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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파라다이스

임재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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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7월 23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06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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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8.78MB)   |  약 16.3만 자
ISBN 9788937422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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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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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희 작가의 첫 장편 소설이자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당신의 파라다이스』 개정판이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는 2025년 민음사에서 새로 출간되었다. 『당신의 파라다이스』는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의 조국을 떠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동 이민을 떠났던 두 남자와 두 여자, 네 인물의 엇갈린 운명을 따라가며 낯설고 척박한, 그러나 새로운 땅에서 자신의 소중한 삶을 지키려 했던 우리나라 최초 이민 세대의 의지와 희망을 재현한 소설이다. 작가는 1985년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 하와이 주립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소설가에 대한 꿈도 포부도 품지 않았던 대학 시절 우연히 수강한 ‘하와이 초기 한인 이민사’ 수업에서 접한 이민 1세대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던 작가는 “소설가에게 ‘쓰고 싶은’ 이야기와 ‘써야 할’ 이야기가 분명 존재한다면, 이 소설은 나에게 언젠가는 ‘써 내야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했고, 훗날 한국에 돌아와 문학 창작을 공부하며 소설의 첫 문장을 썼다. 그리고 그 소설 『당신의 파라다이스』로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하와이 이민 1세대의 사랑과 우정, 이별을 섬세한 인물 묘사와 긴장감 있는 플롯으로 잘 그렸다. 한국 이민 소설의 새 장을 여는 이정표가 되리라 확신한다.”_세계문학상 심사평
짝 - 긴 이야기 속으로 9
캠프 나인 사람들 46
낙원을 꿈꾸며 57
세 남자 76
제 안의 것들 94
파파야가 익어 가는 시간 102
기회의 땅, 힐로 130
스텔라, 사랑을 믿다 147
너무도 사소한 것들 169
목마른 사람들 182
먼 곳을 바라보는 일 198
어둠 속으로 210
부유하는 사람들 225
죽음의 골짜기, 칼라우파파 236
돌아온 여인, 순례 243
새로운 인연 260
편지 285
대륙에서 온 남자 292
따뜻한 인사, 마할로 누이 312
밤은 긴 그림자를 남기고 333
사랑의 방식 349
동지촌 371
가벼워진 생애 - 너무 많은 이름 속에서 385

작가의 말 394
추천사 398

평생 맡아도 물리지 않을 천상의 향기라고 부르고 싶었다. 사철 꽃이 피고 거리에 과일이 뚝뚝 떨어지는 포와에 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며칠 만에 매서운 겨울 날씨를 뚫고 한여름 속으로 툭 떨어졌으니 딴 세상이 분명했다. (10쪽)

*
그러고는 입을 닫았다. 느닷없이 창석에 대한 그리움이 북받쳐 올라 울컥했다. 포와로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교회로부터 연락을 받고 가 보니 선교사를 통해 창석이 보냈다는 작은 상자가 강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엄마를 위한 뜻밖의 선물이었다. 말로만 듣던 비단 목도리를 꼭 껴안은 엄마는 와락 눈물을 터트리며 오열했다. 타국으로 딸을 보내는 불안감을 눈물로 씻어 내며 언젠가 창석을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했었다. (167쪽)

*
상학은 송씨가 술김에 내뱉은 말을 곱씹었다. 어떤 게 옳은 건가.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언제부턴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날들이 이어졌다. 누구나 내는 독립 자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주급을 받으면 정확하게 일정 금액을 떼어서 냈다. 모두 당연하게 생각했고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나라 잃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작은 위로였고 희망이었다. 자신도 뭔가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오늘을 견디는 힘이 되어 주었다. 가끔 여유 있는 사람들이 목돈을 냈다. 그들의 선행은 교회 소식지에 크게 실렸다. 반대로, 사정이 있어 일을 못 하거나 독립 자금을 못 낸 사람들은 주위에서 핀잔을 주는 사람들이 없는데도 괜히 위축감을 느꼈다. (173~174쪽)

*
주디가 뒤척였다. 나영은 잠결에도 가슴을 열어 젖을 물렸다. 그녀의 실루엣이 달빛 아래 느리게 움직였다. 한 생명의 어미임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창석과 나영의 분신이었다. 둘이 하나가 되어 만든 경이로운 생명.
강희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쳤다. 아기를 갖는 일은 강희가 아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미래가 어찌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날들이 지나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남자들이 두런거리는 말소리도 잦아들었다. 강희도 애써 잠을 청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은 또렷해지는 이상한 밤이었다. (180~181쪽)

*
“오래 생각했어요. 우리 다시 선택하는 게 옳아요. 되돌릴 수 있는 건 되돌리는 게 최선이에요. 서로가 원하는 걸 숨기고 산다는 건 위선이고 기만이에요. 우리 넷, 모두 연극을 하는 느낌이에요. 각자의 배역에 맞게, 힘들어도, 억지로. 나는 샌프란시스코로 떠날 겁니다. 당신과 함께요. 우리는 그곳에서 행복할 수 있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를 선택했어요. 그것만으로도 고통을 견딜 이유는 충분해요. 날 따라와 줘요.” (194쪽)

*
창석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여관을 운영하면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수입 일부를 떼어 은행 계좌에 입금했다. 힘없는 나라가 망하듯, 자금이 없으면 좋은 뜻도 펼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후 결정한 일이었다. 몇 년간 꽤 큰돈을 모았고 적지 않은 이자가 붙었다. 언젠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두 형이 용기를 준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뿌듯했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독립된 고향 땅의 흙을 다시 밟고 싶었다. 단벌인 양복을 흔쾌히 내주시며 자신을 배웅했던 외삼촌의 두 손을 마주 잡고 싶었다. 아직 살아 계실까. (201~202쪽)

*
“내가 입고 있었던 옷은 어찌할 거요?”
“정말 알고 싶은가요?”
“네.”
“태울 겁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옷을 태우다니, 창석은 기가 막혔다. 마지막 남은 작은 기대마저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창석은 걸음을 멈추고 환자 수송용 복장을 한 직원을 바라보았다. 직원이 그에게 계속 앞으로 걸어가라는 듯 턱을 약간 내밀었다.
“그럼, 내가 다시는 그 옷을 입을 수 없다는 말이오?”
직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216쪽)

*
오랜만에 느끼는 따스함이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머물러 있는 듯 이마가 간지러웠다. 이마를 짚어 주는 손길을 따라 창석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낯익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의 손길을 느껴 본 것이 얼마 만인가.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이마를 짚어 주는 편안한 손에 자신을 맡겼다. 강희, 당신이었으면. 괜스레 눈가가 뜨거워졌다. 다시는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이름이었다. 사랑도 구원이 될 수 없는 곳에서 그리움은 천형이었다. (265쪽)

*
“죄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우리 네 명 가운데 당신이 가장 솔직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모두 자신을 위해 좀 더 솔직하고 이기적이어야 했어. 당신처럼 용기 있게.”
창석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디 사진을 쥔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나영의 긴 울음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창석은 면회소를 나섰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골짜기가 서늘해졌고, 멀리 업타운으로 올라가는 마차가 보였다. (323쪽)

*
종일 바다를 보고 물고기를 잡고 노을을 바라보며 우쿨렐레를 치던 라니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가닿고 싶은 곳은 바다일 거라고 창석은 생각했다.
“‘라니’ 그 뜻이 뭔 줄이나 알아?”
말없이 일만 하는 창석을 지켜보기 지루하다는 듯 동팔이 물었다. 창석은 라니라는 이름이 발음하기 쉽고 좋아서 하와이 말로 무엇을 뜻하는지 한 번도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천국이란 뜻일세. 얼마나 이름이 곱냐? 하루하루, 매일매일이 천국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는 뜻 아니겠어? 근데, 생각해 봐. 살면서 천국이라고 불리는 게 라니에겐 얼마나 힘들었겠어.” (324~325쪽)

*
나영은 오래 망설이고 결정한 일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주디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못 하나, 칠 하나까지 모두 남편의 손길이 닿은 집이었다. 그 작은 구둣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창석은 호놀룰루에 오면 늘 그 집을 둘러봤다. 장현과의 결혼을 결심했을 때 그 집을 먼저 팔고 싶었던 이유는 동지촌에 들어가기 위한 자금 준비 때문이었지만, 창석에 대한 기억을 말끔히 지워 버리려는 마음도 컸음을 나영은 부인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는 죽어 가는데…….”
주디는 아버지의 죽음을 입에 올린 자신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뛰쳐나갔다.

*
투박한 그의 손가락이 강희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강희는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지나온 시간이 이어진 긴 길을 두 손을 맞잡고 걷는 기분이었다. 창석의 고른 숨소리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노래 같은 흥얼거림으로 바뀌었다. 그가 살아오면서 들었던 모든 소리의 섞임처럼 모든 감정이 배어 있을 것이었다. 때로는 부드러웠고 때로는 애잔해서 강희의 마음을 적셨다. 그의 손길이 노를 젓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희는 따뜻한 모래사장에 두 발이 잠기듯 안온해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며 눈가가 젖었다. (355쪽)

*
눈 감으면 사라질 것들을 지금껏 힘들게 부여잡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강희의 얼굴을 또렷하게 가슴에 새길 만큼 보고 또 보았다. 여한이 없었다. 이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견디며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음껏 그리워하고 원망할 수 있었던 시간이 생의 절정이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356쪽)

*
“내가 당신에게 준 것은 언제나 반쪽이라는 생각을 했소. 그것이 파파야든 행복이든. 아니, 그 어떤 것이라도. 나는 그것이 미안하오.”
강희는 가만가만 수저로 파파야를 떠먹으며 상학의 얘기를 들었다.
“그린파파야로 장아찌를 담갔어요. 얼마나 아삭한지…… 당신은 내게 곶감처럼 만들어 먹는 법만 가르쳐 줬지요?”
“장아찌라고…….”
그가 허허, 하고 웃었다. 이유 없이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그런데, 파파야 씨앗은 왜 이렇게 많을까요?”
강희가 문득 이유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상학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강희와 상학의 눈빛이 잠시 허공에서 마주치며 반짝했다. 서로의 답을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캠프 나인 뜰에서 사연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 그런가요?” (392~393쪽)

“우리 모두를 위한 결정인가요?”

강희와 나영은 어린 시절부터 한 집에서 친자매처럼 서로 의지하며 자랐다. 나영은 부유한 아버지 슬하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일찍 떠나는 바람에 불의에 강희네 몸을 의탁했다. 나영 아버지의 은덕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던 강희 아버지는 강희보다 나영을 귀하게 살피며 둘을 키웠다. 강희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살길이 점차 막막해지던 중 두 사람은 하와이에서 온 중매쟁이를 통해 ‘사진 신부’로 하와이 이민을 떠나게 된다. (‘하와이 사진 신부’는 1900년대 초 하와이에 이민 노동자로 정착한 남자들의 ‘사진’만 보고 그들과 결혼하기 위해 뒤따라 이민을 떠난 여성들을 뜻한다. 이들의 결혼은 미국의 반이민 정책 속에서 가족을 꾸릴 방법이 막힌 이민 남성들과 경제적 또는 사회적 이유로 탈출구를 찾던 여성들의 절박한 선택이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강희와 나영은 그들을 사진 신부로 초청한 창석과 상학을 만나게 되는데, 나영은 자신의 짝 상학을 보자마자 결혼 약속을 무효로 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겠다고 떼를 쓴다. 사진을 보며 고향에서 상상했던 ‘한인 사회 지도자’ 상학이 실은 삼십대 중반의 나이 든 남자라는 현실을 맞닥뜨리자마자 “달콤하고 싱그러운 풀 냄새” 가득하고 “사철 꽃이 피고 과일이 뚝뚝 떨어지는” 이상적인 낙원에 걸었던 기대가 한순간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영은 “작고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에서 나이 많은 남자와 사느니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일본 놈들이 득실거리고 배고프고 희망 없는” 땅으로 돌아가겠다는 무모한 결정을 내리는 나영을 혼자 떠나보낼 수 없었던 강희는 애초에 결정되어 있던 서로의 짝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결혼을 약속하며 주고받은 사진과 편지로 강희에 대한 사랑을 마음속 깊이 키워오던 창석은 강희의 돌연한 제안에 마음을 추스르기 어렵지만, 힘겨운 이민 노동의 삶 속에서 맏형처럼 믿고 따랐던 상학마저 그것이 네 사람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듯 무언의 동의를 하자 강희의 결정을 따르기로 하는데…… 그 순간부터 네 주인공의 삶은 예기치 못한 시련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감긴다.

“이게 우리 모두를 위한 결정인가요?”
강희가 물었다.
“모두를 위한 결정?”
창석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상학과 나영의 문제 아니었냐고 강희에게 묻는 표정이었다.
강희는 ‘모두를 위한 결정’이라는 말을 다시 곱씹었다. 다 같이 살아 내는 일이었다. 고민은 오래 해도 결정은 한순간이고, 어떤 결정은 인생을 바꿔 놓는다는 교회 여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결정으로 모두의 운명이 바뀔 거라는 생각이 들자 숨소리마저 잦아들었다.
“처음 정해졌던 짝을 바꾸기로 하면, 지상의 낙원이라는 이 섬에서 모두 살 수 있어요.”
강희는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44쪽)

“그녀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건,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었다.”

나영은 어리석은 욕심과 이기적 실수를 거듭하면서도 좌절하지 않는다. 어떤 고난에도 무너지지 않고 삶을 끝까지 붙잡는 민초들의 원기가 가장 핍진하게 투영된 인물이다. 창석과 결혼한 나영은 딸도 낳고, 남편의 사업 번창으로 행복한 시간도 보낸다. 그러나 창석이 불치병(한센병)에 걸려 몰로카이 섬에 격리되면서 그녀는 세상 사람들의 멸시를 견뎌야 하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그 고난들을 헤쳐 나간다. 철없고 충동적으로 보이는 나영은 다른 한편으로는 원초적 생명력과 꺾이지 않는 현실적 강인함을 지녔다. 창석과 결혼한 후에는 그에게 아낌없이 마음을 바쳤고, 그를 떠나보낸 뒤에도 여전히 사랑을 믿고 새로운 인연에 운명을 걸며 동지촌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시도한다.
강희와 결혼한 후에 상학은 창석에 대한 미안함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다. 강희에 대한 창석의 진심을 뒤늦게 깨닫게 되면서 강희를 차마 아내로 대하지도 못한다. 젊은 날 등 떠밀려 혼인하여 낳았던 아들 세욱을 고향에 혼자 두고 온 데 대한 죄책감도 그의 삶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다. 이민자들의 공동체 캠프 나인에 모인 사람들의 고난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보살피고, 그들을 교육하는 것에서만 미약하게나마 살아 있는 의미를 찾는다. 강희를 알아가며 삶의 희망를 되찾아가던 상학은 그녀를 자신에게서 떼어놓으려는 창석의 속마음을 간파하고도 그의 부탁을 받아들여 임시 정부에 독립 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상해로 떠난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강희는 자신이 마음을 주었던 창석을 나영에게 떠나보낸 후 상학과의 헛헛한 결혼 생활과 고된 노동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간다. 은연 중에도 늘 자신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나영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에서 벗어나 하와이로 향할 때 다짐했던 굳은 결의를 되새긴다. 결혼을 통한 신분 변화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농업 공동체 캠프 나인 사람들과의 연대 속에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만들어가며 한 사람의 주체적 인간이 져야 할 삶의 무게를 받아들이고 점점 단단해진다. 하지만 가슴 밑바닥에 묻었던 창석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끝내 외면하지는 못한다.
삶에 대한 포부와 열정이 넘쳤던 창석은 사진 속 강희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고, 나영과 결혼한 후에도 강희를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한다. 그녀를 잊기 위해 사업에만 악착같이 전념한 창석은 양화점과 호텔업으로 이민자로서는 드물게 큰 부를 쌓는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강희에 대한 사랑을 접지 못했던 창석은 한 번 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리고 마침내 강희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한 번의 뼈저린 고통과 이별이다.

멀리 업타운에서 새벽안개를 헤치고 내려오는 마차가 보였다. 창석은 강희를 부르며 뛰어가다 멈췄다.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었다. 이제 강희가 사는 세상과 자신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다르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뿐이었다. 멀리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온 마음으로 그녀의 앞날을 축복해 주고 싶었다.
칼라우파파로 떠나오기 전 창석은 기다려 달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진심이었다. 멀리 도망가자고 말했다. 살아 돌아오겠다는 약속이고 의지였다. 강희가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창석은 이제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살아서 이 섬을 나갈 수 없다는 걸 더 분명하게 느낄 뿐이었다. 희망과도 작별할 시간이 온 것이었다. 오롯이 지금의 현실에 투항하는 것.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283쪽)


“어디에 있든 살아 있기를, 풀처럼 꼭 살아 있기를!”

강희와 나영을 맞아준 캠프 나인 사람들 저마다의 일대기에는 일제강점기에 희망 없는 조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새 삶을 추구했던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이 겪었던 고난과 애환이 아로새겨져 있다. 강희, 나영, 상학과 창석 외에도, 남편과 시어머니의 학대에서 벗어나고자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 캠프 나인의 어머니 같은 교육자가 되는 심영, 상학의 조력자이자 창석의 사업파트너로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동체의 유대를 돌보는 태호, 자신을 성폭행한 이웃의 손에 남편을 잃고 타지를 떠돌다 마우나케아 산에서 신내림을 받게 되는 순례, 첫사랑의 아이를 출산하지만, 아이를 빼앗기고도 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홀로 당당하게 성장해 가는 스텔라, 최초의 이민선 겐카이마루 호에서 시작된 이들의 이야기는 모두 가난, 질병, 사별 등 개인적 상실과 식민시대의 역사적 역경 속에서 조금 더 나은 미래를 그리는 생존의 서사다.
나아가 『당신의 파라다이스』는 살아감의 의미가 되어주는 사랑의 여러 얼굴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강희를 향한 창석의 헌신적인 사랑, 강희와 창석에 대한 죄책감을 떨치고 책임감으로 주변을 보살피는 상학의 희생, 이민 공동체 안에서 여성들 사이의 연대의 중요성을 깨달아가는 강희와 나영의 화해, 이민자로 혹독한 노동을 감내하며 굳건해지는 상학, 창석, 태호의 형제애, 사회적 인종적 계급적 장벽을 두려워하지 않은 스텔라의 용감한 사랑, 스텔라를 지키기 위해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행하는 심영의 모성애, 아들을 잃은 상학과 아버지를 잃은 홍석이 구축하는 새로운 가족의 유대, 고립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도 창석에게 공존의 안도감을 가르쳐주는 라니의 슬픈 사랑, 깊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영적인 각성으로 공동체를 지키는 순례의 자기 해방 등, 무수한 고난을 넘어 저마다 자기만의 낙원을 꿈꾸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촘촘히 얽혀 멀고도 가까운 디아스포라의 삶에 바치는, 그들이 남긴 사랑의 힘에 바치는 노래를 완성한다.

상학은 운구차가 교회를 벗어나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한 사람의 일생이 저물어 가는 뒷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이 창석이 몹시 그리웠다.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한 사람의 죽음까지 불러와 상실감을 더했다. 누가 먼저 가고 나중에 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든 한 번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갈 뿐이었다. 거기에 승리나 패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살아 냈다는 것만 남았다. 심영과 창석은 자기 방식대로 그걸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390쪽)

작가정보

저자(글) 임재희

최전방 부대 3사단에 아버지가 근무하실 때,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세 살 무렵 서울로 이주, 1985년 하와이 이민 길에 올랐다. 하와이 주립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며 한국에 올 때마다 트렁크 가득 시집과 소설책들을 사 가곤 했다. 한국어로 쓰인 책들을 읽으며 생존의 언어와 사유의 언어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민자-나-의 언어 세계를 받아들였고, 한국도 미국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 지점’을 살고 있다는 소외감과 결핍감에서 벗어나 양쪽을 다 볼 수 있는 ‘보석의 눈’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며 소설을 썼다. 2013년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당신의 파라다이스』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 소설 『비늘』, 소설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가 있으며, 『라이프 리스트』, 『블라인드 라이터』, 『예루살렘 해변』, 『모호한 상실』, 『오로라』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2023년 『세 개의 빛』으로 제1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말

2013년, ‘작가의 말’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이 소설은 한 시대를 흔적 없이 살다 간 사람들에 대한 애도의 한 방식이다.”
지금도 그 마음은 유효하다.
1903년, 제물포항에서 출발해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에 도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게 우연히 찾아왔다. 하와이 대학교 재학 시절이었다. 졸업 필수과목 중 하나로 소수 민족사를 수강해야 했는데, 나는 이덕희 선생님의 ‘하와이 초기 한인 이민사’를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대강 아는 내용일 거라 짐작했고, 조금 쉽게 학점을 받겠다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그 시대의 이야기를 소설로 쓸 거라는 상상도, 계획도 없었을 때였으나 나는 매번 강의 내용에 마음을 빼앗겼다. 언제부턴가 그 시절 그 땅에서 분명히 ‘존재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모두 빛나는 조연들의 치열한 삶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나와 함께 살았다. 한국에서 대학원 첫 학기를 마친 어느 여름날, 나는 소설의 첫 문장을 썼다. 한국어 문장이, 그것도 소설을 쓴다는 게 어색하고 많이 서툴 때였다. 내가 어떻게 미친 듯 그 시대 속으로 걸어 들어가 ‘겁 없이’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이민 대선배’들의 삶을 소설로 쓰면서 비로소 나의 자리를 되돌아본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_임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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