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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 지음
지식과감성

2023년 12월 18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12월 1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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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3921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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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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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에게 날아든 백지 편지들은 일종의 불가해한 ‘지목’이다. 지목하는 손가락은 질문 자체이며, 삶을 통째로 세워 두고 가리키는 그것은 한 인간에게 가해지는 최고의 폭력이다. 예컨대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마태를 가리키는 예수의 손가락은 세리의 삶을 무참하게 짓뭉개고 전복하는 위대한 질문이자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백지처럼, 질문에는 내용이 없다. 질문 그것이 모든 것이기 때문인데, 대답하기 위해서는 역시 모든 것을 제시해야 한다. 지리멸렬한 삶이란 언제나 덜 제시하고 돌아서고 만 자의 등에 있다. 그러나 지목 이후, 노인은 폭력의 시간에 휘말리도록 스스로를 떠민다. 70년의 삶 전부를 질문에 답하기 위한 논거로 제시함으로써 가장 아름다운 파국을 향해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결국, 파국이란 처음부터 예비된 것이었고, 지목 자체였으며, 다름 아닌 삶의 진면목이었음이 드러난다.
1. 편지들
2. 난기류
3. 청년의 머리, 노인의 몸
4. 그림 밟기
5. 나르시스
6. 종소리
7. 변신
8. 조우
9. 말 더듬는 입
10. 봄의 제전
11. 웃음

삶이 우연들 속에 내팽개쳐져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불안을 떠안으려는 의지는 세속적인 성과들을 소유하려는 욕망 앞에서 맨 먼저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드물게 그러한 의지가 도달한 최종 목적지, 불안한 투쟁이 끝내 성취해 낸 숭고한 인간성의 구현을 목격하게 되는데, 바로 예술에서다. 예술은 우연과 폭력과 불안과 의지가 삶의 비의이자 총체임을 내내 미학적으로 강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우연의 계기에 자신의 삶을 방치할 때, 예술 작품과 조우하며 폭력적인 시간 속으로 더 휘말려 들어가는 것은 단지 문학적 장치로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삶을 겪고 있는 것이며, 게다가 정당한 인간적 심급에서 미학적으로 진정 그것을 겪고자 하는 것이다.

한 달여에 걸쳐 열 통가량의 편지를 받았다. 이삼일의 간격을 두고 편지들은 한 통씩 한 통씩 배달되었다. 내 이름이 타이핑되어 있었으나 보낸 사람은 없었다. 열어 보았을 때 그저 백지가 들었음을 확인하고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백지 편지가 거듭되면서 묘한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아들일까.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적어도 지금의 그 아이는 반복되는 침묵 앞에 나를 세워 일말의 회한이라도 느끼게 할 만큼 부지런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 누구일까. 누가, 나에게 이토록 할 말이 많은 것일까. (p.9)

어쩌다가 나는 오직 아버지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일까. 판사나 명예 따위를 대물림하려는 졸렬한 욕심은 도대체 언제부터 나라는 사람을 아버지로 바꿔 놓았을까. 아버지가 되고 나서 부린 욕심이라는 비겁한 거짓말을 정말이지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를 모르지 않으며, 내가 나의 본성을 이기려 해 본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아니라 한순간도 빠짐없이 아버지였고 판사였다. (p.24)

이어폰을 귀에 꽂고 플레이 버튼을 찾아 눌렀다. 누르자마자, 귓속으로 미친 듯이 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뭔지 모르는 관악기들이 쉴 새 없이 별을 뿜어냈다. 밤의 하늘이 요동을 치고 순식간에 마드리드가 사라졌다. 누워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조금도 무섭지가 않았다. 비행기에서 당장 끝장나 버릴 것만 같았던 어떤 일이 지금, 진정 끝장이 나 버린 것만 같았다. 끝장이 난 다음에, 내가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p.212)

작가정보

저자(글) 김환

201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폭발」이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 자코메티의 조각, 바흐와 베토벤과 말러와 스트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그리고 카프카의 글에 영향받았다. 단편집 『익살스러운 심장』(2022)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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