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에서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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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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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정병호 교수는 2024년에 타계했다. 정병호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어배너-섐페인에서 문화인류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아동을 위한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남북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어깨동무’ 활동 등을 해왔다. 그는 인류학을 단순 학문이 아닌 현장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움직임으로 삼고 이를 실천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의 활동을 기리기 위해 국내외 동료와 제자 들이 힘을 합쳐 정병호 교수가 남긴 구술녹취록을 바탕으로 《긴 잠에서 깨다》를 세상에 내놓았다.
《긴 잠에서 깨다》는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이 모든 과정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화합과 평화다. 정병호 교수는 슈마리나이 현장에서의 유골발굴을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 재일동포와 대만의 청년들까지 동아시아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주춧돌이 됐다. 이는 여러 학계 사람과 시민, 지역 사회까지 참여해 힘을 불어넣은 단체로, 그가 꿈꿨던 ‘하나’가 되는 화합과 평화의 메시지 그 자체다.
사회·역사적 문제에서 항상 한쪽은 가해자가, 한쪽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이고 대립적인 구도에서 한 걸음 나아가 서로를 진정으로 알아가고 진심으로 대할 때 생기는, 진정 한 걸음 나아가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를 비롯해 그와 얽힌 수많은 사람의 작은 움직임으로 사회에 긍정적인 큰 변화를 가져온 기록이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따라가야 할 이정표다.
1장 운명적인 만남: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일본 현장 연구를 가다│‘이상한’ 스님│운명이 결정되는 어린이집│한 달 댁에서 신세 좀 지겠습니다│댐 공사 현장에서 조선인의 위패를 발견하다│뜻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2장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 기획: 인류학자라면 해야 하지 않을까
조릿대숲에서 한 약속│일본 평화교육의 선구자를 만나다│아버지와의 마지막 시간│가해와 피해의 구도를 넘어│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을 기획하다│준비된 사람들│한일 유골발굴 실행 위원회를 꾸리다
3장 역사적으로 ‘연루’된 이들: 처음으로 유골을 만나다
유골발굴 프로젝트의 전환점이 된 인터뷰│국적은 제각각, 마음은 한 뜻│학생 자치 위원회를 만들다│홋카이도 주민들의 인심│만나도 될 만큼은 공부해야 한다│현장에서 터진 ‘앙케트’ 갈등│첫 번째 유골이 출토된 날│양립 구도를 넘어선 공동체가 되다
4장 나비효과: 부드럽고 약한 사람들의 고리는 변화를 일으킨다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족을 찾아가다│‘한일’을 넘어 ‘동아시아’로│재일동포 청년들이 불어넣은 생명력│통일이 돼도 우리는 차별받을 것 같아요│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는 교육│차별은 보이지 않을 뿐이다│신뢰와 연결의 감각│이성도 본성이야!
5장 기약 없이 보관된 유골들: 망각 속에 가라앉은 기억을 되살리다
무덤도 없이 떠난 사람들의 무덤을 만들다│조선 출신, 30대 남성│과거사를 넘어선 아사지노 유골발굴│세우지 못한 희생자 추도비│대학 강당에 방치돼 있던 유골│아이누의 후손과 동학 지도자의 후손│이름과 신원이 지워진 101구의 유골│정태춘의 〈징용자 아리랑〉
6장 유골 115구의 귀환: 삶과 죽음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유골의 사연과 미완의 숙제│안 된다는 말만 하는 정부 기구, 본질을 외면한 보상 기관│‘누구의 유해인가’도 중요하지만│그분들이 왔던 길로 되돌아갑시다│과거는 ‘덮고 갈’ 수 없다│묘역을 마련하다
7장 ‘70년만의 귀향’: 길고 긴 잠을 깨우다
귀향의 시작│배를 타고 도쿄-교토-히로시마까지│115구의 유골, 115개의 유골함│고향 땅의 뜨거운 환영│사회·문화적 연대가 만든 장례식│돈도 명예도 바라지 않고│하나의 유골은 천 개의 다이너마이트와 같다│아이누의 ‘85년 만의 귀향’│멀리 가고자 하는 사람은 함께 간다
8장 평화디딤돌: 기억을 일상으로 가져오다
걸림돌과 디딤돌│기억·진실·평화의 상징│마음을 움직이는 작은 일부터 다시 시작하자
9장 강제노동박물관 건립: 사람들 마음에는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무너진 전시관을 다시 세우다│강제노동 현장에 세워진 첫 번째 박물관│이스트 아시안 드림을 상상하다│뜨거웠던 여름의 기억이 연결되고 움직이기를
에필로그: 철부지 소년이 실천인류학자가 되기까지
10월 유신이 10대 청소년을 바꿔놓다│경찰서에서 구치소까지, 자유를 위한 갈망이 싹트다│‘문화운동’의 세례를 받다│야학 교과서를 만들며 인류학에 매료되다│미국에서 드디어 시작한 인류학 공부│나의 쿨한 선생님│일본에 대해 욱하는 마음을│1984년, 달동네 해송아기둥지│유골발굴의 계기가 된 일본 현장 연구
부록
정병호의 선물, 동아시아에 심은 희망의 씨앗│슈마리나이에서 피어난 평화의 씨앗│현장의 인류학, 기억의 공동체를 만들다│‘분단’을 넘어서는 공감의 힘│세계적 흐름 내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특징│계속 살아 숨 쉴 실천의 삶
1997년 여름, 홋카이도의 외딴 숲속에 젊은이 수십 명이 모여 땀을 흘려가며 유골을 발굴하고 수습해 정중한 추모 의례를 올려드렸다. 밤에는 열띤 토론과 어울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작은 시골 동네의 주민들은 뜻을 모아 이들을 물심양면 지원했고 매끼 정성 가득한 밥을 지어주며 응원했다. / 젊은이들은 친구가 되고,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바다 건너 만나러 다니며 유학도 갔다. 사랑하고 결혼도 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시민운동가, 연구자, 교수, 작가가 됐으며 한일 관계를 비롯한 동아시아 평화의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중이다. 지금은 그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이 이 일에 합류하고 있다. _17~18쪽 〈프롤로그: 좀 더 나은 내일을 여는 일〉 중
1976년 어느 주말, 도노히라는 낚시를 하러 갔다가 우연히 슈마리나이 우류댐 근처에 있는 절인 광현사에서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 위패를 발견했다. “황병만, 쇼와 18년(1943년) 9월 10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황 씨가 댐 공사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위패였다. 절에서 다른 위패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 사람들이 어디서 왔고,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생각했다. / 도노히라는 직전에 진보적인 향토사학자들과 지역운동가들의 민중사 발굴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아이누와 소수민족 차별 문제에 대해서 각성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마주친 위패는 우연한 발견이 아니었다. 그는 강제노동 희생자 문제를 자신의 주제로 삼아 그들의 흔적을 발굴하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_41~42쪽 〈1장 운명적인 만남: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중
일리노이대학교 인류학과는 고고학 수업 두 과목을 필수로 들어야 했는데, 나는 한여름에 미국 선주민 주거지와 무덤을 발굴하는 수업을 들었다. 유골발굴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슈마리나이 현장을 처음 방문했을 때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도노히라가 유골발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줬다. / “우리는 이렇게 발굴하고 깨끗이 씻어서 모두 화장해드렸습니다.” / 심지어 화장하는 사진도 보여줬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아……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노히라에게 말했다. / “여러분 모두 좋은 뜻으로 잘하고 계신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셨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범죄 현장이자 그 범죄의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증거로서 의미가 될 만큼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문가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나도 유골 문제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은 논문 쓰는 게 급합니다. 빨리 논문을 쓰고 한국에서 교수가 되면 학생들과 다시 오겠습니다.” / 그 약속을 1989년 가을에 했고 약속을 지킨 것은 1997년 여름이었다. _48~49쪽 〈2장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 기획: 인류학자라면 해야 하지 않을까〉 중
1994년에 나는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됐고 이미 공동육아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게다가 1995년부터는 남북어린이어깨동무 일로 바빠, 일본 평화교육 쪽에서 연락이 와도 제대로 응답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슈마리나이 유골발굴에까지 손을 대는 건, 지금 돌이켜봐도 무모한 일이었다. / ‘이건 미친 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 정진경 선생에게 상의했더니 한참을 고민하다가 “당신 같은 인류학자에게 이런 중요한 일이 찾아왔는데 언젠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했다. 그리고 그때 유능한 학생 자원봉사단도 있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 작업이 가능할 것 같았다. 동시에 학생들에게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되리라 기대했다. _58~59쪽 〈2장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 기획: 인류학자라면 해야 하지 않을까〉 중
실행 위원회 내에서도 “정말 일본 학생들이 이런 유골발굴 프로그램에 올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는데 예상과 달리 참여가 이어져 다들 놀랐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학생들이 특별히 역사 문제에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한국 학생들과의 만남 자체에 흥미를 느꼈고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한 이가 많았다. / 참가 동기도 다양했다. 대학교에서 추천을 받거나 지인을 통해 소식을 저한 경우도 있었다. “여름에 시원한 홋카이도에서 한일 학생 교류 비슷한 걸 한다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온 이들도 있었고, 신문 기사를 보고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학생들도 물론 있었다. 일본 시민단체에서는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고 판단해서 자발적으로 참가한 이들도 있었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소속 활동가 몇 명도 호기심을 갖고 현장을 찾아왔다. _70~71쪽 〈3장 역사적으로 ‘연루’된 이들: 처음으로 유골을 만나다〉 중
우리는 일본에 대해 근거 없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한편, 깊은 피해의식과 열등감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이 감정들은 얽히고설켜 때로는 자부심과 분노로 때로는 혐오와 증오로 표출되곤 한다. 한국 내에서 진보적이거나 사회 문제에 관심 많은 사람이 일본 사람을 만나면 “너희들은 우리에게 죄를 지은 놈들이니까”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공격적인 언사를 던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피해자라는 도덕적 우위에 서서 상대를 꾸짖고 가르치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움츠러들고 조용해졌다. / 나는 한일 간의 다양한 만남의 자리를 지켜보며 과연 이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 깊이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관련 학자, 활동가 들과 함께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화적 오해와 상호인식 문제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지 자주 논의했다. 내가 일본 문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결심한 이유도 결국 인류학자로서의 도전 때문이었다. 일본을 문화적 편견 없이 이해하는 일은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였다. 내가 직접 겪었던 일본에 대한 경험과 복합적인 감정을, 학생들이 실제로 일본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어떻게든 미리 체감하고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일본문화론 수업의 목표였다. _79~80쪽 〈3장 역사적으로 ‘연루’된 이들: 처음으로 유골을 만나다〉 중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은 매 순간 역사의 무게를 느끼며 강행되는 고된 발굴 작업 속에서 우정을 쌓아갔다. 새로운 만남에서 비롯된 흥분과 진지한 토론의 열기가 이어졌다. 함께 땀 흘려 일하고, 자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노는 공동생활 체험을 통해 이제까지 추상적으로만 알았던, 살아 있는 이웃나라 젊은이들의 존재를 총체적으로 느꼈다. 발굴이 끝난 마지막 날, 정말 봇물 터지듯 이야기가 쏟아졌다.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당시 다쿠쇼쿠대학교의 한 철학과 교수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 “이번 만남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맞먹는 동아시아의 대사건이다.” _89쪽 〈3장 역사적으로 ‘연루’된 이들: 처음으로 유골을 만나다〉 중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과 그에 이은 유족 찾기는 단지 과거를 반추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또한 과학적 증거만을 수집하는 차가운 사실 확인 절차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이 일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좀 더 나은 내일을 열기 위해 반드시 마주하고 성찰해야 할 과제다.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의 삶을 복원하고, 단절된 기억을 다시 이어 붙어는 이 작업은 침묵을 강요받았던 진실의 회복이자 우리가 함께 짊어져야 할 역사적 책임의 한 형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기억’이 어떻게 미래를 여는 문이 될 수 있을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기도 하다. _98쪽 〈4장 나비효과: 부드럽고 약한 사람들의 고리는 변화를 일으킨다〉 중
국민·국가 체제 안에서의 차별은 일정한 보편성을 가진다. 누군가가 그 체제 안에서 차별을 경험할 때 또 다른 누군가는 같은 틀을 이용해 타인을 배제한다. 다른 나라에서 아주 사소하지만 분명한 차별을 겪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은 잊히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들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구조의 일부로 작동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직접 차별하지 않았다고 해도 체제가 내게 배제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차별을 단지 ‘개념’으로만 다뤄서는 안 된다. 차별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누군가에게 가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에게는 더욱 첨예한 현실일 것이다. 그러니 차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경험이든 타인의 고통이든 그 구조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_114~115쪽 〈4장 나비효과: 부드럽고 약한 사람들의 고리는 변화를 일으킨다〉 중
첫 발굴 경험을 토대로 사전 준비를 더욱 철저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유골발굴이라는 작업이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구나 새삼 실감했다. 1997년, 첫 발굴 당시처럼 유골발굴 그 자체에만 의미를 둘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도 다시금 느꼈다. “이번에는 몇 구를 발굴했는가?”와 같이 숫자에 의미를 두면 이 작업은 언젠가 반드시 한계에 부딪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골발굴을 다른 방식으로 의미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유골발굴 자체를 넘어 그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만남과 상호이해야말로 우리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할 이유라는 생각이 점점 더 깊어졌다. _126쪽 〈5장 기약 없이 보관된 유골들: 망각 속에 가라앉은 기억을 되살리다〉 중
지금도 분노를 감출 수 없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기억과 애도를 정치적 도구로 삼는 순간, 우리는 또 한 번 희생자를 외면하고 정치화하게 된다. 애초에 그들이 의도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를 위한 사업이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외교적 관계는 여전히 경직돼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아사지노를 찾아가 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우리는 아사지노 주민들과 좋은 기억을 나눴고 지역 사회와도 깊은 신뢰를 쌓아왔다고 믿는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지금도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 나는 아사지노에서의 발굴이 일본 사회를 계속해서 아시아 차원의 연대와 국제화로 이끄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했다. 실제로 많은 일본 시민이 그런 미래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를 아사지노에서 내 눈으로 봤다. 도쿄의 코리아타운에 모여드는 한류 팬들만이 아니라 일본 곳곳의 평범한 시민들이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한국을 알고 싶어 하고 교류를 바라는지를 직접 경험했다. 그런 일본 시민들까지 혐오와 증오의 정치에 휘말려 있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다. 나는 정말 좋은 일본 시민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그들 또한 해원과 평화, 우정이 실현되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 그 마음을 나는 지금도 믿는다. _137~138쪽 〈5장 기약 없이 보관된 유골들: 망각 속에 가라앉은 기억을 되살리다〉 중
1997년과 2001년, 일본 홋카이도 슈마리나이에서 발견된 조선인 희생자의 유골을 한국으로 모시고자 한국 정부 관련 기관에 “우리가 직접 봉환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민간 차원에서 함부로 하지 말라”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첫 정부 기구인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이하 강동위)’가 출범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피해자와 희생자 유족 들은 소송을 제기하고 거리에서 호소하며 국가가 공식적으로 나서달라고 외쳤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정부도 외면할 수 없었고, 결국 2004년 3월 국회에서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 법을 근거로 마침내 위원회가 출범한 것이다. 위원회의 설립에는 일제 강제노동 피해자들과 유족 단체들의 끈질긴 요구와 눈물겨운 노력뿐만 아니라, 슈마리나이 유골발굴 사례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생각한다. _164~165쪽 〈6장 유골 115구의 귀환: 삶과 죽음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중
방향을 정했다. 삿포로에서 비행기를 타고 바로 한국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도쿄,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시모노세키까지 일본 열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기억의 길’을 만들기로 했다. 이 여정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발신이 되기를 바랐다. 혹시라도 누군가 미리 알아서 길을 막는다면 그 자리를 문제 제기의 자리로 만들기로 했다. / “이 존재는 당신들이 덮고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 그걸 사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봉환의 더 큰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효율보다는 속도 조절을 택했고, 중간중간 멈춰서 발언하고 함께 추모하면서 사회적 메시지를 만들어가기로 했다. 이것이 단지 유골의 이동이 아니라 존엄의 회복을 위한 행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_176쪽 〈6장 유골 115구의 귀환: 삶과 죽음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중
115구의 유골을 모시는 것이라면 115개의 유골함이 있어야 했다. 귀향의 상징적 장소에 각각의 존재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울 시청 광장에서 진행될 귀향 행사에는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학생들, 어린이어깨동무와 공동육아 활동가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도 이 유골이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닌 역사의 무게를 지닌 개별적인 존재로 다가가길 바랐다. / 일본 절에서는 성인 손바닥 크기의 작은 유골함을 사용하는데, 삿포로 별원에서 유골함들을 준비해줬다. 그 유골함에 담기 위해선 반드시 분골 작업이 필요했다. 나는 이 작업은 일본 땅에서 일본 스님이 직접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이건 한국에 가서 하지 말고 일본에서 해결하고 갑시다.” _188쪽 〈7장 ‘70년만의 귀향’: 길고 긴 잠을 깨우다〉 중
이 판세가 바뀐 결정적인 계기가 ‘70년만의 귀향’이었다. 시민들의 힘으로 이뤄진 유골 봉환 실천은 일본 사회 내부에 분명한 울림을 남겼다. 일본 재판부는 그 사건 이후 홋카이도대학교에 합의를 종용했고, 결국 고탄 공동체를 유족 주체로 인정했다. 그렇게 기네우스 고탄에서 도굴돼 납골당에 안치돼 있던 유골들은 2016년에 원래의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유골 봉환을 ‘85년 만의 귀향’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는 그 여정에 함께했다. / 홋카이도대학교 납골당에서 유골을 받아 기네우스 고탄으로 모셔가는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기억의 회복이었고, 공동체의 권리 회복이었으며, 제국이 탈취했던 존재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일이었다. 2015년, 조선인의 유골이 ‘70년만의 귀향’을 통해 본래의 삶터로 돌아간 그 흐름이 이듬해 아이누 조상의 귀향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 두 사건은 서로를 반영하며 탈식민의 길을 함께 걸은 기억의 실천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_199~200쪽 〈7장 ‘70년만의 귀향’: 길고 긴 잠을 깨우다〉 중
국민은 국가가 자신의 안전과 안녕을 완전히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해외 이주나 국적 변경을 고려할 수 있다. 물론 생각한다고 모두가 실행에 옮기거나 그럴 만한 환경을 갖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건강하고 자원이 있고 의지가 투철한 청년은 직접 정보를 알아보기도 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이주를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이주 후에는 좀 더 나은 환경을 구축해 가족을 이루고, 나아가 다른 가족을 불러들여 관계망을 넓힌다. 조류와 어류가 종족 번식에 유리한 환경으로 이주하듯이, 인간 역시 본인과 다음 세대를 위한 안전한 장소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진화한다. _117쪽 〈8장 평화디딤돌: 기억을 일상으로 가져오다〉 중
평화디딤돌은 과거 전쟁과 반인도적 범죄로 희생된 이들, 역사 속에서 단지 숫자로만 남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일상 공간으로 다시 불러내는 ‘기억의 상징’이다. 오늘날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과거 같은 장소에서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유린당한 삶의 진실을 확인하고 되새기는 ‘진실의 상징’이다. 역사적 진실을 바탕으로 진정한 민족 간 화해와 인류의 평화를 함께 모색하는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 평화디딤돌을 놓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해오던 일들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활동 사이의 접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됐다. 애초에 나뉘어져 있던 일이 아니었다. 기억과 책임, 그리고 화해를 말할 때, 그 모든 활동은 결국 같은 자리로 모이게 된다. _212쪽 〈8장 평화디딤돌: 기억을 일상으로 가져오다〉 중
순회 사전전의 목적은 재건을 위한 모금이었지만, 나는 그 전시가 단순히 모금에서 끝나는 자리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전시의 더 큰 의미는 우리가 해온 일을 일본 사회에 소개하고 의미를 함께 나누는 데 있었다. 순회 사진
인류학자라면 해야 하지 않을까
홋카이도에서 마주한 역사의 참상
슈마리나이 유골발굴부터 고국으로의 송환까지
“대부분의 인류학자가 현장 연구 과정에서 경험하듯”(29쪽) 정병호 교수와 도노히라 스님의 만남은 뜻하지 않게 시작됐다. 1989년, 현장 연구를 위해 일본의 어린이집을 연구하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도노히라 스님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방문했다. 일리노이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과 서울 달동네에 만들어놓은 해송유아원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그에게 있어 도노히라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은 엄청난 자연환경을 갖춘 자유롭고 완벽한 연구 장소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움직인 현장은 따로 있었다. 당시 도노히라 스님은 홋카이도의 선주민이라는 이유로 박해받은 아이누나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 그리고 강제노동 희생자를 위한 여러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도노히라 스님의 제안으로 동행한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이 묻혀 있다는 슈마리나이 현장은 묘지라고 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움푹 꺼진 땅에 나무뿌리와 풀이 잔뜩 엉켜 있는 방치된 땅이었다. 슈마리나이 현장은 어린이집 연구 논문과 해송유아원뿐이던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긴 잠에서 깨다》의 신호탄을 쏜 울림이었다.
“여러분 모두 좋은 뜻으로 잘하고 계신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을 하셨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범죄 현장이자 그 범죄의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증거로서 의미가 될 만큼은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문가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나도 유골 문제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은 논문 쓰는 게 급합니다. 빨리 논문을 쓰고 한국에서 교수가 되면 학생들과 다시 오겠습니다.” 그 약속을 1989년 가을에 했고 약속을 지킨 것은 1997년 여름이었다. (49쪽)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된 정병호는 학생들과 함께 일본으로 향했다. 양국이 역사적으로 깊게 얽혀 있는 사이라 걱정이 컸다. 결국 “일본 사람들은 앞과 뒤가 다르다던데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이 담긴 설문 조사로 인해 양국 학생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학생들은 갈등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문제를 해결했고 유골발굴 현장을 연대의 장으로 만들었다. ‘일본은 절대 싫다’던 한국 학생은 일본으로 이민을 가서 기자가 됐고, 한국에 관심도 없던 일본 학생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웠다.
1997년부터 2013년까지 유골발굴이 이어졌다. 유족을 찾은 유골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그럴 만한 여력이 되지 않는 유골이 더 많았다. 그때 마침 박근혜와 아베 정부가 손을 맞잡고 일제강점기 당시의 역사를 지워버리려고 시도했다.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유골은 115구. 수많은 고민 끝에 광복 70주년에 맞춰 유골을 고국으로 모셔가는 ‘70년만의 귀향’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홋카이도에서 출발해 도쿄, 교토, 히로시마를 거쳐 부산항에 도착해 파주 서울시립묘지에 꾸며진 ‘70년만의 묘역’에 유골을 안치했다. 불교, 천주교, 기독교, 천도교, 상조 회사와 서울시까지 많은 이의 도움을 받아 이뤄낸 일로, 길고 긴 역사 중 한 페이지에 마침표를 찍으며 마무리했다.
진정한 평화를 모색하는 일
일상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주다
《긴 잠에서 깨다》는 역사 흔적의 발굴만을 배울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막강한 권력이나 많은 돈이 아닌 사람 한 명 한 명의 움직임과 연대로 세상을 바꾸는 방법을 보여준다. 기득권에 맞서 진행한 ‘70년만의 귀향’은 일본에서 박해받는 아이누의 유골 반환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가 됐다. 물론 역사적 문제를 ‘잊거나’ ‘덮은’ 것은 아니었다.
이 판세가 바뀐 결정적 계기가 ‘70년만의 귀향’이었다. 시민들의 힘으로 이뤄진 유골 봉환 실천은 일본 사회 내부에 분명한 울림을 남겼다. (……) 홋카이도대학교 납골당에서 유골을 받아 기네우스 고탄으로 모셔가는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기억의 회복이었고 공동체의 권리 회복이었으며, 제국이 탈취했던 존재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길이었다. 2015년, 조선인의 유골이 ‘70년만의 귀향’을 통해 본래의 삶터로 돌아간 그 흐름이 이듬해 아이누 조상의 귀향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 두 사건은 서로를 반영하며 탈식민의 길을 함께 걸은 기억의 실천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199~200쪽)
빨리 가고자 하는 사람은 혼자 가고 멀리 가고자 하는 사람은 함께 간다는 말을 정병호 교수는 계속 되새겼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사람들과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203쪽) 그러던 중 독일에서 ‘슈톨퍼슈타인’이라는 걸림돌을 봤다. 앞만 보며 걸어가던 사람들이 걸림돌에 걸려 흠칫 하고 아래를 보게 된다. 그리고 마주하는 것은 나치의 수용소에서 죽어간 유태인, 독일인 사회주의자, 동성애자, 롬인 등의 이름이 새겨진 보도블록이다. 역사를 현대로 끌어와 마주하게 만드는 장치다.
슈톨퍼슈타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그는 과거의 상처를 현재로 가져오는 ‘평화디딤돌’ 설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슈톨퍼슈타인을 만든 독일 조각가 군터 뎀니히와 일본의 조각가 긴죠 미노루를 초정해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평화의 소녀상 곁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기억하는 평화디딤돌 설치를 시작으로 일본 각지의 강제노동 현장에도 평화디딤돌을 놓았다.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자는 의미를 담은 ‘70년만의 귀향’ 프로젝트의 연장선이자 또 다른 시작이었다.
《긴 잠에서 깨다》는 비단 정병호 교수 개인이 실천한 일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평화와 화합으로 가는 ‘진실한 길’이 무엇인지 안내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를 잊지 않되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이 책을 통해서 진정으로 배울 수 있다.
인물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어배너-섐페인에서 문화인류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문과 현장을 잇는 공공인류학의 길을 정립했다.
1990년대 초반, 대안적 교육운동인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의 창립과 운영에 참여하며 돌봄과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어 ‘어린이어깨동무’를 통해 북한 기근 구호와 더불어 남북 어린이들이 만나는 평화교육의 장을 열고자 노력했다. 통일부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 내에 ‘하나둘학교’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무연고로 남한 사회로 들어온 북한 청소년들의 그룹홈인 ‘늘푸른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이주배경청소년지원재단(무지개청소년센터)을 세워 북에서 온 청소년과 다양한 이주 배경의 청소년 들이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썼다.
1997년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을 조직해 홋카이도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을 통한 국제 연대의 장을 열었다. 2015년에는 한국 대표로 희생자 유골 115구의 ‘70년만의 귀향’을 이끌었다.
한국문화인류학회장, 한양대학교 글로벌다문화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연구와 저술 업적과 더불어 남북평화와 다문화주의, 공동육아 등 사회 문제 해결에 헌신한 공로로 2015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국제동문업적상’을 수상했다. 평화디딤돌 초대 이사장으로서 홋카이도 ‘슈마리나이강제노동박물관’ 건립에 힘썼다. 저서로 《고난과 웃음의 나라》가 있으며 공저로 《공감대화》, 《극장국가 북한: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 《웰컴 투 코리아: 북조선 사람들의 남한살이》, 《한국의 다문화 공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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