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너 자선 단편집 1
2025년 06월 20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06월 15일 출간
- eBook 상품 정보
- 파일 정보 ePUB (20.15MB) | 약 30.9만 자
- ISBN 9791194598077
- 지원기기 교보eBook App, PC e서재, 리더기, 웹뷰어
-
교보eBook App
듣기(TTS) 가능
TTS 란?텍스트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술입니다.
- 전자책의 편집 상태에 따라 본문의 흐름과 다르게 텍스트를 읽을 수 있습니다.
- 이미지 형태로 제작된 전자책 (예 : ZIP 파일)은 TTS 기능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쿠폰적용가 14,850원
10% 할인 | 5%P 적립이 상품은 배송되지 않는 디지털 상품이며,
교보eBook앱이나 웹뷰어에서 바로 이용가능합니다.
카드&결제 혜택
- 5만원 이상 구매 시 추가 2,000P
- 3만원 이상 구매 시, 등급별 2~4% 추가 최대 416P
-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추가 최대 200원
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2008년 대선 경선 당시 버락 오바마는 포크너의 말을 인용하며 더 완전한 ‘연합’을 이루자고 미국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시를 가장 높은 문학으로 간주한 포크너는 이 책 『포크너 자선 단편집』으로 결코 죽지 않는 과거가 되풀이되는 현재, 말해지지 않은 진실, 그리고 끝내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사랑, 인간의 존재의 지층을 고요하면서도 무시무시하게 파고든다. 『포크너 자선 단편집』은 20세기 미국 문학을 넘어 세계 문학의 거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 윌리엄 포크너가 직접 고른 단편들을 모은 선집이다. 그의 단편 세계를 총결산한 이 책은 1951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했고 포크너 자신도 결과물에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자신의 단편의 정수를 응축하고자 했던 이 책은 포크너에게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미학적 결정체이자 내면적 서사의 결산이라 할 수 있다.
윌리엄 포크너 노벨상 수상 연설
작품 해제
Ⅰ 시골
불타오른 헛간
주님의 지붕널
키 큰 남자들
어느 곰 사냥
두 병사
스러지지 않으리
Ⅱ 마을
에밀리를 위한 장미 한 송이
머리카락
황동 켄타우로스
메마른 9월
죽음의 매달리기
엘리
윌리 삼촌
마당의 노새
그 또한 괜찮으리라
그 저녁의 태양
Ⅲ 야생
붉은 잎사귀
정의 하나
어떤 구애
로!
그들은 주랑 현관을 가로질렀다. 이제 바닥을 딛는 아버지의 불편한 쪽 발소리가 시계처럼 돌이킬 수 없게 울렸다. 소리를 내는 육신이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것만큼이나 모든 면에서 이곳과 걸맞지 않은 소리였고, 하얀 문을 눈앞에 두고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것이 마치 그 무엇에도 왜소해지지 않는 날카롭고 광포한 최소 음량이라는 성질을 획득한 것만 같았다 - 납작하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한때 검은색이었으나 이제는 늙은 집파리처럼 녹색으로 닳아 번들거리는 브로드천겉옷을 입은 그 육신은, 너무 커서 접어올린 소매 아래에서 갈고리발톱처럼 손을 들어올렸다.
‘이후 약 10초 동안, 아빠는 망치를 그대로 들어올린 채 솔론을 바라봤다. 뒤이은 3초 동안, 아빠의 눈길은 솔론은 물론이고 다른 무엇에도 향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빠는 다시 솔론을 바라보았다. 마치 정확히 2.9초가 지난 후에야 자신이 솔론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최대한 빨리 솔론에게로 시선을 돌린 듯한 느낌이었다. “하.” 아빠는 말했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입을 벌리고 있는 데다 웃음처럼 들렸으니 웃음이라 해도 좋을 법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아빠의 잇새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아빠의 눈가 이상으로 올라가지도 않았다.
“자네도 괜찮은 사람이야. 그저 돌아다니다 보니 온갖 규칙과 규제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을 뿐이지. 그게 우리들의 문제라네. 온갖 두문자와 규칙과 해결 방식을 고안해내다 보니 다른 아무것도 못 보게 되었거든. 두문자와 규칙에 끼워맞출 수 없는 대상을 마주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 거지. 우리는 박사 친구들이 실험실에서 만들어내는 존재처럼 변해 버렸어. 뼈를 발라내고 내장을 빼낸 후에도 여전히 살아서, 어쩌면 뼈와 내장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영원히 살려 놓은 작은 동물처럼 말이야. 우리는 등뼈를 발라내 버렸지. 사람에게 등뼈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결정을 내려버렸거든. 등뼈 따위는 구식이라는 식으로 말일세. 하지만 등뼈가 들어가 있던 홈은 여전히 남아 있고, 등뼈도 아직 숨이 붙어 있다네. 어쩌면 언젠가는 다시 등뼈를 끼우고 살게 될지도 모르지. 언제가 될지, 얼마나 심하게 몸이 비틀려야 그 필요를 깨닫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네.”
우리는 잠들었다. 다음 날이 되었고 아침 버스는 6시에 지나가기 때문에 우리는 램프 불빛 속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제 엄마는 울지 않았다. 그저 음울한 얼굴로 바쁘게 움직이며 우리가 식사하는 옆에 음식을 차려 놓을 뿐이었다. 다음으로 피트 형의 가방 싸는 일을 마무리했는데, 형은 전쟁터에 가방을 가져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그 어디에도, 심지어는 전쟁터에도 갈아입을 옷과 그걸 넣을 가방은 가져가야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프라이드치킨과 비스킷을 넣은 신발상자와 성경 한 권도 챙겨넣었고, 이윽고 떠날 시간이 찾아왔다. 우리는 그제야 엄마가 버스 타는 곳까지 나가지 않을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전의 에밀리 양은 전통이자 의무이자 배려의 대상이었다. 도시에 부과된 세습되는 의무와 같은 존재였으며, 그런 상황은 1894년에 제퍼슨의 시장이었던 사토리스 대령*이 - 검둥이 여성은 거리에 나올 때 반드시 앞치마를 착용해야 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던 사람이다 - 그녀의 부친이 사망한 이후부터 영구적으로 그녀의 세금을 면제한다는 명령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에밀리 양이 그런 시혜를 선뜻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토리스 대령은 에밀리 양의 부친이 사업상 문제로 시 당국에 자금을 대출해 주었으며, 이런 방식으로 갚기를 원했다는 이야기를 꾸며냈다. 사토리스 대령의 세대와 사고방식의 남자여야 꾸며낼 수 있는 이야기였고, 여자여야 믿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녀가 못된 아이였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상에 유독 못되게 태어나는 여자란 없으니, 여자란 원래 못된 존재이며, 못됨을 내재한 채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요는 그 못됨이 머리에 미치기 전에 얼른 결혼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자가 일정 연령에 이르기 전에는 결혼하지 못하게 하는 체제에 그들을 맞추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자연은 체제 따위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으며, 여자들은 체제는 고사하고 그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너무 빨리 성장했다. 체제가 그녀에게 때가 되었다고 이르기 전에, 못됨이 머리까지 이르러 버렸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딸을 가진 아버지의 입장에서 하는 소리다.
이제 방 정리는 온전히 그녀 어머니의 몫이었다. 수척한 이모가 집 전체를 돌봤다. 그 모습을 배경 삼은 미니의 화사한 드레스와 유유자적하고 공허한 나날은 일종의 격렬한 비현실성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저녁 외출이라고는 이웃 여성들과 함께 영화관에 갈 때뿐이었다. 오후에는 새 드레스를 차려입고 홀로 시내로 나가서, 젊은 ‘사촌’들이 이미 연약하고 부드러운 머리와 가녀리고 어색한 팔과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엉덩이를 돋보이며 서로에게 매달려서 늦은 오후 속을 쏘다니거나, 짝지은 남자들과 함께 소다파운틴에서 웃음과 새된 소리를 흘리는 곳으로 나가서, 사람들로 빽빽한 가게 문 앞을 지나치며 걸음을 옮기곤 했다. 이제는 문 안에 늘어져 앉은 남자들이 눈으로 그녀 모습을 좇지도 않는 그곳으로.
“안 해. 진심이야.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애초에 사랑한다는 말조차 꺼낸 적 없잖아.”
“알았어요. 그럼 사랑은 아니라고 쳐요. 사랑 없이 나와 결혼해 줄 수 있나요? 잊지 말아요, 너무 늦어버릴 거예요.”
“아니, 안 할 거야.”
“하지만 왜요? 왜요, 폴?”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자동차는 속도를 내어 달려갔다. 이제 그녀가 인지했던 첫 표지판이 등장했고, 그녀는 조용히 생각했다. ‘이제 거의 다 왔을 거야. 다음 커브길이겠지.’ 그녀는 큰 소리로, 그들 사이에 앉은 귀먹은 늙은 여인을 뛰어넘어 말했다. “왜 안 되는데요, 폴? 깜둥이 혈통 이야기 때문이라면, 나는 그거 안 믿어요. 신경 안 쓴다고요.” ‘그래.’ 그녀는 생각했다. ‘바로 이 커브길이야.’ 도로가 굽어지며 아래로 경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의자에 몸을 묻었지만, 다음 순간 할머니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릴 생각도, 자신의 눈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려 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한테 아이가 생겼다면요?”
그들은 이내 열차에서 내렸다. 기차는 계속 나아갔다. 이내 다른 승객들이, 진흙투성이 장화를 신고 산 짐승이나 죽은 짐승을 담은 바구니를 든 다른 농부들이 객차에 들어왔다. 기차가 폐허가 된 대지를 가로질러 폐허 속 벽돌이나 강철로 지은 역을 방문하는 동안, 그들은 차례대로 창가에 몸을 기울이고 뻣뻣하게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남자를, 그리고 이름을 읽는 그의 입술을 지켜보았다. “전쟁의 풍경을 지켜보게 놔두자고. 이제야 소문이라도 듣고 찾아온 모양이니 말이야.” 그들은 서로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고 나면 알아서 집으로 가겠지. 자기 뒷마당에서 전쟁이 벌어진 것도 아니니.”
“자기 집에서 벌어진 것도 아니고.” 한 여자가 말했다.
그러나 보가드의 눈길은 두 번째 남자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까지 평생 저렇게 흥미로운 인물은 본 적이 없는 것만 같았다. 구부정한 어깨와 살짝 아래를 향하는 얼굴의 형상만으로도 무신경한 분위기가 풍겼다. 옆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얼굴은 마찬가지로 불그레했지만, 그 만듦새 속에는 거의 음침함에 가까울 정도의 침잠하는 근엄함이 깃들어 있었다. 스무 살이지만 1년 동안, 심지어 잠든 중에도, 스물한 살로 보이려 애써온 남자의 얼굴이었다.
미시시피 지역의 날래게 움직이는 태양이 이제 지평선 위로 떠올랐고, 그는 자신이 기이한 하늘 아래, 기이한 풍경 속에, 꿈속에서나 친숙하다고 여길 법한 친숙한 존재들 속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한 번도 산을 오른 적 없는 사람의 추락하는 꿈처럼. ‘내가 정말로 저런 말을 들었을 리가 없어.’ 그는 조용히 생각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나 그 목소리는, 그 말을 뱉었던 친숙한 목소리는 여전히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는 검둥이 노파한테 오늘 아침 태어난 수망아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일찍 일어나신 거였어.’ 그는 생각했다. ‘그거였어. 나나 내 가족 때문이 아니었어. 침대에서 일어나게 만들 이유조차 되지 못했던 거야.’
강사는 여성, 특히 젊은 여성에 대해서, 그들이 잠시 빠지게 되는 기이하고 신비로운 시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맹점이라고나 할까, 마치 고속으로 선회하는 비행사의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과 비슷한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인들은 선악을 판별하지 못하며, 따라서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마 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더 많을 텐데, 그 악행 속의 악성은 명징한 사실에 기반을 두는 반면, 선은 그 사실의 부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기에 여인들은 자신이 희생양을 만드는 바로 그 수단에 의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삶은 변함없이 즐거운 식으로 흘러갔다. 아무래도 시인이란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족속이기 때문인 듯했다. 적어도 이 시인은 달랐다. 앤은 이내 이 시인을 거의 만나지조차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밤마다 코 고는 소리를 제외하면 그가 집 안에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다시 분통을 터트린 것은 2주가 지난 다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는 머리를 빗는 중조차 아니었다. “그 사람이 여기서 지낸 게 2주던가, 아니면 2년이던가?”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는 있으나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중이었고, 아무리 예술가라도 남편이라면 그게 나쁜 소식이라는 점을 모를 리 없었다. 여자가 반쯤 옷을 걸친 채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있는데도 거울 속에서 말하는 자신의 모습조차 지켜보지 않고 있다면, 어디선가 타는 냄새를 맡아야 마땅한 법이다.
그리고 아들 쪽은 2년 전 어느 오후에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채로 문 앞으로 배달되어 왔던 적이 있었는데, 차에 타고 있던 동행인의 정체는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직접 아들의 옷을 벗겨서 침대에 밀어넣다가 아들이 제 속옷 대신 여자의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몇 분 후, 아마도 때리는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보이드의 어머니가 달려와서는 자기 남편이 여전히 의식불명인 아들을 수건으로 연달아 후려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하인 하나가 얼음물 대야를 가져다놓고 수건을 계속 적셔 건네주는 모습도 말이다. 그는 잔혹하고 의도적인 격정에 사로잡혀 아들을 호되게 후려치고 있었다. 아들을 깨우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때리고 있을 뿐인지는, 아마 그 자신조차 제대로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즉시 후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환멸이 끓어오르는 속에서 그는 아내에게 여자 속옷에 대해 말하려 했지만 아내는 듣기를 거부했고, 대신 사납고 여인다운 분노를 터트리며 그를 공격했다. 그날 이후로 아들은 어머니가 함께 있을 때만 아버지를 마주하려고 애썼으며 (사실 아들이나 어머니 양쪽 모두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위축된 앙심과 보복을 원하는 불손함을 뒤섞은, 반은 고양이 같고 반은 여자 같은 태도로 아버지를 대했다.
땅으로 떨어져 부딪치는 그의 죽은 얼굴에도 여전히 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발은 여전히 등자에 걸린 채였다. 연갈색 말은 총소리에 풀쩍 뛰어올랐다가 그대로 웨델을 매단 채로 샛길 옆으로 가서 멈추고 한 바퀴 돌더니, 콧김을 한 번 뿜고 그대로 풀을 뜯기 시작했다. 반면 서러브레드는 굽이길을 지나 그대로 달려갔다가 빙 돌아서 돌아왔다. 배 아래에 담요가 꼬인 채로 눈을 희번득거리면서, 그대로 샛길 위에 널브러진 소년의 시체를 짓밟고 지나갔다. 얼굴은 돌에 찍혀 옆으로 돌아가고, 팔은 뒤로 꺾이고 손바닥은 벌린 모습이 마치 물웅덩이를 넘으려고 치맛자락을 들어올린 여자처럼 보였다. 그러다 말은 몸을 돌려 웨델의 시체 곁에 서서 가볍게 울면서 고개를 위아래로 내젓고는, 산월계수 덤불과 그 안에서 피어나다 사라지는 흑색화약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크너 자선 단편집』은 전체 6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포크너는 작품의 선별과 각 부의 제목과 작품의 배치에까지 스스로 편집자가 되어 개입했다. 포크너의 대표작이자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에밀리를 위한 장미 한 송이」, 인간의 양심과 계급 충돌을 날카롭게 파고든 「불타오른 헛간」, 인종 차별의 폭력을 응시한 「메마른 9월」, 그리고 기억과 죽음을 교차 편집하듯 구성한 「그 저녁의 태양」 등은 모두 그의 미학과 윤리, 그리고 언어 실험이 극단에 다다른 지점에서 쓰인 작품들이다. 이 단편들의 중심 무대는 그의 장편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남부 미국 가상의 지역인 요크나파토파 카운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요크나파토파는 남북전쟁과 인종차별, 경제적 몰락과 종교적 죄의식이 뒤엉킨, 미국 문학사상 가장 정교하게 구축된 신화적 공간이다. 포크너는 이 공간을 통해 미국이라는 국가의 가장 어두운 과거, 그 비극의 진흙탕 위에서도 인간이 여전히 사랑하고 싸우고, 증오하고 용서받기를 원하는 존재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포크너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축적되고 병렬적으로 뒤섞이는 실존적 구조를 보여주고 우리는 그를 통해 존재의 미끄러짐과 반복을 배운다.” 포크너의 단편들은 종종 시간과 인과의 법칙을 벗어난다. 이야기의 결말은 이미 시작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대화의 화자가 누구인지 중반 이후에 제시되기도 한다. 과거는 현재와 병렬적으로 뒤섞이며, 인물들의 기억과 목소리는 중첩되어 과거와 현재를 유령처럼 헤맨다. 이 모든 기법은 독자에게 단순한 줄거리 파악 이상의 체험을 선사한다. 독자는 이야기의 구조 속을 지나가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머무르는 존재가 된다. 포크너는 철학적 개념 없이 혼란스러운 일상의 언어로 인간의 운명과 죄, 사랑과 증오, 패배와 자존을 이야기했고, 그 문장은 성서의 리듬처럼 무겁고 아름다우며, 때로는 증인의 말처럼 단호하고 망설임 없이 던져진다.
포크너는 요크나파토파가 상징하는 ‘미국 남부’를 단순히 패배하고 과거의 인습에 얽매인 지역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론적 장소로 변모시켰다. 그곳은 패배자들의 공간이자,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이며, 인간 조건의 실험실이다. 우리에게도 시각적으로 익숙한 미국의 화려한 도시와 산업 지대, 압도적인 자연의 풍광이 아니라 미디어가 잘 보여주지 않는 그 퇴락한 남부의 풍경 안에 자리한 인간들은 미국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낯설음을 보여준다. 그 세계를 그린 포크너의 이야기들이 보편적인 인간 실존의 서사로 승화된 것은 맬컴 카울리의 말대로 포크너의 작품들이 아메리카의 신화와 상처의 핵심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전쟁과 인종 갈등을 주축으로 한 그 세계는 진보의 대열에서 탈락한 변방의 특이한 이야기들이 결코 아니라 21세기 미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저류에 강하게 흐르고 있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깊은 상처다. 그 상처는 흑인들의 힘이 강해진 지금 더 강력한 형태의 투쟁으로 그 사회 내에서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포크너는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고 남부의 풍경을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의 중첩 속에서 인간은 어리석음과 회한의 경연을 펼치지만, 그것이 향하는 끝은 늘 보편적인 인간 존재의 내면이다.
포크너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문학은 삶의 비탄과 인간 정신의 노력을 다루어야 한다고 했다. 사랑과 명예와 동정과 자부심과 연민과 희생 같은 인간의 내면을 다루는 것이 진정한 문학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목소리가 들리는 한 인간은 불멸할 것이라고 했다. 단순히 분비샘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영혼과 정신에서 나온 소설들을 그는 써왔다. 『포크너 자선 단편집』은 소설이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의 끝에서 쓰인 단편들이다. 이 책은 단지 과거의 문학적 유산을 돌아보는 책이 아니다. 이 단편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을 던진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죄란 무엇이고 용서란 가능한가, 말하지 않는 것들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존재는 무엇으로 이어지는가. 그리고 포크너는 이 질문들을 철학의 언어가 아니라 이야기의 구조, 시점의 흔들림, 음성과 침묵의 간극을 통해 묻는다.
이 책은 포크너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가장 적절한 입문서이자, 그의 작품을 사랑해온 이들에게는 요크나파토파 신화를 다시 체험하게 하는 고전이다. 잔혹하면서도 아름답고, 고요하면서도 무너질 듯 긴장된 언어로 씌어진 이 단편들은 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어둠과 가장 고요한 빛의 순간들을 담아낸다. 그 빛과 어둠은 비탄의 침묵 속에서, 혹은 사라진 목소리의 여운 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읽는 이를 기다리고 있다.
인물정보
(William Faulkner, 1897~1962)
서사와 문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통해 세계 문학사의 지형을 바꾼 20세기를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 명. 미국 남부의 신화적 공간인 요크나파토파를 배경으로 독자적인 서사 우주를 구축했으며, 인간의 죄의식, 역사, 시간, 정체성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1897년 미국 미시시피주 뉴올버니에서 태어난 포크너는 옥스퍼드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미술에 관심을 가졌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 조지프 콘래드, 제임스 조이스, 셀린,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았다. 1차 대전 당시 캐나다 공군에 지원했으나 실전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전쟁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우체국 직원, 대학 행정직원, 작사가, 시인 등 다양한 일을 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29년 발표한 장편 『소리와 분노』는 포크너 문학의 전환점을 이룬 작품으로 몰락하는 남부 사회의 내면을 심층적으로 그려냈다. 이후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압살롬, 압살롬!』 등에서 더욱 급진적인 서사 실험을 이어나갔다.
포크너는 허구의 남부 군郡인 요크나파토파를 창조해 이 지역의 인물과 사건, 역사와 신화를 바탕으로 19편의 장편소설과 다수의 단편을 엮어 ‘하나의 문학적 우주’를 건설했다. 그의 세계에는 과거 남부의 영광과 노예제의 그림자, 전쟁의 상처, 백인과 흑인의 갈등, 빈곤과 몰락의 현실이 교차하며, 이 모든 것이 언어와 시간, 의식의 실험 속에서 구현된다. 그의 분열된 화자, 중첩된 시점, 복잡한 문체는 난해하다고 평가되지만, 이는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인간 경험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구조적 시도였다. 1949년 “심오하고 독창적인 예술적 기교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탐구했다”는 선정 이유와 함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 연설에서 그는 “작가는 사랑, 명예, 긍지, 연민, 희생, 인내 - 그런 것들을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후 1951년에는 자신이 직접 선별하여 여섯 개의 주제로 분류한 『포크너 자선 단편집Collected Stories of William Faulkner』으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100편에 이르는 단편 중 포크너가 42편을 추려낸 이 단편집은 장편소설 속 서사 구조와 미시적 현실 묘사를 압축해낸 포크너 문학의 정수이자, 요크나파토파라는 가상의 세계를 바탕으로 구성된 근대 미국인의 기억과 무의식의 지도이다. 그는 이 단편들 안에서 폐허와 침묵, 전쟁과 인종, 여성과 고통, 폭력과 슬픔을 주제로 남부 사회의 해체 과정을 치열하게 추적한다. 독립된 작품이면서도 포크너의 장편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 단편들은, 그의 문학적 실험이 단지 형식에 그치지 않고 미국 역사와 인간 조건에 대한 총체적인 증언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포크너는 프랑스 실존주의자들로부터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가로 평가받았고, 라틴아메리카의 마르케스, 바르가스 요사,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모두 그를 “자신들의 문학적 아버지”로 언급했다.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중국의 모옌 등도 포크너의 영향 아래 자신들의 고향과 가족의 이야기를 문학화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1962년, 미시시피 옥스퍼드에서 세상을 떠난 그는 미국 남부의 역사와 상처를 하나의 신화로 바꿔놓은 작가”로 남았다. 그의 작품은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독자와 비평가를 불러들이며, 언어와 인간 존재, 그리고 서사라는 개념 그 자체를 묻는 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를 졸업하고 과학서 및 SF, 판타지, 호러 장르 번역을 주로 해왔다. 옮긴 책으로 『나방의 눈보라』 『레이시즘』 『물리는어떻게진화했는가』 『아마겟돈』 『물리와철학』 『장르라고 부르면 대답함』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컴퓨터 커넥션』 『타임십』 『런던의 강들』 『몬터규 로즈 제임스』 『모나』 『레이 브래드버리』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이 있다.
이 상품의 총서
Klover리뷰 (0)
- - e교환권은 적립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 - 리워드는 5,000원 이상 eBook, 오디오북, 동영상에 한해 다운로드 완료 후 리뷰 작성 시 익일 제공됩니다. (2024년 9월 30일부터 적용)
- - 리워드는 한 상품에 최초 1회만 제공됩니다.
- - sam 이용권 구매 상품 / 선물받은 eBook은 리워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 도서나 타인에 대해 근거 없이 비방을 하거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리뷰
- 도서와 무관한 내용의 리뷰
- 인신공격이나 욕설, 비속어, 혐오 발언이 개재된 리뷰
- 의성어나 의태어 등 내용의 의미가 없는 리뷰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100원 적립
문장수집
- 구매 후 90일 이내에 문장 수집 등록 시 e교환권 100원을 적립해 드립니다.
- e교환권은 적립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 리워드는 5,000원 이상 eBook에 한해 다운로드 완료 후 문장수집 등록 시 제공됩니다. (2024년 9월 30일부터 적용)
- 리워드는 한 상품에 최초 1회만 제공됩니다.
- sam 이용권 구매 상품 / 선물받은 eBook / 오디오북·동영상 상품/주문취소/환불 시 리워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구매 후 문장수집 작성 시, e교환권 100원 적립
신규가입 혜택 지급이 완료 되었습니다.
바로 사용 가능한 교보e캐시 1,000원 (유효기간 7일)
지금 바로 교보eBook의 다양한 콘텐츠를 이용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