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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룸

소설, 잇다’ 3
이선희 , 천희란 지음
작가정신

2023년 09월 26일 출간

종이책 : 2023년 09월 26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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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13.72MB)
ISBN 9791160263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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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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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잇다’의 세 번째 책 『백룸』이 작가정신에서 출간되었다. ‘소설, 잇다’ 시리즈는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만남을 통해 한국 문학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시, 또 함께’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백룸』에서는 이선희와 천희란의 소설을 함께 실었다. 도시적 감수성의 모더니스트로 평가받은 이선희는 식민지 조선을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섬세한 심리 묘사와 감각적 문체를 통해 그려내며 1930년대 대표 여성 작가로 활발히 활동했으나, 월북한 이력으로 인해 우리 문학사에서 충분히 읽히거나 기록되지 못했다.
삶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을 정교한 서사로 그려온 작가 천희란은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왔다. 외부 세계로부터 야기된 분열과 혼돈 속에서도 잃지 않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또 그러한 정체성을 규정하는 틀은 무엇인지 탐색해온 천희란과, 자신을 둘러싼 억압과 착취의 정체를 캐묻고 욕망에 대한 자각을 놓지 않았던 이선희의 모습은 서로 닮아 있다. 그들의 소설에는 계속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여성들이, 좌절과 파멸과 때론 죽음이 예정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스스로 걸어들어 가 ‘지옥’을 맞닥뜨리는 담대함과 용기가 가로놓여 있다.

이 책에 실린 이선희의 대표 단편 「계산서」(1937)와 전문(全文)을 실어 선보이는 장편 「여인 명령」(1937~1938)은 가정과 가정 ‘바깥’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로, 여성의 자아 확립과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소설 속 여성들은 궁지에 내몰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목숨 값을 당당히 ‘청구’하거나(「계산서」), 연인 사이였던 남자에게 자신의 아들을 입적할 것을 ‘명령’한다(「여인 명령」). 특히 「여인 명령」에서 대학생, 백화점 점원, 술집 여급 등으로 주인공의 지위가 변화와 몰락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근대화의 산물인 자유연애의 허상과 결혼제도가 지닌 불합리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힌다.

천희란은 소설 「백룸」을 통해 이선희 작품에 나타난 주제를 새롭게 조명하는 동시에 지금도 여전히 여성을 옭아매는 ‘틀’이자 무한히 반복, 재생산되는 ‘미궁’을 펼쳐 보인다. 세계는 일상적 규범성이라는 이름 아래, 엄연히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취급하며 특정 존재를 지우는 행위를 반복한다. 천희란은 바로 그 규범성을 문제시하며, 탈출 불가능한 미궁과도 같은 현실에 처하고도 우리로 하여금 출구를 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지 묻는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견딜 수 없을 ‘미궁’을 그려나가는 천희란에게 이선희 작가는, “‘지속된 한계’를 벗어던지기 위해 새로운 지옥을 찾아 나선 여성”이었으며, 소설을 쓰는 내내 “그저 그 지옥을 함께 걷고자 했다”는 말로 이번 작업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선희
소설
「계산서」
「여인 명령」

천희란
소설
「백룸」
에세이
「우리는 이다음의 지옥도 찾아내고 말 테니까」

해설
백룸: 알고 있지만 보이지 않고 그러므로 믿어야만 걸어나갈 수 있는 곳에 대하여_선우은실(문학평론가)

나는 내 남편도 나와 같이 다리 하나가 병신 되기를 바랐다. 남편의 다리 하나-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다리 하나쯤으로는 엄청나게 부족하다. 내가 받아야 할 것은 그의 목숨 그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을 받아야 겨우 수지가 맞을 것 같다. 이것은 내 계산서뿐만 아니라 모든 아내 된 자의 계산서일 것이다.
_39쪽, 이선희「계산서」

나는 얼마 동안 이곳에 더 머무를 것이다. 내 계산서를 완전히 청산할 때까지 이 땅에 더 있을 것이다. 이 땅은 마적이 있어서 좋고 돼지가 죽은 아이 시체를 물고 뜯어 먹는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좋고 죽음 같은 고독이 있어서 좋다.
_40쪽, 이선희 「계산서」

“사람이란 어떻게 싱거운 물건인지.”
그처럼 오랫동안 그처럼 간절히 만남을 계획하고 바라던 그들이건만 어제도 오늘도 보던 얼굴 같고 조금 전에도 만났던 이웃 사람의 얼굴같이 그렇게 싱겁게 그렇게 무하게 보아지는 법이 어디 있으랴. 물건을 눈앞에 바싹 들이대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숙채와 유원이의 얼굴도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도리어 반가움을 찾지 못했다.
_385쪽, 이선희 「여인 명령」

“사람은 아무 때고 한때 굼벵이가 허물을 벗고 매미 되듯이 그 소위 ‘사랑’이란 허물을 벗을 때가 오는 거예요. 사람에 따라 일찍이 오는 수도 있고 늦게 오는 수도 있으나 어쨌든 오기는 오는 것이라고 하면 지금 나는 그 허물을 막 벗은 셈입니다.”
숙채는 다시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계속한다.
“그럼, 내 명령에 복종하십니까? 이의가 없으시지요?”
_403쪽, 이선희 「여인 명령」

백룸은 일종의 미궁이다. 현실의 이면이라고도 할 수 있고, 숨겨진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공포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기괴하고 뒤틀린 현실의 외형을 갖지는 않는다. 백룸에서는 그저 평범하고 일상적인 공간이 무한히 펼쳐진다. 불규칙한 벽들로 이루어진 미로 같은 복도, 콘크리트로 된 지하주차장, 잘못 진입한 상점가의 전용 통로 따위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세계다. 어두침침하고 축축한 복도를 따라가는 내내 자신의 위치나 시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장치는 아무것도 없다.
_429~430쪽, 천희란「백룸」

너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어. 네 현실은 여기에 있어.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말에 무너지지 마. 그 말들이 얼마나 내게 의지가 되었던가. 언제나 그랬다. 과연 그럴까. 지금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시한폭탄을 품은 것 같은 세계를 가까스로 통과해 걷는 중이다. 이대로 가면 길을 잃지 않고 그들에게 닿을 테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_454쪽, 천희란「백룸」

이선희의 시대보다 훨씬 더 은밀하게 여성을 착취하는 작금의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내 글쓰기가 무엇이 불의인가를 이미 알고 있는 세계가 아닌 현재의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 속으로 내던져지는 경험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근대화된 세계를 둘러싼 동경과 절망을 온몸으로 뚫고 나간 이선희의 작가 정신을 잇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_465쪽, 천희란 에세이「우리는 이다음의 지옥도 찾아내고 말 테니까」

‘나는 내 남편도 나와 같이 다리 하나를 잃기를 원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남편의 목숨이다, 이것이 나의 계산서이다’

일인칭 화자로 서술되는 이선희의 단편 「계산서」에서 주인공은 다리 절단 사고로 인해 남편의 애정이 식었음을 직감하고 ‘모조가정’을 떠나 자기 학대의 유랑길에 들어서게 된다.
‘나’는 일주일 전 집을 떠나 마차를 타고 북국 호인(胡人)의 땅으로 왔다. 일곱 달 전에 다리 하나를 잃고 절름발이가 된 ‘나’에게 이곳은 너무나 춥고 고된 환경이다. 하지만 ‘나’는 돌아갈 생각이 없고, 이곳에서 일종의 계산서를 작성 중이다. 아이와 함께 한쪽 다리를 잃는 사고를 당한 ‘나’의 결혼 생활은 망가져갔다. 남편이 자신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닌 남편 스스로를 안타까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남편에 대한 신뢰까지 잃어버렸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나 남편이 새 넥타이를 매며 급하게 나가는 모습을 보고 “두 다리가 성한 계집을 찾아갔”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남편에게서 무언가를 얻어야, 혹은 남편이 무언가를 잃어야 동등해질까 생각한다. 이는 남편의 다리 한쪽이 아니라 목숨 전체로 확대되어, 남편이 죽음을 맞아야만 수지가 맞을 듯싶다. ‘나’는 말한다. 이것은 바로 “모든 아내 된 자의 계산서”일 것이라고.
장편 「여인 명령」의 남숙채는 여자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 유원과 연인 사이이다. 유원은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의 한 공장에 기사로 취직했으나, 곧 직장을 그만둔다. 이후로 숙채는 그가 ‘운동에 뛰어든 주의자’가 되었다고 추측한다. 유원은 숙채에게 청혼하며 고향에 먼저 가 있으라고 한 뒤 자신도 뒤따라가려다 ××서원에서 검거되어 감옥에 갇힌다. 이 사실을 모르는 채로 고향에서 하염없이 유원을 기다리던 숙채는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로 인한 일가들의 결혼 독촉을 피해 서울로 되돌아온다. 이후 숙채는 학교를 그만둔 뒤 백화점 점원과 술집 여급으로 지위 변화를 거듭하고, 유부남과의 결혼으로 갈등을 겪는 등 불안정하고 고된 삶을 이어간다.
이선희의 작품 속 여성들은 이와 같이 늘 죽음과도 같은 고난의 한복판에 놓이는데 그 기저에는 남성에 대한 강한 피해의식과 보상심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고통과 비애를 견디지 못하고 파멸의 길로 전락하는 여성의 모습을 다루면서도, 불행에만 집중하지 않고 과감히 현실로부터의 탈피를 추구함으로써 당시로서는 큰 도전을 꾀했으며 능동적인 의식을 보이고 있다.

미궁 탈출 게임을 통해 본
‘여성’, ‘청년’, ‘레즈비언’이라는 각각의 방room

천희란의 소설 「백룸」에서 게임 스트리머인 ‘나’는 매번 비슷한 플레이에 염증을 느끼는 중이다. 반복되는 위기와 실수로 빚어진 자신의 캐릭터와 시청자들의 반응에도 무력감이 찾아든다. 대학을 자퇴하고 본격적으로 스트리밍을 시작하며 비교적 단기간에 유명세와 수익을 얻게 된 ‘나’는 친구들과도 미묘한 불화를 겪고 있다.
열세 살 연상인 변호사 애인에게도 이별을 고한 참이었다. 그녀가 조건 없이 베푸는 모든 호의와 선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착하다거나 순진하다거나 하는 ‘나’에 대한 그녀의 섣부른 정의의 말들 때문이었을까. 이별의 이유를 캐묻는 그녀 앞에서도, 또 자기 자신 앞에서도 ‘나’는 답을 들려줄 수가 없다. 그리고 후속작의 여주인공이 레즈비언인 게임을 방송하던 중 ‘나’는 커밍아웃을 한다. 그런 ‘나’를 향한 무지와 야만의 말들은 불쾌할 뿐 상처를 주지 않으며, 그렇다고 ‘나’를 위해 싸워주는 연대의 행위가 내게 들이닥친 난관의 무게를 덜어주는 것도 아니다. ‘나’의 현재 삶은 게임에서처럼 ‘미궁’의 연속이다.
소설은 실체 없는 소문과 비난, 손쉬운 연대와 단절 등 끝나지 않는 지옥과도 같이 ‘나’를 옥죄는 현실을 선명하게 되비춘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있”는 것이 가능한가, 하고 물으며.

이 시대를 써 내려가는 작가 천희란은 이렇게 썼다,
“이선희는 ‘지속된 한계’를 벗어던지기 위해
새로운 지옥을 찾아 나선 작가였다”

“제가 무슨 활빈당을 꾸미고 있던지 그저 웃고 보아주십시오.” 「여인 명령」의 ‘작가의 말’에서 이선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개인의 욕망과 엄혹한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면서도, 그 사실을 폭로하는 데서 나아가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깨우치고자 몸부림쳐 왔다. 천희란은 에세이 「우리는 이다음의 지옥도 찾아내고 말 테니까」에서 이선희에 대해 “‘지속된 한계’를 벗어던지기 위해 새로운 지옥을 찾아나선 여성”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선희가 거의 한 세기 전 직면했던 ‘지옥’은 천희란의 소설에서는 규범성에 내재된 차별적 폭력이 난무하는 현대의 지옥으로 반복, 재생산된다.
천희란의 소설 속에서, 게임의 일종기도 한 ‘백룸’의 공간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출구는 있으나 탈출이 아닌 새로운 미궁으로 이어지는 공간”, “완전히 폐쇄적이면서도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아이러니한 공간”. 시대를 달리하고도 계속 이어지는 미궁 속, 이선희와 천희란 작가가 마련해둔 ‘출구’는 어디인지,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떻게 나 자신으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이선희

191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성장기 대부분을 원산에서 보냈다. 십 대 후반에 서울로 상경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에서 3년 동안 수학했다. 잡지 《개벽》 《신여성》 《신세기》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조선일보》 학예사 기자로도 활동했다. 1934년 《개벽》사에서 기자로 1년간 근무하면서 쓴 단편 「불야여인-가등」을 《중앙》 12월호에 발표하며 등단한 뒤, 1936년 《신가정》 6월호에 「오후 11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 생활을 시작하였다. 단편 「계산서」, 중편 「처의 설계」, 장편 「여인 명령」 등 열네 편의 소설과 두 편의 콩트, 사십여 편의 수필과 평론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해방 이후 1946년 극작가인 남편 박영호를 따라 월북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저자(글) 천희란

201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소설집 『영의 기원』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경장편 『자동 피아노』 『K의 장례』가 있다. 2017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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