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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 소멸 사회

이관후 지음
한겨레출판사 출판사SHOP 바로가기

2024년 12월 20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12월 1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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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7213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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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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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소멸 위기에 처했다는 경고는 이제 낯설지 않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저출생과 자살률, 인구 절벽과 초고령화 사회 진입,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 등에 더해 기후 재난, 전쟁 위협, 에너지·산업 전환 등 지정학적 문제들이 중첩된 복합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소멸의 ‘속도’다. 과거 우리는 최빈국이자 약소국으로 분단과 전쟁까지 겪었지만 이내 초고속으로 문명적 근대화, 경제적 산업화, 정치적 민주화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성공의 원동력이었던 발전주의, 성장 이데올로기, 능력주의, 개인주의, 개발주의가 이제는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공동체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압축 성장’의 결과로 ‘압축 소멸’을 맞게 된 것이다.
나라 자체가 소멸할 위기 앞에서 우리는 꽤 둔감하다. 사회학자 엄기호 교수의 지적처럼 ‘소멸에 대한 감각이 소멸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대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외면한 채 담담히 최후를 기다려야 할까? 격변으로 인해 사회가 어려울 때, 제도를 만들고 고치고 운영하는 기술인 ‘정치’가 파멸을 막는 장치로서 작동해야 한다. 정치학자로서 국회와 정부에서 이론 현장과 실무 현장을 풍부하게 경험한 이관후 교수는 ‘사회의 소멸에는 정치의 소멸이 선행한다. 우리 사회가 소멸을 막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치가 먼저 소멸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16쪽)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는 국가 소멸을 극복할 고민과 대안은커녕 당장의 사회적 갈등이나 재난조차 해결할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우리는 국가 부재 상태에서 무관심과 무능으로 일관하는 정치를 보고 있다. 과연 정치 소멸과 국가 소멸이라는 양대 위기를 어떻게 막아 내야 할까? 저자는 ‘벼락 발전한 것은 벼락 소멸하기 마련’이라는 자조를 단호하게 배척하고, 지금 우리가 처한 국내외 상황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분석해 이 책에 담았다. 절망을 부추기는 대신 희망을 찾는 저자의 문제의식과 해법 모색은 소멸을 앞둔 시한부 대한민국에 매우 귀중한 인사이트를 선사할 것이다.
들어가는 말

1부 대한민국은 왜 소멸을 선택했나
희망 소멸 사회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압축 성장 대한민국, 압축 소멸을 결심하다
지금 여기 사는 청년이 행복해야 하는 이유
지극히 한국적인 자살률과 출생률
정치가 소멸하면 나라도 소멸한다

2부 절망을 부추기는 사회, 위기를 방치하는 정치
안전도, 희망도 없는 아수라의 세계
5000만 전 국민이 서울에서 산다면
저출생 문제 막을 생각 없는 저출생 정책
전쟁 위기는 교통사고처럼 온다

3부 정치의 소멸은 어떻게 오는가
게임과 스포츠만도 못한 정치
정치를 거부한 대통령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
대한민국 계파 정치는 왜 변질되었나
정치와 행정이 사라진 검찰 공화국
'자유 민주주의' 정부에서 후퇴한 민주주의
무엇을 위한 법치,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정의당은 왜 원외로 내몰렸나

4부 다시 희망을 찾아서
기후 재난은 선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정치 복원, 압축 소멸을 막는 유일한 방법
한강을 기념하는 법

나가는 글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이제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진부해졌다고 할까요? 그래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을 둘러싼 어떤 변수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중 하나는 '속도'입니다.
저는 사회과학자로서 언제나 이 속도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회에서는 항상 변화들이 일어납니다. 전쟁, 자연재해, 산업·경제·인구·기술의 변화, 정치적 사건들, 이런 일들은 인류가 처음 사회를 구성했을 때부터 늘 있었던 일입니다. 사실 사회란 이런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회가 버티지 못하고 파괴될 때가 있습니다. 감당하지 못하는 '격변'의 시기가 도달했을 때입니다. _10~11쪽

늘 불쌍한 것은 국민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이 시대에는 청년과 여성, 지방에 사는 국민들이 상대적으로 더 어렵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청년들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극심한 경쟁을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겪어 내는 중입니다. 그 경쟁에서 대부분은 불행해집니다. EBS의 한 프로그램에서 물었을 때, 경쟁에서 이긴 청년들조차 행복하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 경쟁이 공정하지 않고 절대 공정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나는 지옥에 살지만 내 아이까지 지옥에 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_38~39쪽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한국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더 이상 공동체를 지속시키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과연 인류 역사에 이런 나라가 있었을까요? 세계의 최빈국이자 약소국으로 분단과 전쟁까지 겪은 나라가, 실로 엄청난 속도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정치·경제·문화를 성취한 다음, 바로 그 정점에 도달한 때에 소멸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만약 한국이 다음 한 세대 안에 인구 회복의 탄력성을 완전히 잃고 소멸해 버린다면 이는 단순히 한 나라의 소멸이 아니라 인류 문명사에서 볼 때도 참으로 기이한 일이 될 것입니다. 미래의 인류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성장과 소멸을 통해 '인간과 사회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_43쪽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보면 색깔이 좌우로 나뉩니다. 나라가 그렇게 양분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산의 분배나 균형 발전의 측면에서, 특히 경제ㆍ의료ㆍ교육 등의 격차에서 보면 좌우가 아닙니다. 수도권과 지방으로 나뉩니다. 수도권 의원들은 예타를 통해 자기 지역구에 예산을 가져오고 또 합심해서 수도권에 전철망을 열심히 깔고 있습니다. 전철 지하화 이야기도 나옵니다. 호남과 영남의 광역 시ㆍ도에서는 버스가 없어지는 마당인데 말입니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두 개의 나라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_105쪽

소멸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사회가 지속가능성이 없어지면 인구 구조의 변화에 따라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처럼 소아과는 사라지고 노인 요양 병원 같은 고령자 의료 서비스가 엄청나게 늘어날 것입니다. 지방 소멸이 가속화되면서 지방에서는 학교와 병원 같은 기본적인 삶의 인프라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고령자에게 혜택이 주어지는 여러 복지 제도도 탄력적으로 운용하거나 중단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령화와 더불어 OECD 최상위권인 노인 빈곤율이 더 증가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빠르게 인구가 소멸되면 건강 보험과 국민 연금 같은, 미래 세대와의 장기적인 사회 계약을 통해 유지되던 많은 사회 제도와 재정 정책은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_135쪽

그래서 입법부를 선출하는 총선 시기에, 각 정당의 대표와 정책 책임자들은 선거의 핵심 의제와 주요 공약, 선거의 의미와 구도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이렇게 저렇게 투표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또 유권자들은 그에 대해 욕을 하든 편을 들든 이런저런 품평하기에 바빠야 맞습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마주 앉아서 우리 지역에서는 누가 나온다더라, 저 당의 간판은 누구라더라 하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은 실로 정치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선거는 대표자를 선출하는 최종적 목적과 더불어 그 이벤트를 통해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서로 토론하도록 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전자만큼이나 후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22대 총선을 앞두고는 그런 정치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_139쪽

친소 관계가 아니라 정책에 대한 이견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필요한 경쟁입니다. 상대 정당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정당에서 하나의 목소리만 나올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특히 양당제가 고착화되고 있는 우리 정치에서는 다양성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계파가 정치적 가치와 비전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토론과 논쟁, 신념과 고락을 함께한다면 그런 계파는 우리 정치의 희망입니다. 가치가 다른 세력들 간의 경쟁은 피할 수 없고, 그러한 논쟁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정말로 바람직합니다. 그런 세력이라면 나중에 집권하더라도 계파주의에 너무 물들지 않도록 자기 경계를 할 수도 있고,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기득권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_163~164쪽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윤석열 정부는 이태원 참사, 잼버리 사태, 엑스포 유치 실패 등에서 보듯이 국가가 해야 할 기본적인 일들을 실패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단지 운이 없는 일이거나, 전 정부가 잘못 세팅해 놓은 일이거나, 공무원들이 일을 제대로 안 해서 생긴 문제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이 통치되었던 박근혜 시기와는 분명히 다른 형태의 국가 관리 방법입니다. 이것은 나름대로 철학을 갖춘 하나의 일관성 있는 국정 기조이자 통치 신념입니다. _193쪽

정치적으로 유능한 야당이라면 '날씨가 덥다고 대통령을 탓하면 되겠나?'는 소리가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이슈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탓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기후 위기가 심한데도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하나의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정책적 사안을 정치적 레토릭으로 만들어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사실 정치인들이란 원래 그런 것을 잘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요?
키케로가 말한 것처럼 공화정이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의 행위가 공적 이익에 부합하게 되는 체계'입니다. 폭염으로 사람이 죽어 가는 세상입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인들이라면 한편으로는 노동의 권리와 인권을, 다른 한편으로는 기후 위기 대응을 말해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요. _223쪽

'더 나은 나라, 더 좋은 사회'는 누가 대신 만들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시민 스스로 소멸하는 대한민국을 멈추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정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정치 혐오로는 아무것도 이뤄 낼 수 없습니다. 지금은 정치가 만연해서가 아니라 정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정치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정치가 아니라 권력 투쟁에만 몰두하는 정치인과 정당들에게는 박수든 비난이든 보낼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 그 자체입니다.
극단적 권력 투쟁이 아닌 문제 해결을 위해 합리적 진보와 건전한 보수가 경쟁ㆍ협력하는 정치, 포퓰리즘과 팬덤을 넘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정치, 갈등을 드러내고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정치, 미래에 대한 비전을 놓고 숙고하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그것만이 소멸을 막는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_236~267쪽

절망을 부추기는 사회, 위기를 방치하는 정치

외환 위기 이후 심화된 양극화는 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시대를 낳았다. 상대를 이기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극단적인 경쟁 속에서 각자의 삶을 갈아 넣는다. 경쟁에서 이긴 소수도, 탈락한 다수도 행복하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도 없다. 바야흐로 희망 소멸 사회다.(231쪽) 결혼, 출산이 줄고 자살이 늘어나는 이유는 청년 세대가 희망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청년들은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서울로 향한다. 그리고 지방은 차츰 말라 간다. 청년들이 계속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과연 어떤 지속가능한 대안이 있을까? ‘떠나는 청년을 붙잡자’가 아니라 ‘지금 여기 사는 청년을 행복하게 하자’로 정책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51쪽)
인구 소멸, 지방 소멸 같은 위기는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적이다. 그러나 세계는 불안정해졌고 한국은 지정학적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더 심각한 위기들이 마치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럽게 덮쳐 올 수도 있다. 가장 명확하게 실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후 위기다. 세계적으로 공인된 ‘기후 악당’인 한국은 매년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 폭우와 폭설 등 기후 재난을 겪고 있다.(217쪽) 이로 인해 생명과 재산의 직접적 피해를 입는 것도 문제지만, 에너지 전환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는 ‘수출 한국’의 경제에 구조적 타격을 가한다. RE100, 탄소 제로 등 수출 제조업 제품에 대한 국제적 규제 기준이 탄소 배출이 될 것이지만 친환경 에너지원이 부족한 한국 기업 상당수는 탄소 중립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실정이다.(35쪽)
또 다른 위기는 바로 전쟁의 위협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나 다자주의 질서가 만들어 온 평화의 시대가 끝나고, 힘에 기반을 둔 패권 경쟁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뒤를 이어 중국-대만과 한반도가 새로운 전장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크다.(116쪽)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북한군 파병, 미국의 트럼프 정부 2기 출범은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국가 경영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과 정부, 국회와 정치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인구 소멸, 세계 질서의 변화,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한 변환에 아무 관심이 없다. 자기들이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상대를 심판하는 프레임에 매달리고 있다. 심판 프레임에 머무는 한 여야는 ‘나라가 망할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할수록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37쪽) 지금은 정치가 만연해서가 아니라 정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정치가 없어서 문제다.(236쪽) 어쩌다 우리 정치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정치의 소멸은 어떻게 찾아오는가

한국의 정치가 팔팔 살아 있을 때도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고 포퓰리즘이 미국과 유럽을 삼키고 있던 2016년에 한국의 촛불은 폭풍우 속 외로운 등대처럼 민주주의를 지켰다. 그러나 8년여가 지난 지금 많은 것이 변했고 한국의 민주주의 신뢰도와 정치 효능감은 빠르게 후퇴했다. 그 원인으로 선거 제도나 권력 구조, 정당 정치의 퇴조, 미디어 환경의 변화, 전 세계적 포퓰리즘의 흥기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정치에서 상대를 경쟁자가 아닌 적으로 보고 배제하거나 말살하려는 경향이 아주 강해졌다.(133쪽)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은 포퓰리즘과 팬덤 정치, 당내 계파 싸움에 몰두한다. 옳고 그름보다는 이기고 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게임과 스포츠에는 룰과 존중이 있지만 지금 한국 정치에는 그런 것이 없다. 반칙을 해서라도 이기는 게 우선이다. 과거 계파 정치에는 정치적 가치와 노선이 있었다. 지금은 권력 획득을 위한 패거리 집단이 되어 버렸다. 이런 정치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명예와 긍지가 아니라 ‘공천’과 ‘자리’라는 실질적 보상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공천 개입이었다는 사실은 당시나 지금이나 무척 의미심장하다.(154쪽)
윤석열 정부의 국정 운영 능력 부재도 심각하다. 이태원 참사, 잼버리 사태, 엑스포 유치 실패, R&D 예산 삭감, 의료 대란 등 행정과 위기 대응 역량은 처참한 수준이다. 특히 이 정부에서는 적극적인 경제, 재정, 산업, 복지 정책을 찾아보기 어렵다.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일부러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게다가 실무 일선에서는 ‘적극 행정’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적극 행정’을 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불안감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지난 2년 동안 일어난 많은 사건 사고들, 국내외적 실책들은 이런 분위기와 관련이 깊다.(169쪽)
검사라는 특이한 사법 엘리트 기술 관료와 포퓰리즘이 결합한 ‘사법 관료 포퓰리즘’은 윤석열 정부가 완성한 검찰 공화국의 대표적인 통치 수단이다. 정치적 상대방과 정치적 공방을 벌이며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의 영역으로 끌고 와서 단죄하는 방식인데, 정치 혐오 정서를 강화시키면서 정치 자체를 사법적 판단의 하위에 놓으려는 반정치적 기획이다. 궁극적으로 정치가 소멸할 수밖에 없다.(174쪽)
하지만 정치 소멸의 원인이 비단 윤석열 정부와 여당의 무능과 무책임에만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국민의 지지는 야당 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울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사실은 한국에서 정치의 실패와 소멸이 단순히 대통령이나 어느 한 정치 세력의 전적인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78쪽) 그렇다면 정치 소멸을 막고 나아가 대한민국 공동체의 소멸을 저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저자는 그 결정적 방법으로 ‘정치 복원’을 제안한다.


한국의 소멸 위기는 인류사적 대사건,
이를 막을 유일한 방법은 정치 복원

오늘날 한국 정치에는 국민을 잘살게 하고 국가적 문제를 해결할 정책 경쟁이 없다. 오로지 상대를 적대화해 정치적 이익만 누리려는 태도만이 확고하다. 지금의 정치는 민주주의적 경쟁이 아니라 권력을 두고 벌어지는 인기투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정치가 바로 서고, 나아가 우리 사회를 지속가능한 공동체로 바꿔 나갈 전환점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근본적 문제들을 치유할 비전과 대안을 찾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에 대한 합의를 이뤄 내야 한다. 한국판 베버리지 보고서(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가 정부 위촉으로 사회 보장에 관한 문제를 연구·조사한 보고서)와 그것을 실천할 공동체의 연대도 필요하다. 특히 정치를 왜 하는지에 대한 철학과 비전을 언제든지 물을 수 있는 정치, 국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전문성과 리더십을 갖춘 정치, 소수의 지지자가 아니라 다수 국민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정치가 절실하다.(229쪽)
정치가 스스로 복원되지 않는다면 헌법적 주권을 가진 시민들이 새로운 정치를 촉구하고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의 숙의와 토론이 가능한 공론장이 필요하다. 다음 세대에게 희망 없는 무한 경쟁 세상을 물려줄지, 지속가능한 행복의 세상을 만들어 나갈지는 시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정치 혐오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소멸 위기는 단순히 한 국가의 소멸, 공동체의 소멸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근대적 민주주의, 무제한적으로 팽창하는 자본주의, 더디기만 한 기후 위기 대응 노력으로 보건대 마치 인류는 파멸을 향한 돌진을 멈추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소멸하는 것은 대한민국 공동체가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그 첨단에 서 있는 것뿐인지도. 저자는 훗날 이런 이야기가 들려오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세계가 아직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때 한국이라는 나라가 먼저 성장과 소멸을 압축적으로 겪었다. 그들은 인류의 과거이자 현재, 미래였다. 그들은 누구보다 빨리 미증유의 소멸 위기에 처했다. 전 세계에서 닥칠 미래의 위험들이 거기서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해답을 찾았다. 세계는 그들의 방식으로 조금 더 인류의 생존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250쪽)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멸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자 의미일 것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이관후

정치학자.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영국의 런던대학교(UCL)에서 '대표(representation)' 개념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글로컬한국정치사상연구소 전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제16,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으며, 2024년 11월에 역대 최연소로 제10대 국회입법조사처 처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겨레》 《경향신문》 《프레시안》 등 각종 매체에 오랫동안 칼럼을 썼고, 지은 책으로 《양극화에 도전하는 시민》, 공저로 《다시 읽는 '서구중심주의 비판'》 《기후, 기회》 《시민의 조건, 민주주의를 읽는 시간》, 옮긴 책으로 《정치를 옹호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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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축 소멸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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