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지배자
2024년 08월 21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6월 2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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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 정보 ePUB (16.58MB)
- ISBN 979119359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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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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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을까
예지력, 멘탈 타임머신 능력에 관하여
과학자들은 지구의 수명을 약 46억 년으로, 최초의 생물체인 원핵생물이 약 38~41억 년 전에 기원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구상 생명의 역사를 대략 40억 년으로 상정하고 이를 다시 한 달로 축소해본다면, 최초의 영장류는 불과 10시간 전(약 6000만 년 전)에 진화했으며, 인류가 현생 침팬지와 마지막으로 조상을 공유하고 갈라진 시점은 고작 60분, 그러니까 고작 1시간 전(약 600만 년 전)이다. 지구의 역사에서 마지막 1시간 만에 일어난 격동은, 그 이전의 모든 변화를 합친 것보다 많을 것이다. 특히, 현생 인류인 사피엔스는 불과 2분 전에 등장했고, 30초 전에 동굴 벽화를 그렸고, 6초 전에 최초의 달력을, 2초 전에 최초의 컴퓨터를, 0.5초 전에 시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인류는 로켓을 타고 우주를 탐험한다.
2006년 옥스퍼드대학교 국제생물의학센터와 영국왕립과학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에서 세계적인 석학들과 함께 발제자로 참여했던 토머스 서든도프는 인간과 동물의 격차에 관한 세계적인 연구자다. 그는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격차가 예지력(foresight), 즉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밝혀내며, ‘멘탈 타임머신(mental time machine)’ 능력이 인간 진화의 핵심적인 원동력이었다는 개념을 최초로 제안했다. 인간의 정신은 사실상 일종의 타임머신으로 과거에 있었던 일을 한 번 더 경험하고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예측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미래를 설계하며 다가올 기회와 위험을 대비한다. 예지력은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로, 사피엔스가 예지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이래 지구는 놀라운 진보와 격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추천사를 쓴 진화학자 장대익 교수의 말대로 이 책은 “예지력에 관한 놀라운 과학적 연구로 가득”하다.
사피엔스를 지구의 정복자로 만든 예지의 과학
4차원, 시간의 개념을 발명하다
‘내일’은 하룻밤 사이에 발명된 개념이 아니다. 인류가 다른 동물에게서 볼 수 없는 정교한 수준의 예지력을 발휘했다는 증거는 180만 년 전 구인류인 호모 에릭투스가 제작한 양날손도끼에서 발견되었다. 양날손도끼는 적합한 원자재를 선택하고 대칭 모양으로 만들기 위한 정밀한 타격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 제작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미래를 보았고 도구 제작 기술을 공동체가 함께 연마했으며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현생 인류는 5만 년 전에 운반 도구를 발명했으며 4만 년 전부터 아름다운 동굴 벽화나 섬세한 조각품을 창작했다. 정교한 계획, 혁신, 추상적 사고, 상징의 사용으로 요약되는 ‘행동 현대성(modern behavior)’이 시작된 것이다. 예지력이 없으면 정교한 계획을 세울 수 없으며, 추상적 사고와 상징을 활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예지력은 혁신과 협력을 촉진하며 사회적 힘을 촉발시켰다. 즉 네 번째 차원인 시간의 개념을 발명해낸 인간 사회는 비약적인 문화적 진화를 이뤄냈다.
인간은 매일 아침저녁 같은 장소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7000년 전 독일의 고제크 사람들은 천문학 관측소를 만들어 태양의 일출과 일몰을 추적하며 내일, 한 달 뒤, 1년 뒤에는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해냈다. 4000년 전 바빌론 사람들은 12개월로 구성된 달력을 발명했으며 다양한 문화권에서 모래시계나 물시계 같은 최초의 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자와 쓰기를 발명한 인간은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을 합의하고 단기든 장기든 일정을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의 발명은 거래를 확장시키고 깨지기 쉬운 협력의 약점을 보완해냈다. 문자, 쓰기, 달력, 시계와 같은 멘탈 타임머신의 도구들은 과거를 기록하고 현재를 관리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며 혁신을 견인했다. 동물에게는 불가해한 세계를, 인간은 창조해냈다.
인류세, 예지력이 가져다준 재앙의 시대
돌이킬 수 없는 티핑포인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예지력은 인류사의 핵심 열쇠가 되었고 세상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인간에 붙여진 지구의 정복자라는 호명의 이면에는 끔찍한 비극과 잠재적 재앙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사피엔스가 지구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구인류를 비롯해 수많은 종이 멸종했다. 산업혁명 이후 사피엔스의 개체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200년 전에 10억 명이었던 인구가 현재는 8배로 늘었다. 반면, 인간과 같은 계통으로 분류되는 500종의 영장류 중 60퍼센트가 멸절했거나 멸종 위기에 처했다. 이제 지구에서 가장 흔한 포유류는 인간의 가축들이다. 모든 야생 포유류의 개체 수는 전체의 4퍼센트에 불과하다. 전체 조류의 30퍼센트만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으며 70퍼센트는 농장에 갇혀 있다.
예지력은 자주 실패하고 종종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집중하는 데 예지력을 발휘하는 까닭에 공동의 이익과 다가올 세대의 미래가 위협받는다. 인간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원자를 쪼개고 핵무기를 양산했다. 예지력은 자본주의와 결합해 끊임없이 자연을 개발하고 파헤친다. 필요 이상의 강철을 주조하고 플라스틱을 합성한다. 건물, 도로, 컴퓨터, 쓰레기 등 인간이 만들어낸 생산물을 모두 합치면 30조 톤으로 추정된다. 기후변화, 팬데믹, 대량 멸종과 생물다양성 감소, 대기의 에어로졸 축적, 광범위한 탄소 배출, 삼림 파괴, 해양 산성화, 플라스틱 오염, 핵전쟁 위기… 우리 행성은 지난 1만 년 동안 홀로세라는 안정된 상태에 있었으나 인간의 활동으로 자연의 평형상태가 뒤흔들리며 마침내 인류세가 시작되었다.
인류세를 살아가는 사피엔스의 예측 가능한 타임라인은 무척 절망적이다. 인간의 예지력은 도리어 인류세의 재앙을 앞당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인류세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예지력, 즉 멘탈 타임머신 능력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미래에 관해 생각하는 힘은 강력하지만, 미래에 관한 생각을 생각하는 힘은 더 강력하다고. 이 책은 멀지 않은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공멸의 디스토피아를 내다보며 멘탈 타임머신 능력을 어떻게 발휘해야 하는지에 관한 몇 가지 제안을 덧붙인다. 그리고 “기후변화, 핵전쟁, 생명공학적 팬데믹은 우리 스스로 초래하여 직면하게 된 위협의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고 단언하며 지금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티핑포인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거듭 상기시킨다.
1. 저마다의 타임머신
2. 미래의 창조
3. 자아의 발명
4. 뇌가 하는 일
5. 다른 동물은 그저 현재에 갇혀 있는가
6. 4차원의 발견
7. 시간여행의 도구
8. 우리 시대의 시간
감사의 말
사진 출처
주석
참고문헌
찾아보기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장기적 결과를 예견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로서 인간은 다른 생물에게는 없는 선택을 눈앞에 두고 있다. 미래를 가늠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오직 우리 인간에게 남다른 책임감을 부여한다. 예지력의 본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내기에 지금만 한 때는 없다. 우리 종이 지구의 미래를 바꾸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바로 이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예지력을 더 잘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역경에서 빠져나올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_한국어판 서문, 8쪽
인간의 정신은 사실상 일종의 타임머신이다. 이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한 번 더 경험하고,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없어도 미래를 상상한다. 사람들은 여름휴가를 꿈꿀 때마다, 다가올 저녁 데이트 생각에 설렐 때마다, 시험 결과를 곱씹을 때마다 끊임없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이동한다. 인간은 정신의 시간여행자이기에 외치가 그랬듯 미래를 자신이 계획한 대로 설계하며 기회와 위험을 사전에 대비할 수 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예지력은 어쩌면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러한 능력이 본질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인류가 걸어온 길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밝혀낼 것이다.
_1장 저마다의 타임머신, 14쪽
언젠가 진짜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지금 이곳은 미래에서 온 방문객들로 넘쳐나지 않을까? 세상을 떠난 위대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시간여행자들을 위한 파티를 열면서 파티 날짜 다음 날에야 초대장을 공개했다. 물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 시대는 시간여행자 입장에서 굳이 찾아올 만큼 흥미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닌데도 시간여행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건 4차원을 건너는 (적어도 과거로의) 항해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 시간여행은 오로지 정신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_1장 저마다의 타임머신, 25쪽
천문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칼 세이건은 쓰기가 시간을 가로질러 인간의 정신을 엮어놓은 방식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책이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가. 나무로 만든 이 물건의 납작하고 유연한 면에는 웃기게 생긴 길고 꼬불꼬불한 선들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읽게 되면 몇천 년 전 죽은 이의 마음속까지 들어갈 수 있다. 그가 수천 년을 건너와 내 머릿속에 직접 대고 또렷하고 나직하게 말한다. 문자는 서로 알지 못하는 먼 시대의 시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아마도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일 것이다. 책은 시간의 족쇄마저 끊어버린다.”
_2장 미래의 창조, 73~74쪽
사회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과거와 현재, 미래 중에 어느 것을 가장 지향하는지에 따라 사람을 분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설문 조사를 바탕으로 짐바르도는 동료인 존 보이드와 함께 과거와 현재의 ‘시간 조망(time perspectives)’을 다시 두 가지 하위 범주로 나누었다. 먼저 과거에 집중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감상주의자(“좋았던 그때의 행복한 기억이 자주 떠올라”), 또는 부정적인 비관론자(“나는 종종 내가 그때 삶을 잘못 살았다고 생각해”)로 나뉜다. 현재지향적인 사람은 쾌락주의자(“지금 신나게 사는 게 중요해”), 또는 운명론자(“이미 내 삶은 다 결정되었어”)로 나뉜다. 어떤 학자들은 미래지향적인 경우도 부정적인 관점(“내 인생의 목표를 어떻게 성취해야 할지 모르겠어”), 또는 긍정적인 관점(“꾸준히 발전하면 프로젝트를 제시간에 끝낼 수 있을 거야”)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_3장 자아의 발명, 93쪽
동물은 코알라나 쇠똥구리처럼 특수한 환경에 적응한 ‘전문종(specialist)’이거나, 쥐나 비둘기처럼 다양한 서식지에서 살 수 있는 ‘일반종(generalist)’이다. 반면에 능력을 바꿀 수 있는 두뇌의 특성 덕분에 인간은 전문종이면서 일반종일 수 있다. 모순된 말이지만 우리는 ‘일반 전문종(generalist specialist)’이다. 아이들은 서서히 예지력이라는 일반종의 능력을 획득한다. 이 능력 덕분에 다가오는 도전을 전문적으로 준비할 수 있다. 우리는 대체로 흔한 기술들을 평범한 수준으로 습득하지만, 교육과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문화는 개인의 예지력과 소통함으로써 진화하고, 그렇게 하여 상보적인 기술과 지식이 구성하는 사회를 만들어간다. 그 안에서 공동체는 구성원이 습득한 전문 기술의 혜택을 얻고 서로 끊임없이 협동한다. 인간은 자연선택이라는 ‘눈먼 시계공’을 통해서만 적응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앞을 내다보고 자신을 만들어가게 하는 두뇌의 진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_3장 자아의 발명, 114쪽
2016년 3월 19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이세돌 기사의 일생일대 대결이 시작되었다. 전 세계 1억 명이 넘는 시청자가 그날의 대국을 지켜보았다. (…) 이세돌은 세계 챔피언이자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바둑 기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번 대국의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 ‘알파고’였다. 알파고는 구글 딥마인드가 제작한 학습 알고리즘이다. 바둑은 커다란 격자판 위의 교차점에 두 선수가 번갈아 가면서 흰 돌과 검은 돌을 두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바둑판이 다 채워지면 누구의 돌이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는지 계산하여 승자를 결정한다. 규칙은 간단하지만 바둑판에서는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 수보다 더 많은 배열의 조합이 가능하다. 알파고의 알고리즘은 인간 바둑기사의 경기로 훈련하고 이후 자기 자신을 상대로 수백만 번을 경기하면서 학습을 강화한다. 동작과 실행은 긍정적(보상) 또는 부정적(벌칙)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강화학습을 하는 컴퓨터는 미래의 보상을 최대로 얻기 위해 비슷한 상황에서 가장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었던 행위를 반복한다. 알파고는 이세돌을 4 대 1로 이길 만큼 바둑을 제대로 배웠다. 컴퓨터가 처음으로 세계 챔피언을 이긴 기록이었다. 이세돌 기사는 2019년에 바둑계를 은퇴하면서 이런 식의 학습 프로그램은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 시스템의 강점은 생물학적 두뇌가 수백만 년 동안 개발시킨 논리를 활용한 강력한 학습 방식에서 온다.
_4장 뇌가 하는 일, 125~126쪽
동물은 현재에 집중해서 살아가는 것 같다. (…) 그렇다고 해서 이 동물들이 오로지 현재에만 묶여 있다는 뜻은 아니다. (…) 하루 또는 계절의 변화와 같은 장기적인 규칙성에 맞춰 행동하는 생물은 그렇지 않은 생물에 비해 상당한 이점이 있다. 혹독한 겨울철을 대비해 음식을 저장하는 청설모만큼 준비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도 없다. 청설모가 엄동설한에 먹을 것도 없이 배고픔에 떨고 있을 자신을 상상했다고 우겨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이 동물이 그런 이유로 먹이를 저장하는 것은 아니다. 겨울이 뭔지도 모르고 생전 겪어본 적도 없는 어린 청설모도 식량을 모아서 쟁인다. 즉, 청설모가 통찰이 아닌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청설모는 겨울이면 먹이가 부족해지는 반복된 역경에 대한 행동적 해결책을 진화시킨 것이다. 이런 식의 적응은 이주하는 동안 먹지 못할 것을 대비해 고래가 몸에 지방을 저장하는 것이나 산불이 지나가면 사용할 수 있도록 오스트레일리아의 나무들이 잔뜩 불거진 나무 덩이줄기 안에 에너지를 저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동물은 앞으로 다가올 어둠과 추위를 굳이 떠올리지 않고도 밤과 겨울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행동 뒤의 메커니즘은 평소에는 든든하지만, 상대적으로 융통성이 부족하여 새로운 고난이 닥치면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_5장 다른 동물은 그저 현재에 갇혀 있는가, 157~158쪽
‘내일’은 하룻밤 사이에 발명된 개념이 아니다. 어떻게 우리 조상이 네 번째 차원인 시간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먼저 저 방대한 시간 동안 서서히 일어난 변화부터 생각해야 한다. 진화의 시간을 나타내는 큰 수들은 크기를 어림하기가 어렵다. 현생 인류와 침팬지가 공유하는 마지막 공통 조상이 600만 년 전에 살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이것만도 실로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더 먼저 일어난 중요한 사건과 비교적 최근이지만 여전히 아주아주 먼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있다. 이 많은 일들을 모두 그저 옛날 옛적이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여러분이 이 심원의 시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생명의 40억 년 역사를 한 달로 축소해보자. 이 압축된 연대표에서 최초의 다세포생물은 2주 전에 나타났다. 그리고 진화는 7일 전에 성(性)을 창조했다. 유성생식에 이어서 어떤 동물은 마침내 약 3~4일 전에 척추가 발달했다. 최초의 포유류는 고작 어제 나타났으며 영장류가 속한 포유류는 불과 10시간 전(실제로는 약 6000만 년 전)에 진화했다. 우리가 현생 침팬지와 마지막으로 조상을 공유하고 갈라진 이후의 긴긴 시간도 이 척도에서는 고작 60분 전이다.
저 마지막 한 시간 동안 우리 조상은 불을 능란하게 다루게 되었고 마침내 불을 사용해 로켓을 타고 우주로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 우리 자신, 호모 사피엔스는 이 축약된 연대표에서 지금으로부터 2분 전에 이 행성에 처음 나타났다. 동굴 벽화는 30초 전에 그려졌고, 최초의 태양력이 나온 건 6초 전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계산 장치인 고대 안티키테라 기계는 2초 전에, 기계시계는 0.5초도 안 되는 시간을 남기고 발명되었다. 최근에 호모 사피엔스가 이뤄낸 성과만 보면 우리가 대단한 별종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상 우리는 선사시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와 매우 유사한 다른 이족보행 호미닌 동료와 지구를 공유했다.
_6장 4차원의 발견, 197~198쪽
매일 아침저녁 같은 장소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면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태양이 지평선과 교차하는 곳을 표시해두고 시간에 따른 변화를 기록하면 매년 반복되는 패턴을 알아낼 수 있다. 약 7000년 전, 현재 독일의 고제크 마을에서 어느 헌신적인 사람들이 바로 그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관측 장소의 중심에서 약 37미터 반경으로 두 개의 원호를 따라 통나무를 세웠는데 태양의 궤적이 역전되어 전에 뜨고 지던 지점을 반대로 따라갈 때까지 태양의 일출과 일몰을 추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전환점이 하지와 동지, 즉 1년 중에서 가장 낮이 긴 날과 짧은 날이다. 이처럼 1년의 패턴을 기록하고 난 후 사람들은 내일은 어디에서 해가 뜨고 질지, 한 달 뒤에는, 1년 뒤에는 어디에서 해가 뜨고 질지 예측하게 되었다
_7장 시간여행의 도구, 239쪽
지난 1만 년 동안 우리 행성은 홀로세라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인간의 활동이 이런 평형상태를 뒤흔들어 마침내 인류세를 불러왔다. 우리는 기후변화, 대기의 에어로졸 축적, 해양 산성화, 대량 멸종까지 돌이킬 수 없는 티핑포인트 앞에 있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실, 예컨대 동물과 식물, 비와 계절과 같은 것들은 우리가 좀 더 지속 가능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급속히 변화할 것이다. 광범위한 탄소 방출, 산림 파괴, 플라스틱 오염처럼 해롭다고 알려진 활동을 대폭 줄이지 않았을 때 세계가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라. 만약 우리가 지금 의존하는 에너지원의 전면적인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서식지를 보호하거나 회복하려 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경제 체제를 세우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홀로세의 상대적인 안정성을 언제까지나 갈망하게 될 것이다.
_8장 우리 시대의 시간, 300쪽
다른 동물들도 사람처럼 서로 만나면 인사한다. 침팬지는 “안녕(hello)”이라고 말하는 듯한 소리를 내기도 하고 심지어 포옹을 하거나 뽀뽀도 한다. 그러나 제인 구달이 지적한 것처럼 이들이 “잘 가(goodbye)”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인간은 나와 당신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의 길이 내일 다시 교차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는 유일한 동물인지도 모른다.
_8장 우리 시대의 시간, 321쪽
“인간의 예지력에 대한 놀라운 과학적 연구로 가득한 이 책은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다짐하는 모든 시간여행자를 위한 안내서다!”
- 장대익, 스티븐 핑커 추천!
그러므로 책이 여기 있다
“책은 시간의 족쇄마저 끊어버린다.”(74쪽) 칼 세이건의 말이다. 이 책의 원고가 몇몇 이들을 거쳐 내게로 왔을 때, 마침 온갖 회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감을 앞두고 몸살을 앓았다. 회의와 불안이 겹치면 몸은 통증을 감각한다. 책 만드는 일이 좋아서 여기까지 왔지만 여전히 나는 편집자의 일이 아닌 것들에 시달린다. 고루한 미팅이 이어지고 숱한 일들에 쫓겨 하루가 속절없이 흘러간다.
조바심이 일렁이면 잠시 멈추는 것이 상책이다. 편집자의 일을 내려놓고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최초의 독자가 되어 원고를 읽는다. 좋다. 다정한 선의를 무시로 구사하는 번역자 선생님의 메일을 읽는다. 좋다. 책을 핑계로 우정을 일삼는 나의 디자이너를 생각한다. 좋다. 동료가 만드는 다른 책의 원고를 살핀다. 좋다. 우리가 함께 발견하고 자못 흥분했던 미래의 책을 떠올린다. 좋다. ‘시간의 족쇄마저 끊어버릴’ 책일지라도 중쇄를 찍지 못할 수 있다는 것. 그 책을 세상에 내놓기로 한 결심을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고는, 좋아한다. 편집자의 일을 잠시라도 내려놓고 싶었는데 나는 도무지 편집자의 숙명을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좋다.
칼 세이건의 아름다운 문장을 거듭 읽는다(저 문장 앞에 다섯 문장이 더 있다!). 내일을 발명한 인간은 지구를 정복했지만 숙명처럼 불안을 앓는다. 시간의 족쇄마저 끊어버릴 수 있어야 비로소 시간의 지배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책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오늘의 불안을 물리치기로 한다.
“책이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가. 나무로 만든 이 물건의 납작하고 유연한 면에는 웃기게 생긴 길고 꼬불꼬불한 선들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읽게 되면 몇천 년 전 죽은 이의 마음속까지 들어갈 수 있다. 그가 수천 년을 건너와 내 머릿속에 직접 대고 또렷하고 나직하게 말한다. 문자는 서로 알지 못하는 먼 시대의 시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아마도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일 것이다. 책은 시간의 족쇄마저 끊어버린다.”(본문에서)
작가정보
(Thomas Suddendorf)
퀸즐랜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독일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오클랜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간 정신의 본질과 진화에 관한 연구로 호주사회과학원, 호주심리과학협회, 미국심리과학협회 등에서 여러 상을 수상했다. 자아, 시간, 정신의 이해에 중점을 두고 진화심리학과 인지과학을 연구하며, 그의 논문은 《사이언스》 《가디언》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뉴사이언티스트》 등의 매체에 실렸다. 2006년 옥스퍼드대학교 국제생물의학센터와 영국왕립과학연구소가 함께 개최한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심포지엄에서 인류학·생물학·신경과학·의학·뇌과학·기술과학·철학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석학들과 함께 발제자로 참여했다. 첫 책 《간극: 우리를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것의 과학(The Gap: The Science of What Separates Us from Other Animals)》(2013)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근본적 이유에 대한 과학적 탐구로, 《퍼블리셔스 위클리》 《가디언》 〈BBC〉 등으로부터 올해의 과학책으로 선정되었으며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천연물과학대학원과 미국 조지아대학교 식물학과에서 공부했다. 어려운 과학책은 쉽게, 쉬운 과학책은 재미있게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옮긴 책으로 《파브르 식물기》 《바이러스, 퀴어, 보살핌》 《암컷들》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 《언더랜드》 《허리케인 도마뱀과 플라스틱 오징어》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10퍼센트 인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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