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거인
2025년 03월 07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9월 27일 출간
- eBook 상품 정보
- 파일 정보 ePUB (73.99MB) | 약 22.9만 자
- ISBN 9791160896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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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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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놀러 오는 돌고래가 사는 샤크베이(호주) 등
세계 20여 곳을 누비며 고래의 생태, 문화, 역사를 담은
고래와 인간에 관한 거의 모든 이야기!
고래의 생태적 지식을 토대로 인간-고래 관계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다룬 단 한 권의 책!
남방큰돌고래 ‘제돌이’ 야생방사의 시동을 건
환경논픽션 작가 남종영의 최고의 고래 개론서
[1부]
고래의 탄생
- 바다에서 육지로 돌아가다
1장. 그들은 육지에서 왔다 _19
어류인가, 포유류인가 | 땅 짚고 헤엄쳤던 조상 | 파키케투스에서 바실로사우루스까지 | 고래의 특이한 신체 | 옆으로 누워 바라보는 돌고래 | 이빨인가, 수염인가 | 대왕고래에서 프란시스카나까지
고래들-① 130년 크고 푸른 영감을 주다_대왕고래 ‘호프’ 50
2장. 생태, 사회, 문화 그리고 수수께끼 _55
장거리 노마드 | 소리로 보다 | 사랑을 나누러 돌아온 고래들 | 경이로운 바다 속 출산 | 강한 모성애 | 공기방울로 짠 그물 | 포악한 사냥꾼 | 고래뛰기와 꼬리세우기 | 놀고 낮잠 자는 고래 | 도구 사용과 문화의 전파 | 코스모폴리탄 가수 | 인간과 물고기 잡는 돌고래 | 인간에게 놀러오다 | 그들은 ‘집단 자살’ 했을까 | 죽음의 음파, 세기의 재판
고래들-② 길 잃은 고래여, 우리가 도와줄게_혹등고래 ‘험프리’ 103
3장. 세드나의 후손들 107
고래를 잉태한 이누이트 소녀 | 요나의 고래는 향고래 | 네아르코스와 바다 괴물 | 괴물에서 동물로 | 고래 등에 선 성 브레단 | 스트랜딩과 과학의 발전
고래들-③ 이민을 갔나?_귀신고래 128
[2부]
작살을 피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 인간의 탐욕과 고래(上)
4장. 고래야, 네가 원하는 걸 주었다 137
포경 벨트, 북극 문화권 | 얼음의 미로에서 던지는 작살 | 터부와 정화 의식 | 포경 경제의 붕괴 | 북유럽과 일본의 포경 | 포경 시대를 연 바스크족 | 비스케이 만에서 사라진 고래들
5장. 대학살의 서막 165
스피츠베르겐을 발견하다 | 북극에서 부는 돈 바람 | 포경 경쟁: 영국 대 네덜란드 | 죽어서도 모욕을 당한 테이 고래
6장. 고래의 복수 181
향고래를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가다 | 배를 산산조각 낸 고래들 | 경랍과 용연향 | 낸터킷의 몰락 | 캘리포니아 귀신고래 | 자기파괴적 포경 | 17세기 개체수 낮춰 잡기
7장. 남극에 떠다니는 고래 공장들 207
대왕고래, 정복당하다 | 바다를 떠다니는 공장 | 제2차 세계대전과 포경 | 국제포경위원회의 결성 | 지속가능한 포경은 사라지고 | 해달이 사라진 이유
8장. 고래의 눈에서 달처럼 빛나는 구슬 227
한민족 포경의 수수께끼 | 사라진 반구대 부족 | 원나라에 바친 기름 | 일본 제국주의에 쓰러진 고래들 | 고래는 해방되지 않았다
고래들-④ 불법 포경의 벼랑 끝에 밀리다_한국 밍크고래 253
9장. 고래의 노래 257
고래와 오로라 | 우주로 날아간 향고래 | 변화의 바람 | 상업포경, 막을 내리다
고래들-⑤ 가장 외로운 ‘52헤르츠 고래’_참고래 혼종 277
[3부]
살아 있는 고래가 돈을 버는 시대
- 인간의 탐욕과 고래(下)
10장. 포경이나 관광이냐 285
정치적으로 성장한 관광 | 가까이 보고 싶고, 두고 싶고 | 고래 만의 사보타지 | 모라토리엄에 대한 저항 | 일본이 포경에 집착하는 이유 | ‘한국형 포경’의 잔혹함
고래들-⑥ 한국에선 흔해도 세계에선 멸종위기종_상괭이 316
11장. 당신을 즐겁게 하려고 죽어갑니다 319
다이지, 돌고래의 ‘블랙홀’ | ‘행운아’ 범고래 케이코 | ‘살인고래’ 틸리쿰 | 불행이 넘치는 풀장 | ‘야생의 몸’에서 ‘돌고래쇼의 몸’으로
고래들-⑦ 사람 말을 따라한 ‘녹’_흰고래 338
12장. 바다로 돌아간 돌고래들 343
서울대공원 돌고래쇼의 비밀 | 야생방사의 삼원칙 | 우울증 돌고래 ‘복순이’ | 야생방사 실적주의 | 바다쉼터의 미래
고래들-⑧ 사람이 좋아서 ‘펑기’_큰돌고래 365
[4부]
권리의 주체, 그리고 기후변화의 해결사
- 고래의 미래
13장. 기후변화와 싸우는 고래 375
죽음이 잉태한 생태계 | 똥 싸지 못해 벌어지는 일 | 이중의 피해자 | 동해 밍크고래와 자연기반해법
고래들-⑨ 해상 유전 앞에 선 50마리_라이스고래 390
14장. 비인간인격체 고래의 권리 393
존 릴리의 이상한 언어 실험 | ‘다정한 거인’에서 ‘권리의 주체’로 | 남방큰돌고래 생태법인이 중요한 이유
에필로그 409
고래 종별 목록 414
미주 417
찾아보기 439
도판목록 444
아주 옛날에도 인간들은 고래에 독특한 지위를 부여했다. 고래를 흔쾌히 물고기라고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인문학이 꽃을 피웠던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래를 동물 중에서 가장 독특한 존재로 여겼다. 그는 《동물지Historia Animalium》에서 고래와 돌고래는 아가미가 아니라 폐로 숨을 쉬고 살아 있는 상태로 새끼를 낳는 등 육상 동물과 비슷하다며 어류로 분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로마 시대의 철학자들도 새끼를 낳아 기르는 방식을 보아 고래와 돌고래, 물범 등을 어류와 다르게 보기도 했다.
_1장 그들은 육지에서 왔다(27쪽)
남방큰돌고래는 몽키마이어 해변으로 인간을 만나러 온다. 오랜 전통에 따라 오전 8시에 ‘먹이 주기’ 의식이 치러진다. 돌고래들은 얕은 물가에 도착해 거리낌없이 사람들에게 접근한다. 손을 대도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짧게는 몇 분에서 길게는 서너 시간 동안 생선을 받아먹고 사람과 어울리다가 바다로 돌아간다.
돌고래-인간 사이의 특별한 관계는 역사가 오래됐다. 1964년 한 어부가 돌고래에게 생선을 주면서, 돌고래들에게 어떤 ‘문화’가 생겼다. 돌고래들은 먹이를 먹으러 오고, 사람들은 돌고래들을 구경하러 온다. 관광지가 됐고 대형 리조트가 생겼다.
재미있는 점은 돌고래가 무작위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 특정한 부류가 찾아온다는 거다. 샤크베이의 남방큰돌고래는 약 3,000마리. 이 가운데 몽키마이어 해변에 찾아오는 돌고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_2장 생태, 사회, 문화 그리고 수수께끼(92쪽)
반구대암각화에 천착해온 고고미술사학자 이하우는 반구대암각화의 ‘피리를 부는 사람’이 사실은 손을 들어 ‘수신호를 하는 사람’이라며, 반구대 부족이 주변에서 거주하는 이들이 아니라 매년 고래 회유철에 맞춰 사냥을 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신석기 시대에는 아직 수렵이 중심이었고, 수렵 경제에서는 넓은 공간에 흩어져서 사는 게 유리하다. 여러 지역에서 방언을 쓰는 사람들이 고래를 잡는 과정에서 언어적 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신호를 썼다는 것이다. 일부 연구자는 통나무 배는 고래 사냥에 적절치 않고, 암각화의 배도 곡선을 가진 ‘우미아크’로 보인다며, 오호츠크 해와 캄차카 반도의 북쪽 원주민이 회유하는 고래를 따라 내려온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반구대암각화는 알류샨 열도에서 포경을 북서태평양에서 북극해로, 다시 알류샨 열도로 이어지는 환태평양 포경문화권의 자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_8장 고래의 눈에서 달처럼 빛나는 구슬(235쪽)
이로써 15세기 스페인 바스크족이 본격적으로 개시한 상업포경은 약 500년 만에 막을 내렸다. 이제 고래는 더 이상 이윤 축적의 도구가 아니게 되었다. 필요에 따라 잡아 검소하게 사용하는 ‘생계적 사냥’만 남게 되었다. 미국 에스키모의 북극고래, 구소련 시베리아 원주민의 귀신고래, 그린란드 원주민의 흰고래 포획 등 원주민들의 사냥만 국제포경위의 연간 쿼터를 지키는 수준에서 지속하도록 했다.
호텔 밖에선 환호성이 터졌다. 도로를 채운 참가자들은 펄쩍 뛰며 기뻐했고, 환경단체는 일제히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인간 의식의 진보가 고래를 구했다는 자부심이 얼굴에 비쳤다. 도로에선 회의 기간 내내 환경론자들의 마스코트였던 고래 인형을 사람들이 흔들었다. ‘고래를 구하자’라는 피켓 대신 새로운 피켓이 달렸다. ‘고래는 구출됐다-1982년 브라이튼에서.’
_9장 고래의 노래(274쪽)
서울대공원에서 돌고래쇼를 하던 제돌이는 세 가지 조건에 모두 부합했다. 9~10살 때인 2009년 잡혀온 제돌이는 야생방사 결정 시점인 2012년까지 3년 동안 감금돼 있었다. 제주 바다에는 단 하나의 남방큰돌고래 무리만 있기 때문에, 제돌이의 합류 가능성도 높았다.
그렇다고 바다에 돌을 던지듯 돌고래를 방사해선 안 된다. 꽤 오랜 기간 먹이 사냥 같은 야생 생존법을 잊고 살았기 때문에 야생의 생태와 행동 리듬이 복원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야생 돌고래를 수족관에 적응시켰던 것과 반대로 ‘돌고래쇼의 몸’을 ‘야생의 몸’으로 되돌려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활어 급여 훈련이다. 살아 있는 생선을 수조에 넣어 돌고래가 직접 생선을 쫓아 잡아먹도록 한다. 제돌이는 서울대공원에서의 첫 훈련 때부터 살아 있는 생선을 쫓아 잡아먹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사람과의 접촉을 차츰 줄여 야생에서도 홀로 설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바다에 가두리를 설치해 돌고래가 실외의 햇볕과 바람, 그리고 차가운 수온에 적응하도록 한다.
제돌이는 2013년 5월 제주 성산항 내 가두리로 옮겨진다. 몰수 처분을 받은 돌고래 중 춘삼이와 삼팔이도 함께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합류한다. 야생방사를 약 한 달 앞둔 6월 22일, 삼팔이가 가두리 그물의 찢어진 틈으로 사라진다. 닷새 뒤인 삼팔이는 야생 무리와 함께 다니는 게 목격돼, ‘야생방사 성공 제1호 돌고래’가 된다.
_12장 바다로 돌아간 돌고래들(351~352쪽)
지구의 대기, 바다, 땅 그리고 다양한 생물종이 맺는 역학 관계가 교란되면서,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지구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있다. 리벳 하나가 비행기를 추락시킨다. 점점 더 많은 볼트와 너트, 리벳이 녹슬어 빠져나가고 있다. 재앙을 부르는 작은 것, 사건의 중심에 고래가 있다. 고래는 크다. 지구 최대의 몸집을 자랑하는 동물인 대왕고래는 몸길이가 20미터가 넘고, 몸무게는 150톤을 웃돈다. 똥도 크다. 고래 똥에는 철과 인, 질소 등 영양분이 풍부하다. 그래서 고래가 똥 싼 곳엔 식물 플랑크톤이 번성한다.
식물 플랑크톤은 광합성을 통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한다. 이렇게 저장한 탄소를 가진 식물 플랑크톤은 동물 플랑크톤에게 먹히거나 아니면 다른 미세 영양분과 함께 아주 천천히 바다로 가라앉는다. 그걸 과학자들이 ‘바다 눈’이라고 부른 것이다.
바다 눈은 해저에 쌓인다. 식물 플랑크톤을 통해 흡수된 탄소는 여기에 저장되거나 격리된다. 대기 중으로 노출되면 온실효과를 높이는 원인이 되지만,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으니 온난화에 영향 미칠 일이 없다.
_13장 기후변화와 싸우는 고래(379~380쪽)
좌초한 신화, 고래
바다의 괴수에서 돈벌이로 전락하다
고래에 대한 설명으로 ‘경이로움’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 것이다. 고래는 경이로움, 그 자체다. 다른 바다 동물들과 달리, 육지에서 바다로 되돌아간 고래는 엄청난 몸집부터 뛰어난 지능, 운동 능력, 생태와 문화까지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어느 영화에선가, 바다에 가본 적 없는 산적들에게 해적이었던 사내가 고래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닥불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앉은 무리 바깥으로 둥근 원을 그리고 나서, 고래의 눈 크기가 이 정도라고 이야기한다. 이어서 고래의 크기와 생김새, 생태를 설명한다. 코는 머리 뒤쪽에 있고, 이빨 대신 수염으로 먹이를 잡아먹으며, 가끔씩 숨을 쉬러 바닷물 위로 나와 비처럼 물줄기를 뿜어댄다고 말이다. 또 새끼를 낳고 젖을 먹인다는 이야기도 이어진다. 산적 무리는 거짓말을 한다면서 해적 출신 막내를 흠씬 두들겨 팬다. 영화를 보는 사람이야 고래의 생김새와 생태를 이미 알고 있으니 재미있게 웃어넘기지만, 고래를 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정말 그런 동물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고래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신화와 전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누이트의 여신 세드나 전설에, 구약성경 〈요나서〉에, 신드바드의 모험과 피노키오 이야기에 고래는 중요한 역할로 등장한다. 고래를 섬으로 착각했다는 이야기는 동서양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하고 영민한 동물이 바로 고래였다. 그래서 고래에 생활의 많은 부분을 의존했던 이누이트 부족은 고래 사냥에 나서기 전에 그리 까다로운 정화 의식을 치렀는지도 모른다.
캐나다 밴쿠버 섬과 북서태평양 연안에 거주해온 누차눌쓰Nuu-chah-nulth 부족은 사냥 한 달 전부터 아내와 잠을 자면 부정탄다고 여겼다. ‘눗카Nootka’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부족의 고래 사냥꾼 가운데 한 명이라도 터부를 깨면, 사냥은 실패로 돌아가고 선장이 책임을 졌다. 남편이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아내는 집에서 고래가 오도록 문을 열어두고 조용히 기다렸다. 만약 낯선 사람이 집을 방문하면 사냥은 실패한다고 믿었다. 누차눌쓰 부족의 샤먼은 사당을 짓고 고래 사냥꾼 아내의 배설물을 갖다놓았다. 아내의 배설물이 고래를 해안가로 유인한다고 믿었다.
_147-148쪽 (고래야, 네가 원하는 걸 주었다)
이런 생각을 변화시킨 것은 고래의 좌초, 스트랜딩(죽은 고래가 육지로 떠밀려오는 것)이다. 당시에는 고래의 좌초가 그 자체로 놀라운 자연사적 사건이었다. 16세기 후반까지도 사람들에게 고래는 여전히 신비로운 동물이었으며, 민간 구전에서는 ‘바다의 괴수’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르네상스적 인식 변화와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사람들이 뭍으로 올라온 고래를 관찰하고 해부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제 고래도 한낱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이후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고래는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스페인 비스케이 만을 시작으로 북극해와 북아메리카의 낸터킷까지 세계 곳곳에서 경제적 이득을 위해 ‘바다의 거인’에게 작살을 던지기 시작했다.
살육되고, 감금되던 존재가
다정한 거인으로 재인식되기까지
두려움의 대상, 신화적 존재, 바다의 괴수였던 고래가 한 마리 동물로 추락하고 바스크족이 상업적 목적으로 고래를 잡아들이자 영국, 네덜란드,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들은 모두 포경산업에 뛰어든다. 고래기름과 고기, 경랍 같은 고래 부산물을 얻기 위해서 전 세계 바다가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대왕고래 같은 대형 고래를 잡아들이기 위해 포경선들은 갈수록 크기를 키웠다. 머지않아 포경선은 바다의 공장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잡을 고래가 없어지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다시 작살을 던졌다.
디젤엔진을 단 배가 등장하고 폭약 작살이 발명되면서 고래 개체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엔 어군 탐지기와 소나(잠수함의 음파탐지기), 비행기까지 더해졌다. 이때부터 고래는 발견 대신 수색되었다. 그렇게 20세기 중후반에 접어들자 고래가 잘 잡히지 않았다. 포경선도 하나둘 팔리기 시작했고, 흥청거리던 포경항도 점차 퇴색되어 갔다. 1986년 점점 사라져가는 고래 때문에 포경산업이 시들어갈 즈음, 국제포경위원회는 상업포경을 전면 금지한다. 이로써 15세기 스페인의 바스크족이 본격적으로 개시한 상업포경은 500년 만에 막을 내린다.
무엇이 고래를 구출했을까? 인간들의 현명한 지혜도,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도 아니었다. 그저 부족해진 자원량으로 인해 포획 비용이 상승했기 때문에 작살을 던지지 않은 것뿐이다.
_274쪽(고래의 노래)
그러나 상업포경이 금지된 이후에도 고래에 대한 인간의 착취는 계속되었다. 포경 금지 대상이 아니었던 돌고래와 범고래는 여전히 잡혀 수족관에 갇히고,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고통받았다. 좁은 수조와 냉동 생선, 쇼에 적응해야 했으며 조련사의 지시에 따라 쇼 동작을 배워야만 했다. 그래야 냉동 생선이라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야생의 몸’은 ‘돌고래쇼의 몸’으로 변해갔다.
이렇게 ‘경제적 자원’으로 격하되어 대량으로 살육되고 감금됐던 고래의 현실에 대해 반대 목소리가 커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환경운동가와 과학자, 그리고 미디어 제작자들이 오랫동안 공을 들인 결과다. 과학자가 고래의 행동·생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 미디어는 이를 고도의 정신 작용과 다양한 감정, 그리고 개성과 문화로 번역했다. 환경운동가는 ‘고래도 생명’이라고 외치며 정부, 산업계와 싸웠다. 경제적 자원이던 고래가 ‘다정한 거인’으로 재인식되고 나아가 ‘권리의 주체’로 호명된 것은 이러한 문화적 동력들이 뒷받침해 준 덕분이다.
평화와 환경을 지키는 다정한 거인,
권리의 주체에서 ‘비인간인격체’로
이제 고래라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앓고 있는 그녀가 시끄럽고 자극적인 지하철 소음에서 멀어져 오롯이 고래의 노래에 집중하며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 그리고 그런 우영우를 지켜주듯 지하철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고래의 이미지가 생각나니 말이다.
고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많은 철학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동물을 자의식은 물론, 감정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로 정의했다. 오직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고래도 이런 기계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거울실험으로 논파된다. 오랑우탄, 고릴라, 보노보, 코끼리, 유럽까치와 함께 돌고래도 자의식이 있음을 증명했다. 다시 말해 이 동물들도 인간처럼 감정과 고통을 느끼는 것은 물론 자신을 타자화(他者化)할 수 있는 고도의 정신 작용을 가졌다는 뜻이다.
고래를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할 이유는 무수히 많다. 고래는 이제 평화와 환경을 수호하는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탄소를 포집해 바다에 가라앉히는 ‘기후변화의 해결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른바 ‘고래 펌프’와 ‘고래 컨베이어 벨트’로 불리는 현상으로 각각 심해에서 해수면까지, 극지방에서 적도까지 전 지구적 여행을 통해 지구의 안정적인 탄소순환에 핵심적인 톱니바퀴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인공적으로 탄소를 포집해서 해저에 저장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후공학적인 해결책보다 고래 싱태계를 복원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효과적이다.
이제 고래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인간과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존재, 자의식을 가진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시점이다. 마침 과학자와 환경철학자를 중심으로 이런 존재들을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일부 철학자와 동물권 이론가는 자의식을 소유한 동물 종의 개체를 ‘비인간인격체Nonhuman Person’라 하여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 개념은 ‘휴먼human’과 ‘퍼슨person’을 구별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휴먼이 동물 외양의 물리적 특성을 비교해 정의하는 생물학적 범주라면, 퍼슨은 자의식과 주체성, 사회성을 가지고 자율적인 주체로 기능하는 개체를 말한다. 환경철학자 토머스 화이트는 돌고래가 자의식을 가지고 도덕적 판단을 하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면서 돌고래를 인격체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약하자면 생물학적으로 사람과 다르지만(비인간), 인간만이 독보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으로 여겨졌던 특성(인격체)을 공유하는 비인간인격체라는 것이다.
_399-400쪽(비인간인격체 고래의 권리)
사라진 귀신고래, 바다로 돌아간 제돌이
한국 고래와 포경의 역사를 최초로 담다
이러한 변화에 가장 먼저 화답한 곳은 우리나라다. 제돌이와 춘삼이, 삼팔이 등 제주 연안에서 불법으로 포획되어 돌고래쇼를 하던 남방큰돌고래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우리나라는 ‘인간 이외의 존재들 가운데 생태적 가치가 중요한 대상에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생태법인)를 만들어 돌고래에 적용하려는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2017년 제정된 뉴질랜드의 황거누이강법은 동식물과 강물, 바위 등 강 유역에 법인격을 부여하고, 중앙정부와 마오리족이 각각 지정한 두 명이 법적 후견인을 맡아 강의 권리를 보호하도록 했다. 황거누이 강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강의 소유다 ... 마찬가지로) 남방큰돌고래가 생태법인으로 지정된다면, 해상풍력발전소 공사가 진행되는 등 서식지 훼손이 이뤄질 때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남방큰돌고래가 권리를 가진 권리주체이기 때문이다.
_403-404쪽(비인간인격체 고래의 권리)
이 책은 한국 포경과 고래의 역사 그리고 2010년대 중반 이후 전개된 돌고래 해방운동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책이 담지 않았던 우리나라 고래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았다. 선사시대 포경 장면이 그려진 반구대암각화를 남긴 수수께끼 부족에 대한 이야기, 1945년 해방 이후 재개된 한국 포경의 민족주의적 망탈리테 그리고 동해에서 여전히 진행되는 불법 포경과 제돌이를 비롯한 제주 남방큰돌고래 8마리의 귀향 이야기는 독자의 시선을 끈다.
저자는 이 책을 위해 한국 제주와 일본 다이지, 아이슬란드 후사비크와 흐발피오르, 아일랜드의 딩글, 영국의 런던과 던디, 킹스턴어폰헐, 캐나다 세일리시 해, 미국 뉴잉글랜드의 스텔와겐 뱅크와 올랜도, 낸터킷과 뉴베드포드, 알래스카의 프린스윌리엄 해협, 서호주의 샤크베이와 퍼스, 북극의 카크토비크와 스발바르 제도까지 대학살 시대의 유적과 야생 고래의 삶터, 돌고래가 갇힌 수족관을 20년 가까이 취재했다.
200여 편 이상의 논문과 보고서, 자료 원문을 검토해 고래 생태에 관한 최신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 한편 최근 들어 일본과 이아슬란드의 상업포경 재개 등 요동치고 있는 국제 포경 정치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한때 ‘바다의 괴수’였던 고래는 ‘학살과 착취의 대상’이었다가 이제 ‘다정한 거인’을 거쳐 ‘권리의 주체’로 나아가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 고래는 우리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려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고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우리 앞에 닥쳐 있는 자연의 시련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모두가 《다정한 거인》을 함께 읽고 생각해 봐야 할 이유다.
《다정한 거인》은 그 자체로 고래에 관한 가장 최신의 정보를 충실하면서도 현장감 있게 담아낸 살아있는 생태보고서다. 그리고 신화부터 포경문화, 수족관돌고래, 다시 ‘권리의 주체’로 이어지는 고래와 인간 사이의 오랜 역사를 다룬 역사책이기도 하다. 또 동물과 인간,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반성, 문제의식을 던지는 생생한 취재기로도 읽힌다. 독자는 이 책에서 고래와 인간의 역사와 이를 둘러싼 현안들, 그리고 자연과 인간, 동물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맺기에 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다정한 거인》은 비단 신기한 고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야 할 인류의 미래에 관한 따뜻한 대화이자 성찰이다.
작가정보
환경저널리스트이자 기후변화와동물연구소장. 2001년부터 2023년까지 한겨레신문에서 일했다. 영국 브리스틀대학에서 인간-동물 관계를 공부했고, 기후변화와 인간의 동물 통치 체제에 관심이 많다. 북극과 남극, 적도를 오가며 기후변화로 고통받는 인간과 동물을 기록한 ‘지구 종단 3부작’ 시리즈와 수족관에 갇혀 돌고래쇼를 하던 남방큰돌고래 제돌이를 고향 바다로 돌아가게 한 기사를 인생 최고의 보람으로 여긴다. 《안녕하세요, 비인간동물님들!》 《잘 있어, 생선은 고마웠어》 《고래의 노래》 《북극곰은 걷고 싶다》 《동물권력》 등을 썼다. 《동물권력》으로 2023년 한국출판문화상 교양부문 저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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