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명세서
2025년 11월 11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10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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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 정보 ePUB (8.89MB)
- ISBN 9791169094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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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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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정체성이 되어버린 빈곤
물질과 실존의 빈곤 속에서 불안해하는 가난의 ‘유령’이
제 주머니를 털어 보여주는 어떤 결핍의 세부 내역
“나는 줄곧 가난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며 끊임없이 가난과 거리를 두었다. 가난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혐오의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것을 내 삶과 관련 없는 단어로 만들고 싶었다. 아무리 가족의 일일지언정 타인의 선택과 그로 인한 결과를 내가 책임지지는 않겠노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 가난은 내가 결정한 일이 아니니 내게 책임 지우지 말라고 정색했고, 엄마가 ‘빤쓰’가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든 아니든, 그건 엄마의 형편이니 내 알 바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 어떻게 해서든 나한테서 가난의 냄새가 나지 않게, 나에게 가난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못하게 옷매무새며 말투, 가치관까지 관리해왔다. 가난을 이야깃거리가 필요할 때만 잠깐 꺼내 쓰는 ‘어려서 한때 고생한 사연’ 정도로 묻어두고 싶었다. 가난은 뗐다 붙였다 하는 스티커가 아니라 문신처럼 세포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성질의 무언가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아니 모르고 싶었다.” ― 에필로그
Part 1 10월 카드명세서
작업용 노트북 61,900원
엄마 병원비 73,319원
전화 영어 17,600원
오키나와 왕복 항공권 34,100원
향수 29,400원
책장 10,600원
필름 공구 10,100원
가다실 2차 접종 63,400원
여름 원피스 19,600원
바디로션 10,630원
도시락 11,000원
Part 2 일시불 항목: 티끌 모아 태산
정신건강의학과의원 44,400원
보은이 선물 8,000원
대중교통 117,700원
시사 주간지 4,000원
생활 잡화 10,000원
식대 312,060원
에필로그
불안할 때마다 각종 금융 앱으로 신용대출 예상 이율을 조회하며 빚쟁이로서의 삶에 대해 심리적 준비를 해오던 나는, 대학원 마지막 학기가 시작될 때쯤 결국 시중은행에 소액 신용대출을 신청하게 되었다. 한도 500만 원 중 400만 원을 빌렸다. 최대 한도까지 빌리지 않은 이유는 자존감, 존엄, 그 비슷한 것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 친척 들이 돈 문제로 언성을 높이고 험한 소리를 주고받으며 헐뜯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질리도록 보아온 나에게 ‘빚’은 파멸의 동의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해를 입히고, 관계를 갈라놓고, 종국에는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불행의 씨앗. 무능에 따르는 응보이자 천벌. 평범한 삶의 종말. _프롤로그
훗날 엄마는 그날의 전화를 두고두고 후회한다고 말했다. 내가 미국에 온 지 1년째 되던 해 여름, 처음으로 막내 이모할머니 집에 방문한 엄마는 할머니 눈치를 살피느라 잔뜩 움츠러든 내 모습, 집안일을 하느라 습진에 걸려 마디마다 진물이 흐르던 내 손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딸을 한국으로 도로 데려올 처지도 못 되었던 엄마는,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내내 가슴을 쳐야 했다. _전화 영어 17,600원
그날부턴 옷을 입기 전에 무조건 냄새부터 확인한다. 옷장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싶으면 새빨개진 얼굴로, 빈집에 숨어든 강도처럼 서랍이란 서랍은 죄다 탈탈 털어 빨래를 돌린다. 가난이 싫은 이유로 치자면 가난 때문에 욕구를 유예하는 일쯤 대단히 중한 것도 아니다. 욕구를 절제하는 일은 한때 청렴하고 검소하다고 칭송받던 태도니까. 하지만 가난으로 인해 내 존엄에, 자존감에, 사람들과의 친밀감에 한계가 지어지는 것, 그것이 숨통을 조여와도 타격이 없는 척, 원래 좁고 초라한 자아를 타고난 척해야 하는 것―이것이야말로 절망스럽고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내 입으로 들어와 내 몸 밖으로 나가는 것, 몸 위에 걸치는 것까지, 가난은 나를 관통한다. 나는 가난에 절여진 청어 같은 건가. _향수 29,400원
그게 약 몇 알이면 개선될 수 있는 문제였다니. 막상 정신과에 다녀보니, 치료비는 합리적이었다. 10년 가까이 망설인 게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올걸. 얼마나 나올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미리 돈 걱정에 덜덜 떨다 상태를 악화시켰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화가 나고 슬프고 서러웠다. 마음이든 몸이든, 병을 키우다 보면 결국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도 못 막는 날이 오기 마련인 줄 누가 모를까.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그 일이 가난한 이에게는 여유가 생겨야만 누릴 수 있는 호사로 여겨진다. 가난은 현실을 공포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가난이 만들어낸 겁에 질리면 병을 정당화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_정신건강의학과의원 44,400원
“나연 씨,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써요?” 그 한마디에서 이 모든 얘기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난의 명세서』는 무슨 돈을 어떻게 얼마나 썼는가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써놓고 보니 이 이야기는 ‘소비의 목록’이 아닌 ‘가난의 명세서’가 되어 있었다. ‘나연’은 노트북 구입비, 엄마 병원비, 전화 영어, 교통비, 여행비, 정신과 진료비 등 지난 10여 년의 지출 내역을 탈탈 털어 어떤 빈곤의 서사를 풀어놓는다. 그것은 사람을 삶의 극단으로 내모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빈곤이 아니다. 그보다 끊임없이 생활을 제약하고 자아를 위축되게 만드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빈곤 상태’가 이 책에 적힌 가난이다. 말하자면 어쩐지 ‘진짜 가난’임을 증명해야 할 것 같은 가난. 무언가 소명해야 할 것 같은 빈곤.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니는 불완전하고 어중간하고 임시적인 느낌. 그래서 떳떳해지지 못하고 자꾸만 죄스러워지는 마음. 그러나 이 자질구레한 가난의 명세서를 읽어나가다 보면, 그 감정들이야말로 저자의 빈곤 체험을 관통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묻게 된다. ‘가난은 우리를 어떤 인간으로 만드는가?’
가난하게, ‘나’로 살기
―당사자성과 정체성
가난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빈곤이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질 때 그것은 눈에 띄는 결핍으로 시각화되고, 구조적 문제로 도식화된다. 반면 그것이 누군가의 사적 서사가 되었을 때 드러나는 구체적인 하루하루의 내용, 그 내용이 동세대, 전후세대와 얽히며 종횡으로 만들어낸 삶의 패턴은 그 빈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띤다. 누군가에게는 생계의 위협, 누군가에게는 생활의 제약, 누군가에게는 부서진 관계, 누군가에게는 희망 없음인 그것을, 이 책의 저자는 “유령이 되는 일”이었다고 적는다. 풀어 쓰자면 그에게 가난은 자아가 왜곡되고 위축되고 축소되다 못해 소멸되는 일. 저자에게 빈곤은 무엇보다 ‘나 자신으로 살기’와 관련이 있는 문제였다.
여느 당사자 서사가 그러하듯 이 책도 청년 빈곤의 일상적 풍경을 소상하게 담아낸다. 특유의 발랄하고 수다스러운 문체로. 눈앞에 있는 과자의 최저가를 찾겠다고 네이버와 쿠팡을 들락거리는 소비자, 6만 원짜리 운동화도 일시불로 못 사는 빈털터리, 중고 노트북으로 자소서 쓰고 부업도 하는 취준생, 떠나기 전 ‘기초생활수급자 해외여행금지’ 국민청원을 찾아보는 여행객, 회사생활을 병행하며 이삭토스트로 대학원 4학기를 버틴 고학생, 뇌출혈로 쓰러진 엄마의 치료비와 간병비를 책임지는 보호자, 병원비가 무서워 정신과 진료를 10년이나 미룬 환자…… 그런 ‘빈자’로 사는 동안 ‘나’는 삶의 여러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결핍을 감각한다. 언제나 계산하며 살아야 하고, 시간 감각은 ‘지금’에 고정되며, 끊임없이 기대하지 않기를 학습해야 하는 생활. 저자는 이런 생활 속에서 내면에 쌓여온 묵은 감정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화내고, 슬퍼하고, 서러워한다. 자기연민에 빠졌다가 다시 그 연민을 혐오하고, 가난을 멋대로 대상화했다가 또 정체성 삼기도 한다. 이 혼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난의 당사자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에게는 되고 싶은 ‘나’가 있다. 스스로에게 ‘깨끗한 사람’이고 싶고, 앞뒤가 다르지 않은 사람이고 싶다. “오랜 시간 갈고 닦아온 고운 안목”(129)이 있는 사람이고 싶고, 그런 안목으로 탁월하고 지속가능하며 윤리적인 소비를 하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계산 없이 베풀고 싶고,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같이 행복해하는 사람이고 싶다. “내 선택에 대해서만 책임지면 되는” 사람(115), “교양 있고 친절하며 마음에 여유가 가득한 사회 공동체원.”(186)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100)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가난은 끊임없이 ‘되고 싶은 나 되기’에 제동을 건다.
가난이 싫은 이유로 치자면 가난 때문에 욕구를 유예하는 일쯤 대단히 중한 것도 아니다. 욕구를 절제하는 일은 한때 청렴하고 검소하다고 칭송받던 태도니까. 하지만 가난으로 인해 내 존엄에, 자존감에, 사람들과의 친밀감에 한계가 지어지는 것, 그것이 숨통을 조여와도 타격이 없는 척, 원래 좁고 초라한 자아를 타고난 척해야 하는 것―이것이야말로 절망스럽고 견딜 수 없는 것이다. _94쪽
나는 다시 한번, 말라붙은 얄팍한 지갑 때문에 내 가치관에 위배되는 행동만 골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난 속에 있는 한, 나는 비윤리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며, 환경 파괴를 가속화하는 소비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나의 마음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옷도, 아름다운 몸도, 아름다운 태도도 가질 수 없는, 그래서 타인이 욕망할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하는 스스로를 끝없이 혐오하게 만들었다. 윤리도, 도덕도, 아름다움도, 정치적 올바름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본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자질처럼 느껴졌다. _131쪽
자기실현이 거듭 좌절될수록 ‘나’는 세상이 가르쳐준 가난의 문법을 내면 깊숙이 학습한다. 시선에 예민해지고, 스스로를 작게 느끼며, 타인을 믿지 못하는 동시에 자기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날들. 선택은 늘 불안하고 두려운 것, 하고 나서도 찜찜한 것. 그렇게 그의 존재는 늘 시험대 위에 있게 되고, 언제나 존재를 시험당하는 자아는 경직될 수밖에 없다. “내가 욕망하는 이상적인 선택에 부합하지 못할 바에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아야 괴로움과 절망의 길로 흘러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127) “타인은 설령 부모나 친인척이라 할지라도 믿어서는 안 되며, 내가 직접 알아보지 않은 일은 덜컥 시작해선 안 된다는 것,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며,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직접 성취해야 한다는 사실.”(64-65) 가난이 정체성이 되면, 빈곤은 더 이상 물질적 차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래선지 저자가 구체적인 숫자로, 돈 얘기라며 펼쳐놓는 빈곤의 경험은 오히려 실존적 빈곤에 관한 이야기일 때가 많다.
동화 「아기 돼지 삼형제」를 인용하며 그는 말한다. “첫째와 둘째는 과연 벽돌이 가장 단단하고 튼튼한 자재라는 사실을 몰라서 짚과 나무로 집을 지었을까? (…) 나는 벽돌집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해서든 벽돌을 손에 쥐고야 마는 돼지였다. 그것이 형제들의 고통에 눈을 감고 엄마 돼지의 호소에 귀를 막는 일일지라도.”(37) 그렇게 어엿한 직장을 얻고 남들 버는 만큼 벌며 독립해 집을 얻고 그 집에 꿈꾸던 가구를 들인 뒤에도 ‘나’의 질문은 계속된다. “다른 사회로의 환승을 추구하는 나의 속물 근성과 나는 앞으로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116) 이렇게 물으면서도 잘사는 집에서 태어나 해외 생활을 오래 한 동료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한국의 얼’ 자체라고 낮추며 위화감을 고백하는 장면은, 저자의 취약성이 ‘돈’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문제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아니 에르노는 이것을 “사회적 상승 이동으로 찢긴 마음의 상처와 수치심”(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273)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떠나온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 계급이라는 정체성의 복잡함을 진지하게 들여다볼 새도 없이, 배경도 위치도 가치관도 제각각인 타인들과 어떻게 연결될지를 고민할 틈도 없이 이 가난은 또다시 시험대에 오른다. 저자는 자기 결핍을 정당화하고 해명해야 한다고 느끼듯, 자기의 일부가 되어버린 가난도 끊임없이 심문하고 증명하려 한다.
이렇게 배부르고 등 따습게 살면서, 가난이라는 단어를 자꾸 입에 올려도 되는 걸까? 내가 나를 가난했다고 혹은 가난하다고 표현하는 일이 기만이거나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아닐까? 가난은 특정 조건에 부합하는 이의 입에서 나올 때에만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단어일까? _220-221쪽
이것은 답변 가능한 질문일까? 가능하다면 그건 누구를, 무엇을 위한 답변일까? 가난이 ‘자격시험’이 아니라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무엇일까.
내 배경은 내가 아니다
―가족이라는 ‘고투의 원천’과 선 긋기
책은 일견 전형적인 루트로 보이는 K의 이야기로 문을 연다. “모두가 힘들었던 1997년 (…) 4인 가족이었던 K의 집은 외환위기가 터지며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9)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경제적 갈등은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부모는 갈라서고, 싱글맘이 된 K의 어머니는 “냉엄한 생계의 전장에 전사처럼 뛰어들었다”.(57) K는 주경야독 정신으로 대학생활과 직장생활을 이어가며 대학원 진학의 꿈을 꾼다. 그러나 K가 30대에 접어들 무렵, 어머니는 당신이 치열히 싸우던 전장에서 뇌출혈로 쓰러지고 만다. 학비로 쓰려고 모아놓은 돈은 전부 병원비로 들어가고, 재정적 파산 상태가 된 K는 신용대출을 신청한다……. 어머니 대, 할머니 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어디서 들어본 듯한 비슷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마을 유지였던 집안, 고생이란 모르고 금지옥엽 자랐으나 가부장의 여성 편력으로 기울어진 가세,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홀로 키운 자식들. 2남 1녀의 막내, 무심한 모친과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오빠들,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결혼, 먹고 살려고 뛰어든 보험업, 경기 침체, 갈등과 반목, 삶의 소용돌이, 무너진 몸과 마음.
어쩌면 ‘가난’의 이름을 단 이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얽히고설킨 관계의 서사인지도 모른다. “직접 도시락을 싸준 적도, 휴대용 생리대 한 번 사준 적도 없는 매정한 노친네”와 그의 딸. “너 한국에 오면 그길로 너도 죽고 나도 죽어야 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엄마와 그의 딸. 어디서 무엇이 결핍되고 누락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이 연대기는 가난의 외피를 쓴 채 돈 얘기로 시작해 돈 얘기로 끝이 난다. “그래서 언제 갚을 수 있다는 건데?” “사람들 다 듣는데 쪽팔리게 만들 작정이냐?” ‘애초에 가난하지를 말든가 아프질 말든가, 둘 중에 하나만 했어야지.’ 오랜 간병과 끝 모르는 노동, 지속되는 재정 불안과 끝없는 감정 소모, 모진 말들에 지친 K는 말한다. “내 1인칭 관점에서 우리 가족사를 관통하는 주제는 이랬다. 이 가족은 물질적, 감정적 채무로 맺어져 채무의 의해 유지되는 관계.”(54)
K가 찾은 탈출구는 그의 어머니, 할머니가 택했던 삶의 경로와 마찬가지로 동세대적이다. 제니퍼 M. 실바는 『커밍 업 쇼트』(문현아·박준규 옮김, 리시올, 2020)에서 오늘날 청년 세대의 성인기 인식에 대해 설명한다. “밀레니얼 세대는 동일 연령대의 이전 두 세대에 비해 학자금 대출 부담도 더 많이 지고 빈곤율과 실업률도 높은 반면 부와 개인 소득 수준은 낮은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불안정한 분위기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 놀랍게도 많은 청년이 자신의 가족들과 선을 긋고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며 가혹한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가족을 자기 문제와 고투의 원천으로 이해하고 있었다.”(제니퍼 M. 실바, 『커밍 업 쇼트』, 문현아·박준규 옮김, 리시올, 2020, 10-11)
아마 내가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것, 그래서 어떻게든 감추고 싶었던 것은 당장 바이닐도, 오디오도 살 수 없는 통장 잔고가 아니라 내 능력과 노력만으로는 무너져 내리는 속도를 도저히 늦출 수 없는 우리 가족, 허름하기 짝이 없는 내 배경이었나 봐. 힘껏 등 뒤로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존재를 부정할수록 긍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아. 나는 나를 우리 가족에게서 충분히 분리해서 사고한다고 믿었는데 전혀 아니었나 봐. 이렇게 글로 적고 보니 누구보다도 가족에게 매여 있는 사람이잖아. _116쪽
나는 줄곧 가난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며 끊임없이 가난과 거리를 두었다. 가난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혐오의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것을 내 삶과 관련 없는 단어로 만들고 싶었다. 아무리 가족의 일일지언정 타인의 선택과 그로 인한 결과를 내가 책임지지는 않겠노라고 억지를 부렸다. 어떤 엄마에게서 태어나 어떤 동생의 언니가 될 것인지 내가 결정한 일이 아니니 내게 책임 지우지 말라고 정색했고, 엄마가 ‘빤쓰’가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든 아니든, 그건 엄마의 형편이니 내 알 바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_222쪽
하지만 선을 그은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노후를 담보로 돈과 시간을 끌어와 아픈 엄마를 부양하는 데 써야 하는 큰딸이 아니라 내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모든 꿈을 펼쳐볼 수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 그는 어떤 모습일까? K는 선을 그었다고 말하면서도 그 언저리를 떠나지 못한다. “하나밖에 없는 보호자” “나의 한 명뿐이던 보호자”, 그렇게 부르던 이가 쓰러져 장애를 갖고 살아가게 되었을 때 K가 내린 결정은 그리 된 보호자를 떠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고아’가 되는 게 아니었다. “엄마를 대신해 내가 방어막이 되어야” 한다면서 보호자의 곁에 선 그는 장애인 이동권을 의식하며 달리는 차들을 향해 경계의 눈을 번득인다. 독립하겠다는 선언에 어디로 가는지 묻는 대신 생활비를 따져 묻는 가족에게 그가 내민 것도 절교장이 아닌 주거비였다. 일상이 비로소 일상 같아졌을 때조차 그는 생각한다. “이걸 나 혼자만 알아도 되는 건가. 이런 편리한 세상을 우리 가족은 모르고, 나만 누리고 살아도 되는 걸까.”
누군가 그에게 이렇게 해줄 수 있었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가장 취약한 순간에 방어막이 되어주고 지원자가 되어주는 사람, 조금은 부자유롭고 의존적인 상태에 있을 때 연민을 가져주고 또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저자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독자에게 건네는 “너무 홀로 외로워 말라”는 위로의 말은 ‘너무 홀로 외로웠다’는 자기고백처럼도 들린다. 이 책을 통해 “민낯으로 여러분을 만나고 싶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도 싶다”는 그에게 이제 어떤 연결이 가능할까? 그 연결은 세계를 돌고 돌아 다시 가장 가까운 이들을, 자기 자신을 향할 수도 있을까?
인물정보
주중에는 기계 언어를 풀이하고, 가끔 인간의 언어를 번역하며, 드물지만 자기 언어로 글을 쓰기도 한다. 취미는 여전히 단어 모으기. 에세이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를 썼고 『나의 친애하는 불면증』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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