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월악산(月嶽山) 신륵사(神勒寺)의 역사 : 창건과 중창(重創)·중수(重修)
이용수 0
- 영문명
- History of Sinreuka Temple(神勒寺) on Mt. Wolak(月嶽山) : Founding, Reconstruction, and Repair
- 발행기관
- 충주문화원 부설 충주학연구소
- 저자명
- 김종수(Jong Su Kim)
- 간행물 정보
- 『충주학연구』2025년 제4호, 115~142쪽, 전체 28쪽
- 주제분류
- 인문학 > 역사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25.06.30
무료
구매일시로부터 72시간 이내에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이 학술논문 정보는 (주)교보문고와 각 발행기관 사이에 저작물 이용 계약이 체결된 것으로, 교보문고를 통해 제공되고 있습니다.

국문 초록
월악산 신륵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천년 고찰이나, 지금까지 이 사찰이 중창·중수된 내력까지를 망라한 역사에 관한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질 못했다. 이에 본 논의에서는 김홍식이 지은 「월악산신륵사중수기」(1960)를 직접 판독한 뒤에, 신라에서 19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신륵사의 역사를 통시적 차원에서 재조명하였다. 기존의 제반 논의는 이 기문의 내용을 왜곡한 차원에서 전혀 엉뚱한 결론을 도출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신륵사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복수의 사찰에 대한 추적을 통해서, ‘신륵’이 불보살의 위신력을 상징하는 기호라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청풍의 금수산에 소재한 무암사가 대홍수로 인하여 월악산으로 이건한 1726년 이전 시점에는, 기존 월악사가 고려 시대까지 존속했던 사실도 주목된다. ‘증지수좌’에 명해진 고려의 유가종 계열의 승려인 최관오의 묘지명(1158)은, 월악사가 최소한 통일신라시대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는 개연성을 시사해 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사찰명칭이 변경된 신륵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등장한 이후로, 18세기에 이르러 김이만의 『학고집』과 조귀명의 『동계집』에 다시 출현한다. 이는 신륵사가 임진왜란 이후로 오랫동안 폐사 상태를 유지해 왔음을 시사해 준다. 김이만과 조귀명의 문집은 청풍의 무암사가 월악산으로 옮겨 중창하게 된 역사를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고문헌 자료에 해당한다.
또한 김이만의 『산사』와 선행 연구는 신륵사의 삼층석탑이 무암사로부터 이송되었을 개연성을 추정케 해준다. 차후 신륵사는 1806년 이후로 극락전에 다수의 탱화를 그리는 등의 보수 작업을 단행한 끝에, 6.25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결과적으로 약 1,400여 년에 이르는 신륵사 역사를 둘러싼 논의란, 전통 깊은 문화재를 보존하고 가꾸는 일에 내포된 소중한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
영문 초록
Silleuksa Temple in Woraksan Mountain is one of thousands-years-old temples which is assumed to be founded during the Silla(新羅) Dynasty, but researches on the construction that covers even the history of reconstruction(重建)·renovation(重修) of the temple have not been carried yet. Thus, this manuscript read the 「Woraksan Mountain Silleuksa Temple Renovation Record(月岳山神勒寺重修記)」(1960) and reviewed history of Silleuksa Temple from Silla to the early 19th century from a diachronic point of view. Simultaneously with the foregoing, this manuscript also investigated and verifi ed by tracking a multiple number of temples using Silleuksa Temple that the term ‘Silleuk’ is a sign(記號) that represents prestige of buddhas and bodhisattvas(佛菩薩).
Meanwhile, it is noticeable that Worak Temple(月岳寺) existed until the Goryeo(高麗) Dynasty before 1726 when Muam Temple(霧巖寺) located in Geumsusan Mountain(錦繡山), Cheongpung(淸風) was relocated to Woraksan Mountain by the great flood. Epitaphs(1158) put in the grave of Choi Gwanoh(崔觀奧) who was a buddhist monk designated as the ‘Jeungjisujwa(證智首座)’ during the Goryeo Dynasty also implies probability that Woraksa Temple can trace back to pre-unifi ed Silla Dynasty(統一新羅). After the change of name, Silleuksa Temple first appeared in the 『Sinjeungdonggukyeojiseungram(新增東國輿地勝覽)』(1530) and recurred in Kim Ee-man(金履萬)’s 『Collection of Hakgo(鶴皐集)』and Cho Gui-myeong(趙龜命)’s 『Collection of Donggye(東谿集)』 in the 18th century. Collections of literary works by Kim Ee-man and Cho Gui-myeong confi rm the history of Muam Temple in Cheongpung clearly that it was relocated and renovated(重創). In addition, advanced researches on Kim Ee-man’s 「Sansa(山史: History of mountains)」 make us estimate the possibility that Three-story Stone Pagoda in Silleuksa Temple was relocated from Moorim Temple(霧林寺). After that, Silleuksa Temple has existed so far after undergoing the Korean War and repair works such as painting a number of altar portraits of Buddha(幁畵) in the Geungnakjeon Hall(極樂殿) after 1806.
목차
Ⅰ. 머리말
Ⅱ. 신륵사의 창건·중수와 사명(寺名)
Ⅲ. 청풍(淸風) 무암사(霧巖寺)의 이건(移建)과 중창
Ⅳ. 맺음말
키워드
해당간행물 수록 논문
참고문헌
관련논문
인문학 > 역사학분야 NEW
- 적석목관묘의 축조와 장송의례 - 충주 호암동 유적을 중심으로
- 충주지역 숯가마의 성격과 의미 - 삼국~통일신라시대 숯가마의 분포를 중심으로
- 1256년 충주산성전투(忠州山城戰鬪)의 역사적 성격
최근 이용한 논문
교보eBook 첫 방문을 환영 합니다!
신규가입 혜택 지급이 완료 되었습니다.
바로 사용 가능한 교보e캐시 1,000원 (유효기간 7일)
지금 바로 교보eBook의 다양한 콘텐츠를 이용해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