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아
2025년 01월 02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01월 0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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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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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작가상 수상 작가 최정나의 문제작
“현실의 허구성과 가상성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설”(이장욱 소설가)임을 보여주고, “경계를 넘나드는 유체적인 상상력”(신형철 평론가)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은 작가, 최정나. 개성적인 문체와 연극적 형식을 통해 사실과 허구,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끊임없이 탐색해온 그가 이번에는 “폭력의 객체와 주체의 완벽한 전복”(김이설 소설가)을 선보인다. 『로아』는 작가정신 ‘소설, 향’ 시리즈의 열 번째 작품이자 최정나 작가의 첫 중편소설로, 모두가 피해자를 자처하고 가해자는 없는 세계 속 폭력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나’(로아)는 지금,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폭행을 당해 병실에 누워 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뒤로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나는 그동안 회피했던 기억을 마주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는 현재를 바라보기 위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똑똑히 보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 날마다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이 두려운 존재였던 언니, 상은이 되어.
피해자인 화자가 가해자로 분해 서술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아동학대는 양육자의 ‘방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힘주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읽는 자로 하여금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학대의 참상을 그대로 목도하게끔 이끄는데 폭력이 왜,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또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지 집요하게 파고들어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정폭력과 학교폭력, 신체적·물리적 폭력과 언어적·정신적 폭력이 얽히고설킨 광경이 펼쳐진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훈육과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휘두르는 폭력, 묵과하고 방조하기에 더욱 확대되는 폭력, 가장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에게 가해지는 폭력. 『로아』는 현실에서 수없이 접하면서도 매번 충격을 주는 그러한 폭력의 지점들이 견고하게 맞물려 있음을, 믿기 어렵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이러한 사건들이 의식의 사각지대에서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가리켜 보인다.
『로아』의 발문을 쓴 김이설 소설가는 “소설이 가해자를 이해하는 근거가 되거나, 폭력을 합리화하는 동기가 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이 소설이 “폭력의 속성을 닮았으나 가해자의 변명이 아니라 피해자의 증언”임을 짚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로아』를 읽어야 할 당위성과 의미”를 갖추게 된다면서.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아프게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 『로아』. 『로아』의 안에서, 그리고 『로아』의 바깥에서 수많은 ‘로아들’은 그럼에도 누군가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기를, 힘겹지만 부디 주목해주기를 바라고 또 바랄 것이다.
불가능한 재현을 시도하며
로아
발문
폭력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서 _ 김이설(소설가)
긍지를 갖는다는 건 앞으로의 삶이 불편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희망을 품는 것도 마찬가지, 희망은 절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살고자 하는 로아의 얼굴, 그 얼굴에 드리운 공포, 그러다가 다시금 차갑게 얼어붙는 로아의 눈빛을 보는 것은 나를 고통스러운 쾌락으로 마비시켰다. 나는 어떤 열기 속에서 더욱 가혹해져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_22~23쪽
누군가 죽기 위해 성큼성큼 걸어 내려간 이 길에서, 누군가 구급차에 실려 가던 이 길에서, 누군가 다리가 골절되고 누군가 어린아이를 희롱하며, 누군가는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고 누군가는 자신을 지키려고 폭력을 행하는, 비극의 집들이 나란히 이어 붙은 이 길에서 저들은 어떻게 웃는가? 어떻게 까르르 웃나? 어떻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살아가는가?
_51쪽
누군가 말하기를 고통이 삶을 속이는 게 아니라 고통을 없애려는 노력이 삶을 속인다고 하더라고. 고통을 관리하면 나중에 억압된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면서. 그러면 그제야 우리가 서 있는 지반을 보게 되는데 대다수는 그걸 보는 게 두려워 또다시 고통을 관리한다는 거지. 자기는 고통스러우면 그것을 느끼려고 한대. 고통도 삶의 일부분이니까.
_93쪽
세상은 이해되지 않는 것들투성이지만 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아이가 의문을 품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생명을 연장하려면 무지가 미덕이니까요.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가 의문을 표하면 살아남는 게 불가능해질 수도 있거든요.
_110쪽
“오래전 괴물을 죽이고 돌아온 배가 낡아서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수선을 위해 나무판을 모두 바꿨다면 그 배는 전과 같은 배일까, 아닐까 ?”
“같은 배……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아니, 다른 배요. 나무판을 모두 새 걸로 바꿨잖아요.”
“맞아.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만, 같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단다.”
“어려워요.” 로아는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지금은 어렵게 들릴 거야. 그러니까 너이면서도 네가 아닌 로아가 너를 찾아올 거라는 뜻, 테세우스의 배처럼.”
_137~138쪽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은 몰이해의 증거일 뿐이니까. 상은의 세계는 슬픔의 실체는 없고 자기 연민만 가득했다. 타인은 없고 자신만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도 없는 세계,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이용 가치에 따라 선과 악이 바뀌는 세계, 그 안에서 모든 걸 통제하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기에 늘 불안에 시달리는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는 상처도 슬픔도 모두 전형이다.
_144쪽
“로아는 유기되었다. 내가 방치되었듯”
엄마의 ‘유기’와 ‘방치’에서 시작된 학대와 폭력
『로아』는 폭력의 연쇄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묻는 소설이다. 그런데, 언니가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동안 그들의 부모는 무엇을 했는가. 한때 군중의 폭력을 응시하는 사진작가로 주목받았던 아버지는 상은과 다툼을 벌인 뒤에 죽음을 선택한다. 세상에서 자신 외에 소중한 것이라곤 없는 엄마는 태어난 지 몇 달밖에 안 된 로아를 지인의 집에 보내고 상은마저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그렇게 아버지의 돌연한 죽음과 엄마의 방기와 무관심 속에 자라온 상은은, 극도의 불안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괴물’이 되어간다.
7년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온 천진하고 해맑은 로아를 보면서 상은은 “공격하지 않으면 오히려 공격당한다고, 아름다운 것은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표면적으로 폭력의 주체는 언니 상은이고, 객체는 동생 로아이지만 이 모든 상황은 이를 방관하는 양육의 책임자, 즉 엄마에게서 비롯된다. 엄마 기주는 상은의 학대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합리화한다. 상은은 말한다. 로아는 ‘유기’되었고 자신은 ‘방치’되었다고. 기주가 제대로 된 관심과 사랑을 기울였더라면, 아버지가 상은의 말에 집을 나가 죽지 않았더라면 결과가 달랐을까. 어떠한 폭력 행위도 이해받을 수 없다. 그러나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짚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상은의 경우 폭력 행위는 양육자의 방치에서 비롯된다. “딸을 희생양으로 바치고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살아온” 엄마 기주가 폭력의 진짜 가해자이자, 가장 큰 학대자가 되는 것이다.
‘누가 나 좀 말려줘!’
무한히 증식하는 증오와 분노의 연쇄
그리고 로아는 폭력의 희생양이 된다. 상은에게 직접적인 폭행을 당하기 전부터, 이
미 로아는 가족으로부터 버려졌다. 로아가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것도, 기주가 새로 만난 남자 때문에 상은과의 사이에 갈등이 생겨서였다. 태어나자마자 유기된 아이가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란 없었다. 로아는 제가 당한 일에 의문을 표하기보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인다. 미소만이, 들어주는 이가 없기에 함구하는 침묵만이 로아의 생존방식이었다.
날이 갈수록 상은은 로아에 대한 폭력의 수위를 높여간다. 성난 자신을 달래려고 로아를 때린 손에 용돈을 쥐어주는 엄마에게 복수라도 하는 듯이. 로아가 오기 전 어둠 속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던 상은은 제가 겪은 처절한 외로움을 로아를 통해 다 되갚아주리라 다짐한다. 누군가 자신을 돌아봐주는 유일한 순간이 바로 폭력을 행사할 때이고, 스스로의 존재감을 가장 강렬하게 확인하는 순간이 바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힘을 가할 때라는 걸, 상은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상은은 통제와 지배의 권한이 주는 강렬한 쾌감에 전율하며 멈추지 못한다. ‘누가 나 좀 말려줘!’ 비명을 지르면서, 그렇게 자신 또한 폭력의 제물이 되어가고 있음을, 스스로 제 삶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나는 네가 되어본다. 너의 눈으로 나의 세상을 본다”
기억할수록, 내가 네가 될수록
나를 일으키는 뜨겁고 강렬한 폭발음
오랜 시간 학대받은 아이는 반항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고, 죽음에 가까운 어느 순간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겪어온 일들을 떠올린다. 기억을 불러온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던 시간을 뒤로 하고, 고통의 기억을 마주하기로 한다. “고통이 삶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없애려는 노력이 삶을 속”여왔음을 깨닫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마침내 로아는 언니의 말을 거역하지 않는 착한 동생과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다정한 딸이라는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가, 가족이란 이름의 창살조차 없는 끔찍한 감옥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폭력이 내린 뿌리는 길고도 깊었고, 불시에 닥치는 사고와도 같이 예기치 않은 순간 일상을 뒤흔든다. 지금까지의 로아의 삶이 정지된다.
이 소설은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도, 폭력의 속성을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입체적으로 통찰하고 있다. “모두가 다 피해자인데 도대체 누가 가해했다는 말인가?”라고 말하며, 작가는 저마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이 겪은 고통과 슬픔에만 함몰되어 더 큰 폭력에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묻고 있다. 기주가 상은과 로아를 방치하고, 상은이 로아를 폭행하며, 또 학대받은 로아가 또 다른 폭력을 일삼는 지경으로 나아가는 장면 속에서, 어느 순간 우리 자신을 닮은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폭력이 폭력으로 대갚음되는 연쇄를 끊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기를 바란다. 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어쩌면 가해자일지도 모를 우리 모두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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