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
2025년 08월 28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07월 3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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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9791194087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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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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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대선을 앞둔 2021년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저자는 진보 정당의 대선 캠프에 들어가기로 마음먹는다. 한국을 떠난 뒤 차별과 혐오가 덜한 해외에서 더 안심하며 지내게 되었다는 전 여자친구의 말에, 투쟁을 통해 한국도 살 만한 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다. 철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이며 페미니스트 활동가인 저자는, 낮에는 진보 정당의 대선 캠프에 들어가 여자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밤에는 데이팅 앱을 뒤적이며 끊임없이 레즈비언 데이트를 한다. 대통령 선거일인 2022년 3월 9일까지의 매일을 디데이 형식으로 세어 나가며, 선거 캠프의 노동자이자 퀴어로서의 일상을 흥미진진하게 써 내려간다. 정당 정치와 한 사람의 생활을 병렬로 연결하며, 민주주의와 여성, 퀴어의 삶을 한데 꿰어 내는 117일 동안의 생생한 기록이다. 가히 “페미니스트 난중일기”(장혜영)라 칭할 만하다.
일기들
에필로그
갑자기 대선 캠프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에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내려고 했던 3개월이 대선 기간과 얼추 들어맞는다고 설명했다. 그게 이유의 다는 아니었는데. 단순히 몰두할 대상이 필요해서였을까? 아니면 H에 대한 복수심에서였을까?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고 H는 늘 한국 밖에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차별과 분노, 부조리에서 한발 떨어져 살기 때문에 우울증이 심해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글쎄, 나도 외국에서 살아 봤지만 내가 겪은 상황은 반대에 가까웠다. 사회의 맥락 속에서 아예 지워진 사람, 심지어 투쟁의 주체도 되기 힘든 사람. 소수자가 아닌 투명 인간으로 살아가는 경험을 유쾌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저 지독하게 외로웠다. 어떤 상황에서 더 행복할 수 있는지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H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나는 여기서 싸우겠다고. 모두가 그럴 수는 없지만, 난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17~18쪽)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오는 길에 15분 버전으로 요약한 나의 실패한 연애담을 듣고 엄마는 역시 차갑게 말했다. “야, 오픈 릴레이션십이든 폴리아모리든 난 모르겠고, 남편이 바람피워도 울고불고하면서 계속 사는 내 친구들이랑 뭐가 다르냐?”
엄마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또 장황하게 설명했다. 생득적 가부장 권력이 작용하지 않는 퀴어 연애의 특성과 합의하에 다른 사람을 만나기로 하는 여러 관계에 대해. ‘키 파트너’라는 개념도 있어서, 각자 자유롭게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어떤 두 명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가 되기로 약속할 수도 있다고. 가만히 듣다가 엄마는 다시 말했다. “이거 그거네. 누구네 남편이 바람피우다가 걸려서 아내한테 변명을 하는데, 그 여자는 그냥 잠깐 만나는 것뿐이고 당신이랑은 같이 가정도 이루고 애도 키우고 제사도 지내잖냐고.” 아, 제사라는 말에 난 녹다운됐다. 레즈비언이고 어쩌고 연애는 연애다. 구질구질하기론 다 똑같다. (25~26쪽)
청년 정치란 뭘까? 위원장에게도 물어보았다. 청년위원회 활동에 만족하냐고. 난 솔직히 중앙당 선대위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청년위원회라고 해서 실망했다고. 학생 운동으로 사회 운동을 시작해 이제 서른이 되었으니 10년 동안 청년이었던 셈인데, 언제까지 나에게 나이 많은 사람들이 구워 놓은 케이크 위에 뿌리는 스프링클 같은 역할만 주어질까?
나이의 문제만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파티나 축제를 여는 방식의 운동을 해 왔는데, 애초에 페미니즘 운동 그리고 파티나 축제를 여는 운동 방식은 곁다리 취급을 받는다. (49쪽)
별 뜻 없는 거대한 조각품 사이를 돌아다니며 엄마한테 농담조로 말했다. “엄마는 H에게 고마워해야 해요!” 사실 농담이 아니라 완전히 진심이었다. 탓하는 마음도 꽤 섞여 있었다. 엄마는 내 쪽을 보지도 않고 “그러니까.” 하고 짧게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었네. H가 나를 재양육했다는 점을. 엄마가 주지 못한 것들을 그가 주었다는 사실을. (56쪽)
어제 참석한 참모 회의를 계속 떠올린다. 아저씨들이 저소득 청년 생계비의 대출 만기를 30년으로 할지 35년으로 할지 고민하고 토론했던 순간을. 당장 내일이라도 집권해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사람들처럼.
원래 정치인들은 아무리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늘 마법 같은 당선을 염두하는 사람들일까? 얼마나 진심일까? S는 정말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유세를 다닐까? 그렇다면 나는 그 믿음에 감동할까 아니면 실망할까? (87쪽)
미국 정치 드라마를 떠올리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연설문 작성자라는 직업이 따로 있지 않나.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하는 말을 직접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가? 대학에서는 남의 글을 허락 없이 가져다 쓰면 잘못된 일이라고 가르친다. 개인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글도 출처 없이 베끼면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 하지만 여기는 정당이니까, 내 관점과 의견을 넣어 내가 쓴 글이 ‘대표자’의 이름으로 나가는 건 당연한 이치인가? (95쪽)
내가 태어날 때 아빠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 말에 따르면, 내 탄생을 기념하며 친구들이랑 술 처마시느라 못 왔단다. 엄마는 하룻밤 꼬박 진통 끝에 나를 낳고서 생각했다. ‘아기만 낳고 이혼해야지.’ 결국 동생을 또 낳았지만. 어쩌다 금연을 결심한 이의 돗대 같은 존재로 태어났을까, 나는.
퀴어문화축제에 해마다 오는 혐오 세력은 매해 비슷한 문구가 쓰인 팻말을 든다.(똑같은 손 팻말을 매해 돌려 가며 쓰나? 그 팻말은 한 해 내내 어느 교회 창고에 쌓여 있나?) 그 단골 문구 중 하나는 “엄마 아빠가 사랑해서 나를 낳았어요.” 나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으로 태어났을까? 이혼 결심과 함께 태어난 아기는 부모의 사랑으로 탄생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이 한때 사랑하고 또 피부를 맞댈 정도로 친밀했다는 증거는, 오직 나의 존재뿐이었다. (113~114쪽)
엄마가 레즈비언이라면 좋겠다. 아빠를 만나 결혼한 과거가 있지만 중년에 정체화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까. 엄마는 왜 레즈비언이 아닐까? 더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아니, 퀴어성은 가족력일 수 없나? (129쪽)
정말로 활동가는, 혹은 진보 정당에서 일한다는 것은 웃음거리인가? 페미니스트 활동가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살 때의 장점은 이런 나를 이해해 줄 사람만이 주변에 남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작고 소중한 버블 속에서 살게 된다. 동성애도 이성애만큼 당연한, 더 나아가 “동성애도 이성애만큼 당연하다.”라고 말하면 “왜 동성애만 언급하냐. 무성애는? 양성애는? 범성애는?” 하는 반응이 튀어나올 버블 속에서.
그간 버블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데이트밖에 없었다. 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닌데 나와 다른 환경에 속한 사람을 만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앱을 통해 얼굴만 겨우 아는 사람을 만나 자기소개를 하면 이런 반응이 자주 돌아왔다. “그럼 앞으로 정치하시려는 거예요?” 그럼 그냥 농담으로 넘기고는 했다. “저 여성 편력 하느라 정치 못해요.” (146쪽)
선거 캠프로 출근이 확정된 날, 집 근처 유일한 서점인 알라딘 중고 매장에서 일기장을 샀다. 양장 노트를 집어 들고 결심했다. ○○당에서 겪은 모든 일을 기록할 것이다. 정당 정치라는 구조가 내 글을 한 개인의 것으로 사유화한다면, 그 시공간에서 내가 겪은 모든 일을 내 언어로 씀으로써 복수하겠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밤중에 위원장이 부탁한 자료를 텔레그램으로 전달하면서도 억울함이 덜했다. (153쪽)
국회로 외근 나간 어느 날, 사무실로 복귀하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사원증을 목에 건 행인이 말했다. “광인, 오늘도 광인 천지네.”
주위를 둘러보니 중공의 도청 장치로 고통받았다는 사연을 몸 피켓에 붙인 사람, 확성기를 들고 자신이 믿는 신을 전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농성장이나 간호법 제정을 촉구하며 피켓 선전전을 하는 무리도 눈에 띄었다. 정당에서 게시한 선거 홍보물도 곳곳에 붙어 있었다. 그 행인이 말한 ‘광인’은 누구일까. 대로변에 있는 그 모두일까? 666 베리칩에 대해 경고하는 사람이나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우리나 다 거기서 거기일까? 남들 출근해서 일할 시간에 거리에서 뭔가를 외치는 미친 자들? (158~159쪽)
상담이 끝날 때쯤 선생님이 말했다. “미섭 씨는 아버지 때문에 겪은 일들이 인상적이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중요한 인물은 어머니였네요. 아버지는 조연이었던 것이죠. 미섭 씨 인생에서.”
맞는 말이었다. 계속 눈물을 흘리다가 말했다.
“너무 불공평한데요. 아빠는 저를 방치했는데도 별 원망을 안 사고, 엄마는 어쨌든 열심히 키웠는데도 딸이 심리 상담에서 줄줄 울면서 이건 다 엄마 탓이라고 하고. 여자한테 너무 불리하네요, 세상이.” (163쪽)
책임지기 싫어서 이 무리의 ‘얼굴’이 되기 부담스러운 건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나대도 되나 주저했던 듯싶다. 내가 너무 돋보이고 싶어서, 주목받는 것이 좋아서 앞에 서는 건 아닐까 하는 자기 검열. 그날 이후로는 페미당당 활동을 하면서 전면에 나서는 일을 책임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게 설령 잘난 척으로 보이더라도.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책임감 때문이든 나대고 싶어서든, 애초에 한 사람이 다른 이들을 대표할 수 있는가? (170~171쪽)
회의인지 중언부언인지를 하는 와중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반은 양복에 반은 개량 한복 차림인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들어온 목적은…… 지도를 사라고? 저 현대의 김정호 선생은 여의도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지도를 팔고 있는 건가? 대선 후보가 잠적했는데 기자들이 아니라 지도 할아버지가 들이닥치는구나, 여기는.
다시 M: 지금까지 후보랑 선대위 간 소통이 안 되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당 대표는 이제 선대위 말고 비서실 체제로 후보 맘대로 하라고 하고 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빨리 잡코리아 켜. 난 벌써 워크넷 둘러보고 있어. (175쪽)
페미당당을 막 시작했을 때는 위 세대 페미니스트 활동가를 절실하게 만나고 싶었다. 우리가 활동한 시기를 어떤 이들은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부르던데, 리부트라면 일단 전원을 다 꺼야 하지 않나. 1990년대 ‘영페미’ 운동 이후 페미니즘 운동의 명맥이 끊긴, 혹은 그랬던 것처럼 기록된 시점이었다. 이 땅에 여성이 살면서부터 페미니즘 운동은 늘 존재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도, 늘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함께였지만 계보적으로는 외로웠다. 먼저 활동한 선배들, 엄마나 이모 같은 그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고, 의견도 나누고, 가능하면 칭찬도 좀 듣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선배들 중에는 호주제 폐지든 영페미 운동이든 “아휴, 난 뭐 별것도 안 했다.”라고 하는 분이 많아서 당황했거든. 이제는 그게 겸양이 아니라 연대의 표현이라는 걸 알지.
그럼에도 난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내가 했다!”라고 선언하고 책임져야겠다. ‘우리’가 했다고 하는 방법도 있겠고 당연히 그쪽이 더 진실에 가깝기도 한데, 수많은 우리들이 다 “내가 했다!”라고 뻔뻔하게 말한다면 더 좋겠다. (220쪽)
고백하자면, 가끔씩은 내가 더 당사자라고 느낄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싶기도 했다.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고 살아가면서 임신중지를 온전한 나의 일로 여기기는 힘들었다.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임신중지권 투쟁은 생식 기관, 나아가 신체 전반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낳을 권리, 낳지 않을 권리’나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같은 문구를 줄줄 외고 다니면서도 가끔은 외로웠다.
그 전화를 받고는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이 정말로 친구들을 위한 것이었구나. 그동안은 말만 했지 실제로 느낀 적은 없었다. 가까운 친구가 그렇게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내 일처럼 행복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충분했다. (222쪽)
지난번 대선 때도 S는 토론회에서 많은 남자 후보들을 혼냈다. 문재인이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하니 본인의 찬스 시간을 써 “동성애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반박했으며, “설거지는 여자의 몫”이며 이는 “하늘이 정해 준 것”이라고 말한 홍준표에게는 “딸들에게 사과하라.”라고 꾸짖었다. 그래, 꾸짖었다.
옳다거나 통쾌하기보다 왜 고맙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을까. 아, S는 하필 ‘딸들에게’ 사과하라고 했을까? 그러면 나는 마치 영원한 빚을 진 듯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그 두 순간 때문에 답도 없는 여기 선거 캠프에서 일하게 된지도 모른다. S는 어떻게 말 한마디로 온갖 딸들을 다 얻었을까, 아들 엄마 주제에. (224~225쪽)
“S를 뽑으면 S가 됩니다.”라는 말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누구도 S가 지금 당장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며 그에게 투표하지는 않는다. 다만 페미니스트로서, 퀴어로서, 노동자로서 대선에서 내 존재가 지워진다면 살 수 없겠다는 마음, 그 때문에 굳이 웃음거리가 될 사표를 내는 것이다. (237쪽)
점심 식사는 “왜 선거 캠프에 들어오셨어요?”라는 질문으로 마무리됐다. 지난 대선에서 1분 찬스를 쓴 S에게 진 빚을 갚으려 한다고 대답했다. 고등학생 때 본 모습이 좋았다고, 학원 거리를 돌아다니는 유세 차량 위에 웬 아저씨가 아니라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이 있어서 반가웠다는 말도 함께.
이를 닦고 자리에 앉아서 다시 생각하니, 엄마랑 S는 나이 빼고는 비슷한 구석이 없다. 엄마는 키가 크고 시원시원한 느낌. S는 그보다는 더…… 아니다. 외모 이야기를 해서 무얼 하나? 아무튼 나는 S에게서 엄마를 겹쳐 봤다. (243~244쪽)
진보 정당을 이끌며 국정 감사에서 기업인들에게 소리치는 일은 어디서나 높게 평가받는다. 그러니 ‘나랏일’을 하는 보호자는 ‘집안일’에는 좀 소홀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들을 실망시킨 사연이 S의 흉보다는 미담에 가깝게 소비되듯. 그러나 우리 엄마는, 고작 가족 하나 먹여 살리려고 일을 한 엄마는 우산 하나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지금까지 딸내미한테 원망을 듣는 것이다. 상사에게 소리 한 번 못 치고 일하며 더 고생스러웠을 텐데.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풀렸다. (245~246쪽)
나는 자라며 아빠가 글을 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집에 있는 단 한 대의 컴퓨터로 엄마는 매일 원고를 고쳤다. 몇 달을 그렇게 보내고, 엄마가 몸살이 날 지경이 되어야만 비로소 책이 나왔다. 택배로 도착한 책을 나는 자랑스럽지만 또 분명히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살펴보고는 책장 한 칸에 넣었다. 아빠의 이름으로 가득 찬 칸이었다. (270쪽)
겪은 일을 곧장 서사화함으로써 인생과 거리 두는 버릇은 분명 나를 지켜 주었다. 그러나 요즘은 감각을 정돈하지 않고 어떻게든 표출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냉소적 언어가 아니라 악 소리로 풀어내고 싶은 응어리가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가 아니라 시인의 딸로 자랐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또 엄마 탓이나 하기는 싫지만……. (281쪽)
하지만 연대는 그렇게 작동하는 게 아니다. 연대는 번갈아 가며 빚을 지는 품앗이도, 애정에 기반한 편들기도 아니다. 그저 옳은 일을 함께하는 행위일 뿐이다.
만일 S가 당사자로서 성소수자 인권을 이야기했다면 나는 그를 위해 무언가를 희생해야겠다는 생각도, 그를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결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당사자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여야 했다. 나는 S에게 갚을 빚이 하나도 없었다. (292~293쪽)
그러나 S가 보여 준 연대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았다. 진보 정치인이 마땅히 보여야 할 언행이었다. 진심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명제를 믿었다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를 대변해 주었다고 정치인에게 황송해할 이유는 없었다.
의식적으로 어깨를 한 번 폈다. 복수심 항목이 높은 사람은 연대감이 낮을 수밖에 없다는 심리 검사 결과가 이해됐기 때문이다. 복수란 내가 무언가를 받았기 때문에 갚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마워서 하는 복수’는 성립할 수 없다. 진심으로 고맙다면, 상대에게 빚을 졌다고 되갚는 대신 그와 연대할 일이다. (299쪽)
나는 더 이상 엄마‘들’과 징그러운 애착으로 서로 돌보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다. 그들과 연대하고 싶다. 연대는 모두 독립된 상태를 전제하는 관계다. 연대는 징글징글한 애착이 없어도 가능하다. 연대는 나와는 전혀 다른 대상과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연대는 누구에게도 빚을 지우지 않는다. (302쪽)
나는 이미 그 어떤 타인과도 연대할 자신이 있다. 내가 만난 최초의 타인, 엄마와도. (303쪽)
동성 애인과 막 헤어진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홧김에 진보 정당의 대선 캠프에 들어가 새로운 일상을 꾸리며 써 내려간 ‘페미니스트 난중일기’.-장혜영(전 국회의원)
말할 자리가 없으면 스스로 무대를 만들고 동료를 모아 방파제를 짓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심미섭은 이제 책을 통해 자신이 짓고 만들어 낸 세계로 초대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해도 될까 망설인 적이 있는 사람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권김현영(여성학자)
“그 시공간에서 내가 겪은 모든 일을 내 언어로 씀으로써 복수하겠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서로 돌보고 들볶고 되갚고 연대하는
여자와 여자와 여자들의 복수혈전
광장에서는 노동권을 외치면서도 정작 진보 정당의 노동 환경은 열악하기만 하다. 퇴근 후 업무 지시는 일상이며 ‘동일임금 동일노동’의 원칙을 지키기란 요원한 듯만 하다.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자는 진보 정당의 구호와 그 안에서의 실제 경험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틈이 있을까? 끝없이 마주치는 부조리 속에서 저자가 택한 투쟁 방식은 겪은 모든 일을 처절하리만치 솔직하게 씀으로써 ‘복수’하기다.
저자의 복수는 열악한 노동 환경만을 향하지 않는다. 사랑했지만 일시에 나를 버린 전 여자친구에게, 나를 키워 줬지만 나에게 냉담했던 엄마에게, 나를 대변해 줘 고맙지만 일순간 잠적한 대선 후보 S에게 복수의 연필심을 겨눈다. 지겹다 싶을 만큼 서로를 돌보고, 서로에게 진 빚을 되갚고, 서로를 실망시키고, 서로에게 연대하는 여자와 여자와 여자들 이야기가 제20대 대선 정국과 맞물린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보수 정당, 차별금지법 제정을 회피하는 유력 대선 후보, 젊은 남성의 표심 잡기에만 급급한 정치인들…… 이 틈에서 심미섭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일상이 당연하다는 듯, 뻔뻔하게 드러낸다.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가 어렵기에 데이팅 앱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그 어떤 관계보다 평등하지만 복잡한 욕망과 감정이 오가는 레즈비언 섹스에 대해 토로하며, 페미니스트 활동가로서 ‘동의’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대선 캠프 안에서의 대문자 정치와 대조되는 이 이야기들은, 친밀성이라는 사적인 영역을 정치로 확장하기에 이른다. 약자성에 천착해 스스로를 타자화하기를 거부하는, “적나라할 만큼 솔직하고 처절할 만큼 분투하는 이런 레즈비언 이야기”(임솔아)는 그 자체로 차별과 혐오에 정면으로 돌파하는 용감한 전략이 된다.
엄마 대신 여자친구 대신 여성 정치인 대신……
나를 키운 엄마, 내가 키운 엄마‘들’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117일
단, 아무리 슬퍼도 ‘눈물은 한 방울씩만’ 흘리면서
‘복수하기’와 ‘은혜 갚기’란 내가 받은 것을 상대에게 되돌려준다는 측면에서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은 아닐까? 저자가 진보 정당의 대선 캠프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대선 후보 S다. 제19대 대선 토론회에서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후보를 향해 S가 “동성애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반박해 준 덕이다. ‘1분 찬스’를 써 성소수자를 대변한 정치인 S에게 빚을 졌다고 느낀 저자는 자신이 진 ‘빚’을 갚기 위해 S를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일한다.
전 여자친구와 엄마에게도 마찬가지다. 전 여자친구와 결별하고 대선 캠프에서 일한 117일은 나를 사랑으로 돌봐 준 전 여자친구, 나를 대변해 주는 여성 정치인, 그리고 내게 언어와 문화 자본을 물려준 엄마까지…… 즉 나를 엄마처럼 키워 주는 동시에 내가 엄마처럼 의지할 수밖에 없던, 동시에 나를 끊임없이 실망시키는 이들에게 ‘빚’을 갚고 진정으로 독립하는 과정과 다름없다.
어떤 고통이든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로 희극화하며 스스로를 지켜 온 저자는 이 과정을 고난의 서사가 아닌 특유의 날카로운 유머로 풀어낸다. 아무리 슬프고 외롭고 화가 나도 ‘눈물은 오로지 한 방울씩만’ 흘릴 수 있기에 더욱 신랄하면서도 진실한 복수극이 된다.
“애초에 한 사람이 다른 이들을 대표할 수 있는가?”
페미니즘과 정치, 권력과 글쓰기에 관한 가장 사적인 탐구
“하지만 여기는 정당이니까, 내 관점과 의견을 넣어 쓴 글이 ‘대표자’의 이름으로 나가는 건 당연한 이치인가?”(95쪽) 선거 캠프에서 공보국장이자 대변인으로 일하며 저자는 자신이 쓴 글이 위원장 개인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데에 의문을 품는다. 활동가로 일하던 시절 자신이 쓴 글이 ‘우리’ 단체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과 달리 ‘대표자’ 한 사람의 생각과 주장인 것마냥 언어가 사유화되는 데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페미니스트 활동가로서의 경험과 편집자였던 엄마에 관한 유년기의 기억으로 뻗어 나간다. 분명 수개월간 책상 앞에 앉아 매일 글을 다듬고 노동했지만 책장에 가득하게 꽂힌 책에는 남성 작가의 이름만 남아 있던, “책장 어디에도 엄마의 이름은 없었”던(11쪽) 기억으로 말이다.
이처럼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권력과 페미니즘, 기록와 계보에 관해 진보 정치와 사회 운동 안에서 마주한 ‘여성’ 인물들을 통해 새롭게 써 나간다. 여성은 배제되어 온 남성 중심의 ‘이름 남기기’ 문화, 사회 운동 안에서 페미니즘의 위치, 여성 운동의 계보를 잇고 기록한다는 의미, 대표자를 중심으로 조직화된 권력 구조 등에 대해 구체적이고 생생한 경험을 통해 질문한다.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사랑과 연대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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