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문명
- Ryu Seong-ryong
- 발행기관
- 서애학회
- 저자명
- 이종각(Jong Gak Lee)
- 간행물 정보
- 『서애연구』제3권, 309~370쪽, 전체 62쪽
- 주제분류
- 사회과학 > 사회학
- 파일형태
- 발행일자
- 2021.05.30
국문 초록
임진왜란(1592-98) 중 전시 재상으로 정무와 군무를 총괄했던 류성룡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서는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가? 류성룡은 일본인을 교활, 신뢰할 수 없다고 인식하면서도, 일본과는 사대교린이란 조선의 외교방침에 따라 임진왜란 이전에는 일본과의 화친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임진왜란 직전 일본 정세 파악을 겸한 조선통신사 파견이 필요하다고 판단, 이를성사시킨다. 전쟁 발발 후 류성룡은 일본군의 진법, 용병, 축성 등의 장단점을파악해 진관제 부활, 부교 개설, 훈련도감 설치 등을 건의, 실시하는 한편 명나라 측에는 강화가 아닌, 일본과의 결전을 촉구한다.
명과 일본은 전쟁 중 조선을 철저히 배제시킨 채 강화교섭을 진행했으나 결렬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재침을 명령해 정유재란(1597)이발발했다. 히데요시가 병사함에 따라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598년 후반 류성룡은 정적들이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 이른바 ‘주화오국(主和誤國)’의 죄명으로 탄핵 당함으로써 영의정에서 파직되어 낙향한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원인은 여러 가지지만, 조선 측에서 보자면, 성종-선조대 조선 위정자들의 일본에의 통신사 파견 무시 등 일본과의 화친의 중요성 간과, 조총으로 무장한 당시 세계최강의 군대를 보유한 일본의 내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조선 정부의 대외 정세 무지, 건국 후 2백 년간 계속된 태평무드속의 국방태세 소홀 등이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류성룡은 전쟁 전 일본과의 대화를 강조하는 한편, 조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전쟁 중에는 일본군의 진법, 수성, 무기 체계 등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음은 특기할 만하다고 하겠다. 이 같은 류성룡의 일본 인식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에도시대 조ㆍ일 양국은 조선통신사 왕래(1607-1811, 총 12차례)가 상징하듯이 평화ㆍ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일본에 정한론이 일어나는 가운데 자율적인 근대화에 실패한 조선은 아시아 국가 중 서구식 근대화(메이지유신)를 가장 먼저 추진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죽창”, “의병” 운운이 아니라 강력한 국력을바탕으로 일본과의 친선ㆍ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긴요하다.
영문 초록
목차
Ⅰ. 서론
Ⅱ. 류성룡의 일본 및 일본인관
Ⅲ. 일본 조총에 대한 대응
Ⅳ. 류성룡의 일본군 전략ㆍ전술에 대한 인식
Ⅴ. 명-왜 강화 교섭에 대한 류성룡의 입장
Ⅵ.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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