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는 책들
2024년 01월 25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09월 06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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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979117152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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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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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 『인간실격』의 요조가 회식 자리에 앉아있다고 상상해 보자. ‘익살’이란 가면을 쓰고 그 시간을 용케도 잘 버텨내면서 내면에 큰 수치심과 괴리감, 시대와의 불화를 느끼지 않았을까. 아니면 요조가 미친 척 발광에 실성한 척을 해대서 그 술자리는 일찍 파해 2차까지 가지 않아 다행스러울 수도 있다. 물론 다음날 내가 대신 그 민망한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고통은 있다.
아니면 『빨간머리 앤』의 주인공 앤을 보내 하루종일 수용초과의 투머치 토크를 건네, 상사가 다시는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지 않게 되는 건 어떨까? 이 또한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책 속의 어떤 주인공이든 오늘의 나를 대신해 회사 생활을 한다면 일은 망치겠지만 하루를 망치지는 않겠다는 묘한 쾌감이 든다.
일터에서 비루해지고, 초라해지고, 남루해지며, 처참과 비참, 비탄을 느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내 삶의 장르 자체가 회색빛으로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근사하게, 당당하게, 멋있게, 직업윤리를 지키며 자아 성장을 도모해 줄 것이라 믿었던 무지갯빛 일터는 신기루처럼 흩어져버렸다.
바람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박은빈이 되고 싶지만, 현실은 〈나의 아저씨〉의 아이유다.
날카로운 굴욕과 치욕, 모멸과 너절함이 마음을 땅 밑으로 꺼지게 한다. 뜻대로 되지 않는 삶과 생계에 대한 중압감이 허무와 절망으로 누를 때. 그럴 때 저자는 순전히 도피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펼친다. 할 줄 아는 게 읽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일 생각 좀 떨쳐버리고 싶었으니까.
이 책은 그런 때 눈물을 삼키며 읽은 ‘도망간 곳에서 찾은 활자’들의 기록들이다.
비정한 일터에서 처절히 무너진 '일개 독자'의 '읽는 인생'
책 속에 등장하는 활자들의 행진은 고작 2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흉포한 일터에서 찢기고, 할큄당하고, 쏘이고, 난도질 당하다 너절해진 저자를 안아주고 얼러주며 위로한 도서들이다.
저자가 읽은 책들은 일하는 고통에 휩싸인 인간에게 자기계발서나 처세술 서적이 그러하듯, 똑 부러지게 ‘이렇게 하세요’ 라는 직접적인 해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답 같은 건 없다고 눙을 치며 슬그머니 뭉개기만 한다. 해답을 구하는 독자에게 더 난해한 질문과 난수표 같은 반응으로 응수해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일터에서 고통을 해소하는 수단으로서 책을 읽는 것은 가성비가 떨어져도 한참 떨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생산성 낮은 ‘도피성 독서’를 통해 단언컨대 ‘일하는 인간’으로서 조금 더 단단해지고 명료해지며 단호해졌다고 말한다.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일의 고통을 조명했다. 시작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대한 독후감이다. 저자는 일터에서 광대가 되어야 하거나, 허위와 가식에 환멸을 느낄 때 『인간실격』 요조의 포효를 떠올린다. 『라인: 밤의 일기』는 일터를 장엄한 시야로 볼 수 있게 하고, 『비타민』은 남루한 하루치의 노동에 깊은 소외를 느끼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위안을 준다.
2부는 일터에서의 대인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야간비행』은 워커홀릭 상사들의 내면심리를 초고밀도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다. 『우신예찬』은 인간은 본디 본성이 불완전하고 어리석으니, 그깟 인간에 상처받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스토너』와 『관리의 죽음』은 사회생활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오해와 갈등 상황에서 어떻게 내면을 지킬 수 있는지 알려준다.
인정 욕망에 대해 말하는 3부에서는 내 안의 음습한 마음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위로해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올까』가 함께 한다. 4부는 매너리즘을 다뤘다. 『외투』를 읽으면 자아도취감이 얼마나 인간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 알 수 있고, 『세일즈맨의 죽음』은 어딘가 불안정한 삶터와 일터가 인간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지를 간접 체험하게 한다.
5부는 일의 끝과 시작에 대해 말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일보다 더 중요한 삶의 가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집요하게 묻고, 『그림자를 판 사나이』, 『단식광대』는 일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고 묵직하게 사색할 수 있게 한다.
현관문을 여는 것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출근길은 늘 변함없는 루틴임에도 이상하리만치 낯설고, 껄끄럽고 요원하다. 그 외롭고도 지난한 길에 누군가 우리 손을 잡아준다.
'걱정마, 오늘도 내가 같이 가 줄게.'
마치 전장을 나가는 신참 보병처럼 비장한 내 어깨 언저리엔 소총대신 '오늘의 책' 한 권이 들어있는 가방이 달랑거린다.
'출근하는 책들'과 함께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런 하루란 말인가.
당신은 일터에서 울어본 적이 있나요?
1부. 나를 붕괴시키는 일
건배사에 학을 떼는 당신에게 _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1지망이 아닌 일을 하고 있다면 _이진경 『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
저 이런 일 할 사람 아닌데요 _레이먼드 카버 『비타민』
익스트림 롱쇼트로 일을 바라보면 _조제프 퐁튀스 『라인: 밤의 일기』
#퇴근길 농담 _일이 내면의 바다를 위협할 때는
2부. 인간관계가 어렵다면
똑부 꼰대 상사의 내면이 궁금하다면 _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야간비행』
우리는 다 별로니 상처 주지도 받지도 말자 _에라스무스 『우신예찬』
일터에서 필생의 악연을 만난다면 _존 윌리엄스 『스토너』
오해하고 할퀴는 직장 인간관계의 본질 _안톤 체호프 『관리의 죽음』,『공포』
#퇴근길 농담 _업무 메신저 쿠션어 사용법
3부. 인정받고 싶은 마음
일터에서 죽기 살기로 용기내야 할 때 _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동료가 망하면 기분이 좋아요 _티파니 와트 스미스 『위로해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올까』
현대판 계급 지도, 직업등급표에 기죽지 않으려면 _스탕달 『적과흑』
나는 예뻐야 하는가, 유능해야 하는가 _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이갈리아의 딸들』
#퇴근길 농담 _상사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4부. 매너리즘에 빠진 그대에게
사람을 뒤틀리게 만드는 일 _니콜라이 고골 『외투』
원치 않는 부서로의 인사 이동이 괴롭다면 _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퇴근하고 유튜브와 인스타그램만 하는 당신에게 _솔 벨로 『오늘을 잡아라』
일의 야만과 모순에 어떻게 저항해야 하나 _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반복은 광휘를 만든다 _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퇴근길 농담 _일터에 이데아는 없다
5부. 끝과 시작, 다시 일
죽기 전에 과연 일 생각이 날까 _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욱해서 퇴사하고 싶을 땐 _아데레르트 폰 샤미소 『그림자를 판 사나이』
우리는 일로 연결되어 있다 _조지 오웰 『위건부두로 가는 길』
일터의 연극은 언젠가 끝난다 _프란츠 카프카 『단식광대』
자, 이제 눈물을 뚝 그치고
일하는 사람들은 일터에서 그렇게 스스로를 연소시키며 산다.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 순수하고 맑았던 얼굴에, 거짓과 위선의 가면, 허위와 기만의 육중하고 둔탁한 가면을 쓴다. 가면은 차갑고 무거워서 우리의 피부를 짓누른다. 어떤 사람은 가면을 하도 오래 써서 가면이 나인지 내가 가면인지 모르게 변해간다.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다. 요조는 그것이야말로 인간 ‘합격’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가면을 출근할 때 쓰고 퇴근할 때 벗지 못하면 인간 ‘불합격’, 인간 ‘실격’ 처리가 된다. _23p
일하는 삶을 영화로 만들면, ‘하드보일드’* 장르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한참 일이 안 풀리고 힘들 때 그랬다). 세계는 비정하고 무정하다. 숭고한 가치도 어떤 선 의지도 왕창 무너져 내렸다. 모래알을 한 움큼 삼킨 듯 건조하고 텁텁하며 희망 없는 세계 속에 우리는 무표정하게 살아간다. 기계적으로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유령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 속에 잿빛이 된 얼굴의 나도 있다. 치정, 복수, 살인, 마약 같은 극적 요소는 없지만, 그저 지리멸렬하게 일상은 굴러갈 뿐이다. 허무와 퇴폐가 지배하는 세계다. 그러다 갑자기 사소한 악들을 연쇄적으로 맞딱뜨린다. 나는 속절없이 와르르 붕괴된다. _33p
‘소설가들의 소설가’로 알려진 레이먼드 카버는 많은 단편소설에서 미국 노동자계급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했다. 거기엔 한 줌의 낭만도 환상도 없다. 음울하고 고되고 지루하고 엄혹한 노동 속에서, 만만치 않은 세계가 주는 비참과 굴욕을 참아가며 사투하다가 무너지는 인간의 마음만이 있다. 그런 그는 십대 후반에 결혼했고, 항상 궁핍했다. 일찍 얻은 두 아이들의 양육비를 대느라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 했다. 그 시기 시간을 쪼개 쓴 단편소설이 오늘날 미국 단편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것은 모든 소설에 그가 삶으로서 부딪히고 겪어낸 생생한 체험들이 녹아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그가 쓴 소설이기에, 더 묵직하게 읽히는 이 소설을, 오늘 일터에서 비탄과 초라함을 느낀 당신에게 권하고 싶다. _40p
내게 ‘독서’란 행위는 이렇게 시시각각 변해가는 내 바다를 항해하면서, 내 고통을 돌보고 자정하는 시간과 같았다. 오늘은 산성비가 무섭게 쏟아져내렸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그 산성의 ph가 얼마였고, 섞인 원소가 무엇인지. 불순물의 양은 얼마나 됐고, 내 마음의 바다는 얼마나 제 농도를 잃었는지, 간혹은 현미경을 들고, 리트머스지를 대보며 검사를 해봐야 했다. _ 52p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의 스토너를 그런 때 떠올린다. 질 가능성이 높거나 이기든 지든 그 전쟁의 상흔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도 불구하고. 일터에서 이 건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싸워야만 한다고 생각될 때, 스토너의 인생 ‘싸움장면’을 보고 기를 모으게 된다. 평소에 소심하고 착한 사람이 성이 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본때를 제대로 보여주는 주인공을 보면 묘하게 대리만족을 하게 된다. 모든 일에 어설프고, 소극적인 스토너지만 싸워야 할 때는 한치의 물러섬이 없다. 타협도 양보도 절대 하지 않는다. _77p
안톤 체호프의 단편집 『관리의 죽음』을 읽다 보면 관계의 오해에서 오는 번민이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묘한 안도감이 든다. 그리고 처연해진다. 오해 자체가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 같아서. 그건 관계의 본질이고 불가항력적인 조건 같아서. 우리는 아무리 많이 맥주를 마시고 뒷풀이를 가고,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해도,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것 같아서. _87p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이 망하면 통쾌한 마음’이란 용어는 독일어에 실제로 존재한다. 우리말로 “고소함” “쌤통”으로 쓰인다. 솔직하지만 내밀한 감정이어서 우린 흔히 쓰지 않지만 이렇게 명징하게 존재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나뿐만 아니라 다수가 이런 감정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을 폭로한다. *『위로해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올까』를 쓴 티파니 와트 스미스는 쌤통의 감정은 꽤나 보편적이며, 특히 인간의 욕망이 발산되는 대중매체, 정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_115p
한탸에게 일터는 그의 고유의 순정을 지켜주는 은신처이자 피난처 역할도 한다. 전쟁으로 금서들이 파괴되고, 무리를 지은 인간들이 협잡하고 공격하는 시대에 그가 일하는 지하작업장은 바깥 세계로부터 차단돼있다. 시끄러운 포격음도 사람들의 아귀다툼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폭력과 혐오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고요한 곳. 그는 그 곳에서 책을 읽고 교양을 쌓고 지식을 흡수하며 ‘자신만의 순정’을 지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행복감을 경험한다. 일과의 일체감, 환희와 낭만을 느낀다. 길고 혹독한 노동 시간 중 실낱같은 희망을 주는 그만의 축제이자 환상적인 ‘제의’ 같은 시간이다. _180p
‘책은 우리 내면의 얼음을 깨는 도끼’라는 말을 믿는다. 도끼를 하도 맞아서 풍화되고 침식되다 못해 포슬포슬한 모래 알갱이가 된 독자 한 명이 여기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도끼로 맞고, 자기 갱신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 과정을 통해 지켜야 하는 진지함과 엄정함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우리는 범속해지지 않은채, 정글 같은 일터에서 고유성과 개성을 지키면서 단독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과 같이 행간에 머물고, 책의 척추를 어루만지며 다시금 사유해 본다. 당신과 나, 우리가 지금 느끼는 어떤 고통에 가 닿길 바라며. _231p
“너무나도 반듯한 모양새로 되바라진 눈빛을 던지는 그들은
늘 그렇듯 매혹적이다.
그래서 오늘 출근길 역시 책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
도피성 독서가 일터의 진창에서 건져올린 일하는 인간의 기록
OTT 시리즈 중 〈좀비 100 : 좀비가 되기 전에 하고 싶은 일 100가지〉가 있다. 주인공 텐도 아키라는 매일 강압적인 철야에, 인정사정 없는 상사, 회사 복지라고는 하루종일 켜놔도 전기세 한 푼 달라고 하지 않는 '컴퓨터 무제한 사용' 외에는 없는 짐승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소위 블랙기업의 '사축인간'이 된 셈이다.
어제와 다를바 없는 출근날 아침, 아키라는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뗀다.
'가기 싫다, 가기 싫다, 가기 싫다, 가기 싫다, 가기 싫다, 가기 싫다'
그의 주문이 먹힌 걸까? 마침 그의 주변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케첩같은 피를 덕지덕지 묻힌 좀비떼들이 여름 모기처럼 그의 주변에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 아키라가 외치는 어이 없는 한 마디, '아, 회사 지각하면 안 되는데....'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서도 지각을 걱정하는 전형적인 회사원의 모습이다. 자전거 페달을 죽을듯이 밟던 아키라는 문득 지금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어쩌면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살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을 느낀다.
'그래! 어쩌면 회사에 안 가도 될지 몰라!'
우리는 늘 현관에 앉아 신발을 신으며 오늘은 좀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나, 되도 않는 상상을 한다. 천재지변으로 전세계의 전기 공급이 중단되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늘에서 갑자기 개구리떼들이 떨어져 집안에만 갇혀 지내는 판타스틱한 상황이 벌어지면 좋겠다... 라는 말도 안 되는 몽상이다.
이유는 그. 어. 떤. 상. 황. 보. 다, 싫. 은. 출. 근. 때. 문. 이. 다.
좀비에게 물려 좀비가 될 지언정, 차라리 회사에 안가도 되는 난리법석의 상황이 말할 수 없이 행복한 불행한 회사원. 결코 이상하거나 괴기스러워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니까.
『출근하는 책들』의 구채은 저자는 일터에서 내면이 찢기고 자아가 소멸되는 것 같을 때, 다 큰 성인으로서 지켜야 하는 존엄함의 영토가 침범당하는 것 같을 때, 감정을 억누르고 익살꾼을 연기해야 할 때, 누군가의 송곳 같은 말이 뒷통수에 착 달라붙어 꿈에까지 쳐들어올 때, 그럴 때 마다 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하나하나 도장찍듯 남겼다.
물론 그런 고비의 순간에 책이 저자를 살려줬다거나, 지혜를 줬다는 식의 금방 들통이 날 거짓말은 하지 못한다. 책 속 인물들은 대개 저자보다 더 찌질이에, 못난이에, 심지어 실성한 사람들이 많았다. 정면교사보다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파괴돼가는 인간들 투성이가 책에서 허우적 대고 있었다. “이 바보를 어떡하니, 불구덩이 속으로 돌진하네” 하며 혀를 끌끌 차게 하는, 측은지심을 불러오는 인물들이어서, 롤모델로 삼았다간 쫄딱 망하기 십상이다. 그들의 인생을 관망하다, 이제 구원의 힘을 좀 발휘해 볼까... 하고 손을 뻗을 때쯤, 지하철은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리곤 이런 울림을 준다.
'구하긴 누굴 구하니, 너나 오늘도 무사히, 일터에서 잘 살아남으렴.'
누군가는 끈질기게 분투해 그 세계의 규정에 맞게 자신을 조각해 나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마지못해 지금 세계에 자족하고, 슬프지만 낙관해야 하는 순간도 올 것이다. 그땐 도리가 없다. 그 어긋남을 기꺼이 받아들일수밖에. 승복하고, 그 삶 속에서 살아갈 틈새를 찾아야 한다. 그 삐쩍말라 비틀어진 틈새에서 구원의 빛으로 찾아낸 건 '책'이었다. 고맙게도 그 거칠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틈새를 비집고 나와 나의 손을 잡아준 '활자들'은 잿빛의 삶을 햇빛 가득한 삶으로 이끌어주었다.
저자가 상황에 맞춰 소개해주는 책들은 절묘하다. 기묘하고도 비틀어져 남루하기까지한 주인공들의 인생에서 나의 존재를 찾고, 위로하고, 통곡하고, 박장대소를 던진다.
그렇게 웃고, 울고, 떠들며, 분노하고, 한탄하다 보면 오히려 오늘도 오롯이 나를 위한 지하철 자리 한 칸이 온전히 남아 있음에 감사를 건네게 된다.
뜻대로 되지 않는 삶과 생계에 대한 중압감이 허무와 절망으로 누를 때. 그럴 때 종종 꺼내보는 초콜릿 같은 책들. 아직 우리에게는 다 꺼내먹지 못한 수천, 수만 종의 씁쓸하고도 달달구리한 초콜릿들이 남아 있으니 우리의 출근길은 그리 절망적이지 않다.
나와 함께 출근하는 그들은 일렬종대로 오늘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과 함께 사유하기 위해 가끔은 지루하고 자주 졸리지만 책을 편다. 그리고 믿어본다. 그 작은 힘이 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작가정보
1985년에 태어났다. 서강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아시아경제 정치부 기자다. 10년 넘게 기자로 일해왔지만 뼈기자(기자 일이 천직인 기자)가 아니라 순살기자(생계형 기자)다. 본캐는 기자지만, 부캐는 심리학자, 예술가 지망생이다. 2021년 ‘씨티 대한 민국 소비자금융 부문 언론인상’을 수상했다. 2018 년 ‘한국상담심리학회 차세대 연구자상’을 받았다. 한때 문청이었다. 지금도 텍스트로 된 모든 것을 추앙한다. 책을 사랑하지만 독서는 늘 미완이라 느낀다. 진정한 읽기는 활자에 서린 정신이 삶에 스며, 행동으로 나타날 때 완성된다고 믿어서다. 앎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고, 읽음과 행함 사이의 거리를 응시하며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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