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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바다

바뢰이 연대기 2
로이 야콥센 지음 | 손화수 옮김

2024년 12월 20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11월 2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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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23.96MB)
ISBN 9791190234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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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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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세상, 노르웨이 북부 해안 어딘가. 본토에서 청어를 손질하며 살아가던 잉그리드는 이제 서른다섯 살이 되었고, 더 이상 그녀에게서 소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어느 날, 그녀는 고향인 바뢰이섬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주인 없는 나룻배에 몸을 실은 채 노를 저어 섬으로 향한 그녀는, 돌아온 고향에 생명의 흔적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할아버지 마틴과 아버지 한스, 어머니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후, 남아 있던 가족들마저도 모두 섬을 떠나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다. 고모 바브로는 병원에 입원해 있고, 그녀의 아들 라스는 로포텐에 정착해 가정을 꾸렸으며, 딸이나 다름없었던 수잔은 열네 살도 되기 전에 섬을 떠났다. 그녀의 오빠 펠릭스도 섬을 잊은 듯하다. 잉그리드는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가 방을 둘러보고 램프에 불을 밝힌 뒤, 부엌과 거실에 불을 지핀다. 이제 이 섬을 다시 생명이 꿈틀거리는 삶의 터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잉그리드 한 사람뿐이다.
1장|7
2장|87
3장|171

잉그리드는 연이은 암초와 나룻배 사이에 노 한 개의 길이만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길게 쭉 뻗은 그로홀멘을 향해 나아갔다. 암초들을 지나자 보이는 것이라고는 무겁고 잔잔한 망망대해뿐이었다.
-14~15p

그녀는 노를 저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산탄총을 발사했다. 총소리에 놀란 물새들은 구름을 향해 버섯처럼 솟아올랐다가 곤두박질을 치며 그녀와 나룻배를 에워쌌고, 그녀는 새소리와 퍼덕이는 날개 속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적어도 바람은 총소리를 바다 쪽으로 실어 갔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불에 태우고,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질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전날 아니, 이미 그제 깨달았던 그 거뭇거뭇한 눈빛 앞에서 스스럼없이 몸을 씻었다. 그녀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 것은 바로 그 눈빛이었고, 그녀는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강인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54~55p

침대에 누운 채 고맙다고 말한 잉그리드는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날이 1월 7일이라고 말했다. 에바 소피에는 발걸음을 멈추고 찌무룩한 미소를 지으며 창문 옆에 걸려 있는 커다란 종이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왼쪽 손가락 끝을 종이 위에 얹고, 잉그리드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날들과 잉그리드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 말해 줄 뿐 아니라, 현재를 이겨내기 위해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삶의 상세한 요소들을 적어 놓은 네모 칸 위에 엑스 표를 그렸다. 그 종이는 마치 빈칸을 다 채워 넣은 낱말 퍼즐처럼 보였다.
-102p

금요일 아침, 잉그리드가 평상복으로 갈아입자 에바 소피에는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잉그리드에게 평상복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작별 인사를 건네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아다와 시그니의 생각은 달랐다.
“왜 울어요?” 잉그리드가 에바 소피에에게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에바 소피에는 동그란 양철통을 잉그리드에게 찔러주었다. 아이들이 그린 듯한 크리스마스트리와 흔들목마 그림이 뚜껑에 그려진 양철통 안에는 빵과 케이크가 들어 있었다. 양철통을 여행 가방에 넣을 수 없었던 잉그리드는 그것을 겨드랑이에 끼고 병원을 나섰다.
-116p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잉그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문이 열리며 마그누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후진을 시작했어요. 아르뇌이를 향해 방향을 틀었죠. 거기엔 꽤 크고 좋은 항구가 있어요.”
그가 마치 머릿수를 세려는 듯 아이들을 향해 흘낏 바라보더니 총총 자취를 감추었다. 안냐가 의아한 표정으로 잉그리드를 쳐다보았다. 잉그리드는 다 잘될 거라고 말하며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달짝지근한 악취가 풍기는 사라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안냐는 미켈을 향해 다 잘될 거라며 안냐가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선박의 느릿느릿한 요동 속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기계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갈 수 없는 잉그리드도 있었다.
-135p

부엌 바닥에 누워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그녀는 거센 바람에 집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문득 검은 뱀을 닮은 무언가에 관자놀이를 맞았던 것 같은 기억이 떠오르자, 귀가 먹먹해지고 얼굴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눈앞에는 하얀빛 조각이 어른거렸고 흐르는 물소리 같은 정적이 그녀를 감쌌다. 깨끗하지 않은 액체. 그것은 오줌이었고,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그 미적지근하고 추악한 냄새와 그녀가 흘린 빨간 피비린내가 그녀의 콧구멍을 채웠다.
-180p

잉그리드는 메마른 눈송이가 흩날리며 만들어 내는 장막을 통해 바닷가에 정박해 있는 작은 나룻배로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도살당한 가축처럼 양쪽에서 하르겔과 헨릭센에게 부축을 받으며 담요를 어깨에 걸친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눈물을 훌쩍이던 그녀는 12월 어느 날 오후 교역소로 옮겨졌다. 그녀를 돌보기 위해 호출된 사람은 제니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증기선에 오른 후로는 낯선 여인의 보살핌을 받았다. 연기 가득한 살롱의 축축한 온기 그리고 의사 에릭 팔크 요한네센과의 첫 대면. 의사는 고개를 삐딱하게 돌린 채 세 겹으로 겹쳐 입은 옷을 벗는 것도, 말하는 것도 거부하는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206p

잉그리드는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조각난 기억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211p

그녀는 눈을 뜬 상태에서 누운 채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낯선 존재가 그녀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수잔이었다. 북동쪽 창틀에 내려앉은 황금빛 햇살로 미루어 보아 저녁 무렵인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른 아침일지도 몰랐고, 그녀가 침대에 거꾸로 누워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231~232p

그녀는 어쩌면 그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녀의 몸속에 있는 새로운 생명과 함께. 뱃속의 발길질을 느낀 그녀는 이제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54p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그녀는 새로 페인트칠을 한 배의 난간 너머로 정고와 해안의 고조점 사이에 하나둘 모여든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그녀와 거룻배를 향했다. 잉그리드는 타지에서 온 청년들이 그토록 많이 바뢰이에 머무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잉그리드는 녹색 안개 속에서 색과 길이는 물론 크기도 서로 다른 그들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청년들 사이에 서 있던 바브로는 입을 쩍 벌린 채 무기력한 인사를 건네듯 한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그날 하늘은 회색빛을 띠었고 바다는 눈 쌓인 산처럼 하얗게 반짝였다.
-286p

아이들은 물론 검고 풍성한 흙으로 뒤덮인 다섯 개의 밭에 심어 놓은 곡식과 풀은 시간과 함께 자랄 것이고, 그녀의 아들은 곧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으리라. 게다가 그녀는 잉그리드의 몫까지 일을 척척 해냈다. 그들은 아이가 한밤중에 소리를 지르고 울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의 귓전을 후벼파는 소리는 바로 미래의 울부짖음이었다.
-289p

그녀는 주섬주섬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 사이에 서서 집과 외양간, 해안의 부두와 정고를 응시했다. 갑자기 그녀를 이 섬에 붙들어 두었던 그 모든 것들이 엄밀히 따지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있으면 눈은 비로 바뀔 것이고, 섬은 진드기처럼 갈색으로 변할 것이며,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바다는 잿빛으로 변할 것이다.
-본문 중에서

섬에 산다는 것은 항상 무언가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잉그리드는 쌓인 눈 밑에서 옷가지들을 발견한다. 갈색 누더기 같은 옷을 집어 들자 톱밥이 떨어져 나왔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옷이다. 이어서 그녀는 바다에 펼쳐져 있는 그물을 끌어당기다 부패한 시신을 발견하고, 축사에서도 남자 시신 한 구를 더 찾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아직 숨이 붙어 있다. 잉그리드는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회복할 수 있게 간호하면서, 섬을 돌아다니며 썩은 옷가지를 찾아 태우고 발견되는 시신들을 한데 모아 두는 등 강인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밀려오는 외로움만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 내내 그에게 노 젓는 일을 맡겼다. 그가 노를 젓는 동안만큼은 그에게 들키지 않고 마음껏 눈물을 흘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을 봐 버린 그는 노를 내려놓았다. 그가 양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 얹었다. 그녀는 그의 엄지장갑에 얼굴을 기대면서도 그를 돌아보진 않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룻배는 파도를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그가 다시 노를 저었다.
-본문 중에서

잉그리드와 남자는 서로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점차 각별한 감정을 나누게 된다. 그럴수록 그녀의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이 남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독일인이 아니라면, 러시아인? 알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녀의 외로운 삶에 기쁨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잉그리드는 고양이를 데리고 올 겸, 장을 보기 위해 본토에 갔다가 영국 전투기가 독일군 수송선을 폭파해서 수백,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문을 듣는다.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섬에서 발견한 옷가지와 시신에 대해 반드시 본토의 독일군에게 보고해야만 한다. 만일 그들이 섬을 조사하러 온다면, 분명 이 낯선 남자의 존재를 의심할 게 분명하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그는 바뢰이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잉그리드는 섬의 주인으로서 바뢰이섬을 지키고, 사랑하는 남자를 지키기 위해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리는데…….


《하얀 바다》는 노르웨이에서만 50만 부 이상 판매되고 맨부커 국제상 최종 후보작에 오르며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속편이자, 작가의 대표 연작 〈바뢰이 연대기〉의 두 번째 이야기이다. 전작이 20세기 초 노르웨이 북부 어느 해안에 위치한 작은 섬 바뢰이를 배경으로, 한 가족의 삶과 어린 소녀였던 잉그리드가 어떻게 섬의 주인으로서 성장해 나가는지 광범위한 시각으로 보여준다면, 《하얀 바다》에서는 철저히 잉그리드의 시각을 통해 모든 사건이 전개된다. 소설은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본토에서 청어를 손질하며 살아가던 서른다섯 살의 잉그리드가 홀로 바뢰이섬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전쟁 중 조금이라도 안정된 일을 하려고 하는 세상에서 돌연 모두가 떠나 아무도 없는 섬에 돌아가기로 한 이유도 특별히 없다. 물고기들이 먼바다를 헤엄치다 돌아오는 것처럼, 그녀 또한 고향인 바뢰이섬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무도 타지 않는 나룻배에 오른 잉그리드는 독일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험한 파도가 앞을 가로막고 힘이 들어 눈물이 맺혀도 손에서 노를 놓지 않는다. 그녀가 얼마나 강인하게 성장했는지 보여 줌과 동시에 앞으로 그녀에게 펼쳐질 격렬한 경험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물고기들이 먼저 왔다. 인간은 바다에 손님으로 찾아온 하나의 끈질긴 생명체일 뿐이다.
-본문 중에서

만약 자신의 집 마당에서 낯선 옷가지를 발견한다면 단순한 궁금증으로 끝날 수 있을까? 다른 끔찍한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그것도 여기저기서 발견된다면 말이다. 대부분은 기겁하거나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할 것이다. 그러나 잉그리드는 달랐다. 손질 중인 물고기처럼 등뼈가 훤히 드러난 시신을 발견했을 때도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던 사람처럼 묵묵히 받아들였다. 시신인 줄 알았는데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남자를 발견했을 때조차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말도 통하지 않고 정체도 모르는 상처투성이의 남자를 치료하고 보살피는가 하면, 섬 곳곳에서 발견한 시신들을 찾아 한데 모으고, 낯선 옷가지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불태우는 등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담담하게 해낸다. 전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겉모습은 평범한 여성들과 다르지 않아도 누구보다도 강인한 내면을 가지고 있었기에, 때때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절대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가 삶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이러한 모습은 시대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견딜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외로움이다. 혼자 음식을 먹는 것도 힘겨워하던 남자가 점차 회복해 가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감정이 일게 된다. 대화가 통하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 사랑의 방식은 침묵이고 믿음이었으며, 그것은 바뢰이섬을 닮아 있었다. 그러던 중 잉그리드는 본섬에 장을 보러 갔다가 독일군 수송선이 침몰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섬에 널브러진 옷가지와 시신들, 남자도 그 사건과 연관이 있을 게 분명하고, 어쩌면 유일한 생존자인 그를 독일군에게 보고하고 넘겨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사랑이 깊숙이 자리 잡은 터였다. 그녀의 사랑은 단순히 이성 간의 감정을 넘어, 그녀 자신도 알아채지 못하는 인류애와 같은 거대한 감정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전쟁의 참혹함을 눈앞에서 실감한 뒤에야 비로소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잘라 낸 돛으로 시신을 덮고 돛의 가장자리를 돌멩이로 고정한 후 북쪽으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 나룻배를 끌어왔다. 새 선착장으로 시신을 실어 간 그녀는 자신이 바다의 야생 동물로부터 섬을 보호한다거나 모든 죽음은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그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그 어떤 생각도 없이 시신을 끌어올렸다.
-본문 중에서

얼마 후, 잉그리드가 예상했던 대로 독일군이 바뢰이섬을 찾는다. 그녀는 섬에서 발견한 옷가지와 시신에 대해 말한다. 다만 한 가지 절대로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바로 그녀가 사랑하게 된 남자 알렉산더였다. 옅은 눈동자를 가진 그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것도 말하지 않았다. 독일군은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을 알려준 뒤, 섬을 떠났다가 며칠 후 다시 잉그리드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녀는 기억을 잃는다.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하얀 벽으로 된 병실 안이었다. 그녀는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으며, 잔혹하게 폭행을 당한 게 분명했지만 단편적인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누가 그녀를 폭행했는지, 여자로서 감당하기 힘든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잉그리드는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담당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비슷한 처지의 환자들에게 점차 마음을 열게 된다. 그녀 외에도 병원에는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환자들로 가득했는데, 심지어 담당 의사나 간호사조차도 각자의 아픔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모두가 피해자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전쟁을 견뎌내고 있었다. 서로의 불행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인 것처럼. 어쩌면 인류는 무구한 역사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남아 오늘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언제 날아올지 모를 폭탄이 순간의 평화와 작은 희망을 한순간에 피와 재로 만들어 버린다 해도, 그들은 서로의 눈물로 현재를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이 맑은 어느 날 아침, 그들은 다시 남쪽으로 여정을 시작했다. 내륙의 산꼭대기에 쌓인 눈은 옅은 햇살을 받아 청동색으로 반짝였다. 배 안에는 삶 중에서도 가장 취약하다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을 기대하는 조용하고 무기력하나 희망적인 질서가 자리를 잡았다.
-본문 중에서

병원을 떠나는 날, 잉그리드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건들 덕분에 한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 준다. 전쟁 난민들과 함께 배에 오르게 된 잉그리드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으나, 이제는 난민들을 살뜰히 보살피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병실에서 벗어나 상처를 회복한 그녀가 바다로 나서자, 다시 누구보다 강인한 존재로서 피어난 것이다. 한편, 그녀는 난민들에게서 전쟁 상황에 대한 정보를 들으며, 남자의 행방을 알아보려 했지만, 그의 생존 여부조차 알 길이 없다. 본토에 도착한 잉그리드는 전쟁의 배를 함께 타고 온, 잔혹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임시로 터를 잡는다. 하지만 바뢰이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데, 그녀의 단호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어릴 적 아버지 한스에게 배운 것처럼, 마냥 다른 사람에게 퍼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닌 실리를 중요시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나갔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터득해 온 온갖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 각자가 가진 능력을 파악하고 역할을 정해 주는가 하면, 생사가 오가는 전쟁 중에도 교육의 중요성을 잊지 않으며 진정한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이와 동시에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노력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더 이상 그녀에게 독일군의 총은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걸 알게 된 그녀는 다시 바뢰이섬으로 향한다. 물고기는 언제나 바다를 헤엄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법이다. 다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잉그리드는 하늘을 향해 원망과 애원의 부르짖음을 보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듯 살아가야 하는 의미를 깨달았다. 어둡고 비참했던 과거조차 신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의 삶에는 분명 신의 계획과 돌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깨달음은 마치 맑은 하늘에서 내려치는 마른번개처럼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왔다.
-본문 중에서

잉그리드가 바뢰이섬에 돌아온 후, 그녀의 고모 바브로도 오랜 병원 생활을 마치고 섬에 돌아온다. 잉그리드는 병원을 나오며 탄 배에서 만난 핀마르크 삼 형제와 몸과 마음에 상처가 남은 어린 넬비도 섬에 데려온다. 이어서 딸처럼 키웠던 수잔도 그녀의 아들 프레드릭과 함께 돌아온다. 바뢰이섬은 다시 활기를 띠어 가는 듯했으나,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가까이 있던 누군가가 죽었을 때 보통의 삶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식되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배 속에는 작은 생명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전쟁이 끝나고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이 더 많은 가족을 이루어 섬으로 돌아온다. 바뢰이섬은 꺼지지 않는 백야처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희망은 섬 구석구석을 비추어 내리며 찾아오고 있었다.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앞둔 이들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바다의 손님으로 찾아온 인류는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 계속해서 삶을 살아낼 것이다.

◆ 언론 호평
“문학적으로, 언어를 통해서 표현된 모든 현대 작품을 통틀어 이 시리즈를 능가하는 책은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클라세캄펜》

“더 이상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간결하고 깊이 있는 통찰력을 지닌, 현대 노르웨이 문학의 정수.”
-《다겐스 내링슬리브》

“작가 특유의 간결한 문장은 품위를 지켜 내기 위한 인간의 투쟁에 바치는 고귀한 찬사이다.”
-다니엘 마크 제인,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

“우주적 서사와 정서적 긴장을 냉철하게 결합한 작품.”
-클레어 올프리, 《데일리 메일》

“독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진솔한 이야기. 전쟁의 위기에 처한 개인과 세계를 날카롭게 부각시킨다.”
-《커커스 리뷰》

“전작보다 더 풍부하고, 더 도발적이다.”
-《뉴욕 타임스》

“작가는 《하얀 바다》를 통해 겉모습은 그 시대의 여느 여성과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강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감수성이 풍부한 새로운 여성의 초상을 보여 준다. 정교함이 묻어나는 문학적 성취이다.”
-《북포스트》

“짧은 글쓰기 거장만이 쓸 수 있는 우아하고 기교 넘치는 장과 장면의 연속.”
-《VG》

“작가를 대표하는 또 다른 걸작의 탄생.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상에서 어떻게 메마른 도덕성을 되찾아 가는지 보여 준다.”
-《월드 리터러쳐 투데이》

“강력한 가독성을 지닌 책.”
-데이비드 밀스, 《선데이 타임스》

“갈등, 사랑, 인간의 인내심에 대해 아름답고 깊이 있게 탐구한 감동적인 작품.”
-《세인트캐서린스 스탠다드》

“전작을 뛰어넘는 후속편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다그스아비센》

“크누트 함순을 연상시키는 재치와 섬세한 캐릭터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
-《아프텐포스텐》

작가정보

1954년 12월 26일 노르웨이 오슬로 출생. 1982년 첫 단편 《감옥생활(Fangeliv)》을 발표했고, 노르웨이 작가연합이 그해 최고의 데뷔작에 수여하는 타리에이 베소스 데뷔상(Tarjei Vesaas’ debutantpris)을 수상했다.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다가 1987년 칼펠렌상(The Cappelen Prize)과 1989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노르웨이 비평가 문학상(Norwegian Critics Prize for Literature)을 수상하면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1년 노르웨이 서점 협회에서 매년 그해의 책 중 단 한 권에만 수여하는 노르웨이 서점상(Norwegian Booksellers’ Prize)을 수상한 《승리자들(Seierherrene)》과 2003년 《서리(Frost)》로 높은 문학적·예술적 기준을 충족하는 북유럽 문학 작품에 수여되는 북유럽협의회 문학상(Nordic Council Literature Prize)에 두 번 이름을 올리는 영예를 안았다. 2009년 《호게른(Hoggerne)》으로 국제 IMPAC 더블린 문학상(International Dublin Literary Award)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같은 해 《신동(Vidunderbarn)》으로 노르웨이 서점상에 다시 한번 이름을 올렸다. 2013년에 발표한 〈바뢰이 연대기(The Barrøy Chronicles)〉의 첫 번째 작품 《보이지 않는 것들(De Usynlige)》은 출간 즉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노르웨이에서만 50만 부 이상 판매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전 세계 28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2017년 맨부커 국제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과 2018년 국제 IMPAC 더블린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21년 유럽 문학상(European Literature Prize)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외국어대에서 영어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대학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다. 1998년 노르웨이로 이주, 크빈헤라드고등종합학교를 거쳐 크빈헤라드코뮤네예술학교에서 전임강사로 피아노를 가르쳤다. 2002년부터 노르웨이 문학을 번역하기 시작해 2012년 노르웨이번역인협회 회원이 되었고, 같은 해 노르웨이국제문학협회에서 수여하는 번역가상을 받았다. 2019년 한·노 수교 60주년을 맞아 노르웨이 왕실에서 수여하는 감사장을 받았으며, 2021년에는 노르웨이예술인상을 받았다.
《샤이닝》 《멜랑콜리아 1, 2》 《책을 살리고 싶은 소녀》 《사자를 닮은 소녀》 《우리의 사이와 차이》 《진짜 노동》 《밤의 유서》 《콜락의 아내》 《벌들의 역사》 《비발디》 《바르삭》 《루시퍼의 복음》 《노스트라다무스의 암호》 《파리인간》 《나의 투쟁》 시리즈, 《우아한 제국》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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