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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韓国の代表的創業企業家·李秉喆の企業家活動: 挫折からの再起を巡って

이용수  3

영문명
A Study on the Entrepreneurial History of Byung-Chul Lee, Korean Representative Entrepreneur
발행기관
아시아.유럽미래학회​
저자명
柳町 功(Isao Yanagimachi)
간행물 정보
『유라시아연구』제5권 제2호, 17~32쪽, 전체 16쪽
주제분류
사회과학 > 사회과학일반
파일형태
PDF
발행일자
2008.09.30
4,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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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의
논문 표지

국문 초록

기업가활동에 대하여 고찰할 때에는, 그의 성공이나 실패 자체에 대한 단편적 고찰에 국한하지 않고, 실패나 성공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인과관계를 객관적인 관점에서 명확하게 하면서, 동시에 기업가가 어려운 국면을 어떻게 극복하여 성공으로 이끌어왔는지를 도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한국근대사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삼성 창업자인 이병철의 생애는 실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가에 걸맞게 파란만장하였으며, 따라서 이병철의 기업가활동도 전후의 현대사 속에서 격변하는 정치변화와 관련하여 형성되면서 독특한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본 연구의 목적은 1960년대에 발생한 대표적인 두 가지 정치적 사건을 대상으로, 이병철이 정치가들에게 농락당했던 좌절상황에서 이를 어떻게 극복하여 재기를 할 수 있었는지, 역사적 관련성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는데 있다. 이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좌절에서부터 재기에 이르기까지’의 첫 번째 사례는 1960년대 초에 발생한 「부정축재처리문제」이다. 1950년 후반에 삼성은 이미 한국재계를 대표하는 재벌로 성장하였으며 이병철은 그 총수로서 재계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4.19학생혁명(1960년)에 의하여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마자 이승만 정권과 결탁한 「부정축재자」에 대한 수사가 다방면으로 진행되면서 정치가나 공무원, 군인, 그리고 많은 기업가들이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이들 기업가 중에 이승만 정권 시절에 한국 최대의 재벌이 되었던 삼성이 「부정축재자 제1호」가 되어, 창업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도정권과 민주당 정권에 이어서 5.16군사혁명(1961)이 발발한 뒤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부정축재자에 대한 조치는 한층 더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이병철의 경우 당시 일본에 체제 중이었던 이유로 체포는 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조홍제가 구속되어 혁명재판을 받게 되었으며, 그 결과 막대한 벌금뿐만 아니라 자유당정권 시대에 획득한 시중은행이나 여러 계열사의 주식이 몰수되는 등 가장 심각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이병철은 「기업가=범죄자」로 취급받는 것을 수용하지 않고 재계의 대표로서 혁명정부의 중심인물인 박정희와의 면담에서 자신의 소신을 표명하였다. 기업가들에 대한 이해를 구하여 국가경제의 재건을 위해서 그들이 공헌할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면서 사태를 타개했던 것이다. 「부정축재자=범죄자」로서 낙인이 찍혔던 것은 사업보국, 즉 사업 활동을 통해서 국가에 공헌해야 한다는 강력한 국가관을 경영이념으로 삼고 있었던 이병철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굴욕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일시적이지만 자신이 직접 정계로 진출하는 것을 검토하기도 하였다. 결국은 단념하였지만, 그 대신 정치보다 강력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언론을 중심으로 한 「종합 매스컴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심했다. 매스컴을 통해서 기업가로서 자신의 의견을 정정당당하게 표명하고, 국민을 계몽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동양TV.라디오 서울(모두 1964년), 중앙일보(1965년)라는 매스컴사업의 ‘종합화’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좌절에서부터 재기에 이르기까지’의 두 번째 사례는 1966년 가을에 발생하였다. 소위 한비사건이다. 국책사업인 비료공장 건설 프로젝트가 삼성이 설립한 한국비료(주)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지만, 수입금지 물품의 밀수행위가 적발되었던 것이다. 일단 무마가 된 사건이었지만 일부 정치가에 의하여 다시 문제시 되면서 각 신문사에 의한 삼성 두들기기가 일대 정치 문제화되었다. 차남인 이창희(중역)가 구속되어 이병철은 결국 발본적인 사태수습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①공장 건설이 종료되는 대로 이 회사를 국가에 헌납한다(=주식 51%를 정부에 기부). ②사건의 책임을 지고 자신은 경영 제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것이었다. 이병철의 은퇴 후 장남ㆍ이명희가 삼성의 최고책임자가 되었지만, 이것은 충분히 준비된 후계자에게 권한을 위양한 것은 아니었다. 정권과의 비정상적인 관계, 매스컴의 삼성에 대한 반감, 사건을 계기로 한 최고 간부의 삼성이반 등, 삼성은 한비사건의 「후유증」으로 꽤 오랫동안 몸살을 앓았다. 결국 장남을 중심으로 한 삼성재건은 실패로 끝나 1년 뒤에는 이병철 자신이 제일선에 다시 복귀하게 된 것이다. 삼성의 본격적인 재건을 도모할 목적으로 결정된 신규 사업이 전자공업이었다. 그룹 전체가 총력을 다하여 추진한 신규 사업이었지만, 기존의 전자업계 등이 삼성의 진출을 저지할 목적으로 격렬한 정치공세를 확산시켜나갔다. 그러나 격렬한 마찰의 결과 박정희 대통령의 조건부 승인에 따라 삼성의 비원이었던 전자공업의 진출은 성취되었다. 이병철의 기업가 활동은 높게 평가되어야 하는데, 그 근거로서 다음의 네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이병철은 정치권력에 의하여 수많은 좌절을 맛보았지만, 그 때마다 고난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재기에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업경영에 필요한 종합적인 경영능력을 몸에 익혔다고 판단된다. 두 번째는 기업가활동의 근저에 있는 이념 혹은 사상으로서, 상당히 강력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 전술한 「사업보국」은 그의 중심적인 경영이념으로서 위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이와 함께 「합리추구」와 「인재제일」을 중요한 경영이념으로 삼았다. 「부실경영」을 죄악시하고 임원들에게는 상당히 높은 능력수준을 설정했던 그의 원칙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에 대해서도 예외가 없었다. 또한 대졸자 공개채용을 통한 토박이 인재육성 등에는 특별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네 번째는 후계자 문제에 대한 대응이다. 한비사건 이후 장남과 차남이 후계자 후보로부터 차례차례로 실격이 되자 삼남이 유일한 후보가 되면서, 장기간에 걸친 후계자 교육과 경영능력의 배양이 철저하게 실시되었다. 삼성 전체가 시스템으로서 후계자 육성 장치를 구축하여 인재를 육성해나갔던 것이다. 끝으로, 이병철은 좌절에서부터 재기하는 가운데 어떠한 것을 학습하였을까? 1960년대에 연속으로 발생한 정변과 스캔들을 통해서 다음의 두 가지 점을 배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는 재벌경영의 정치성 약화와 「불가원, 불가근」이라는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종래의 자유당 시대에는 정치권력과 긴밀한 관계가 사업활동을 성공으로 이끌어내었다고 할 수 있으나, 1960년대부터는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는 경영능력의 중시를 명확하게 지향한 것이다. 근시안적인 혈족의존의 체질로부터 탈피하여 경영능력을 축적하기 위한 장치를 구축해나가는 실천적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것들이 그 이후 이병철의 기업가활동에서 나타난 특징이랄 수 있다.

영문 초록

In the study of entrepreneurial history, it is very important to consider not only successful or unsuccessful case itself, but also the process bringing high performance or failure as a result. And we also emphasize the process how an entrepreneur overcome difficult situations. The life of Byung-Chul Lee, founder of Samsung group, the largest and representative Korean chaebol, was said to a microcosm of Korean modern history. Therefore, his entrepreneurial history has been formed with relationship to the politics change of turbulence. In other word, Lee’s life was a typical life full of ups and downs.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process of Lee’s overcoming a collapse and attempting a comeback in 1960’s and to evaluate his entrepreneurial activity in the historical context. I took up two political cases that happened in 1960's by this study. The first case is the illicit wealth accumulation investigation after the 4.19 student revolution in 1960. At the end of 1950’s, Samsung was the top chaebol and Byung-Chul Lee had influence in the Korean business community. Samsung made a rapid growth in 1950’s with good relationship to Syng-man Rhee administration. After the military coup led by General Chung-Hee Park through Korea in May 1961, the military junta attempted to purge chaebol entrepreneurs with the Special Law for the Disposal of Illicit Wealth Accumulation. Byung-Chul Lee was a major target of the purge. In accordance with the special law, most of main entrepreneurs were detained, and expected to forfeit their assets. After coming back to Korea from Japan, Lee was detained and he met General Park the next day. At the meeting, Lee persuaded General Park that the arrested business executives were the best entrepreneurs and that tax evasion was unavoidable for business survival because the tax laws were made under the emergency situation of war. After the meeting, Lee, the head of the illicit profiteer, emerged as a leader representing Korea entrepreneurs again. He served as the first president of a business association that later became the Federation of Korean Industry (FKI). Being called as the head of the illicit profiteer was humiliation for him, and he needed legal measures in which he could express his and businessman’s opinion. So Lee decided to involve in journalism and broadcasting businesses, such as Joongang Daily News (founded in 1965) and Tongyang Broadcasting (founded in 1964). The second case was “saccharin smuggling” scandal in September 1966. Byung-Chul Lee had attempted to build a fertilizer plant in the late 1950s. Being an agricultural country, Korea was short of fertilizer supply. But, after the 4.19 student revolution in 1960, he failed to realize his plan to build a fertilizer plant. President Park urged Byung-Chul Lee to restart the plan again. Finally, Lee founded the Hanguk Fertilizer Company with a financial loan from Mitsui for US$41.9 million in August 1964. It was the largest industrial project of the period in size. In September 1966, when the construction of the plant was ending, the company was involved in the so-called “saccharin smuggling” scandal. Lee’s second son, Chang-Hee Lee was profiting illegally by smuggling saccharin and other valuable import items. Samsung and Lee’s business ethics were soon the target of public criticism at the National Assembly. Lee was forced to donate 51 percent of the company’s shares to the government and announced his retirement from the business world to the public. Lee and Samsung had a serious setback in business and reputation in the late 1960s because of the incident of the Hanguk Fertilizer Company. One year later, however, Lee decided to embark on the reconstruction of Samsung group, and he was reinstated in his previous position. As a reconstruction plan, Lee decided to entry new business area, the electronics industry. Samsung planed to build an electronics factory with Sanyo and NEC.

목차

Ⅰ.はじめに
Ⅱ.企業家活動の事例①― 不正蓄財処理
Ⅲ.企業家活動の事例②― 韓肥事件
Ⅳ.企業家活動に対する視角
Ⅴ.むすび
参考文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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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町 功(Isao Yanagimachi). (2008).韓国の代表的創業企業家·李秉喆の企業家活動: 挫折からの再起を巡って. 유라시아연구, 5 (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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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町 功(Isao Yanagimachi). "韓国の代表的創業企業家·李秉喆の企業家活動: 挫折からの再起を巡って." 유라시아연구, 5.2(200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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