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 삼부작 2: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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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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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향수로 가득한 1부와 섬뜩하리만치 냉정한 3부 사이에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청춘』은 두 작품의 특성을 적절히 나눠 갖고 있다. 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사회에 나오면서 세상으로부터 주어진 삶을 억지로 살아야 했던 디틀레우센은 단순 노동직을 전전하면서도 문학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삶의 지침을 냉정한 세상에게서 배우게 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지침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원하는 바가 있으며, 내가 그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면 나도 그가 욕망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냉정함과 뜨거운 욕망이 함께 들끓는 세상을 헤쳐 가며 시와 사랑을 찾아 헤매는, 이제 스무 살을 향해 다가가는 이 예비 시인은 숙명이나 정의 같은 형이상학적인 미덕보다는 욕망의 거래와 정산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점점 시인에 가까워지는 동시에 ‘어린 시절’로부터 급격히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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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한다. “나한테 그 시들을 보여 주고 싶어요?” 내가 그에게 원하는 게 뭔지 그가 알아맞혔기에,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다. “아.” 그가 말한다. “시가 아니면 뭔가 다른 걸 수도 있었겠죠. 사람들은 늘 서로에게서 뭔가를 원해요. 그리고 난 당신이 나를 어딘가에 이용하고 싶어 한다는 걸 내내 알고 있었어요.”
-37쪽
“네 젊은 남자 친구는 어떻게 됐니?” 한때 학교 선생님의 장모가 되는 꿈을 꾸었던 어머니가 묻는다. “다른 사람이랑 사귀어요.” 내가 대답한다. 그러자 성격상 모든 일에 아주 구체적인 이유들을 만들어 붙여야만 하는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너 외모에 신경 좀 더 써야겠다. 그놈의 자전거 대신에 봄에 입을 정장을 사야겠어. 자연 미인도 아닌데 조치를 좀 취해야 하지 않겠니.” 어머니는 내게 상처를 주려고 이런 말들을 하는 게 아니다. 어머니는 그저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철저히 무지할 뿐이다.
-69~70쪽
“저, 파혼했어요.” 내가 말한다. “잘했구나.” 어머니가 대답한다. “그 사람은 별로 좋은 남자가 아니었어.” “아뇨, 좋은 남자였어요.” 나는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문다. 그의 좋은 점이 무엇이었는지 어머니에게 설명하지 못하겠다. “누구에게나 뭔가 좋은 점은 있어, 알프리다.” 이모가 침대에 누운 채 다정하게 말한다. 그리고 어머니와 나는 이모가 카를 이모부를 떠올리고 있음을 안다.
-140쪽
죽음은 내가 한때 믿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잠드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잔인하고 추악하며 역겨운 냄새를 내뿜는다. 나는 두 팔로 내 몸을 감싸 안은 채 내가 젊고 건강하다는 사실을 만끽하며 기쁨에 젖는다. 그렇지 않다면 내 청춘은 당장이라도 없애 버리고 싶은 하나의 결함이자 방해물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151쪽
그는 챙 넓은 녹색 모자를 들어 그걸로 우아하게 호를 그리더니, 다시 머리에 쓰고는 대로를 빠르게 걸어 내려간다. 나는 거기 서서 내 눈으로 좇을 수 있는 만큼 그를 지켜본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한다. 나는 늘 남자들과 헤어지고 있다고. 그들의 등을 빤히 쳐다보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발소리를 듣는다고. 그들이 뒤를 돌아보고 내게 손을 흔드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189쪽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욕망을 거래할 수 있다는 뜻이다
1부 『어린 시절』에 이은 2부 『청춘』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 디틀레우센의 모습을 담고 있다. 가난한 여성 노동자인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순했다. 벌이가 적은 직업을 전전하거나 결혼해서 전업 주부가 되는 것이었다. 디틀레우센은 두 선택지를 모두 거부할 방법을 찾아내려 애쓰고, 특히 어린 시절부터 꿈에 그리던 시인이 될 방법을 찾기 위해 분투한다.
아련한 향수로 가득한 1부와 섬뜩하리만치 냉정한 3부 사이에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청춘』은 두 작품의 특성을 적절히 나눠 갖고 있다. 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사회에 나오면서 세상으로부터 주어진 삶을 억지로 살아야 했던 디틀레우센은 단순 노동직을 전전하면서도 문학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삶의 지침을 냉정한 세상에게서 배우게 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지침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원하는 바가 있으며, 내가 그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면 나도 그가 욕망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냉정함과 뜨거운 욕망이 함께 들끓는 세상을 헤쳐 가며 시와 사랑을 찾아 헤매는, 이제 스무 살을 향해 다가가는 이 예비 시인은 숙명이나 정의 같은 형이상학적인 미덕보다는 욕망의 거래와 정산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점점 시인에 가까워지는 동시에 ‘어린 시절’로부터 급격히 멀어져 갔다.
*‘코펜하겐 3부작’ 소개
출간 후 50여 년이 지나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 10선에 선정된 회고록
비극적인 여성 작가의 삶. 최근 들어 집중적으로 조명받는 이 주제를 다룬 책은 그만큼 치열한 경쟁과 마주해야 한다. 이때는 실비아 플라스나 버지니아 울프처럼 유명한 작가의 삶을 그리거나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는 내용을 담고 있을수록 주목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공식에 거의 부합하지 않는 토베 디틀레우센의 회고록 ‘코펜하겐 3부작’은 조용히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태풍처럼 그 틀을 부수었다. 덴마크 바깥에는 반세기 가까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가 무려 50여 년 전에 쓴 회고록이 독자와 비평가의 압도적인 찬사를 얻은 것이다.
정의正義에서 벗어남으로써
정의定義에서 탈출하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작가의 유년기부터 서른 남짓까지를 회고하는 이 3부작은 엘레나 페란테를 연상시키는 설정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끝은 노스탤지어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흔히 애수와 소회로 채워지는 회고록을 특별한 작품으로 승화시킨 비결은 바로 냉정함이다. 그는 어느 타인보다 더 냉정하게, 마치 환부를 관찰하는 의사처럼 스스로의 결점들을 관찰했고, 그 관찰 결과에 아무런 판단도 덧붙이지 않았다. 합리화도, 자책도, 원망도 없다. 심지어 디틀레우센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문하지 않는다. 회고를 통한 감정적인 결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작가의 고백이 독자의 공감이나 연민으로 이어지는 회고록 장르의 심리적 전통을 파괴해 버렸다. 실로 전위적인 결과였다.
1985년에 『어린 시절』과 『청춘』을 통해 처음으로 디틀레우센을 접한 미국 여성주의 문학계는 두 작품의 이러한 특징을 격찬했다. 디틀레우센이 ‘불의를 깨닫고 정의를 추구(해야)하는 여성’이라는 정치적 프레임마저 벗어던지고 오류와 불안에 기꺼이 노출된 여성-인간을 출현시켰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정의와 윤리로부터 스스로의 욕망을 따라 이탈하는 것, 이는 파멸을 부르는 불의이면서 더 높은 단계의 해방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 여성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던 틸리 올슨은 디틀레우센의 회고록에 실린 이런 문제의식을 파악하고 그를 당대에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했다. 그리고 이 문제의식은 그로부터 30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숙제처럼 다가온다.
또한 이 냉정함과 초연함은 특별한 종류의 온기도 가져다준다. 자기 연민이 없는 디틀레우센은 자신의 불행을 외부에 투사하지 않고, 따라서 적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조국을 점령한 독일군 병사들조차 미워하지 않는다. 시대와 운명이 그들을 거기로 이끌었을 뿐이고,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불공평한 의무와 욕망을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깨달았던 디틀레우센은 타인의 과오와 오류를 자신의 그것처럼 조용히 바라본다. 손쉽게 내 편과 상대편을 가르지 않고 온 인간이 근본적으로 같은 결핍을 지닌 동족임을 이해한 것이다. 회고록 사상 가장 냉철한 관찰자의 내면에 담긴 이 역설적인 따뜻함은 오래도록 잊기 어려운 감흥을 선사할 것이다.
작가정보
Tove Ditlevsen, 1917~1976
20세기 덴마크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1917년에 코펜하겐에서 1남 1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였으며 어머니는 전업 주부였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언어 구사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고등 교육을 포기해야 했다.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그는 노동자 지역에서 함께 자란 또래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고, 어머니와의 애착 관계 형성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이 결핍은 훗날 디틀레우센의 삶에 많은 시련을 안겨 주지만, 동시에 가장 풍부한 작가적 영감을 안겨 주는 원천이 되기도 했다.
10대 후반에 가정부, 사무 비서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디틀레우센은 작가이자 비평가인 비고 F. 묄레르와 만나면서 그간 염원하던 문학계로 진출했다. 1939년 첫 번째 시집인 『소녀의 마음』을 출간한 뒤로 시집과 소설을 꾸준히 내놓았으며, 1950년대에는 동화를, 1960년대부터는 에세이를 여러 권 발표했다.
디틀레우센의 작품들은 생전에 덴마크 내에서는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그를 해외에 알린 작품은 사후인 1985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두 권의 회고록 『어린 시절』(1967)과 『청춘』(1967)이었다(그 뒤의 이야기를 담은 『의존』(1971)은 2019년에야 영어로 번역되었다). 특히 미국의 여성주의 작가이자 활동가로 명망이 높았던 틸리 올슨은 이 회고록을 접한 뒤 디틀레우센을 해당 세대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았다. 당시만 해도 구세대적인 작가로 여겨지던 디틀레우센은 이후 본격적인 재평가를 받았고, 인간 내면의 불안을 관찰하는 데 있어 독보적인 능력을 가진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기자, 편집자, 작가 등 글을 다루는 다양한 일을 하다가 번역을 시작했다. 거대하고 유기체적인 악기를 조율하는 일을 닮은 번역 작업에 매력을 느낀다. 옮긴 책으로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노마드랜드』, 『아파트먼트』,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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