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스
2024년 08월 13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7월 24일 출간
- eBook 상품 정보
- 파일 정보 ePUB (4.26MB)
- ISBN 9791160516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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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발견
말 없는 로봇
배 위의 피아니스트
비밀과 진실
불시착한 조종사
전투 준비
타종
빛을 따라서
작가의 말
10쪽_모든 것이 지워진 세상에서 혼자 눈감게 될 모양이라고 정민은 매일 밤 생각했다. 골똘히 생각하며 한숨 쉬다가도 아니야, 그래도 혹시 몰라, 하며 아랫입술을 윗니로 누른 채 머리를 굴렸다. 살아남자. 가능하면 오래.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11쪽_그날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지구의 대기권 바깥에서 오지 않았다. 세상을 끝낼 절체절명의 위기는, 지난겨울 깊은 바닷속에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67쪽_등탑 창으로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져 내렸다. 조금 전 정민이 서 있던 자리에 빛이 내리쬐는 것을 지켜보던 주주는 그 자리의 온도를 재었다. 그리고 계산했다. 울던 사람이 지나간 자리를 조금쯤 데우는 햇빛에 대해서. 소리 없이 우는 사람의 몸짓에 대해서.
70쪽_정민은 조용히 짐작했다. 바다 위에서 피아노를 쳤다는 로봇 또한 바다에서 소중한 이를 잃었음을. (…) 멀미 같은 건 느끼지 못할 로봇인데도 뜻밖의 이별 앞에서 오류라도 발생한 것처럼 바로 설 수 없는 때가 있음을.
92쪽_그리고 지금 정민은 유민을 따라서, 지금은 여기 없는 언니를 따라서 등대를 지키고 있다. 정민을 쉽게 떠날 수 없는 처지로 만든 건 괴생명체뿐만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족쇄는 애도의 이름을 갖고 있는 한편, 책임자의 이름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107쪽_“사숙도 등대를 지켜 내고, 여기서 주주랑 같이 되도록 오래 살 거예요.”
어떤 가능성은 느닷없이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 버린다. 그것이 마음에 들든 탐탁하지 않든 고민하느라 낭비할 시간이 더는 없다.
112쪽_오늘 사숙도 등대가 바닷길을 밝힐 도구는 무신호지만, 하늘길을 밝히는 건 빛이 될 것이다. 항해하는 이들을 위해 빛을 내던 등대는 이제 비행하는 이들을 위해 불빛을 낼 모든 준비를 끝냈다.
113쪽_뜻밖에도 나는 언니만큼 바다를 좋아하는 모양이지. 정민은 저도 모르게 실실 웃었다. 그러니 (…)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하는 거겠지. 더 많은 계절 동안 바다를 보기 위해서. 슬퍼하고 서러워하는 일을 끝내고 마침내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결심을 발판 삼아서.
125쪽_어느 순간 정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니야, 하고 중얼거렸다. 파로스가 아니다. 이제는 꺼지고 없는 등대의 불빛은, 정민이 현재 제일 사랑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사랑할 등대의 불빛이었다.
128쪽_이제 사랑이든 희망이든 바다 너머에만 있는 게 아니잖아. 여기 찾아왔잖아. 근영의 투정에 정민은 실없게 웃었다. 웃음이 나온다. 지금 여기에 살아서 나는 웃고 있다. 혼자 아닌 셋이서.
소녀, 내일이 되다! 청소년을 위한 SF 시리즈, ‘내일의 숲’ 열세 번째 책 『파로스』는 제5·6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우수작을 수상한 이필원이 오랜만에 내놓은 SF 청소년 소설이다. 작가는 개체와 개체 사이에 떠도는 소중한 감정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유심히 관찰해 왔다. 그리고 그 호기심 많고 다정한 시선을 장착한 채로 『파로스』에서 그 자체로 귀중한 타자의 존재 가치를 포착한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아름다운 등대섬을 배경으로, 서로를 통해 비로소 떠나보낸 이를 애도하고 희망을 찾는 세 주인공의 모습이 서정적으로 그려진다.
벌써 90일째, 정민은 사숙도 등대에서 홀로 지내고 있다. 바다에서 올라온 괴생명체의 습격과 함께 사라져 버린 언니를 기다리며. 밀려드는 고독감에 바다 건너를 그리워할 무렵, 두 존재가 섬으로 흘러든다. 유람선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다 바다로 침몰한 로봇 주주, 그리고 불타는 전투기에서 탈출해 불시착한 공군 근영. 셋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떠나보낸 이들을 추모하고 새날을 도모한다.
공간을 통해 극대화되는 고독과 상실의 공포
소중한 이를 잃었을 때의 망연함과 허무는 겪어 보지 않고는 알기 어렵다. 심지어 상실로 인해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면 그 공포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파로스』는 어떤 말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상실에 대한 아픔과 그에 동반하는 깊은 고독을 상징적 공간과 촘촘히 꿰어 숨 막힐 듯 생생히 묘사한다.
주인공 정민은 언니 유민의 실종 이후 외부와의 모든 연락이 끊긴 채 작은 섬 사숙도의 등대에서 홀로 지낸다. 유민과 함께하던 사숙도라는 공간은 계속해서 정민에게 유민의 부재를 상기시키고 고독감을 증폭시킨다. 정민은 몸을 움직이려 과장되게 무릎을 들어 올리며 걷고, 유민의 환청을 듣고, 혼잣말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런 온갖 몸부림에도 고요하고 기척 없는 바다는 정민이 놓인 상황을 몸서리쳐지도록 실감 나게 만든다.
한편 정민과 마찬가지로 주주, 근영은 각기 다른 공간에서 소중한 이를 잃어버리고 등대로 흘러든다. 주주와 근영의 상실은 각각 바다와 하늘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유람선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로봇 주주는 배가 난파되어 망망대해에 홀로 표류했고, 전투기 조종사 근영은 동료를 모두 잃고 드넓은 하늘 위에서 홀로 비행해야 했다. 광막한 공간을 배경 삼아 혼자 남은 이들의 모습은 별다른 말이나 행동 없이도 그 자체로 고독이라는 감정을 표현한다.
이들의 체험에 동참함으로써 독자는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겪게 될 상실에 공감하고 내면의 고독을 정면으로 마주할 힘을 얻는다. 『파로스』는 고독을 들여다보는 것이 단순히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고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중요한 경험임을 일깨운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더 나다운 내가 되기
주주는 정민에게 자신의 추억이 담긴 노래 〈Beyond the sea〉를 반복 재생해 들려준다. 그리고 바다 너머의 소중한 이를 그리는 이 노래와 함께 정민은 유민을 마침내 떠나보낸다. 이제 정민은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유민이 좋아하던, 사라진 파로스 등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사숙도 등대임을 안다. 유민은 항상 정민에게 강해지라고 했지만, 정민은 자신이 유민의 방식으로 강해질 수 없음을 안다. 정민은 바다 너머에서 온 주주와 근영의 존재로 인해, 바다 너머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었던 유민을 애도하고, 이제는 바다 너머의 새 사람들을 맞이하기로 한다. 유민을 따라 수습 등대원이 되었던 정민은 그렇게 비로소 사숙도 등대의 정식 등대원이 될 준비를 끝낸다.
등대에 모인 이들에게 상실을 안겨 준 건 심해에서 올라온 괴생명체다. 육지에서는 투명해지고 전자기파를 무력화하는 이 괴물은 불가해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상실의 늪에 빠뜨렸다. 그러나 이제 사숙도 등대와 여기 모인 사람들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으로 무장한 정민은 더 이상 부조리 앞에 무력하지 않다. 주주와 근영을 통해 알게 된 희망을 섬 바깥의 생존자들에게도 전하겠다는 마음으로, 정민은 괴생명체에 맞설 작전을 세운다. 근영 또한 정민으로부터 용기를 얻고 작전에 동참하기로 한다.
이렇게 서로가 곁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그저 인지하는 것만으로 이들은 사라진 것을 애도하고 미래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작전이 끝나면, 주주도 이제 몇 번이고 반복해 재생하던 〈Beyond the sea〉 대신 다른 노래를 들려줄 것이다. ‘이제 사랑이든 희망이든 바다 너머에만 있는 게 아니’(128쪽)라, 지금 여기, 사숙도 등대에 가장 충만할 테니까.
‘내일의 숲’ 시리즈 소개
‘내일의 숲’은 여성 청소년이 주인공인 SF 시리즈다. ‘바위를 뚫는 물방울’ 시리즈를 통해 꿈을 이룬 여성들로부터 희망의 목소리를 빌려 어린이에게 전해 온 씨드북이, 이제는 SF라는 장르를 빌려 청소년과 함께 미래를 도모하고자 한다. 새로운 세상에서 활약하는 소설 속 소녀들처럼, 독자 여러분도 내일의 주인공이 되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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