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시나리오
2024년 08월 19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6월 27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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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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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경 작가의 친절한 안내서!
처음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는 이들, 다른 글쓰기를 하다가 드라마나 영화 각본을 쓰려고 하는 이들, 어떤 식으로든 자기만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정서경 작가의 친절한 안내서. 자신의 첫 완성작인 〈불쌍한 우리 아기〉와 〈대전 일기〉를 공개하며, 그 이야기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이 작품들을 써내면서 어떤 변화를 겪고 무엇을 배웠는지 솔직하게 들려준다.
_ 들어가는 말 9
_ 불쌍한 우리 아기 19
_ 잇는 말 168
_ 대전 일기 171
_ 맺는 말 310
이런 상상을 해본 적 있다. 나는 무슨 이유에선가 교실 가득한 학생들에게 시나리오를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만 이 교실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학생들 역시 무슨 이유에선가 시나리오를 꼭 써야 한다. 그래야 병든 어머니가 낫는다든지, 망하던 가게가 다시 일어선다든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는 동생이 풀려난다든지...... 다들 갖가지 절박한 이유로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데, 그중에 딱 한 가지 이유는 없다. 시나리오를 잘 써서 작가로 입봉하고 성공하는 것. (9)
깨끗하게 비워진 머리를 가지고 학교에 돌아왔다. 왠지 부끄러움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때 꿈을 꾸었다. 나는 시내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어떤 아기를 안고 있었다. 어둡고 쭈글쭈글한 피부를 가진 못생긴 아기였지만 내 아기였다. 그 아기를 목욕탕 수건에 대충 감싸 좌석에 앉아 있으니...... 놀랍게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꿈을 꾸고 나니 세상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시나리오를 쓰자. 못생기고 쭈글쭈글해도 좋으니 내 아기라고 할 만한 것. (14)
어머니에게 나를 낳을 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때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는 아주 좋다.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 없고, 자고 싶어도 잠을 잘 수가 없고,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아 죽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나를 낳았다고 했다. 나는 조그맣고 쪼글쪼글하고 아주 약한 아기였다고 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선 언제나 눈물이 글썽인다. (25)
아기목소리(소리): (은희가 억지로 아기 목소리를 내는 듯한 소리) 엄마, 이 사람 맘에 들지 않아. 이 사람을 가까이하지 마세요. 이 사람을 좋아하면 안 돼. 나만 생각하세요, 엄마. (36)
9 은희의 방, 밤
은희는 반지하 자취방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빛이 긴 도형을 만들었다가 문을 닫을 때 사라진다. 은희는 불도 켜지고 방구석으로 천천히 기어간다. 멍하니 앉아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벽에 만들어내는 빛 상자를 바라본다. 밤늦게 들어가는 사람의 바쁜 발 모양, 슬쩍 스쳐가는 고양이, 멀리서부터 오는 헤드라이트 불빛. 은희는 눈이 부셔서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뜬다. 마이크를 던지고 넥타이를 슬슬 푸는 과장님의 화난 모습이 떠오른다. 헤드라이트의 가장 밝은 부분이 지나간다.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다. 힘없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내려가는 지석 씨가 보인다. 은희는 체머리를 흔들고는 벌떡 일어나 이부자리를 펴고 눕는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은희는 돌아누워 눈을 꼭 감고 못 들은 척한다. (38)
은희는 남은 울음을 삼키려고 노력하며 책상 옆의 커피 메이커에서 원두커피를 뽑아 컵에 따르고, 그 안에 커피 믹스 두 개를 한꺼번에 넣어 부장님 탁자로 가져간다. 부장님은 맛있다는 듯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맛을 쩝쩝 다신다. (41)
은희: 그러니까, 음...... 겉으로는 잘 안 보이지만 우리 안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누가 알겠어요?
알 수 없는 말들을 알아듣기 위해 지석 씨는 인상을 점점 찌푸리며 은희 쪽으로 다가가고, 은희는 말을 멈추고 다시 햄버거를 먹던 자세로 돌아간다. (83)
41 거리, 저녁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반짝이는 거리. 환한 표정의 사람들. 손에 선물을 들고 둘씩 셋씩 짝지어 즐거이 걸어간다. 다른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황망히 걷고 있던 은희 앞에 산타가 나타난다. 산타는 길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호객을 하고 있다. 지나가려는 은희를 오른쪽, 왼쪽으로 장난스럽게 막아서는 산타. 은희는 거의 울상에 되어 끈질기게 따라붙는 산타를 피해 도망친다. (115)
입체성은 이야기가 높은 곳과 낮은 곳에서 동시에 흐르면서 생긴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가 섞이거나. 이야기의 의미는 많은 경우 이 입체성에서 생겨난다. 나는 오랫동안 순서대로 쓰는 작가였는데 지금은 구조를 70퍼센트 정도 먼저 쓰고, 쓰면서 내가 세운 구조의 일부를 파괴하고 다시 세우는 식으로 쓴다. (169)
2 거실, 낮
혜신은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읽던 책을 가슴에 펼쳐놓은 채로. 모든 것을 반짝이게 하는 여름 햇볕이 얼마나 환하게 자기를 비추고 있는지도 모르고, 창밖에서 나뭇잎들이 웃음을 터뜨리듯 흔들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마당에서 그네가 혼자 심심하게 축 늘어져 있는 것도 모르 고. 빛 속에 드러난 혜신의 얼굴, 아무것도 감추지 못하는 잠든 얼굴. 안 보이는 저 멀리서 들리는 규칙적인 공사장 소음 사이로, 처음에는 작게, 점점 크게, 혜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혜신아, 혜신아......." (174)
여자아이 1, 2(소리): 김정훈!
문을 여는 혜신. 문 밖에는 정훈의 또래지만 키가 훨씬 큰 여자아이 둘이 깡패같이 버티고 서 있다.
여자아이 1: (약간 놀랐지만 뻔뻔하게) 누구세요?
혜신: 나......? 정훈이 사촌누난데.......
여자아이 1: 들어가도 돼요?
혜신이 "어어......" 하는 사이, 이미 밀고 들어오는 여자아이 둘. (209)
34 동양백화점 지하 식품 매장 안, 저녁
광활하고 풍성한 백화점 지하 식품 매장 안. 입구에서 카트를 끌고 가기 시작하는 네 사람. 혜신이 카트를 끌고 아이들이 뒤를 따른다.
혜신: 자, 오늘부터는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거만큼은 신나게 먹는 거야. 그, 그, 뭐냐, 미역국! 그거 한 솥만 다 먹고 나면, 건강에 좋고, 살도 안 찌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런 음식과는 이제 안녕이야. 우리는 좀 더 근사한 음식, 음식다운 음식, 먹으면 곧바로 살로 가는 고칼로리에,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벌컥벌컥 마시게 하는, 그런 강력한 음식을 먹을 거야. 비타민이나 칼슘 같은 건 깨끗이 잊어버려. 너네 엄마도 너네 놔두고 즐기러 갔으니까 우리도 그런 것쯤은 먹어도 되겠지, 응? 자, 자, 뭐 먹고 싶어? (218~219)
62 베란다, 낮
무덥고 흐린 날씨. 하늘 저쪽에서는 먹구름이 뭉게뭉게 일고 있다.
혜신(V.O.): 현진이는 그런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가 보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다 자기 자신의 일부인걸.
베란다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혜신.
혜신: 확 한번 쏟아졌으면 좋겠다. (268)
선영: 미안하다. 니가 이해해라. 내가 너를 바래다줘야 되는데....... 내가 지금 필름이 끊겼거든. 나는 지금 내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도 몰라.
택시가 와서 선다. 혜신은 선영을 억지로 밀어 넣지만, 선영은 막무가내로 혜신을 꼭 끌어안고 속삭인다.
선영: 오늘 밤은 너만 잊어주면 돼....... 고맙다.
혜신의 볼에 쪽 뽀뽀를 한 선영은 냉큼 택시에 오르더니, 혜신의 손을 물리치고 택시 문을 닫고는 열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혜신은 택시 문을 붙잡고 실랑이하면서,
혜신: 어떻게 혼자 가려구.......
선영은 한 손으로 택시 문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눈을 찡긋한다. 어쩐 일인지 멀쩡해 보이는 선영. 차가 출발한다. 창밖으로 빠이빠이 하는 손.
선영: 그럼...... 내일 수업 시간에 보자.......
"무슨 소리야......." 중얼거리며 혼자 피식 웃는 혜신. 선영이 탄 택시가 사라진 주위에는 지나가는 차들도 거의 없다. 발을 동동거리며 차를 기다리던 혜신은 모퉁이를 돌아 더 큰길로 뛰어나간다. (291~292)
이 책을 만드는 동안 나는 정말 25년 전의 교실로 돌아갔습니다. 그때의 친구들. 진실함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묻은 조그만 진실이라도 찾아주려고 했죠.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대부분 친구들에게서 배운 것들입니다. 그 친구들, 특히 은영이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310)
책은 정서경 작가가 첫 시나리오를 완성하던 시기, 막막함과 의구심, 기대, 욕심, 소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 시기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시작한다. 두 작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였고 전혀 다른 스타일을 따르고 있지만, 두 작품 모두 정서경 작가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책을 읽은 모두가 자기만의 캐릭터와 주제, 시공간을 만들어내고 싶은 강력한 욕구를 느낄 것이다.
“마침내 시나리오를 완성했을 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게 나구나. 어둡고 쭈글쭈글하지만 이게 나였어. 마치 엑스레이 같잖아. 이걸 쓰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생겼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아버지와 내 친구와 선생님과 맞은편 빌라에 사는 무당과…… 그리고 내 아기의 영혼. 진실함이 무엇인지 그렇게 알고 싶었는데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진실함은 자기 자신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걷어내고, 똑바로 바라본 자신의 얼굴.” (「들어가는 말」 중에서)
정서경 작가가 2001년에 완성한 시나리오 〈불쌍한 우리 아기〉는 어린이책 출판사에서 사무보조로 일하는 은희와 은희 어머니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다. 통속적이면서도 모호하고, 불편하지만 강렬한 모녀관계는 은희의 일과 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1990년대~2000년대 초반의 분위기를 풍기는 어린이책 출판사 사무실의 분위기가 기괴한 전래동화 같은 전체 이야기와 결합해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거칠고 원형적인(무의식적인) 몰입감을 선사하는 이야기 속에 정서경 작가 특유의 재치 넘치는 디테일들이 포진하고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겨울날 할머니가 화로 앞에서 들려주는 옛이야기 같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시즌의 동화 같기도 한 이 이야기는 여러 번 읽을수록, 마지막까지도 수수께끼 같은 긴 여운을 남긴다.
비슷한 시기에 쓰인 〈대전 일기〉 역시 1990년대 분위기를 가득 담고 있는 작품으로, 대학생 혜신의 가족과 친구 등에게 느끼는 감정을 다룬다. 방학과 대전이라는 한정된 시공간 안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가 장르의 규칙을 따르는 듯 따르지 않으면서 으스스하고 귀엽게 그려진다. 일상적이고 평온한 분위기 속에 중간 중간 깜짝 깜짝 놀랄 만한 장면들이 숨어 있어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독자들은 풍부하고 완결성 높은 이야기 속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을 느끼게 된다. 무언가가 끝내 밝혀지는, 미스터리 장르의 특징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의 진짜 미스터리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대전 일기」는 미스터리 구조를 갖고 있다. 내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는 꽤 솔직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비밀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고, 내가 비밀이 많은 이유는 나의 아주 큰 이야기들은 나 스스로도 잘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전 일기」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는 주인공의 마음에 숨겨져 있다. 나는 왜 대전에 다녀왔을까?” (「잇는 말」 중에서)
두 편의 중편 시나리오에 각각 일러스트레이터 김라온 작가(〈불쌍한 우리 아기〉), 박재인 작가(〈대전 일기〉)가 그림을 그려 넣었다. 김라온 작가와 박재인 작가는 각 작품을 깊고 세밀하게 분석한 후 가장 효과적으로 이미지화할 수 있는 장면들을 포착해 개성이 넘치는 일러스트레이션을 만들어냈다. 이 그림들은 영상화된 작품이 보여줄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김라온 작가의 그림들은 기묘한 옛이야기 삽화에 어울릴 듯하면서도 동시에 무척 세련되고 현대적이다. 강렬하고 초현실적인 붉은 톤의 그림들은 세부적인 묘사보다 전체적인 형상과 보는 사람들의 반응(충격)에 중점을 둠으로써 이야기와 조화를 이룬다. 박재인 작가의 그림들은 여름휴가를 떠올리는, 청량감 넘치고 귀여운 그림들이다. 인물의 표정과 미세한 동작들이 단조롭지 않은 구도 속에서 그림에 생명력을 더한다. 두 이야기만큼이나 대조적인 색감과 분위기, 스타일을 지닌 그림들이지만 한 권에 담김으로써 더 풍부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작가정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을 졸업했다. 2005년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시작으로 2006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2009년 「박쥐」, 2016년 「아가씨」, 2022년 「헤어질 결심」까지 박찬욱 감독과 주로 작업했다. 드라마로는 2018년 「마더」와 2022년 「작은 아씨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 『돌봄과 작업』(공저) 등이 있다.
언젠가 꿈꿔왔던 장면을 정확한 모양으로 그려내려고 한다. 홍익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인과 문학, 조각과 설치 등의 예술 분야를 탐구했다. 현재는 상업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한다. Bloomberg, Businessweek, ZEIT, Vox Media, 나이키코리아, 카카오 등과 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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