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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마지막 여름

L'ultima estate in citt?

2023년 11월 08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10월 24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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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21.07MB)
ISBN 979119023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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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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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세대’가 낳은 혼란을 대변하는 한 남자 레오 가짜라와 로마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의 환멸적 관계를 통한 군중 속의 고독, 그리고 잔인하리만큼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랑의 모순을 탐구한 소설 《도시의 마지막 여름》은 전례가 거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출판 사례를 가지고 있다. 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작가는 밀라노에 본사를 둔 신문사의 특파원으로 로마에 파견되고, 취재를 마친 후 밀라노에 돌아가는 대신 로마에 남아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완성된 원고는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절당하고, 우연히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인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단 하룻밤 만에 소설에 매료된 그녀의 열렬한 지지를 얻어 1973년 가르잔티에서 첫 출간된다. 같은 해 이네디토상을 수상하고 한여름 동안에만 17,000부가 팔리는 등 돌풍을 일으켰으나 돌연 출판 시장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이후 이 책은 문학을 연구하는 박사과정의 학생들과 책 애호가들의 탐구 대상이 되면서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퍼지게 되고, 다시 세상에 알려진다. 그렇게 아라그노에서 재출간된 후, 첫 출간 당시 이 소설을 소홀히 여겼던 많은 매체 및 비평가들의 공개적인 사과와 함께 ‘고도로 정교하고 진지한 소설’이라는 호평을 받는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두 번째 판이 소진된 후 책은 또다시 모습을 감추게 되고, 독자들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 2016년 봄피아니에서 다시 한번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2021년 작가의 소설 중 처음으로 미국의 출판사 파라, 스트라우스 앤 지루에서 영어로 번역 출간되면서 같은 해 피츠제럴드상과 마르코폴로상을 수상하고, 유럽문학상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된다. 현재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아 전 세계 2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도시의 마지막 여름|15

결국 항상 이런 식이다.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끝장으로 치닫게 만드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다행히 그 치열한 경주에서 기꺼이 제외될 수 있었다. 이곳에 막 도착해 출발점에 선 사람부터 결승점에 도달한 사람까지 온갖 부류를 알고 있었는데, 다들 얼마 후에는 하나같이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인생은 그저 방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 초봄 어느 비 오는 날처럼 돈도 없는데 불운까지 겹친 현실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날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어쨌든 내가 그 누구에게도 나쁜 감정 따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확실하다. 내게 주어진 운명이 있고 그것을 따라 살았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15p

나는 매일 바다를 보러 갔다. 주머니에 책 한 권을 찔러 넣고 오스티아행 지하철을 타고 가서 해변의 어느 작은 트라토리아에 앉아 거의 온종일 독서를 했다. 그리고 다시 시내로 돌아와 나보나광장 주변을 배회하곤 했다. 그곳에서 친구 몇 명을 사귀었는데, 그들은 모두 나처럼 배울 만큼 배웠고 불안하지만 기대에 찬 얼굴로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방황하고 있었다. 로마는 우리의 도시였고 우리에게 관대했으며 우리를 달래 주었다. 나 역시 실직한 이후 불규칙적인 일로 돈벌이를 하며 몇 주째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못 하고, 누렇게 바래고 삐걱거리는 가구 몇 개가 전부인 음습한 여관방을 전전해야 했지만 로마는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로마라는 도시는 기억을 태워 버리는 특별한 성질을 갖고 있기에,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아주 소수의 인물과 장소, 일에 대한 기억만 또렷이 남아 있다. 도시라기보다 꼭꼭 감추어 두었던 짐승 같은, 우리의 은밀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어여쁜 짐승은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기에, 최고의 사랑이 아닌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이곳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남부의 푸르고 가파른 길이든 울퉁불퉁하게 뻗은 북부의 도로, 혹은 저 깊은 영혼의 심연이든 그 출발지를 막론하고 로마를 찾는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유일한 통행료는 사랑, 오직 이것 하나뿐이다.
-23~24p

시내로 돌아오면서 지금까지 겪은 이별을 떠올렸다.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했을 때를 떠올렸고, 산텔리아 사장님과 이별할 때도 떠올렸다. 그리고 이 모든 이별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생각해 봤다.
-27p

바깥은 약간의 떨림과 붉게 물들기 시작한 부드러운 공기로 가득했다. 그렇게 겨울과 봄이 서로 최후의 일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계절은 사람들 모르게 캄캄한 밤사이 바뀌었고, 우리는 그 웅장하고 고요한 변화를 구경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밤이었다. 내 옆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는 여자는 두 손으로 우비를 꼭 붙잡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자신의 정원에 우연히 찾아온 손님과 함께 있는 사람처럼 만족스러운 얼굴로 플라타너스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나도 숨을 돌릴 겸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고, 아주 높고, 흘러가는 커다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48p

나는 도로 끝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감정을 다잡기 힘든 지경이었고, 술집으로 돌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고 곧바로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와 일단 라디오부터 켰다. 탁상용 램프 가까이로 안락의자를 옮기고 푹신한 곳에 쿠션을 덧대어 놓았다. 그리고 손이 닿는 곳에 담배를 놓은 후, 독서를 할 때 들리는 그 설득력 있는 내면의 목소리에 빠져들어 보려 했다. 우리의 영혼이 다르면 그 목소리가 다르고 영혼이 같으면 그 목소리도 같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가지고 있던, 우리가 세상에 나오며 울부짖기 이전의 불협화음 없이 완벽한 태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96~97p

새벽이 되자 공기가 차가워졌고 계곡의 나무들은 새소리로 가득 찼다. 아리아나도 잠에서 깨어 함께 새소리를 들었다. 그러는 동안 방이 서서히 밝아졌고, 그녀가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냥 누워 있어요.” 그녀가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그녀를 보기 위해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으로 갔다. 그녀가 철문 쪽으로, 새벽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차키가 말을 듣지 않는지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가 차에 올라 출발했다. 나는 계곡이 보이는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흐트러진 침대를 보니 배가 뭉치는 느낌이 들어서 바로 이불을 털어 말끔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침대 시트에서는 여전히 그녀의 향기가 남아 있었고, 나는 차를 끓이러 주방으로 향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라디오를 켰다. 예전 노래들과 세계 곳곳의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모든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99~100p

“나를 위한 게 아닌 건 분명하군.” 그라지아노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내게 헛소리할 생각하지 마. 내 눈은 속일 수 없으니까. 종일 화장실에 틀어박혀 끙끙거리고 있다가 해 질 녘이 돼서야 나를 데리러 온 게 맞지?”
“아니, 자네도 알잖아. 왜 없는 사실을 지어내려는 거야?”
“물론 나도 알지. 난 내가 말을 지어내는 이유를 확실히 알고 있거든. 단지 자네가 쓸쓸히 집에 돌아가도 비타민 말고 자네를 반겨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야. 왜 술을 끊었는지 말해 봐.”
“성공할까 봐 두려웠거든.”
“무슨 성공?”
“죽는 거.” 내가 대답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시가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104~105p

바람이 그의 수염을 뒤흔들고 치아 사이에 느슨하게 물고 있는 시가 끝을 더 붉게 만들었다. 이 도시가 우리를 어루만지고 있었고, 조금씩 아리아나를 생각하는 일도 힘들지 않게 되었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도시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으며, 슬플 수는 있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래도 내가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면 그녀를 보고 싶었다.
-114p

바다는 광활하고 거대하고 어두웠다. 부두 끝에 가서 앉았다. 주위는 온통 바다로 가득했고, 파도가 해안으로 온몸을 던져 부서지고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어선들의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 옛날 카바피스의 말이 옳았던 걸까? 그가 말하기를 당신이 속한 도시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며, 당신을 위한 배도 도로도 없기에 다른 곳에서 희망을 품지 말라고, 이 세상 작은 구석에서 인생을 낭비한 것처럼 그 어느 곳이라고 해도 당신의 망가진 인생은 달라질 것이 없다고 했다. 그 옛날 카바피스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집에 두고 온 여행 가방을 떠올리며 담배 두 개비를 피웠다. 뭐, 나는 내가 와야 할 곳에 왔고, 이제 남은 것은 집에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126~127p

“앉아 있어요. 가서 사람을 불러올게요.” 내가 말하자 그가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누구를 부를 건데? 부를 사람 아무도 없어.” 그가 울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있을 세상은 없어! 이제 그런 세상 따위는 없다고!” 그러고는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큰 울음을 터트렸고, 그 소리가 화장실에 울려 퍼지며 메아리쳤다. 나는 너무 놀라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맙소사,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는 걸까? 나는 본능적으로 화장실 문을 향해 뒷걸음질을 쳤다.
“저는 돛을 올려야겠어요.” 내가 말했다. 복도로 나가자 나폴레옹 병사가 굉장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서 누구 좀 불러와 주세요.” 나는 병사에게 말한 뒤 출구 쪽으로 향했다. 건물 밖으로 나온 나는 햇볕을 쐬려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물 알파 로메오를 타고 나보나광장으로 출발했다.
-146p

“난 정말 자기를 걱정했어.”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서 나와 뭘 하고 싶은데? 브리오슈가 먹고 싶은 거야? 아니면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 어쨌든 난 잘 거야. 남의 피뢰침 노릇 해 주기 지쳤어.”
내가 이런 말들을 쏟아내는 사이 그녀의 눈동자에는 다시 눈물이 가득 찼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로 가서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누웠다. 그녀도 나를 보는 것이 힘들었는지 불을 꺼버렸고, 방안은 순식간에 달빛으로 채워졌다.
얼마나 멋진 밤이었던가.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산들바람과 아련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의자에서 꼼짝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꿈으로 가득한 얕은 잠에 들 때까지 거의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잠에서 깬 나는 그녀가 있던 쪽을 바라봤다. 의자는 비어 있었고, 방에서는 희미한 라일락 향기가 풍겼다.
-158~159p

“레오, 무슨 일이야?” 그라지아노가 물었다.
“지쳤어.” 내가 말했다. “너무 피곤해.”
“온 세상이 다 그래.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그가 말하고는 주머니에서 스카치 병을 꺼내 한참 동안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고는 잔뜩 인상을 쓰고 술병을 바라봤다. “이 흥분제는 나를 점점 더 작게 만든단 말이야.” 그리고 술병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불행이 또 있을까.” 황량한 광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가 계속 말했다. “나도 아리아나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
-178~179p

8월 중순이 되자 제비들이 사라졌다. 제비들이 이렇게 일찍 떠난 것은 처음이었다. 석양 무렵 내가 바람을 쐬러 발코니로 나가면 하늘은 텅 비고 고요했다. 신문에서는 도시를 짓누르고 있는 유독성 대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유치한 합리화였다. 진실은 높은 곳에서 봐야 잘 보이는 법이다.
나는 책도 읽지 않고 극장에도 안 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신문사에 출근할 시간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다. 내가 유일하게 자부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밸런타인도 한 병 사서 탁자 위 잘 보이는 곳에 두고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중 9월을 열흘 남겨두고 아리아나의 편지를 받았다.
-192~193p

바다는 진줏빛을 띠고 있었다. 점점 짧아지는 하루가 너무 슬프게 느껴졌다. 돌이킬 수 없는 무엇인가를 돌이키고 싶은 마음이랄까. 나는 씁쓸한 마음을 안은 채 혹독했던 여름이 가라앉을 9월을 생각했다.
“왜 내게 데리러 오라고 한 거야?” 내가 물었다.
그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게 맞아, 미안해.”
-200~201p

내가 지내 본 모든 호텔 중 캄포 데이 피오리 뒤에 있는 곳이 가장 괜찮았다. 저녁이면 밖으로 나와 골목길을 걷고, 텅 빈 고요한 광장을 지나는 것도 좋았다. 이곳은 5세기 전 선견지명이 있는 건축가들이 엄격한 교황들의 명령대로 건설한 돌로 만든 이 도시의 오랜 심장이었으며, 건물 사이에 끼어 있는 너무 많은 수의 교회들이 석회화된 모습을 드러내며 하늘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낮 동안 이 동네는 개미굴 같지만, 저녁 무렵에는 강의 수위보다 아래에 있다고 느껴졌으며, 집들의 벽에서 고대 홍수의 수위를 증명하는 날짜가 적힌 돌비석을 볼 수 있었다. 아주 높은 제방으로 둘러싸여 홍수로부터 보호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동네는 무척 건조했다. 건물 벽에 커다란 균열이 파고들고, 회벽이 벗겨졌으며 거리를 걷다 보면 창문 너머로 집 안의 스테인드글라스 천장이 조각나 떨어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틀리에의 장인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수리하고 있었다.
-224p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그녀도 입을 꾹 다물었지만, 우연히 손이 닿았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꼭 잡은 것을 보면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손 안의 그녀의 손은 아주 작고 아주 차가웠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흐려지더니 하얗고 뿌연 얼룩처럼 멀어졌고, 그녀의 얼굴만이 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232p

창밖으로 주택가 건물들의 지붕과 강변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 교회 첨탑들이 보였다. 저 멀리 꺼져가는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녀가 팔로 내 가슴을 감싸고 등에 머리를 기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기 살 빠졌구나.” 그녀가 말했다. “그걸 이제야 알았네.”
-237p

택시기사가 어디로 갈 건지 내게 물었다. 호텔은 멀지 않았고, 걷고 싶었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걷기 시작했다. 비가 몇 방울 다시 떨어졌고, 도시는 먼지 냄새를 풍겼다.
-241~242p

잃어버린 로마의 여름, 그 황량함 속 고독과 위태로운 사랑!

1970년대 초, 달콤한 사랑에 중독된 도시 로마에서 그저 하루하루 흘러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레오 가짜라.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결혼을 하고 돈을 벌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서른 살이 된 그에게는 그런 전망이 혐오스럽게 느껴진다. 신문사에서 용돈 벌이를 하며 나보나광장을 서성이거나 여자 친구들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일과의 전부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커녕 야망조차 없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삶의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일시적이며 고루한 인간관계 사이에서 환멸을 느끼면서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던 중 초대를 받고 찾아간 TV 방송국 관계자 렌조의 집에서 아리아나를 만난다. 두 사람은 밤새도록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늦은 봄 새벽 바다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서로에 대해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이 아니기를 바라며, 그는 위태로운 마음과 허영심으로 가득 찬 그녀와 함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로마에서의 여름을 맞이하는데…….

◆ 출판사 서평
2021년 피츠제럴드상, 마르코폴로상 수상작
2021년 유럽문학상 최종 후보작
1973년 이네디토상 수상작

내게 주어진 운명이 있고 그것을 따라 살았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본문 중에서

1973년에 첫 출간된 《도시의 마지막 여름》이 오랜 시간에 걸쳐 시대를 관통하는 컬트 소설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 가장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감정을 탐구했다는 점이다. 소설은 1970년대 초,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의 서문에 거트루드 스타인의 말을 인용한 데서 유명해진 ‘잃어버린 세대’가 낳은 로마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로마는 현재 우리가 아는 유명한 유적 관광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 “아틀리에의 장인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수리하고 있었다”라는 표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번화하지만 그 이면에는 세월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낙후되고 황폐한 모순된 장소로 대변된다. 주인공 레오 역시 밀라노를 떠나 로마에 살고 있지만, 어떻게든 그곳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다 실패해 다시 떠나거나 결승점에 닿더라도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게 되는 온갖 부류를 보면서 방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날 내리던 비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잊고 있던 깜짝 선물처럼 도시에 갑자기 내린 봄비는 그 어떤 향수보다 더 향긋한 냄새로 도시를 채우고 있었고, 내 인생에서 이 이야기가 시작된 날만큼 향기 가득한 날은 다시없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낭비적인 인간관계에서 환멸을 느끼며 표류하고 있던 레오는 이런저런 불운들이 한꺼번에 겹친 어느 날, 무작정 빗속을 걷기 시작한다. 우연히 단골 술집에서 평상시 친분이 있는 성공한 TV 프로듀서 렌조를 만나고, 그는 그날 저녁 자신의 아파트에서 있을 칵테일파티에 레오를 초대한다. 레오를 맞은 것은 렌조의 아내 비올라 부인이었고, 그녀는 비에 홀딱 젖은 레오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다. 렌조 또한 레오를 초대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듯하다.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부유해 보이는 삶을 쫓는 부류였고, 레오는 그들과 어울리는 것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오직 허기진 배를 채울 무언가를 찾는 것뿐이었다. 바로 그때 하얀 벨벳 소파에 앉아 혼자서 하는 카드 게임을 하고 있던 아리아나를 만나게 된다. 결코 속할 수 없는 군중 속에서 외로움을 등에 지고도 삶을 포기하지 않을 유일한 이유를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세상은 최선을 다하긴 했다. 며칠간 날씨는 따뜻했고 하늘도 푸르고 잔잔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바로 그 멋진 날씨가 내 고통을 더할 뿐이었다. 내게 가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도무지 사라지지 않아 집 안을 서성였고, 발코니에 앉아 책을 읽거나 담배를 피우면서도 내가 왜 이러는지를 몰라 당황스러웠다.
-본문 중에서

그날 새벽 레오와 아리아나 두 사람은 함께 도시를 표류하면서 서로가 느끼는 그 묘한 감정이 사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부인한다.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이 아니기를 바라는 씁쓸하고도 위태로운 역설이다. 아리아나를 만나 이후 레오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기 위해 모진 말로 상처를 주고 차갑게 외면하면서도, 동시에 그녀를 너무나 강하게 원하는 모순과 마주한다. 그의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 가장 원했을 그 약간의 온기를 느끼고자 그녀의 알몸 옆에 몸을 뉘여 작고 단단한 배 위에 손을 올린다. 하지만 자신을 더 만져달라는 그녀의 속삭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는 자신이 불행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무엇보다 가장 원했을 그 약간의 온기, 그녀의 배에 닿은 내 손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 결국 그녀에게 돌려줄 수 있게 만드는 그 따스한 온기가 그에게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 자네의 일부라고 느껴지는 게 하나라도 있나? 아니, 없을 거야. 왜 그런지 알아? 그건 우리가 멸종된 종에 속하기 때문이지. 우린 그저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들인 거야. 그뿐이지.” 그가 시가에 불을 붙이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내가 몰랐다면 그것은 오랜 역사를 지닌 아름다운 유럽이 아주 명료하고 신중하며 단호하게 자살 시도를 하고 있을 때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누구였던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고향의 전선에서 서로를 학살하던 사람들, 바로 그들이었다. 우리는 바로 그 시기에 태어났고, 우리 어머니들의 허리를 끌어안은 그들의 손은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레오의 외로움과 불안을 진정으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친구 그라지아노뿐이다. 백만장자인 아내를 둔 그였지만 항상 술집을 전전하며 취해 있는, 레오처럼 ‘남은 음식(avanzo)’에 만족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탈리아어로 남은 것, 잔재,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재산에서 원치 않고 버려진 잔해 또는 불필요한 인간을 의미하는 ‘남은 음식’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바로 레오의 삶의 본질을 꿰뚫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레오는 사는 아파트, 파티에서 허기를 채워 준 견과류나 냉장고의 음식, 애인이 생긴 남편을 둔 여자에 대한 끌림,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누군가가 타던 고물 자동차까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남은 것들이다. 그라지아노는 레오에게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처음으로 두 사람은 영화 대본을 쓰기 위해 ‘남은 음식’, 즉 다른 사람들에 의한 선택이 아닌 자신들의 의지로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영화 제작은 결국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깨닫는다. 그러던 중 그라지아노는 아리아나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고 이를 레오에게 털어놓고, 레오 또한 아리아나의 마음속에 다른 남자를 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세상에 그들을 위한 온전한 것이라고는, 그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음 외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상하게 슬프지도 않았다. 적어도 너무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조금 지친 것은 맞다. 확실히 그랬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전차를 타고 있었다. 운이 좀 좋으면 역 가판대에서 좋은 책을 발견하고 기차도 너무 붐비지 않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 책은 재미있었고 기차는 거의 비어 있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슬픔이 밀려왔다. 기차가 다른 방향, 그 어떤 방향으로 향해도 내게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본문 중에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렌조의 집을 찾은 레오는 그곳에서 깊은 환멸을 느끼고 그동안 의미 없는 삶을 살던 자신을 품어 주었던 로마에서 완전히 단절되고 고립되었다는 기분을 느낀다. 그는 지친 마음으로 향수(鄕愁)를 안고 밀라노행 기차에 오른다. 하지만 밀라노에 도착한 그는 자신이 자란 거리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 많은 거리는 많은 변화를 겪었고, 그의 부모 또한 이미 자신이 없는 삶에 익숙하고 충실한 모습이었다. 레오는 이제와 그들의 안정된 삶에 자신이 끼어들어 가족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깜짝 등장을 그만두기로 하고 어릴 적 향수를 달래줄 수 있는 무언가를 위해 소시지 가게를 찾아 돌아다니다 괜찮은 곳을 찾아낸다. 따끈한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를 넣은 샌드위치에 소금에 절인 양배추와 머스터드를 조금 추가해 먹으며 역 쪽으로 걸으면서 생각한다. 이것만으로도 밀라노에 올 가치가 있다고. 다시 로마행 기차에 오른 레오는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로마든 밀라노든 애초에 자신이 있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레오, 내 친구.” 그라지아노가 분수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 두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리 중 하나라는 느낌이 든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야.”
-본문 중에서

우리를 둘러싼 군중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상 한 사람이 느끼는 고독과 그곳에서 이는 모순을 모른 채 피할 방법은 없다. 더욱이 미디어로 넘쳐나는 세상이 발전하면 할수록, 단절된 세대를 거듭하면 할수록 그 고독과 모순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마지막 여름》이 오랜 시간 동안 출간과 절판을 거듭하며 시대를 관통하는 컬트 소설로 자리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곁에 실재하는 감정이며 현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가 느끼는 고독은 어쩌면 우리만의 것이 아니며, 모순된 세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모두 시간과 장소가 낳은 환상일 뿐일지도 모르기에.

작가정보

Gianfranco Calligarich, 1939~2024
1939년 5월 3일 에리트레아 아스마라 출생.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후, 1960년대 로마로 이주하여 저널리스트이자 TV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이탈리아 공영방송국 라이(Rai)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쓰면서 비평가들과 대중 사이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고, 1994년 테아트로 XX 세콜로(Teatro XX Secolo, 20세기 극장)를 설립하면서 활동 무대를 극장으로 옮겼다. 1973년 이네디토상(Inedito Prize)을 수상한 《도시의 마지막 여름(L’ultima estate in città)》은 작가의 소설 중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 출간되었고, 2021년 피츠제럴드상(Fitgerald Prize)과 마르코폴로상(Marco Polo Prize) 수상 및 유럽문학상(European Literature Award)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되면서 전 세계 2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2012년 《사적인 심연(Privati abissi)》으로 바쿠타상(Bagutta Prize)을 수상했고, 2017년 《크루시치의 우울(La malinconia dei Crusich)》로 내러티브 부문 비아레지오상(Viareggio-Rèpaci Prize)을 수상했다. 2023년 《개와 함께한 산책(Passeggiate con i cani)》을 남기고, 2024년 11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페루지아국립대학과 피렌체국립대학에서 언어 과정을 마쳤다. EBS 《일요시네마》와 《세계의 명화》를 번역하고 있으며,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 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달나라에 사는 여인》 《모든 순간의 물리학》 《프라다 이야기》 《나쁜 회사에는 우리 우유를 팔지 않겠습니다》 《식물을 미치도록 사랑한 남자들》 《내가 사랑한 엄마》 《내가 사랑한 책》 《내가 사랑한 고양이》 《줄리엣의 웨딩드레스》 《여자, 그림으로 읽기》 《구스타프 클림트》 《빈센트 반 고흐》 《기술의 영혼》 《세상의 중심, 16살 인생에게》 《아인슈타인, 호기심은 나의 힘》 《인류의 집》 《시간의 섬》 《식물 혁명》 《아탈란타와 떠나는 그리스 신화》 《세상을 바꾸는 50가지 작은 혁명》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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