으로 2년간 천하를 여행했다.
⁃ BC124년 : 낭중(황제의 시종)이 되어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 BC110년 :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자신이 시작한 <사기>를 완성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 BC108년 : 태사령이 되어서 한무제를 수행하며 장성 일대와 하북, 요서 지방을 여행하였다. 이 여행을 통해 <사기>를 쓰는 데 필요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였다.
⁃ BC104년 : <사기>를 쓰기 시작했다.
⁃ BC99년 : 흉노와의 전쟁에서 투항한 이릉(李陵)장군을 두둔하다 황제의 노여움을 사 사형당할 처지에 놓였다. 사형을 피하는 방법은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치욕적인 궁형 대신 사형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궁형을 선택하였다.
⁃ BC95년 : 황제의 용서를 받고, 환관 중 최고 직책인 중서령이 되었다.
⁃ BC91년 : <사기>를 완성하였다.
⁃ BC86년 : 세상을 떠났다.
번역 우리고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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