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빗 인 더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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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9788954449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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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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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현의 첫 소설집’
〈안나〉 원작 『친밀한 이방인』 소설가 정한아 추천!
2021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통해 소설가로서 첫발을 뗀 김나현이 그간 부지런히 그려낸 일곱 개의 작은 세계를 그러모아 한 권의 세상을 완성했다. 멀리서 보면 안온하기 그지없는 삶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며 낯설고 서늘한 구석을 기어코 떼어내 각양의 이야기로 발전시키는 작가의 능력은, 사실 그 자체보다 단정하고 차분한 방식과 과정에서 더 빛을 발한다. 그녀가 만든 세계라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어쩐지 믿어봄 직하다고 여겨지는 수수께끼 같은 마법이 이 한 권에 펼쳐져 있다. 우리는 그저 작가가 가리키는 그 세계로, 무한히 확장할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오늘 할 일
래빗 인 더 홀
미동
로쿰
앙배의 이야기
꿈의 책의 꿈
해설 │ 불가해한 삶 속 성실한 수수께끼의 미학 - 민선혜
작가의 말
“눈을 갖고 싶어서요. 나한테 딱 어울리는 눈이요. 진짜 내 눈이 되어줄 것 같은 그런 눈을 만나면, 나도 눈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안의 세계」, 25쪽)
“사람은 오래되면 묵은 감정 같은 게 생기는데, 이 년이면 말이야, 충분히 썩어서 냄새가 날 정도로 감정이 묵어버리는 거지. 그런데 새 사람은 냄새가 안 나. 말 그대로 새롭다는 거야.” (「안의 세계」, 27쪽)
가장 예쁘고 마음에 드는 게 자신과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가장 예쁘고 마음에 드는 걸 선택하기 위해 살아간다. 정말로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어떨까? (「안의 세계」, 29~30쪽)
“사람이 무언가에 돈을 써가면서 계속하는 건, 결국 그거야. 그게 슬픔을 지워주니까.” (「안의 세계」, 49쪽)
“저 인간은 말이야. 이곳에서 울 만큼 울었어. 아주 바삭바삭해졌지.” (「래빗 인 더 홀」, 124쪽)
인간의 고통은 조금 단단했다. 단맛이 나는 듯도 했다. 고통의 맛은 점차 혀를 마비시켰다 (「래빗 인 더 홀」, 126쪽)
기억은 돌아올 수 있다. 기억은 소멸되지 않는다. 기억은 가라앉은 채 남아 있다. 우리는 배웠다. 그런 것을 무의식이라고. 그러니까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의식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고, 그렇다면 안에 대한 기억은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것이 된다. 존재하고만 있다면 그것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존재하고 있자. 계속 존재하게 하자. 그러면 기억할 수 있다. (「로쿰」, 204쪽)
“아버지가 항상 이런 말을 하시거든.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면 그 일이 자기 자신이 된다고. 그러니까 아버지는 소포 분류 일을 오래 해서 자신이 ‘소포 분류’ 그 자체라고 생각한대.” (「앙배의 이야기」, 224쪽)
꿈에서 그가 잠들면 내가 깨어나. 어느 쪽이 꿈인지 알 수가 없지. (「꿈의 책의 꿈」, 273쪽)
가끔, 그 꿈을 떠올리게 하는 꿈들이 반복되었다. 목이 마르고, 땀을 흘리고, 물을 원하고, 앞니로 차갑게 컵이 부딪혀왔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꿈은 소멸되지 않을 것 같았다. (「꿈의 책의 꿈」, 283쪽)
문장들은 내 입술 주변에 들러붙었다. 그러더니 꿀이 되어 흘러내렸다. (「꿈의 책의 꿈」, 285쪽)
평연한 소멸, 안전한 균열, 아늑한 추락
익숙하고 당연한 것을 새롭게 감각하는 시간
소설집은 김나현의 등단작 「안의 세계」로 문을 연다. 견고하게 이상한 작가의 세계 그 정문에 위치한 소설이다. 「안의 세계」 안에는 안眼(눈)이 없는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 이레는 이 눈이 없는 여자를 통해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섬세한 차이를 알아간다. 눈이 있어 보이는 것과 눈이 없음에도 볼 수 있는 것을 깨달으며 세상을 보는 시각과 본다는 것의 의미를 새로이 정의한다. 이 소설의 결말에 닿을 때쯤 모두가 자신의 눈두덩에 손을 가져가보거나 그 자리를 채울 또 다른 눈을 상상해볼 것이다.
「오늘 할 일」은 회사, 성과, 결혼, 대출, 내 집 마련, 소음, 보상금 같은 현실적인 소재들이 가득 담긴 소설이다. 매일 다이어리에 ‘오늘 할 일’을 적고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나를 확인하는 매일이 이어지는 소설의 중심부는, 우리에게 소설이 아닌 다이어리를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매일의 다짐이 사실은 어차피 지키지 못할 약속이자 이룰 수 없는 계획임을 알고 있는 대목에서, 그것을 자각한 후에도 성실하게 할 일을 기입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대목에서 우리는 희망과 불안이 한 몸임을 받아들인다.
“따뜻한 물에 잠기듯, 검은 구멍 속으로 몸을 밀어 넣듯
마음 놓고 존재의 암전을 누릴 수 있었다”
표제작 「래빗 인 더 홀」은 작고 보드라운 토끼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유치원 사육장에 살고 있는, 바이러스 창궐 이후 혼자 남겨진 이 토끼를 통해서도 희망과 불안은 같은 문을 통해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 구멍으로 들어갔거나 들어가려는 존재들과 누군가를 찾기 위해 구멍으로 들어가려는 존재를 통해 소멸은 어쩌면 하나의 가능성임을, 외로움과 평안은 그리 다른 말이 아님을 속삭이듯 알려준다.
「로쿰」에 나오는 구멍은 조금 더 서늘하다.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생긴 구멍에 스스로가 먹히고, 그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하는 기묘한 잔인함마저 존재한다. 구멍에 의해 사라지는 건 몸체뿐이 아닌데, 구멍이 커지는 소멸이 발현될수록 존재에 대한 기억 역시 함께 사라진다. 흐르는 시간만큼 막을 수 없는 소멸은 기어이 모든 기억을 망각시키지만, 노트로 옮겨 적은 기억은 사라진 와중에도 선연히 존재하며 소멸을 저항해낸다.
존재와 선택의 무한한 여지,
그 파편들이 아름답게 존재하는 세계
「미동」에는 존재하지 않고도 가장 선명하게 존재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격리라는 이름으로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 여자는, 방 밖에 위치한 그녀의 엄마와 언니와 조카로 인해 조금은 기구한 인생의 전환점들이 들추어진다. 기억하는 이마다 묘하게 다른 모양을 한 그녀의 과거는, 현재에 이른 방 안의 존재를 의심케 하는 혼동을 선사한다.
제목 그대로 앙배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앙배의 이야기」는 가장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소설이다. 앙배와 나 그리고 앙배의 이야기로 인한 나의 이야기 모두 저마다의 ‘만약’이 존재하며 셀 수 없는 물음표와 말줄임표를 만들어낸다. 액자 속 앙배의 이야기에서 빚어지는 분실과 획득이 일으킨 날갯짓은 액자 밖 나의 인생에 나비효과가 되어 선택의 순간, 기회와 성공의 열쇠가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제목이 화자인 ‘나’의 이야기가 아닌 ‘앙배’의 이야기인 이유는 또한 선택에 있음을 밝혀둔다.
마치 앞선 가능성들을 실현하면 이런 모양일까. 「꿈의 책의 꿈」은 현실과 꿈이, 과거와 현재가 이음점 없이 맞닿아 유연하게 넘나드는 과감한 소설이다. 삶의 가능성과 꿈의 현실성은 교차하고 전복되는 지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흐르고, 우리는 그 안에서 기묘한 희망을 맛볼 수 있다.
의지대로 되지 않는 지점마다 열리는 가능성,
그것이 바로 “성실한 수수께끼의 미학”
『래빗 인 더 홀』의 해설을 쓴 민선혜 평론가는 “김나현의 소설에는 수수께끼 같은 부분이 하나씩 존재한다”면서도 “수수께끼의 답을 찾지 못했다고 상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삶의 모든 질문에 답을 내릴 수는 없다는 사실이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덧붙이면서. 즉, 김나현은 이 몽환적이고 수상한 세계 속에서도 가장 진실된 마음, 가장 현실적인 이치를 바탕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연히 펼쳐내거나 손 가는 대로 풀어놓은 것이 아닌, 아무리 구르고 넘어지고 추락해도 다치지 않을 만큼 안전한 바닥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바닥에 깔린 쿠션은 김나현이라 레이블링된 가능성과 희망일 것이다.
■■■ 해설
김나현의 소설은 볼록렌즈 실험처럼 어느 한곳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그곳에 잠재해 있던 이상한 기미들을 살며시 들춰낸다. 김나현의 볼록렌즈가 빛을 모으는 지점은 잘 보이지 않는 곳, 그래서 더욱이 볼록렌즈가 필요한 곳이다.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마음과, 가만히 바라보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세계와 사람들. 김나현은 이렇게 삶의 애매한 곳을 향해 아주 정확하게 빛을 모은다. 희미하고 분명치 않은 삶의 구석들을 확대해 보는 것만으로 그누구도 쉽게 답을 말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스르륵 튀어 오른다.
- 민선혜 (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소설집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쓴 소설들을 반복해 읽으며 서서히 깨달았다. 나는 늘 내가 쓸 소설이 궁금했던 것이다. 하나를 끝내면 다음 하나가 올 것이고, 써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미지여서 그것을 보고 싶은 열망이 나를 책상 앞으로 이끌었다.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쓰고 싶다. 내가 나의 소설을 궁금해하면서, 아직 오지 않은 소설을 성실하게 발굴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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