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25
2025년 02월 2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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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 정보 ePUB (6.28MB)
- ISBN 9791191146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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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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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중국 최초의 임금인 황제(黃帝)부터 무제에 이르는 역사를 인물 별로 나누어 쓴 <사기> 130권은 형식으로나 내용으로나 획기적인 역사책이다. 이런 형식을 기전체(紀傳體)라고 하는데, 연대순으로 써가는 편년체(編年體)와 함께 역사 기록 방법의 하나이다.
<사기>의 가장 큰 특색은 역대 중국 정사의 모범이 된 기전체(紀傳體)의 효시로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연표인 표(表) 10편, 역대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書) 8편, 제후왕을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 30편, 공명을 세운 사람들의 전기 열전(列傳) 70편 등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마천은 서문(태자공자서)을 통하여 <사기> 전체의 내용을 간략하게 알 수 있게 했다. 이편을 둘로 나누어 전반부는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의 아들 사마천의 집안 내력과 사기를 집필하게 된 동기 등을 기록하고, 후반부는 <사기> 130편에 대하여 각 편을 기록하게 된 동기를 기록하고, <사기>를 저작하게 된 동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황제(黃帝)부터 태초(太初) 연간에 이르기까지 총 130편에 526,500자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였다.
또 사마천이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서 이광의 손자 이릉(李陵)이 흉노를 토벌하러 나갔다가 흉노에게 항복하자, 사마천이 무제(武帝)에게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宮刑)을 당하게 된 사실을 말하였다.
사기는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107.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 62
권 108.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 112
권 10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 141
권 110. 흉노열전匈奴列傳 | 180
사기 25
史記
열전列傳
9
사마천
우리고전연구회 역
차 례
권 106.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 | 6
권 107.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 62
권 108.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 112
권 10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 141
권 110. 흉노열전匈奴列傳 | 180
권 106.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
오왕 유비(吳王 劉濞)는 전한(前漢)의 제후왕으로 한고조 유방(劉邦)의 형 유중(劉仲)의 아들이다. 황실이 제후국을 견제하는 것에 반발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
유비는 고조 12년(기원전 195) 오왕(吳王)으로 봉해졌고, 봉국(封國)에 있으면서 망명객들을 모으고 주전(鑄錢)과 제염(製鹽)을 대대적으로 시행하며 세금을 걷지 않는 등 위민정책으로 세력을 불렸다. 한문제(漢文帝) 때 유비의 아들 유현(劉賢)이 천자를 알현하고 황태자 유계(劉啟)와 함께 술 마시며 쌍륙(雙六) 놀이를 하다가 황태자가 유현을 죽이자, 이에 앙심을 품어 병을 핑계로 조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한경제(漢景帝) 때 조조(晁錯)의 건의로 봉국을 빼앗기자, 조조를 주륙(誅戮)한다는 명분으로 초(楚)와 조(趙), 교서(膠西), 교동(膠東) 등 제후국들과 함께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을 일으켰고, 한나라가 주아부(周亞夫)를 보내 격퇴했다. 유비는 동월(東越)로 달아났다가 동월 왕에게 살해되었다.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 (1)
오왕 유비(吳王 劉濞) (1)
吳王濞者(오왕비자) 高帝兄劉仲之子也(고제형유중지자야) 高帝已定天下七年(고제이정천하칠년) 立劉仲為代王(입유중위대왕) 而匈奴攻代(이흉노공대) 劉仲不能堅守(유중불능견수) 棄國亡(기망국망) 閒行走雒陽(한행주락양) 自歸天子(자귀천자) 天子為骨肉故(천자위골육고) 不忍致法(불인치법) 廢以為郃陽侯(폐이위합양후)
오왕 유비(吳王劉濞)는 한고제(漢高帝)의 형 유중(劉仲) 劉仲(유중) : 대경왕 유희(代頃王劉喜). 한고조의 작은형이다. 자는 중(仲), 시호는 경(頃)이다. 고제가 흉노와 싸워 백등산 포위전에서 곤궁에 처했다가 겨우 빠져나오고서, 고제 7년(기원전 200년) 대나라 왕으로 봉했다.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에는 고제 6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의 아들이다.
고제가 천하를 평정한 지 7년 후, 유중을 대왕(代王)에 봉했다.
그 후 흉노(匈奴)가 대(代)를 공격하자, 유중은 굳게 지켜내지 못하고 나라를 버리고 달아나 사잇길로 달려 낙양(雒陽)으로 들어가 천자에게 자수했다.
고제는 그와 혈육인지라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왕위를 폐하고 합양후(郃陽侯) 郃陽(합양) : 고제가 삼진을 정복하고 수도를 합양 약양현으로 옮겼다. 고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장안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수도로 기능했다.
로 낮추었다.
高帝十一年秋(고제십일년추) 淮南王英布反(회남왕영포반) 東并荊地(동병형지) 劫其國兵(각기국병) 西度淮(서도회) 擊楚(격초) 高帝自將往誅之(고제자장왕주지) 劉仲子沛侯濞年二十(유중자폐후비년이십) 有氣力(유기력) 以騎將從破布軍蘄西(이기장종파포군기서) 會甀(회추) 布走(포주) 荊王劉賈為布所殺(형왕유고위포소살) 無後(무후) 上患吳會稽輕悍(상환오회계경한) 無壯王以填之(무장왕이전지) 諸子少(제자소) 乃立濞於沛為吳王(내립비어폐위오왕) 王三郡五十三城(왕삼군오십삼성)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가을, 회남왕영포(淮南王英布) 淮南王(회남왕) 英布(영포) : 黥布(경포). 항우에게 귀의하였으나 초한(楚漢) 전쟁 중, 한나라가 설득하자 한나라로 귀순했다.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졌고, 유방을 따라 해하(垓下) 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했다. <사기 권 91. 경포열전>
가 반란을 일으켜 동쪽으로 형(荊)을 병합하고 형의 군사를 빼앗은 후 서쪽으로 회수(淮水)를 건너 초(楚)나라를 공격하자, 고제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러 갔다.
유중의 아들 패후(沛侯) 유비(劉濞)는 나이가 스무 살이었는데, 강건하고 힘이 있어 기마부대 장군으로 종군하여 영포의 군대를 기현(蘄縣) 서쪽 회추(會甀)에서 격파했고, 영포는 달아났다. 이때 형왕(荊王) 유고(劉賈) 荊王 劉賈(형왕 유고) : 고제의 종형으로 형왕을 지냈으며 영포의 반란 때 전사했다. 영포가 동쪽으로 형(荊)을 치니, 형왕 유고(劉賈)는 달아나다가 부릉(富陵)에서 죽었다. 영포는 그의 군대를 모두 빼앗아 이끌고 회수를 건너 초를 쳤다. <사기열전 권 91. 경포열전>
가 영포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고제는 오(吳)와 회계(會稽) 사람들이 민첩하고 사나워 걱정했으나, 이들을 제압할 만한 힘이 있는 왕이 없는 걸 근심했다.
고제의 아들들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유비를 폐(沛)의 오왕으로 삼아 3군(三郡) 三郡(삼군) : 동양군(東陽郡), 장군(鄣郡), 오군(吳郡).
53개 성을 다스리게 했다.
已拜受印(이배수인) 高帝召濞相之(고제소비상지) 謂曰(위왈) 若狀有反相(약상유반상) 心獨悔(심독회) 業已拜(업이배) 因拊其背(인부기배) 告曰(고왈) 漢後五十年東南有亂者(한후오십년동남유란자) 豈若邪(기약야) 然天下同姓為一家也(연천하동성위일가야) 慎無反(신무반) 濞頓首曰(비돈수왈) 不敢(불감)
고제가 이미 왕의 도장을 수여하고 난 뒤, 유비(劉濞)를 불러 그의 관상을 보고 말했다.
“너의 얼굴에 모반의 상이 있구나.”
내심 후회했으나 이미 왕으로 봉한 뒤라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훈계하였다.
“한(漢)나라를 세운 후 50년 사이 동남쪽에서 난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설마 너는 아니겠지? 그러나 천하는 모두 유씨 성(姓)의 집안이니, 절대로 모반하지 말도록 하여라!”
유비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감히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會孝惠高后時(회효혜고후시) 天下初定(천하초평) 郡國諸侯各務自拊循其民(군국제후각무자부순기민) 吳有豫章郡銅山(오유예장군동산) 濞則招致天下亡命者益[盜]鑄錢(비즉초지천하망명자익[도]주전) 煮海水為鹽(자해수위염) 以故無賦(이고무부) 國用富饒(국용부요)
한혜제(漢惠帝), 孝惠(효혜) : 한혜제(漢惠帝) 유영(劉盈). 전한의 제2대 황제로 고조의 맏아들.
고후(高后) 高後(고후) : 한고조 유방(劉邦)의 황후(皇后) 여치(呂雉).
때에 이르자 천하가 가까스로 안정되었고, 군국(郡國)의 제후들은 각기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는 데 힘썼다.
오나라 예장군(豫章郡)에 구리 광산이 있었는데, 유비는 천하의 망명자들을 불러 모아 (몰래) 돈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지 않아도 나라의 재정은 풍족했다.
孝文時(효문시) 吳太子入見(오태자입현) 得侍皇太子飲博(득시황태자음박) 吳太子師傅皆楚人(오태자사부개초인) 輕悍(경한) 又素驕(우소교) 博(박) 爭道(쟁도) 不恭(불공) 皇太子引博局提吳太子(황태자인박국제오태자) 殺之(살지) 於是遣其喪歸葬(어시견기상귀장) 至吳(지오) 吳王慍曰(오왕온왈) 天下同宗(천하동종) 死長安即葬長安(사장안즉장장안) 何必來葬為(하필래장위) 復遣喪之長安葬(부견상지장안장)
효문제(孝文帝) 孝文(효문) : 한효문제(漢孝文帝). 문제(文帝). 유항(劉恆).
때 오나라 태자 吳太子(오태자) :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태자. 유현(劉賢).
유현(劉賢)이 천자를 알현하고 황태자 皇太子(황태자) : 문제(文帝)의 태자. 훗날 한경제(漢景帝). 유계(劉啟).
유계(劉啟)를 모시고 술을 마시며 쌍륙(雙六) 博(박) : 고대 일종의 도박. 쌍륙(雙六).
을 두었다.
오나라 태자의 스승들은 모두 초나라 출신으로 경박하고 사나웠고, 오나라 태자도 천성이 교만하여 쌍륙을 노는 데 규칙을 다투는 것이 오만불손해, 황태자가 쌍륙 판을 오나라 태자에게 집어던져 그를 죽였다.
그리하여 한나라 조정에서는 오나라 태자의 시신을 돌려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그의 시신이 오나라에 당도하자, 오왕 유비(劉濞)는 화를 내며 말했다.
“천하가 모두 같은 유씨(劉氏)의 집안인데, 장안(長安)에서 죽었으면 장안에서 장례를 지내야지, 무엇 때문에 꼭 이곳에서 장례를 치르게 한다는 말인가!”
그러고는 태자의 시신을 다시 장안으로 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吳王由此稍失藩臣之禮(오왕유차초실번신지례) 稱病不朝(칭병부조) 京師知其以子故稱病不朝(경사지기이자고칭병부조) 驗問實不病(험문실불병) 諸吳使來(제오사래) 輒系責治之(첩계책치지) 吳王恐(오왕공) 為謀滋甚(위모자심) 及後使人為秋請(급후시인위추청) 上復責問吳使者(상부책문오사자) 使者對曰(사자대왈) 王實不病(왕실불병) 漢系治使者數輩(한계치사자수배) 以故遂稱病(이고수칭병) 且夫(차부) 察見淵中魚(찰견연중어) 不祥(불상) 今王始詐病(금왕시사병) 及覺(급각) 見責急(견책급) 愈益閉(유익폐) 恐上誅之(공상주지) 計乃無聊(계내무료) 唯上棄之而與更始(유상기지이여갱시)
오왕은 그 일로 인해 점차 번신(藩臣) 藩臣(번신) : 봉지(封地)를 하사받은 제후국의 왕.
의 예를 지키지 않게 되었고, 병을 핑계 삼아 입조(入朝)도 하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은 그가 자식이 죽은 일 때문에 병을 핑계로 입조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조사해 보니, 사실 병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나라에서 사자들이 오면 번번이 붙잡아 문책했다.
오왕은 두려운 마음에 더욱 심하게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그 후 추청(秋晴) 秋請(추청) : 고대에 제후들이 경성에 와서 황제를 알현하는 일로 춘천(春天)은 조(朝), 추천(秋天)은 ‘청(請)’이라 한다.
시에 다른 사람을 보내오자, 황제는 또 오나라 사자를 문책했다.
오나라 사자가 대답했다.
“오왕은 실제로 병이 든 것이 아니며, 한나라 조정에서 오나라 사신 여럿을 붙잡아 두고 문책하므로, 두려워서 병이라 핑계 대는 것입니다.
무릇 ‘연못 속의 고기를 살피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察見淵中魚(찰견연중어) 不祥(불상) : 연못 속의 고기를 살피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즉, 황제가 신하의 사생활을 살피는 것은 좋지 않으며 내란을 일으키게 만든다는 뜻. 한비자에는 ‘知淵中之魚者不祥’이라고 하였다. <韓非子 說林上> <열자(列子) 설부편(說符篇)>에는 ‘察見淵魚者不祥(찰견연어자불상) 智料隱匿者有殃(지료은닉자유앙) 연못 속의 물고기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은 상서롭지 못하고, 지혜로 감추어진 것까지 헤아려 낼 수 있는 사람은 재앙을 만난다.’라고 하였다.
’라고 했습니다.
왕이 처음에는 거짓으로 병이라고 했는데,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심하게 문책받자, 더욱더 움츠리면서 지금은 황제께서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꾀를 낸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황제께서는 옛일은 잊으시고, 오왕(吳王)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於是天子乃赦吳使者歸之(어시천자내사오사자귀지) 而賜吳王几杖(이사오왕궤장) 老(노) 不朝(부조) 吳得釋其罪(오득석기죄) 謀亦益解(모역익해) 然其居國以銅鹽故(연기거국이동염고) 百姓無賦(백성무부) 卒踐更(졸천경) 輒與平賈(첩여평가) 歲時存問茂材(세시존문무재) 賞賜閭里(상사려리) 佗郡國吏欲來捕亡人者(타군국리욕래포망인자) 訟共禁弗予(용공금불여) 如此者四十餘年(여차자사십여년) 以故能使其眾(이고능사기중)
그래서 천자는 곧 오나라 사자들을 사면해 그들을 돌려보내고, 오왕에게는 궤장(几杖)을 하사하며 賜几杖(사궤장) : 고대에는 늙어 벼슬에서 물러나는 중신(重臣)에게 임금이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연로했으니 입조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오왕은 죄를 사면받게 되어 모반할 생각도 점차 느슨해졌다. 그러나 그는 구리와 소금에서 나오는 이득으로 나라를 다스린 까닭에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걷지 않았다. 병역을 대신 복무한 자에게 그때마다 주는 대역금(代役金) 踐更(천경) : 부역을 대신하는 사람에게 금전을 주는 제도
을 공정한 가격으로 하게 하였다. 매년 철 따라 재능이 우수한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다른 군국(郡國)에서 관리가 와서 도망자를 체포하고자 해도 그들을 감싸며 넘겨주지 않았다. 40여 년간 이같이 하자, 그의 백성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 (2)
오왕 유비(吳王 劉濞) (2)
이 장에서는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亂. 吳楚之亂)의 발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오초칠국의 난은 전한(前漢) 경제(景帝) 치세인 기원전 154년 전한의 제후국 오(吳)나라의 왕 유비(劉濞)가 주축이 되어 초(楚)왕 유성(劉成), 조(趙)왕 유수(劉遂),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 치천왕(菑川王) 유현(劉賢),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雄渠) 등이 전한 중앙 정부에 일으킨 반란이다. 이 제후왕의 반란은 태위 주아부(周亞夫)가 거느린 정부군의 교묘한 전략으로 오왕(吳王)은 살해되고, 오와 공모한 제후왕도 모두 살해당하여 전란은 불과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晁錯為太子家令(조조위태자가령) 得幸太子(득행태자) 數從容言吳過可削(삭종용언오과가삭) 數上書說孝文帝(삭상서설효문제) 文帝寬(문제관) 不忍罰(불인벌) 以此吳日益橫(이차오일익횡)
그 무렵 조조(晁錯) 晁錯(조조) : 문제(文帝) 때 후일 경제(景帝)가 된 태자(太子)의 사인(舍人)으로 있다가 가령(家令)이 되어 태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각박한 성품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내사(內史)에 임명되고 자주 경제(景帝)와 독대하여 자신의 계책을 실현하였으며,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자 제후들의 세력이 너무 강성해서 장차 나라의 큰 우환이 될 것을 우려하여 제후들의 봉지를 삭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오(吳), 초(楚) 등 7국이 조조를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사기열전(史記列傳) 권 101. 원앙조조열전(袁盎鼂錯列傳) 조조(鼂錯)>
가 태자가령(太子家令)이 되어, 황태자의 총애를 받게 되자, 자주 태자를 종용하여 오나라가 지은 죄가 있으니, 봉지를 삭감해야 한다고 말하도록 하였다. 또 문제(文帝)에게도 자주 상서로 권고하였으나, 문제는 천성이 관대했기에, 차마 오나라에 벌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에 오왕(吳王)은 더욱 교만해졌다.
及孝景帝即位(급효경제즉위) 錯為御史大夫(조위어사대부) 說上曰(설상왈) 昔高帝初定天下(석고제초정천하) 昆弟少(곤제소) 諸子弱(제자약) 大封同姓(대봉동성) 故王孽子悼惠王王齊七十餘城(고왕얼자도혜왕왕제칠십여성) 庶弟元王王楚四十餘城(서제원왕왕초사십여성) 兄子濞王吳五十餘城(형자비왕오오십여성) 封三庶孽(봉삼서얼) 分天下半(분천하반) 今吳王前有太子之郄(금오왕전유태자지극) 詐稱病不朝(사칭병부조) 於古法當誅(어고법당주) 文帝弗忍(문제불인) 因賜几杖(인사궤장) 德至厚(덕지후) 當改過自新(당개과자신) 乃益驕溢(내익교일) 即山鑄錢(즉산주전) 煮海水為鹽(자해수위염) 誘天下亡人(유천하망인) 謀作亂(모작란) 今削之亦反(금삭지역반) 不削之亦反(불삭지역반) 削之(삭지) 其反亟(기반극) 禍小(화소) 不削(불삭) 反遲(반지) 禍大(화대)
효경제(孝景帝)가 즉위하고 조조(晁錯)가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되자 황제에게 아뢰었다.
“옛날 고제께서 처음 천하를 평정하셨을 때 형제들은 적고 자제들은 아직 어려서 같은 유씨(劉氏) 성(姓)을 제후왕으로 많이 봉했는데, 서자(庶子) 도혜왕(悼惠王) 悼惠王(도혜왕) : 유비(劉肥). 고조 유방(劉邦)의 맏서자이다. 그 어머니는 다른 집안 출신의 첩실로 조씨(曹氏)이다.
유비(劉肥)는 제(齊)나라 70여 성의 왕이 되었고, 서제(庶弟) 원왕(元王) 元王(원왕) : 유교(劉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이복동생으로 모친은 태상황후(太上皇後) 이씨(李氏)이다.
유교(劉交)는 초나라 40여 성의 왕이 되었고, 형의 아들 유비(劉濞)는 오나라 50여 성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세 서얼(庶孽)을 왕에 봉해 천하의 반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지금 오왕(吳王)은 황제께서 예전에 태자로 있을 때 생긴 일로 인해 사이가 나빠져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는 입조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옛 법에 따르면 당연히 사형에 처해야 할 일이지만, 문제께서 차마 처벌하지 못하고 도리어 궤장(几杖)을 하사하셨습니다.
은덕이 이토록 두터우니, 오왕은 마땅히 잘못을 고치고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왕은 오히려 교만함이 더욱 넘쳐 광산에서 돈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며, 천하의 도망자들을 유인하여 반란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의 봉지를 삭감해도 모반할 것이고, 삭감하지 않아도 모반할 것입니다. 봉지를 삭감하면 그 반란의 시기는 빨라지겠지만 화는 적을 것이고, 삭감하지 않으면 반란의 시기는 늦어지겠지만 그 화는 더욱 클 것입니다.”
三年冬(삼년동) 楚王朝(초왕조) 晁錯因言楚王戊往年為薄太后服(조조인언초왕무왕년위박태후복) 私姦服舍(사간복사) 請誅之(청주지) 詔赦(조사) 罰削東海郡(벌삭동해군) 因削吳之豫章郡會稽郡(인삭오지예장군회계군) 及前二年趙王有罪(급전이년조왕유죄) 削其河閒郡(삭기하간군) 膠西王卬以賣爵有姦(교서왕앙이매작유간) 削其六縣(삭기육현)
경제 3년(기원전 154년) 겨울, 초왕(楚王) 楚王(초왕) : 유무(劉戊). 초이왕(楚夷王) 유정(劉程)의 아들이다. 문제(文帝) 6년(기원전 174) 왕위(王位)를 이어받았다.
이 입조하자, 조조는 이를 기회로 삼아 초왕 유무(劉戊)가 지난해 박태후(薄太后) 薄太后(박태후) : 유방(劉邦)의 후궁. 문제(文帝)의 생모.
상중(喪中)에 상가(喪家) 服舍(복사) : 상중에 머무는 가옥.
에서 몰래 간음한 죄를 물어 그에게 죽음을 내리라고 청원했다.
경제는 조서(詔書)를 내려서 사면은 하였으나, 벌로 동해군(東海郡)을 삭감했다. 이에 이어 오나라의 예장군과 회계군을 삭감했다.
또 2년 전 조왕(趙王) 趙王(조왕) : 유수(劉遂). 조유왕 유우의 아들로 고황후 사후 여씨 일족이 몰락하고 문제가 황제가 되면서, 여록을 대신해 조나라 왕이 되었다.
유수(劉遂)가 지은 죄를 물어 조나라 하간군(河間郡)을 삭감했다.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 膠西王卬(교서왕앙) : 유앙(劉卬). 고조의 손자이며 도혜왕(悼惠王) 유비(劉肥)의 아들이다.
이 매작(賣爵) 賣爵(매작) : 한(漢)나라 때 재정(財政) 구제책(救濟策)의 하나로, 작위를 파는 제도.
시 부정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의 여섯 개 현(縣)을 삭감했다.
漢廷臣方議削吳(한정신방의삭오) 吳王濞恐削地無已(오왕비공삭지무이) 因以此發謀(인이차발모) 欲舉事(욕거사) 念諸侯無足與計謀者(염제후무족여계모자) 聞膠西王勇(문교서왕용) 好氣(호기) 喜兵(희병) 諸齊皆憚畏(제제개탄외) 於是乃使中大夫應高誂膠西王(어시내사중대부응고조교서왕) 無文書(무문서) 口報曰(구보왈) 吳王不肖(오왕불초) 有宿夕之憂(유숙석지우) 不敢自外(불감자외) 使喻其驩心(사유기환심)
한나라 조정의 신하들은 바야흐로 오나라의 봉지를 삭감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오왕 유비는 자기 영토를 삭감당하는 것이 그치지 않을 걸 두려워하다가, 이 일을 계기로 계책을 드러내 거사하려고 하였다.
제후 중에 함께 도모할 만한 자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이 용맹하고 건장하며 용병을 좋아해 제나라 지역 제후들 諸齊(제제) :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가 죽자, 문제(文帝)는 제나라를 유비(劉肥)의 일곱 아들에게 분봉하였는데, 제왕(齊王) 유장려(劉將閭), 제북왕(濟北王) 유지(劉志),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 치천왕(菑川王) 유현(劉賢), 성양왕(城陽王) 유장(劉章),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雄渠)를 세웠다. 이들을 일컬어 제제(諸齊)라 한다.
이 모두 두려워한다는 말을 듣고, 중대부(中大夫) 응고(應高)를 사자로 보내어 교서왕을 회유하려 했다.
응고는 서신도 없이 구두(口頭)로 오왕의 뜻을 전하며 말했다.
“오왕은 불초하며 조만간 宿夕(숙석) : 하룻밤. 짧은 시간.
닥쳐올 우환을 걱정하여, 감히 남에게 말하지 않고 오왕의 명백한 호의를 전하게 했습니다.”
王曰(왕왈) 何以教之(하이교지) 高曰(고왈) 今者主上興於姦(금자주상흥어간) 飾於邪臣(식어사신) 好小善(호소선) 聽讒賊(청참적) 擅變更律令(천변경률령) 侵奪諸侯之地(침탈제후지지) 徵求滋多(징구자다) 誅罰良善(주벌량선) 日以益甚(일이익심) 里語有之(이어유지) 舐糠及米(지강급미) 吳與膠西(오여교서) 知名諸侯也(지명제후야) 一時見察(일시견찰) 恐不得安肆矣(공부득안사의) 吳王身有內病(오왕신유내병) 不能朝請二十餘年(불능조청이십여년) 嘗患見疑(상환견의) 無以自白(무이자백) 今脅肩累足(금협견루족) 猶懼不見釋(유구불견석) 竊聞大王以爵事有適(절문대왕이작사유적) 所聞諸侯削地(소문제후삭지) 罪不至此(죄부지차) 此恐不得削地而已(차공부득삭지이이)
교서왕(膠西王) 유앙이 말했다.
“무엇을 가르쳐주신다는 것이오?”
응고가 말했다.
“지금 황제께서는 간신을 등용하고, 사악한 신하에게 가려져 눈앞의 이익을 좋아하시며, 참소를 일삼는 적신(賊臣)의 말을 들으셔서 이들이 제멋대로 법령을 고치고 제후의 땅을 침탈하며 요구하여 거두어들이는 바가 점점 많아지고, 선량한 사람을 죽이고 벌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속담 里語(이어) : 속담.
에 이르기를, ‘쌀겨를 핥다 보면 쌀알까지 먹게 된다. 舐糠及米(지강급미) :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말한다. 조정에서 봉지를 삭감하다 보면 봉국까지도 소멸시킬 수 있다는 뜻.
’라고 하였습니다.
오왕와 교서왕은 이름난 제후들이나 하루아침에 조정의 사찰을 당하면 안녕과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오왕은 몸에 속병이 있어 입조하지 못한 지 20여 년이 되었고, 항상 의심받으면서도 스스로 명백하게 증명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고 계시며, 지금 어깨를 움츠리고 발을 멈추고 脅肩累足(협견루족) : 무서워 어깨를 움츠리고 발을 멈추다, 두려워 움츠리다.
조심하고 있지만 오히려 용서받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소문으로 듣건대, 대왕께서는 작위에 관한 일로 문책받아 봉지를 삭감당할 것이라는 말이 제후들 사이에서 들리고 있으며, 죄는 봉지를 삭감당할 정도는 아니나, 오히려 이 일이 봉지를 삭감당하는 데서 그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王曰(왕왈) 然(연) 有之(유지) 子將柰何(자장내하) 高曰(고왈) 同惡相助(동오상조) 同好相留(동호상류) 同情相成(동정상성) 同欲相趨(동욕상추) 同利相死(동리상사) 今吳王自以為與大王同憂(금오왕자이위여대왕동우) 願因時循理(원인시순리) 棄軀以除患害於天下(기구이제환해어천하) 億亦可乎(억역가호) 王瞿然駭曰(왕구연해왈) 寡人何敢如是(과인하감여시) 今主上雖急(금지상수급) 固有死耳(고유사이) 安得不戴(안득부대)
교서왕이 말했다.
“그렇소. 그런 일이 있었소. 그대는 어찌하라는 것이오?”
응고가 대답했다.
“미움을 같이하는 자는 서로 돕고, 기호가 같은 자는 서로 붙들어 머무르며, 뜻을 같이하는 자는 함께 이루며, 하고자 하는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를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구성하였다.
사마천은 <본기(本紀)> 12권에서 “제왕들이 일어나게 된 자취를 살폈는데, 그 처음과 끝을 탐구하고 그 흥망성쇠를 보되 사실에 근거하여 논하고 고찰하여 삼 대 이상은 간략하게 추정하고, 진나라와 한나라는 상세하게 기록하되, 위로는 황제 헌원(軒轅)으로부터 아래로는 지금(孝武本紀第十二효무본기제십이)에 이르기까지 12편의 본기(本紀)로 저술하고, 종류별로 배열하였다.
<표(表)> 10권에서는 본기(本紀)에 나오는 제왕과 제후들의 흥망을 연표(年表)로 정리하였다. 사마천은 ‘세대가 다른 일이 같은 시기에 일어나고, 발생한 연대의 차이가 분명치 않은 사건들이 있으므로, 10편의 표(表)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서(書)> 8권에서 사마천은 ‘예악(禮樂)의 증감, 율력(律曆)의 개역, 병법의 권모술수와 산천의 귀신, 하늘과 인간과의 관계 등에 관하여, 그 성패와 변화를 살피기 위해 8편의 서(書)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세가(世家)> 30권에서는 분봉한 국가의 군주나 제후들, 혹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사적 및 사회에 특출한 재능을 보인 인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사마천은 ‘28수(宿)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수레바퀴 살 30개가 바퀴통에 모여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처럼, 제왕을 보필하는 팔다리와 같은 신하들을 이에 빗대어, 충신으로서 도를 행하여 군주를 받드는 모습을 30편의 세가(世家)로 지었다.’라고 하였다.
사마천은 <열전(列傳)> 70권에 대해서, ‘정의롭게 행동하고 자잘한 일에 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세상에 공명을 세운 사람들에 대해 70편의 열전(列傳)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서평
Epub은 한자의 덧말 쓰기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아, 한자 옆에 훈을 달았다. <사기>를 이해하는 데에, 특히 한자 읽기에 큰 보탬이 되리라 기대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13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사기의 기전체 서술은 역사의 줄기를 제대로 더듬어 갈 수 있게 안배하고 있다.
특히 <표> 10권은 연도별로 일어난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하여 역사적 사실을 알아볼 수 있게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자료의 방대함에 새삼 놀라게 된다.
《사기》는 중국 전한 왕조인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저술한 중국의 역사서로, 중국 이십사사의 하나이자 정사의 으뜸으로 꼽힌다.
본래 사마천 자신이 붙인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으나, 후한 말기에 이르러 《태사공기(太史公記)》로도 불리게 되었고, 이 ‘태사공기’의 약칭인 ‘사기’가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서, 그 서술 범위는 전설상 오제(五帝)의 한 사람이었다는 요(기원전 22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 말의 전한 무제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 서술 방식은 후대 중국의 역사서, 특히 정사를 기술하는 방식의 전범(典範)이 되었고, 유려한 필치와 문체로 역사서로서의 가치 외에 문학으로서도 큰 가치를 가진 서적으로 평가받는다.
《사기》의 내용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바로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也非也)’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늘의 도리, 즉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기》 열전에서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의인(義人)이 틀림없는 백이와 숙제가 아사(餓死)라는 초라한 죽음을 맞은 데에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서는 사마천 자신이 과거 친구이자 이릉의 불가피한 항복을 변호했던 올바른 행동을 하고도 궁형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데 대한 비통함이 깔려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사기》의 기술은 유교 사상이 주가 되는 와중에 다른 사상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을 추구한다는 역사서 편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역사 서술을 위한 간결하면서도 힘찬 문장은 ‘문성(文聖)’ 또는 ‘백전노장의 군대의 운용’과 같은 것이라 하여 격찬받았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 면에서는 정사로서 기술된 당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는 섬세한 기술로 당시의 생활이나 습관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서〉(書)의 내용은 전한 시대의 세계관이나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에 관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또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이나 서역에 관한 기술도 현재 알려진 지리와 유적 발굴 등에서 판명된 당시 상황과의 정합성이 높고, 이러한 지방의 당시를 알기 위한 귀중한 단서가 되고 있으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에 근위병 3천 인의 인형을 묻었다’는 기술에 대해서도, 시안시 교외의 병마용갱 발견으로 그 정확성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이 책이 경쟁 시대에 살아가는 당신의 새로운 무기를 연마하고 개발하는 데 사용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작가정보
저자(글) 사마천
사마천司馬遷
⁃ BC145년 : 중국 섬서성 용문시하양에서 태어났다.
⁃ 기원전 139년 : 아버지 사마담이 천문 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이 되어 무릉에거주하였다.
⁃ BC126년 : 아버지의 도움으로 2년간 천하를 여행했다.
⁃ BC124년 : 낭중(황제의 시종)이 되어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 BC110년 :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자신이 시작한 <사기>를 완성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 BC108년 : 태사령이 되어서 한무제를 수행하며 장성 일대와 하북, 요서 지방을 여행하였다. 이 여행을 통해 <사기>를 쓰는 데 필요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였다.
⁃ BC104년 : <사기>를 쓰기 시작했다.
⁃ BC99년 : 흉노와의 전쟁에서 투항한 이릉(李陵)장군을 두둔하다 황제의 노여움을 사 사형당할 처지에 놓였다. 사형을 피하는 방법은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치욕적인 궁형 대신 사형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궁형을 선택하였다.
⁃ BC95년 : 황제의 용서를 받고, 환관 중 최고 직책인 중서령이 되었다.
⁃ BC91년 : <사기>를 완성하였다.
⁃ BC86년 : 세상을 떠났다.
번역 우리고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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