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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위고

2025년 03월 14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02월 15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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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상품 정보
파일 정보 ePUB (37.41MB)   |  약 15.1만 자
ISBN 979116089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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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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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암시하듯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번역에 대한 거대한 비유다. 허먼 멜빌이 거대한 흰 고래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모비 딕』의 화자 이슈메일의 입을 빌려 그토록 방대한 서사시를 써냈듯 홍한별 번역가는 이 책의 열네 장에 걸쳐 끝내 완성되지 않을 번역에 대한 글을 책장 위에 그린다.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 절대적인 사랑이 추동한 집요하고도 아름다운 글쓰기의 모험. 언어와 언어 사이 새하얀 진공에 다가가려는 도전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번역이라는 축에 의해 떠오르고 연결된다.

홍한별 번역가는 지난 20여 년간 100여 권의 책을 번역하며 평단과 독자의 아낌을 받아왔다. 애나 번스의 『밀크맨』으로 한 해 출간된 영문학 번역서 중 한 권의 번역가에게 수여하는 유영번역상을 수상했고, 2024년 서점가를 휩쓸며 다수의 언론과 독자가 최고의 책으로 호명한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번역했다. 가즈오 이시구로, 데버라 리비, 수전 손택, 시그리드 누네즈, 리베카 솔닛, 조앤 디디온, 버지니아 울프 등의 작품이 홍한별의 번역으로, 그가 쓴 우리말로 독자를 만났다. 무한에 가까운 단어들의 목록으로 사전의 세계를 섬세하게 어루만진 『아무튼, 사전』에 이어 두 번째로 출간되는 단독 저서인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텍스트의 이면을 꿰뚫어 그 너머의 침묵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 번역에 관한 에세이다.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9
바벨 23
배신자들 39
나는 내가 의미하는 걸 말해 59
자비를 베푸시오, 샤일록 79
이 광기에는 번역을 처방한다 95
영국식 퀼트 만들기 119
번역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137
그녀를 믿지 마세요 163
성경과 옥수수빵 179
틈새의 여자들 193
침묵과 메아리 207
기계 번역 시대의 번역가 223
다시 흰 고래 243

주 251
참고문헌 263

나는 번역을 명료하게 정의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자신은 없으니, 비유를 통해 비스듬하게 다가가려 한다. 내가 이 책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흰 고래를 정의하려는 이슈메일의 시도 같은 것이 될지 모른다. 이슈메일이 그랬던 것처럼, 번역의 사례를 들고, 번역을 분석하고, 번역을 해부하고, 번역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 쓴 글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번역을 어떻게 (같은 말로) 다르게 말하고 있느냐는 이야기이자,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이자,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다. (21면)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번역은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한순간이라도 고정하려고 애쓰는 덧없지만 불가피한 시도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대부분-저버리는 일이다. 누구나 알듯이 어떤 번역도 원문을 있는 그대로 거울에 비추듯 재현하지 못한다. 역설적이지만, 나보코프가 쌓아 올린 무한한 주석의 탑은 번역이 놓친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비다(나보코프가 열거한 것만 들자면 우아함, 좋은 소리, 명료함, 취향, 현대적 용례, 문법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주석의 탑이 뻗으며 여백도 손실되었다. 상상의 여지도, 모호함의 가능성도). (47면)

나도 번역이라는 일이 탐정이 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탐정소설 속 탐정의 목표는 범죄가 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저질러졌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이다. 탐정이 모든 정황과 맥락을 고려해 가장 그럴듯한 한 가지 서사를 완성하듯이, 번역가도 단어들의 단서를 모아 매끈한 하나의 문장, 빈틈없는 하나의 줄거리를 만든다. 번역가는 흩어진 의미의 조각들을 이렇게 맞추어보고 저렇게 맞추어보며 도무지 옮겨지지 않는 것을 옮기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르륵 퍼즐이 풀린다. 비어 있는 한 자리에 딱 맞는 단서/단어를 끼워 맞추자 이야기가 완결된다. 이렇게 문장을 완성할 때의 희열. 결국 번역을 하는 이유는 번역이 이런 일이기 때문이다. 드물게 찾아오는 완성의 감각. (65면)

실제로 번역을 할 때는 ‘단어’를 번역(직역)하거나 ‘단어의 의미’를 번역(의역)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제3의 무언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What do you think?’ 같은 간단한 문장이 수십 가지로 번역되는 것이다. 행간을, 침묵을, 여백을 번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간에는 참 많은 것이 있다. 맥락, 어조, 정서, 분위기, 성격, 암시, 어감, 문화적 인유, 의도. (75면)

언어의 본질은 변화다. 언어는 고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샤일록이 “맹세, 맹세, 나는 하늘에 맹세했소. 내 영혼이 위증을 해야 하오?”라며 자신의 계약을 신에게 한 맹세에 동일시하며 신성시하려고 하더라도 계약이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 한, 해석의 차이는 필연이다. 그 차이를 통합하고 이해하려면 자비가 필요하다.
언어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번역에서 자비 없는 축어역을 고집한다면, 어떤 불충도 허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의미와 행간의 침묵을 무시한 채 단어만 번역하려 한다면 언어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고 파괴되는 치명적 결과를 낳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92-93면)

어쩌면 번역은 변신-몸을 바꾸는 일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런 모습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늘어서는” 번역,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입는 번역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걱정이다. ‘나’는 말보다 내가 먼저 변신할까 봐 두렵다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마치 내가 저자인 것처럼, 내가 저자라고 착각하고 마치 내 글을 쓰듯 글을 쓰게 될까 봐 두렵다는 걸까? 번역 과정에서 기표와 기의 사이의 끈이 끊어지고, 단어가, 이야기가 변신해서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버릴까 봐, 저자를 배신하는 배신자가 될까 봐, 번역으로 원문을 손상시킬까 봐? 뻔뻔스럽게 살을 베어내고 글을 다듬으며 문학성을 지워버릴까 봐? (105면)

단어를 옮길 수도 의미를 옮길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번역가에게는, 아예 단어도 의미도 아닌 감각으로 이루어진 시를 번역하는 경험, 읽을 수 없는 시를 읽을 수 없는 시로 번역하며 언어를 창조할 자유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서 아르토처럼 번역본이 원본보다 더 원본에 가까운 것이라고 선언하는 거다. 번역은 순수 언어에 더 가까워진 것이므로 사실 그 말이 맞다. (116-117면)

나는 잘 읽히는 번역문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러운 논리로 글을 읽게 하려고 어쩌면 나에게 허락된 것보다 더 많이 개입할 때가 있다. 마치 편집자가 된 것처럼 원문에 가위를 댈 때도 있다(있는 것을 잘라내거나 없는 것을 집어넣는다는 말은 아니다. 문장을 합하거나 나누거나 문장구조를 뒤틀거나 긍정과 부정을 뒤집을 때가 있다). 그런데 번역 원고를 다듬고 고치다가 피츠제럴드처럼 진부함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철렁해진다. (134면)

번역이 아무리 자연스럽고 편안한 한국어를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번역문에는 번역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 흔적이 번역문의 미덕이 된다. 타자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포개어지고 간섭이 일어날 때 아롱거리는 무늬가 언어에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는다. 나는 한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을 흉내 내려 하는데 번역가를 흉내 내어 글을 쓰는 사람도 있고, 이런 교환과 충돌을 통해 언어의 가능성이 최대로 이끌어내어지기도 한다. 내가 쓰는 언어에도 지금까지 내가 읽고 번역한 무수한 글들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175면)

한국전쟁 때 강원도에서도 그 책이 등장했다. 미군이 소통 불가능한 민간인 한 무리를 마주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생김도 구분이 가지 않는 사람들. 적인지 우리 편인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공백, 의미의 진공. 그때 복종과 추종의 기호가 성경책의 형태로 나타난다. 불에 타고, 복원되고, 부활하여 새로운 몸과 새로운 의미를 얻은 책이었다. 이 장면은 호미 K. 바바가 프로이트의 개념을 빌려와 ‘최초 장면(primal scene)’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기에도 손색이 없다. 식민주의자와 식민지인의 첫 번째 만남-폭력, 죽음의 위협, 위기, 오해, 혐오와 욕망, 정체성 형성, 빵과 의료의 수혜, 문화적 지배의 시작. 이 첫 번째 만남의 트라우마를-그리고 갈망을-나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도, 오빠도, 나도 평생 번역을 하면서 살게 되었다. 델리 인근에 사는 인도인들은 성찬을 거부했으나, 우리는 거부하지 못하고 그 빵을-몸을 받았다. (184-185면)

최초의 여성 번역이라는 문구와 함께 에밀리 윌슨의 책이 출간되었을 때, 한편에는 의심의 눈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다. (요즘 세상에) 여자가 번역했다는 게 뭐 대단한 일인가? 이미 수십 편의 번역이 있는데 왜 또 다른 번역이 필요한가? 여자의 번역이라서 의미가 있다는 말은 곧 번역가가 투명해야 한다는 의무를 저버리고 원본에 함부로 개입해 훼손했다는 뜻이 아닌가? 요즘 말로 하면 호메로스에 ‘페미 묻힌’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위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고, 윌슨이 옮긴이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윌슨은 원문 충실성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오히려 현대의 편견이나 관념이 글에 옮겨지는 것을 경계했다. 오뒷세우스에게 장려하고 과장된 수사를 붙이고 페넬로페의 손에 필터를 먹이고 여자 노예들에게 ‘창녀’라는 오명을 덧씌운 것은 남자 번역가들이다. (203면)

에밀리 윌슨의 『오뒷세이아』 번역은 원본의 틈새에 파고들어 은폐된 모순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권위 있는 텍스트에 미세한 균열을 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근원적인 서사로 생각한 것에도, 호메로스의 위대한 작품에도 균열이 있고 여러 목소리가 섞여 있으며 순수한 하나의 목소리란 신화에 불과함을 여성의 번역이 드러낸다. 반들반들 다듬어진 표면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던 균열, 삶의 고통, 노예들의 비명, 우리가 보고 싶지 않았기에 눈을 돌렸던 것들이, 그럴듯하게 구성된 신화를 치웠을 때 비로소 보인다. 번역이 원문의 틈새에 깃들어 있던 목소리를 끌어낸다. (204면)

바벨탑 때문에 같은 것을 말하는 수만 가지 다른 방식이 생겼다. 우리는 그전으로 거슬러 가서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게 되고 싶은가. 서로 다른 말들의 부딪힘과 어울림, 언어를 가지고 노는 다양한 방법, 날마다 우리가 느끼고 겪는 언어의 신비한 변화,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버리고 싶은가. 살아 있는 풍부하고 섬세한 언어 없이 문화가 발전할 수 있을까. 흐릿하고 개성 없는 공용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섬밀하고 정교한 언어의 세계가 있다. 단테가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속어가 아니라 공용어이지만 죽은 언어인 라틴어로 글을 썼다면 『신곡』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번역이든 창작이든 우리가 쓰는 글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더 평범해지는 쪽이 아니라 더 탁월해지는 쪽으로 가야 한다. (240-241면)

나도 저작권이 만료되어 이미 여러 판본의 번역이 나와 있는 책을 번역할 때나, 나 이전에 다른 사람이 번역한 적이 있는 책을 재번역할 때는 경쟁심과 초조함에 시달린다. 내가 저자의 속마음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되기를, 내가 더 간절히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 이전에 이 텍스트를 차지했던 사람에게 알 수 없는 질투심을 느끼고 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번역을 내놓고 싶다. 이럴 때 번역은 사랑의 경쟁이고,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배신이기도 하다. (246면)

번역은 몸을 바꾸는 일, 변신이자,
고집스러운 짐승이 인물의 자리에 들어서는 메타포다

언어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해 한 자리에 고정하려는 번역이 언제나 무언가를 조금씩 저버리고 배신하는 일이라면, 글자를 옮기는 과정에서의 손실이 불가피하다면, 번역가는 언어의 하얀 진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번역을 이론으로 정리하거나 번역의 정의를 규명하는 데 주안을 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메타포라는 강력한 장치를 사용해 번역에 우회적으로 다가선다. 일찍이 리베카 솔닛이 일견 관련 없어 보이는 존재들을 메타포로 연결시키는 인간 고유의 사고방식이 “기계로 수행될 수 없는 인간적 생각의 본질”이라고 말했듯, 이론과 우화, 역사와 문학에서 번역의 메타포를 가져와 조각보를 짜내는 이 작업은 섬밀하고 정교한 언어 세계를 향한 믿음을 가장 ‘인간적인’ 형식과 유려한 텍스트로 보여주고 있다.

번역의 사례를 들고, 번역을 해부하고, 번역을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이 가져오는 이론의 조각과 문학의 메타포 들은 나열하기만 해도 흥미롭다. 『모비 딕』의 이슈메일이 집요하게 좇은 거대한 흰 고래에서 시작해, 벤야민이 극강의 직역을 주장하며 추구한 ‘순수 언어’, 언어와 번역에 관한 가장 오래된 은유인 바벨, 나보코프가 『예브네기 오네긴』을 번역하며 쌓은 주석의 탑, 이상한 나라에서 내가 하는 말이 내가 의미하는 것인지 혼동하는 앨리스,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이 필사적으로 지키려 한 기표와 기의의 결속, 세간의 웃음거리가 된 횔덜린의 ‘미친’ 번역, 앙토냉 아르토가 광기의 치료제로 처방받은 「재버워키」 번역,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루바이야트』를 극도로 길들이면서 완성한 진부함의 결정체, 국제적으로 벌어진 『채식주의자』 번역의 충실성 논쟁, 여성 번역가가 옮긴 최초의 영역본인 에밀리 윌슨의 『오뒷세이아』, 진 스태퍼드의 「러브 스토리」를 번역하는 오기방 번역가와 홍한별 번역가 사이 66년의 시차…. 번역에 관한 이토록 독특하고 다채로운 화제들을 연결시켜 직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결속을 이루어내는 짜릿한 지적 여정은 흔히 ‘직역 대 의역’ 논쟁으로 수렴되는 번역에 관한 이야기에 지평을 넓힐 뿐 아니라, 탁월한 에세이스트이자 스토리텔러로서 홍한별 번역가의 저력을 보여준다.


절대적으로 숭앙해야 하는 원문의 권위라는 것은 없다
번역은 원본이 그 자체로 완결성과 근원성을 지닌다는 신화를 무너뜨린다

저자가 「성경과 옥수수빵」에서 처음 영어를 읽고 싶어 했던 때를 떠올리며 번역의 충동과 식민주의적 맥락을 연관 짓는 것은 이 책에서 특히 인상적인 대목이다. 식민 지배를 받는 이들이 지배자의 책을 베끼고 해석하고 오독하며 절대적 진리로서의 책의 권위가 해체되는 과정은, 쓰인 시점에서 못 박혀 고정되어버린 원본이 번역을 거쳐 다시 살아나는 과정과 닮았다. 우리는 번역을 가리켜 언어의 한계에 대한 증거라고, 번역은 무언가를 항상 배신하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번역의 불가능성은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언어의 빈틈, 행간, 침묵, 여백을 읽는 수많은 방식은 원본을 현재의 요구에 적응하며 새로 태어나게 만든다. “온 힘을 다해 꽉 붙들고 절대 놓아주지 않으면” 텍스트 이면에 담긴 진실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을, 홍한별 번역가는 이 책을 통해, 그가 지금껏 옮겨온 수많은 책들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는 틈새에 있는 번역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지배 서사에 균열을 만들어 주변화된 목소리가 들리게 한다. 번역은 원본이 그 자체로 완결성과 근원성을 지닌다는 신화를 무너뜨린다. 번역은, 이종교배는, 혼종은 원본을 변형하고, 아버지를 살해하고, 혹은 아버지를 삼키고, 거기에 내 모습을 입히고, 내 것으로 만들고, ‘최초 장면’의 트라우마를 길들인다. -본문 190면

원본은, 이미 죽어 있는 원본은 번역이 없으면 정전이 되지 못한다. 원본은 번역되면 될수록 정전으로서 위치가 굳어진다. 드 만은 원본이 번역을 필요로 하므로 순수하게 그 자체로 정전일 수 없고, 또 번역될 수 있으므로 최종본이 될 수도 없다고 한다. 번역은 원본을 정전화하고, 잠정적으로 동결하며, 이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원본의 유동성과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서양 문학의 시조인 『오뒷세이아』도 끊임없이 번역되지 않으면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렇지만 새로운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다양한 번역이 여러 목소리를 낼 때마다, 고정되고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원본이라는 신화는 무너진다. 번역을 통해 우리는 원본을 받아들이며 영향을 받아 달라지지만, 원본도 늘 번역을 겪으며 새로운 생명을 얻고 다시 복원되고 변모한다. 『오뒷세이아』 4장에 나오는 해신(海神) 프로테우스는 사자, 뱀, 나무, 물 등 어떤 모습이라도 될 수 있지만, 온 힘을 다해 꽉 붙들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면 변신하기를 포기하고 진실을 들려준다. 번역도 때로는 그렇게 꽉 붙드는 일이다. 무수히 변하는(폴리트로폰) 원본을 고정하고 틈새에 스며 있던 의미까지 꽉 짜내어 진실을 듣기 위해서. -본문 204-205면

작가정보

저자(글) 홍한별

글을 읽고 쓰고 옮기면서 산다. 지은 책으로 『아무튼, 사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공저), 『돌봄과 작업』(공저) 등이 있으며, 클레어 키건, 애나 번스, 가즈오 이시구로, 데버라 리비, 버지니아 울프, 수전 손택, 시그리드 누네즈, 앨리스 오스월드, 조앤 디디온, 리베카 솔닛 등의 책을 옮겼다 . 『밀크맨』으로 제14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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