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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개의 말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밀란 쿤데라 지음 | 김병욱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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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7월 23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06월 26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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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상품 정보
파일 정보 ePUB (7.45MB)   |  약 4.5만 자
ISBN 9788937428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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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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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2주기인 7월 11일을 앞두고 작가의 유고집 『89개의 말 ㆍ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쿤데라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의 프랑스 망명을 도운 피에르 노라가 작가 사후 두 편의 산문을 묶어 펴낸 책이다. 이 두 텍스트는 쿤데라가 각각 1985년과 1980년에 프랑스 갈리마르에서 간행한 인문ㆍ정치 잡지 《데바》 지에 발표한, 매우 개인적인 글들이다.
「89개의 말」은 이후 작가가 개고해 『소설의 기술』에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이라는 꼭지로 실렸다. 그런데 사실 이 글은 소설 미학에 관한 글이라기보다는 쿤데라가 중요시했던 말들, 골칫거리로 여겼던 말들, 좋아했던 말들을 모은 그의 “개인 사전”에 더 가깝다. 어느 순간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은둔한 밀란 쿤데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말해 그가 무엇을 중요시하고 좋아했으며,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던 사람인지 말해주는 말들의 모음인 것이다. 원래는 《데바》 지에 89개의 말로 된 소사전으로 발표되었다가, 내용을 적잖이 덜어내고 수정하고 12개의 말을 덧붙여 『소설의 기술』에 수록했다가, 이 책에서는 원래의 글에 나중에 덧붙인 12개의 말을 포함시켜 총 101개의 말들이 실렸다.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는 단행본에는 실린 적이 없는 국내 초역의 글이다. 쿤데라를 낳고 그의 작품의 특수성을 길러 준 문화의 폭발, 그리고 ‘작은 나라’에서 탄생했으되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친 한 문화의 풍요로움에 관한 이 에세이에는 정치적 이유로 한평생 타국에 살아야 했던 작가가 품었던 향수와, 그 문화를 억압하고 질식시킨 ‘소련 문명’과 체코 문명의 가치를 몰이해한 서유럽에 대한 이중의 비판이 드러나 있다.
「89개의 말」과 이어지는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는 밀란 쿤데라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이들에게 큰 선물이자, 그가 남긴 언어와 통찰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고 시의적절하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밀란 쿤데라가 우리 곁을 떠난 지금, 다시 가져와 한데 묶은 이 두 텍스트는 그의 존재를 다른 어떤 책보다도 더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준다. 이 책은 어떤 이들에게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세계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가 될 것이요,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의 매력적인 아이러니와 판단의 섬세함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의도이자 무엇보다 소중한 바람이다.” (피에르 노라, 9쪽)
소개의 말 7

89개의 말 11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95

『농담』은 1968년과 1969년에 서구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슬플 수가. 프랑스에서는 번역가가 나의 문체를 완전히 바꿔 소설을 거의 다시 쓰다시피 했다. 영국에서는 편집자가 내적 성찰이 이어지는 모든 단락을 짧게 자르고, 음악학적인 장들을 없애 버리고, 부部들의 순서를 바꾸어 소설을 재구성했다. 또 다른 어느 나라. 번역자를 만나 보니, 그는 체코어를 단 한 마디도 모른다. “번역을 어떻게 하셨나요?” 나의 물음에 그가 “마음으로요.”라고 대답하며, 지갑에서 내 사진을 꺼내 보여 준다. 그의 태도가 너무도 호의적이어서 나는 마음의 텔레파시로 번역하는 게 진짜 가능한 줄로 믿을 뻔했다. (소개의 말 「89개의 말」, 13쪽)

물론 나만큼 번역 문제로 몸살을 앓는 작가도 없다. 다른 작가들은 번역이 더 잘 되어서가 아니라, 번역본에 나만큼 영향을 많이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968년의 러시아 침공이 있기 전만 해도, 『농담』과 『우스운 사랑들』은 프라하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체코 독자들이 있었기에, 외국 독자들에게 읽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1968년 이후, 나의 다른 소설들은 더 이상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출간될 수 없었고, 캐나다의 한 작은 출판사에서만 체코어 원본으로 소량 출간되었다. 당시 나는 적어도 몇 부 정도는 고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국경은 그리 쉽게 뚫리지 않았다. 나와 가장 친한 프라하 친구들조차도 내 책의 체코어판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소개의 말 「89개의 말」, 16쪽)

Comique_희극비극은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을 줌으로써 우리에게 위로를 안겨 준다. 희극은 잔인하다. 희극은 우리에게 모든 일의 무의미를 난폭하게 드러내 보인다. 나는 무엇이든 사람의 일에는 희극적인 측면이 있으며, 그것이 널리 알려지고 받아들여지고 이용되는 경우들도 있지만,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경우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희극의 진짜 천재들은 우리를 가장 많이 웃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미지의 희극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사람이다. (27쪽)

Idées_사상
어떤 작품을 그 사상으로 축소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느끼는 혐오. 소위 ‘사상 논쟁’이라는 것에 휘말리게 될 때 내가 느끼는 공포. 작품에는 무관심한 채 온통 사상에만 정신이 팔린 시대가 내게 불러일으키는 절망. (41쪽)

Opus_오푸스
작곡가들의 훌륭한 습관. 그들은 자신이 ‘가치 있는’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것에만 작품 번호를 부여한다. 미성숙기에 만들었거나 어쩌다가 만들게 된 작품, 또는 습작으로 만든 작품에는 번호를 매기지 않는다. (…) 모든 예술가에게 제기되는 근본적인 질문. 그의 ‘가치 있는’ 작품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야나체크는 마흔다섯 살이 되어서야 자신의 독창성을 찾았다. 그 이전 시기의 작곡으로 남아 있는 몇몇 작품을 들을 때 나는 마음이 괴롭다. 드뷔시는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초안, 미완성으로 남긴 모든 걸 없애 버렸다. 저자가 자기 작품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봉사, 그것은 그 작품들 주변을 깨끗이 청소해 주는 것이다. (67쪽)

Quatre-vingt-neuf_여든아홉
소수素數들. 그들은 요새처럼 견고하고, 나눌 수 없고, 파괴할 수 없다. 작품 건축에 이상적인 수학적 토대다. 여든아홉으로 말하자면, 이 소수는 8과 9라는 큰 두 숫자 덕에 어느 스웨덴 운동선수 커플의 매력을 지니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여든아홉처럼 아름답다.”라고. 루돌프 2세 궁정의 연금술사들이 숭배했던 숫자이기도 하다. (72쪽)

프란츠 카프카가 프라하 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전前 세대의 비중 있는 독일 작가는 단 한 사람,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쓴 구스타프 마이링크뿐이었다. 1902년 마이링크는 주간지 《짐플리치시무스》에 자신의 첫 단편 소설 「뜨거운 병사」를 발표한다. 몸에 갑자기 열이 나, 70도까지, 80도까지 자꾸만 올라가 주변의 모든 게 불타기 시작하자 모두가 그를 피해 달아난다는 어느 군인 이야기다. 설명할 수도 없고 근거도 없는, 괴물로 변해 버린 한 남자의 변신 이야기다. 그로부터 십 년 후, 프란츠 카프카는 자신의 유명한 첫 단편 소설, 역시 설명할 수도 없고 근거도 없이, 갑자기 벌레로 변하는 그레고르 잠자 이야기를 쓰게 된다.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101-102쪽)

1914년 세계 대전 직후, 유럽 문학이 미래에 대한 찬란한 비전과 혁명의 종말론에 매혹되는 경향을 보일 때, 이들 프라하 출신 작가들은 진보의 숨겨진 얼굴, 위협적이고 병적인 그 검은 얼굴을 누구보다도 먼저 꿰뚫어 보았다.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104쪽)

프라하 구조주의자들은 예술 작품을 모든 게 내용인 동시에 형식인 하나의 유기체, 그 무엇도 다른 언어(이념적 설명의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함으로써 인간 자체의 환원 불가능성을 옹호했다. 마치 카프카, 차페크, 그 밖에 또 다른 작가들이 느낀 불안, 그들이 미래의 저 깊은 곳으로부터 가차 없이 다가드는 그 환원적 힘들 앞에서 느낀 불안(너무나 프라하적인)을 그들과 공유하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118쪽)

야나체크 음악의 놀라운 점(그리고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던 것), 그것은 어디에도 분류할 수 없는 음악이었다는 데 있다. 음악 낭만주의는 말러의 마지막 교향곡들에서, 쇤베르크의 초기 작품들에서 그 가능성의 끝에 도달한다. 젊은 세대가 음악을 영혼의 거울로, 고백과 표현으로 이해했던 한 시대 전체를 음악 낭만주의와 함께 떠들썩하게 매장해 버린다. 그런 중차대한 순간에, 야나체크는 음악의 현 상태에서 다른 진화 가능성을 찾아냈다. 그 외에는 다른 누구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홀로 그 길을 좇았다.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122-123쪽)

나로선 설명하기가 어렵다. 어쨌거나 나의 조국이 금세기에 건립한 가장 기념비적인 세 예술 작품은 모두 미래의 지옥을 그린 그림들이다. 즉 카프카가 그린 관료주의적 미궁, 하셰크가 그린 어리석은 군대, 야나체크가 그린 절망적인 강제 수용소가 그 셋이다. 그렇다, 『소송』(1917)과 「죽음의 집」(1928) 사이에 프라하에서는 모든 것이 말해졌고, ‘역사’가 할 일은 허구가 이미 상상했던 것을 모방하는 것뿐이었다.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126쪽)

쿤데라 특유의 날카롭고도 유머러스한 철학적 성찰,
그리고 번역이라는 망명 속에 살아가는 작가의 고뇌가 담긴 101개의 말

밀란 쿤데라는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해 2023년 사망할 때까지 조국인 체코로 돌아가지 않았다. 체코어로 쓴 작품들이 조국에서 판매 금지된 후 『느림』(1993년)부터 프랑스어로 작품을 집필한 그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전작이 체코어로 출간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돌아가지 못한/않은 조국 체코와 프랑스 사이에서 그는 평생 물리적 ㆍ 언어적 디아스포라로 살아가야 했다. 그런 쿤데라에게 정확한 번역은 매우 중요했고, 그에게 ‘말’이란 끊임없는 의심과 점검의 대상이었다.
「89개의 말」은 이 같은 번역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쿤데라가 그토록 번역에 예민하고 철저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많은 나라에서 번역 저본으로 선택된 프랑스어판이 엉망으로 번역된 데다 이후 프랑수아 케렐이라는 번역가와 파트너를 이루어 작업했음에도 체코어로 집필한 작품이 결국 같은 언어를 쓰는 동포 독자들에게 가 닿을 수 없었던 제한적 조건 때문이었다. 그래서 쿤데라는 “미래의 프랑스어 판본을 메아리처럼 들으며” 집필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작가의 고뇌에 피에르 노라는 제안한다. “자네의 개인 사전을 써 보면 어떻겠나? 자네가 중요시하는 말들, 자네를 골치 아프게 하는 말들, 자네가 애착하는 말들을 모은……?” 작가는 즉시 이 생각에 매료되었고, 「89개의 말」은 그렇게 탄생한 글이다. 이 소사전은 ‘절대(Absolu)’에서 시작해 ‘저속함(Vulgarité)’까지 101개의 단어가 알파벳 순서로 펼쳐진다. 그 안에는 쿤데라 특유의 날카롭고도 유머러스한 철학적 성찰과 함께 번역이라는 망명 속에 살아가는 작가로서의 고뇌도 함께 드러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엄정하게 선택한 단어가 번역을 거치며 재창작에 가까울 정도로 변형되어 의도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 일화나, 그가 소설이라는 예술에 대해 품고 있는 철학이다. 첫 항목인 ‘절대’에서 그는 “소설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에 손을 대는 것인 만큼, 형이상학적인 말들(절대, 본질, 존재 등)은 소설에 인용될 권리가 있다.”고 못 박으며 시작한다. 이어서 ‘정의(Définition)’ 항목에서는 “모호성 속으로 빠져들고 싶지 않다면, 내가 그 말들을 극도로 정확하게 선택해야 함은 물론 그것들을 정의하고 또 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존재(Être)’ 항목에서 등장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제목에 대해 그의 주변에서 보였다는 반응도 흥미롭다. 그는 제목의 ‘존재’라는 단어가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다고 말하며, ‘존재’의 대척점에 있는 ‘죽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유명한 『햄릿』의 대사(“존재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작가가 기쁨, 관능, 쾌락이라고 쓴 곳마다 ‘오르가슴’으로 바뀌어 있는 미국 번역판에 관한 에피소드(‘오르가슴[Orgasme]’)와 ‘도덕적 상황’에 관한 ‘미학적 판단’이라는 쿤데라의 날카로움을 드러내는 항목(‘추함[Laid]’)은 웃음과 함께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프랑스어에서 국외자일 수밖에 없는 그가 모국어와 프랑스어의 간극에서 느낀 낯선 아름다움과 때로는 익살스럽기까지 한 안타까움에 관한 이야기들도 있다. 예컨대 B 항목의 ‘Bander(꼴리다)’에서 그는 『우스운 사랑들』에서 쓴 문장에서 실은 ‘꼴렸다’는 말을 썼어야 했는데 체코어에 그 단어가 존재하지 않아 생각해 내지 못한 일화를 이야기한다. 뒤늦게 적확한 단어를 찾은 쿤데라는 “내 모국어가 꼴릴 줄도 모르다니!” 하며 한탄한다. C 항목의 ‘Chez-soi(내 집)’에서는 정치적, 국가적 버전으로서의 ‘조국’과 ‘집’으로서의 고향 사이에 존재하는 틈에 대해 성찰하고, ‘책(Livre)’ 항목에서는 ‘내 책’과 ‘내가 사는 마을’이라는 프랑스어 사이에 존재하는 음과 박자에서 독특한 발견을 하는 식이다.
그가 각별한 애정을 품은 중부 유럽과 유럽 작가들에 대한 항목들, 그중 프라하의 상징과도 같은 작가 카프카를 언급한 항목들은 쿤데라라는 작가와 겹쳐 보게 하며 긴 여운을 남긴다. “카프카는 비참하게 덫에 걸린 인간의 상황을 그렸다. 지난날, 카프카 전문가들은 카프카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는지 아닌지를 놓고 많은 논쟁을 벌였다. 아니, 희망은 없다. 다른 게 있다. 카프카는 삶이 불가능한 그런 상황조차도, 기이한, 검은 아름다움으로 발견한다. 아름다움, 그것은 더는 희망이 없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후의 승리다. 예술에서의 아름다움이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것이 발하는 돌연한 빛이다. 위대한 소설들이 발하는 그 빛은 세월이 흘러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인간은 늘 인간의 실존을 망각하기에, 소설가들이 이룬 그 발견들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부단히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아름다움[Beauté]’ 항목)

천년 역사의 마지막 메아리를 남기고
‘전체주의의 밤’에 파묻힌 문화에 대한 밀란 쿤데라의 고찰

이어 실린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詩)」는 쿤데라의 프랑스 망명 초기, 즉 렌 대학교에서 ‘카프카와 중앙 유럽의 문학’을 강의하던 1980년에 피에르 노라의 요청으로 《데바》 지에 발표한 글로, 점점 멀어져 가는 고국을 향한 애틋함과 절망이 깃들어 있다. 수년 전 떠나온 조국과 프라하에 대한 쿤데라의 향수, 소련 침공으로 “전체주의의 밤” 속에 파묻혀 버린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물론, 프라하의 위대한 문화에 대한 그의 자부심도 느낄 수 있는, 큰 울림을 주는 글이다.
프라하는 서유럽 문화의 오래된 중심지이자, 점점 동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난 도시다. 라인강 동쪽 최초의 대학 도시이자 종교 개혁의 요람이자 바로크의 수도였고, 1968년에는 서구적 사회주의 실험의 무대였던 곳. 그러나 쿤데라는 이 도시가 체코어라는 언어 장벽과 반복된 정치적 침략 속에서 아틀란티스처럼 멀고도 낯선 곳이 되었다고 말한다.
체코 문화는 오랫동안 서구에서 간접적으로만 이해되었다. 드보르자크, 야나체크, 카프카, 네즈발, 무카르조프스키 등 체코 예술가와 지식인 들의 작업은 그들이 속한 언어, 환경, 사유의 맥락 없이 해석되었고, 체코어는 유럽의 불투명한 유리 벽이었다. 그는 덴마크, 카탈루냐, 폴란드, 체코 같은 소국들이 대국의 문화를 모방한다고 여기는 통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이들 소국은 서로 다른 시각과 감수성을 지닌 또 다른 유럽을 형성한다.
프라하의 문화사는 이성보다 환상과 불합리의 계보에 속한다. 황제 루돌프 2세 궁정의 비학과 환상 예술, 바로크 시대의 광기, 초현실주의 시인 네즈발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는 늘 비합리의 정서에 민감했다. 이런 전통은 카프카와 하세크, 차페크 같은 작가들을 낳았다. 그들은 유럽이 진보와 이념에 도취되던 1차 세계 대전 후 이미 그 이면의 위협과 병리성을 꿰뚫고 있었다. 특히 『소송』의 요제프 K.와 『용감한 병사 슈베이크』의 주인공 슈베이크는 전체주의라는 기계 앞에 선 인간의 두 가지 태도를 상징한다. 쿤데라는 이들이 30년 후 프라하의 현실을 예견했다고 본다.
한편 프라하는 세기 초부터 현대 예술의 모험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공간이었다. 쿤데라는 유명한 카프카 전기를 집필한 클라우스 바겐바흐를 비판한다. 바겐바흐가 프라하를 세상과 동떨어진 곳, 고립된 한 지방 도시로 파악함으로써 카프카를 오해하게끔 했다는 것이다. 프라하는 또한 구조주의의 요람이자 최초의 대도시이기도 했다. 쿤데라는 프라하에서 꽃핀 구조주의와 체코 구조주의자들의 특성, 그것이 인간과 예술에 대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성찰한다. 또한 체코 초현실주의에 대해서도 다루는데, 서구의 합리주의에 반하는 프랑스 초현실주의와 달리 체코의 초현실주의는 프라하 예술 전통에서 유기적으로 발전했다. 그런 전통에서 탄생한 네즈발의 시는 특히 “구체성에 대한 도취”를 통해 독특한 미학을 드러낸다.
이런 흐름은 음악에서도 이어진다. 야나체크는 말러와 쇤베르크 이후 음악 낭만주의의 한계에 맞서, 삶과 심리에 밀착된 음악을 시도했다. 그런데 쿤데라는 야나체크가 생애 말년에 작곡한 마지막 오페라 「죽음의 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작곡가의 삶과 전혀 무관한 어두운 비전으로 가득 찬 그 작품을 창작한 이유를 묻는다. 그로서는 정답을 찾기 어려운 이 문제에 대해 그는 다만 카프카의 『소송』, 하셰크의 『용감한 병사 슈베이크』와 함께 「죽음의 집」이 미래의 지옥을 그린 20세기 가장 기념비적인 예술 작품이라고 꼽는다. 이 작품들을 통해 “이미 모든 것이 말해졌고, 이후의 역사는 그 상상을 따라왔을 뿐”이라면서.
1948년의 쿠데타와 1968년의 소련 침공은 프라하를 동유럽의 위성국으로 전락시켰고, 천년의 문화는 그렇게 붕괴했다. 카프카가 위협적인 이유는 그가 반공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러시아적 세계관과 결코 섞일 수 없는 낯선 문화의 구현자이기 때문이다. 쿤데라의 결론은 비극적이다. 프라하에서 사라진 것은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이해받지 못한 하나의 위대한 문화였다.

작가정보

프랑스 사부아 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성균관 대학교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일했다.현재 성균관 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불멸』, 『느림』, 『배신당한 유언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불의 정신분석』, 『물과 꿈』, 『문학의 쓸모』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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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89개의 말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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