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그리고 도마복음 말씀 1-28
2024년 09월 20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9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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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9788988137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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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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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복음과 도마복음은 어록의 약 절반 정도가 일치하고 나머지는 정경복음에 없으니 불일치 하는 것일까.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문체와 서술방식과 이야기하는 내용이 전혀 다른데 왜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을까. 둘은 같은 책인가 다른 책인가. 서로는 서로에게 적대적인 문서일까 아니면 서로를 보충하고 있는 것일까. 각자는 그 나름대로 문서의 완결성을 지닌다. 전혀 다른 성격의 문서이나 비평가에 의해서 수많은 비평이 이뤄질 수도 있지만, 독자에 의해서 둘은 서로를 증거로 제시하고 서로를 보충하는 문서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독자에 의해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매우 이질적인 문서가 하나의 책에 담겨 있는 불편하고 이상한 책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도마복음과 정경복음의 차이와 같음은 마치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의 같음과 다름 정도로 이해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본서는 도마복음과 정경복음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는다. 도마복음의 난해한 로기온은 성서의 찬란한 빛에 의해 해석되고, 성서의 난해한 구절 또한 도마복음의 아름다운 로기온이 되비쳐 주어 성서 이해의 깊이를 더 해준다. 도마복음이 어록의 모음집이라는 특성이 있지만, 모름지기 어떤 말씀이 말씀으로 드러나려면 그것의 전후 맥락과 서사가 있기 마련이다. 같은 사건이 아니라 하더라도 유형이 같은 다른 이야기에서 어록을 유추할 수 있다. 성서는 이야기 모음집이고, 성서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도마복음은 서사와 이야기가 없이 어록만을 모아놨다. 그렇다고 도마복음이 서사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의 어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서사 속에서 어록이 생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에 의해 어록의 이면에 있는 서사가 읽혀야 한다. 그때 수많은 서사가 담겨 있는 성서는 매우 훌륭하고도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성서는 도마복음을 밝혀주는 보물 창고(寶庫)다. 동시에 도마복음의 어록은 수많은 서사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종교 너머 더 깊은 인생의 길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넉넉히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도마복음 서론 ㆍ 도마복음 텍스트 구조 ㆍ 17
살아있는 예수 ㆍ 17
디두모스 유다스 토마스 ㆍ 19
쌍둥이 플러스 ㆍ 28
감추어져 있는, 신비의 말씀 ㆍ 31
말씀 1 해석을 발견하는 자 ㆍ 35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ㆍ 37
‘죽음’ 개념에 대해 ㆍ 41
죽음을 맛보는(γεύσηται θανάτου) 또 다른 형태ㆍ45
말씀 2 찾음과 발견 그 경악스러움과 주권 ㆍ 52
말씀 3 너희 자신을 아는 것과 왕국 ㆍ 57
말씀 4 칠 일 된 어린아이와 생명의 장소 ㆍ 64
니체 ‘정신의 삼단계’와 말씀 4 ㆍ 69
말씀 5 앞에 있는 것을 알라 ㆍ 72
말씀 6 금식과 거짓 ㆍ 77
말씀 7 사자가 사람이 되려면 ㆍ 84
사람에게 먹히는 사자와 사람을 먹는 사자 ㆍ 86
사람과 사자, 사자와 사람 ㆍ 87
말씀 8 가슴을 갖고 있는 현명한 어부 ㆍ 96
말씀 9 씨 뿌리는 비유 ㆍ 104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 ㆍ 104
씨 뿌리는 비유에서 바위 ㆍ 110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덤불 ㆍ 120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 ㆍ 132
말씀 10 불과 태워져야 할 것 ㆍ 139
말씀 11 천지와 지천 ㆍ 149
천지(天地)와 지천(地天) ㆍ 149
죽은 자와 산 자 그리고 떠나가는 하늘 ㆍ 153
죽은 것을 산 것으로 ㆍ 158
하나(ⲟⲩⲁ)와 둘(ⲥⲛⲁⲩ) 이야기 ㆍ 162
말씀 12 야곱에게 가리라 ㆍ 169
누가 우리 위에 큰 자가 되겠습니까 ㆍ 170
의인 야고보에게 가리라 ㆍ 173
말씀 13 말할 수 없는 세 마디 ㆍ 180
말씀 14 금식과 위선 ㆍ 187
금식은 자신에게 짓는 죄 ㆍ 187
기도는 자신을 정죄하는 것 ㆍ 189
말씀 15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 ㆍ 194
말씀 16 가족 전쟁과 모나코스 ㆍ 199
불, 칼, 전쟁 ㆍ 199
말씀 17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 ㆍ 206
말씀 18 근원과 궁극 ㆍ 210
말씀 19 존재하기 전에 존재하는 자 ㆍ 219
두 존재(Two Being) ㆍ 222
낙원(ⲡⲁⲣⲁⲇⲓⲥⲟⲥ 파라디소스)의 다섯 나무 ㆍ 227
1. 아칠루트 나무 ㆍ 228
2. 브리야의 나무 ㆍ 229
3. 예치라의 나무 ㆍ 230
4. 앗시야의 나무 ㆍ 231
5. 야웨의 나무 ㆍ 232
말씀 20 겨자씨와 왕국의 비유 ㆍ 233
흙갈이 된(ϩⲱⲃ 홉) 밭에 떨어지다(ϩⲉ 헤) ㆍ 234
말씀 21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 ㆍ 239
남의 밭에 사는 어린아이 ㆍ 239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 ㆍ 242
그에게서 듣게 하라 ㆍ 247
말씀 22 작은 자와 왕국 ㆍ 249
작은 자란 ㆍ 249
둘을 하나로 만드는 자 ㆍ 254
말씀 23 천에서 하나 만에서 둘 ㆍ 261
말씀 24 빛이 존재하는 빛나는 사람 ㆍ 271
말씀 25 형제 미움과 형제사랑 ㆍ 280
눈동자 ㆍ 286
말씀 26 들보와 티 ㆍ 288
말씀 27 금식과 안식 ㆍ 294
말씀 28 술 취하지 말라 ㆍ 301
참고문헌 ㆍ 309
부록 / 도마복음 콥트어 원문 직역(로기온 1~28) ㆍ 310
쿰란 문헌은 80% 이상이 히브리어로 작성된 문서들이고(일부 아람어와 코이네 그리스어 문서 포함), 나그함마디 문서는 콥트어로 기록된 문헌들이다. 옥시링쿠스에서 발굴된 문헌들은 헬라어(그리스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성서와 관련한 문서들이 대부분이다. 3개의 언어로 기록된 고대 문헌들은 중근동의 이스라엘과 이집트 지역으로 각각 발굴된 장소는 다르지만, 다른 언어의 문헌이라는 것이 경이롭다. 〈pp. 6-7〉
이런 때에 쌍둥이 복음은 진정 복음이 될 수 있을까. 도마복음 말씀의 서술 구조는 이항대립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둘의 대립구조(쌍둥이)로 진술된다. 노인과 어린아이를 대립시키면 그 의미 전달이 쉽다. 산 자와 죽은 자, 영과 육, 선악과 생명, 사망과 생명, 안과 밖, 하늘과 땅, 먼저와 나중, 앞에 있는 것과 감추어진 것, 나타난 것과 숨어 있는 것, 축복과 저주,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 등등 서로 대조적인 구조 틀 거리로 114개의 말씀(말씀)을 진술하고 있다. 〈pp. 23-24〉
생의 비밀은 이곳에 있다. 육신에 속한 인간에게 ‘얼’은 언제나 비밀이다. 영혼은 비밀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은밀한 것이다. 처음의 베드로는 예수를 따라다니며 목숨을 바쳐서 사랑한다고 했다. ‘사랑’은 그에게 비밀이다. 즉, 그가 목숨을 바쳐 사랑하겠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부정되는 베드로만의 사랑이었고 인생들이 좇아가는 사랑이다. 후에야 알게 되지만, 비밀이 드러나야 비로소 알게 되지만 그때까지 그가 아무리 사랑을 말하더라도 그에게 사랑은 감추어진 것이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생에게 사랑은 숨어 있는 것이고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p. 33〉
자기가 부재한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타인을 끌어다가 타인을 부정함으로 자기 존재를 긍정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옳고 그름을 논함으로 자기 존재를 긍정하려고 한다. 옳고 그름은 타인의 그름을 증명하여야 하기에 타인을 살해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타인을 살해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살해한다는 뜻이다. 정신은 타인을 살해함으로 자신을 살리려 한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을 살게 하려는 유혹에 머무는 것, 그래서 언제나 선악에 집중한다. 마치 극장에서 무대의 공연에 집중하듯, 스크린만을 집중하듯 온통 선악에 집중한 채 그의 삶을 영위한다.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고가 그의 일상이다. 〈p. 39〉
이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가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뜻은, 곧 선악을 넘어서 존재의 나를 발견하고 존재의 나가 존재를 드러내는 로고스를 발견하는 것, 자신의 소리와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것, 나의 말과 나의 소리를 간직하고 그를 살려내 나의 노래를 부르는 것, 그를 향해 서 있는 것이 도마복음의 어록 배후에 숨어 있는 웅장한 서사다. 나를 감추고 숨게 한 은폐물이 곧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되고 장애물을 치우는 것, 거기에 많은 서사가 있다. 도마복음은 114개 말씀의 구슬로 이뤄졌다. 그 중심 주제는 ‘나’이고 ‘신’이며. 비로소 ‘나’와 마침내 ‘나’에 대한 서술이다. 〈p. 44〉
종교는 천국을 시공간에 매달아 놓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도마복음은 이 점에서 매우 단호하다. 그런 천국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천국이 있다면, 하늘에 천국이 있다면 새들이 먼저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새들이 그대들보다 앞서서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만일 천국이 바다에 있다고 한다면 물고기가 너희에 앞서서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국을 어떤 가상의 공간으로 상정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다. 도마복음은 밖에 있는 천국에 대해 단호하게 메스를 가한다. 그런 천국은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복음서와도 일치한다. 천국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 복음서의 강력한 서술이다. 〈pp. 58-59〉
종교가 타락하면 선악의 꼭대기에 서게 된다. 자신들은 택함 받은 선민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다. 선민의식의 자긍심으로 행복이 충만해진다. 스스로의 선의식에 만족한다. 선의식은 그 반대의 경우를 반드시 악으로 규정한다. 선과 악은 같은 두 개의 레일이다. 하여 선민의식은 천민의식이 되어버린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만족해하는 행복은 불행과 같은 이름이 되고 만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전파하는 왕국은 하여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미명과 양의 옷을 입혀 선전하는 천박한 나라와 다르지 않다. 〈p. 81〉
그함마디에서 발굴된 그대로의 콥트어 원문은 ⲁⲩⲱ ⲡⲙⲟⲩⲉⲓ ⲛⲁϣⲱⲡⲉ ⲣ̅ⲣⲱⲙⲉ(그리고 사자는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주석가들이 수정한 원문은 ⲁⲩⲱ ⟨ⲡⲣⲱⲙⲉ⟩ⲛⲁϣⲱⲡⲉ ⟨ⲙ̄ⲙⲟⲩⲉⲓ⟩(그리고 사람은 사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다. 어순을 바꿔놓고 원문과 다름을 알리기 위해 중괄호〈 〉로 표기하고 있다.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한가. 〈p. 85〉
예수는 처음부터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를 때,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그들을 불렀다. 그의 부름은 애초부터 사람이다. ‘사람’은 그물과 물고기로 비유하면 그물에 잡힌 큰 물고기가 ‘사람’을 비유한다. 그렇다면, 잔챙이 작은 물고기들은 무엇을 비유하는 걸까? 예수는 베드로를 어떻게 사람으로 낚아 올리고 있을까? 그리고 마침내 사람을 낚는 현명한(가슴이 있는) 어부로 만들었을까? 여기서 ‘현명한(wise)’은 본래, 마음의 사람을 일컫는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남자(man of mind)를 일컫는다. 〈p. 98〉
도마복음은 쌍둥이 복음서다.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도 서로 대조되는 쌍둥이 메타포가 담겨 있다. 작은 물고기도 물고기다. 어리석은 어부는 작은 물고기에 관심을 갖는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힌 작은 물고기를 놓고 이를 가르지 못한다. 숫자의 신에 매몰된다. 맘모니즘에 사로잡힌다.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아야 한단다. 가르고 나누지 못하면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힌 물고기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베드로의 충성 서약을 좋아하고 덥석 수납하는 그대는 현명한 어부일까? 어리석은 어부는 작은 물고기를 좋아한다. 다다익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한다. 작은 것에 발목 잡혀 큰 물고기를 잃는다. 작은 물고기 때문에 사람을 낚지 못한다. 그가 가진 소유를 충성 예물로 수납하기를 좋아하니 사람을 낚지 못한다. 〈pp. 101-102〉
그러니까, 물리적 우주 창조론에 의하면 애굽과 가나안을 구분하는 것은 난센스다. 왜냐하면 애굽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가나안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범재신론적 신관에 의하면 가나안과 애굽을 축복의 땅과 저주의 땅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그같이 구분한다면 천지 창조론적 창조주의 신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게 아닌가. 〈pp. 106-107〉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에 떨어졌다고 한다. 가시나무는 콥트어로 숀테(ϣⲟⲛⲧⲉ), 헬라어로 아칸다스(ἀκάνθας), 히브리어로 코츠(קֹ֥וץ)라 불린다. 가시나무는 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적 장치로 사용된다. 창세기 3장 18절에 처음 등장하는 코츠는 구약성서에 단지 12회 정도만 등장하고, 신약성서의 아칸다스(ἀκάνθας)도 11회 사용된다. 물론 기타 동의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도마복음에서는 말씀 45의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따지 않는다고 할 때, 이 단어가 한 번 더 사용될 뿐이다. 〈pp. 120-121〉
타인의 말이 그 의식에서 독버섯처럼 ‘양심’이라는 당의정을 입고 나타나 삶의 규칙을 제공하던 것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 말과 제소리를 내며 제 길을 뚜벅뚜벅 걷게 된다. 존재의 나무, 생명의 나무가 된다. 그는 나요, 나는 그가 된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비로소 내가 길이고 내가 진리고 내가 생명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가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처음 하늘이 지나가고, 사라지고 나니 비로소 그러한 사실이 자명하게 드러난다. 〈p. 161〉
예수는 그 같은 유대교의 신과 절연한다. 그 같은 종교 패러다임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도마복음은 처음 하늘이 떠나가야 한다고 외친다. 죽음의 신을 잡아먹고 전쟁의 신, 살인의 신의 자리에 생명이 꽃피게 한다. 도마복음은 살신(殺神)복음서다. 살신(殺神)에서 생신(生神)이 이뤄진다. 신을 죽이고 그것을 먹는 날에 신은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 둘은 하나가 된다. 이때의 신은 죽은 신이 아니라 비로소 나와 그는 하나가 된다. I AM HE가 된다. 신을 죽여야 신이 살아난다. 이때 비로소 나도 살아난다. 죽음을 맛보는 삶에서 벗어나 생명의 삶을 살게 한다. 선악 나무를 베어내고 생명 나무가 된다.〈p. 161〉
따라서 하나와 둘은 잠자는 자가 잠을 깨어 길을 떠날 때 비로소 드러나는 둘이다. 정신이 독립하고 자기 존재와 자기 정신을 향하게 될 때 드러나는 둘이다. 둘은 주돈이의 말처럼 무극(無極, One)이 곧 태극(太極, Two)이다. 무극이 무극으로 있으면 그곳엔 생멸도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로소 생명작용을 할 때 음극과 양극이 둘로 작동한다. 〈p. 165〉
인간에게 진정한 의란, 각자의 각자다움이 꽃피는 것만을 ‘의로움’ 곧 옳다고 할 수 있다. 개나리는 개나리다워야 옳고, 장미는 장미다워야 옳다. 그대는 오로지 그 누구의 영향력 아래, 타자 지배 아래에 식민백성으로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그대 안의 신성, 곧 그대 안의 숨어 있던 하나님이 일깨워져 그대의 모습으로 꽃피는 것, 그것만이 그대에게 옳음이요, 의로움이다. 의로운(ⲇⲓⲕⲁⲓⲟⲥ) 야고보의 상징성은 모든 각 개인이 타자 지배를 벗어나, 신의 지배를 벗어나, 자신의 존재로 꽃피는 것, 그대 안에 있는 신성이 죽어 있지 않고 존재로 꽃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의’요, 그대의 옳음이고 그대의 의로움이다. 〈p. 179〉
이제부터는 누구나 타인이 전해주는 열 마디 혹은 수백 마디의 깨달은 말보다 자신 안에서 들려지는 세 마디의 깨달은 말씀이 자기 존재와 자기 생명을 이루게 한다. 존재의 나무로 자라가게 한다. 〈p. 186〉
기도하지 말라. 너희가 기도할 때 너희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도마복음의 놀라운 가르침이다. 더구나 너희가 자선을 베풀 때, 너희는 너희의 정신을 해칠 것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자비와 긍휼로 구제와 자선을 베푸는 것은 종교인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덕목이 아닌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귀족의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무가 아니던가. 갈수록 심화하는 양극화의 해소에 적극 권장해야 할 덕목인 자선과 구제가 정신을 해치는 행위라고 가르치는 도마복음은 현대 사회의 도덕률과도 충돌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 도마복음은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곧 귀족의 도덕적 책무라는 미명으로 자신의 온갖 부도덕을 덮는다. 자신의 오염된 정신을 감추는 위선과 가면이 거기에 있다. 구제와 자선이라는 행위가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할 기회조차 박탈하고 만다. 그러므로 자선과 구제는 자신의 정신을 심각하게 해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선은 없다. 구제도 없다. 자선이라는 말은 위선이다. 구제도 위선이다. 자선과 구제는 선으로 위장하는 위장술이다. 〈pp. 191-192〉
신은 모시는 게 아니다. 시천주(侍天主)는 시천주(侍天主)가 아니다. 시천주(侍天主)는 생천주(生天主)요 기천주(起天主)여야 한다. 모시는 신은 이제 신이 아니다. 신의 죽음을 알리는 부음(訃音)의 자리에서 여인이 낳지 않은 자를 다시 만난다. 갈릴리 해변에서 새벽에 다시 만난 예수는 베드로가 낳고 베드로가 상상하는 가상 세계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줄 세상 임금 예수가 아니다. 베드로가 낳고 물을 주고 키운 예수는 죽었다. 세상 임금의 흔적인 시체조차 찾을 수 없어 울고 있는 그에게 그가 낳은 적이 없는 다른 예수가 서 있다. 생천주(生天主)하니 신기(神起)요, 신기(神起)하니 신기(神氣)한다. 〈pp. 196-197〉
말이 바뀌는 것은 방언에 비로소 복음이 전파될 때 이뤄진다. 손으로 만지고 마음에 들여야 말이 바뀐다. 제대로 소리를 낸다. 애굽에서 바로의 언어를 사용하다가 가나안에서 그(HE)와 하나 된 자신의 언어로 바뀐다. 광야는 언어가 바뀌는 과정이다.
가나안에서 바뀐 언어는 전혀 보지도 듣지도 말해 본 적이 없는 비로소 제 눈으로 보고 제소리를 듣고 제 언어로 말하게 됨이다. 이것이 존재의 언어요, 여인이 낳지 않은 자, 지성소의 그로부터 새로 낳음을 입고서야 새로운 혀를 선물 받는다. 그(HE)는 아버지요, 비로소 ‘나’이니 그와 나는 하나가 된다. 비로소 배운 언어, 큰 자의 언어, 식민 지배의 언어로부터 혀가 구원받는다. 민족(ἔθνος)이 바뀌고 족속(φυλὴν)과 백성(λαόν)과 방언(γλῶσσα)에게 전해지는 복음을 듣게 된다.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려면, 마침내 그 혀에까지 전파되어야 한다. 〈pp. 208-208〉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는 뜻은, 나는 그 시작이 율법 세대를 살 때도, 그 주어가 ‘나’고 마침내 율법으로 사는 ‘나’가 죽고 율법이 마치고 생명으로 살게 되는 때가 찾아와도 그때의 주어는 ‘나’라고 하는 사실이다. 누구나 인생의 알파와 오메가는 그 자신이다. 제발, 그(HE)만이 알파요 오메가라는 깊은 수렁의 잠에서 깨어나자. 〈p. 218〉
낙원의 다섯 나무에 대해, 이런 나의 해석은 도마복음과 카발라의 생명 나무가 내 순례의 여정에서 만나 서로서로 해석해줌으로 가능했다. 여기서 죽음을 맛보지 않는 생명의 세계가 펼쳐진다. 아직도 죽음을 맛보지 않는 것을 육체의 영생불사나 진시황의 욕망으로 보려는 이들에게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의미를 전달할 방법이 없다. 이 글을 함께 읽는 이들이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것을, 여전히 내세에 예비 된 천국이 그대만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이글은 백해무익이고 무용지물이다. 〈p. 232〉
영지주의를 앞세워 영적 지식이 구원인 양 사람을 유혹하게 되고 자신의 지식으로 타인을 현혹하여 지배하려는 속성이 발동하는 것은 정신이 유혹에 빠지는 것이고, 도적에게 탈취당하는 일이다. 진정한 생명 현상이 아니다. 생명을 다시 탈취하는 것이다. 깨달음과 영적 지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다. 한 번 비췸을 맛보고 잠시 존재의 세계에 참여했다가 다시 타락하는 현상이다(히 6장 참조). 우후죽순 솟아나는 신흥종교는 이와 같은 현상의 표출이다. 〈p. 244〉
갈수록 무한 경쟁으로 내모는 큰 자의 시대, 작은 자의 복음, 도마복음이 시대의 목탁과 경종(警鐘)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큰 자를 지향하는 삶에서 넋 아웃(soul out) 된 이들에게만 유효하고 또 그 소리가 들리리라. 도마복음은 탈종교 시대에 흩어져 존재 자아의 삶을 꿋꿋이 세워가는 이들이 곁에 두고 읽을 경전이다.〈p. 254〉
듣기(to hear)는 여성성이요, 말하기(to speak)는 남성성이다. 우리의 정신은 듣기와 말하기를 통해 그의 의식을 키워간다. 들어야 할 때는 들어야 한다. 아직 혀가 풀리지 않을 때, 그때는 듣기에 충실해야 한다. 정신의 형상이 여자로 있을 때다. 그에게서(자신 안에 있는 He) 듣기가 시작되면 말하기도 시작된다. 타자에게서 듣기를 멈추고 자신에게서 듣기 시작해야 자신의 말을 하게 된다. 여자가 남자가 되는 원리가 거기 숨어 있다. 생물학적 육체의 성전환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남녀의 우열을 말하는 성차별적 언어가 아니다. 남녀의 성(gender)을 비유로 정신의 성질과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pp. 259-260〉
한 사람은 정직한 한 사람이며, 일천과 일만은 많은 꾀를 도모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상상계와 상징계에서 일어나는 천태만상(千態萬象)이다. 그러므로 천 명 중 하나, 만 명 중 둘은 천태만상의 나에게서 벗어나, 오직 홀로 하나인 실재계에 우뚝 서 있는 나와 마주하는 것을 일컫는다. 〈p. 269〉
눈은 마음의 창이다. 모든 씨앗에는 생명의 씨눈(eyes of seed)이 있다. 우리 의식의 영역에서 존재, 곧 생명의 씨눈은 로고스에 의해 점화된 불꽃이자 눈동자며 새로 태어난 존재의 의식을 향해 서 있는 깨어있는 의식이고 겨자씨며 누룩이다. 눈은 지성의 영역과 감성의 영역을 지각하는 지혜의 눈이고 총명의 눈이다. 씨알이며 어머니의 자궁인 총명이 곧 눈이다. 이 눈을 지켜야(콥 ⲧⲏⲣⲉⲓ 테레이, 헬
작가정보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철학교육을 전공하였다. 수도침례신학교와 중부대학교에서 기독교철학과 헬라어, 히브리어를 강의하였다. 저서로는 『베드로의 고백 그 허와 실』(1994)『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냐』(1998)『예수의 믿음』(2018)『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2021)『유대신비주의 카발라와 생명나무』(2023) 등이 있다. 원어성서원 刊 『스테판 원어성경』 데이터 작업과 편집에 참여하였으며 격월간지 『형상과 글』을 창간하기도 했다.
현재 유튜브 방송 김창호TV(https://www.youtube.com/@biblelogos)를 운영하고 있으며, 원어 성경을 토대로 한 해설 요한계시록과 창세기, 산상수훈, 주기도문, 카발리즘, 도마복음, 로마서, 히브리서 등 동영상 약 620여 편이 업로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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