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의 상자
2025년 02월 25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02월 1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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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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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20주년을 맞은 정소연의 소설집 《미정의 상자》가 출간되었다. 지난해 먼저 선보인 《앨리스와의 티타임》과 나란히 놓이며 《옆집의 영희 씨》 복간 프로젝트가 완료된 것이다. 10년 전 “소박하지만 위대한 삶의 단면들”을 담아내며 “제법 묵직한 성취”(소설가 배명훈)를 이루었다는 평을 받았던 이 책은 아쉽게도 장기간 절판된 바 있다. 독자들의 꾸준한 복간 요청이 이어지던 이 책이 작가의 신작 단편들과 함께 새 짜임, 새 장정을 갖추어 래빗홀에서 두 권으로 출간되었다. 비교적 초기작이 다수였던 《앨리스와의 티타임》과 달리 이 책에서는 구간 수록작 5편에 신작 9편이 더해져 총 14편이 묶였다.
첫 챕터인 ‘카두케우스 이야기’는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대가 배경인 연작소설들로 이루어져 있다. 먼 거리를 단숨에 건너갈 수 있는 ‘비상점’을 통해 먼 항성계 사이를 건너갈 수 있지만, ‘도약’이라 불리는 이 초광속 비행 기술을 ‘카두케우스’라는 회사가 독점하고 있는 상황을 공유한다. 특히 〈깃발〉, 〈무심〉, 〈돌먼지〉, 〈비 온 뒤〉, 〈집〉은 기존에 책으로 묶인 적 없는 작품들이라 카두케우스 시대에 어떤 일들이 더 있었는지 궁금해했던 독자들에게는 무척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챕터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은 재난 상황을 테마로 한 퀴어소설이 다수 묶였다. 표제작 〈미정의 상자〉와 〈현숙, 지은, 두부〉에서는 공통적으로 시간을 거슬러 삶의 다른 경우의 수를 탐색하는 상자가 등장하여, 극악의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대상을 살리고 싶고, 그래서 최선을 찾고자 시간마저 되돌리고 싶은 절박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환상적인 존재나 고도의 기술 환경이 주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로 우리의 일상 속 익숙하게 미답의 자리에 남아온 문제들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정소연의 특장은 이 책에서도 빛난다. 더하여 여러 작품이 현실적인 상황으로 인해 이별하는 이들을 그리면서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인물들의 의지로 이야기는 항상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렇게 정소연의 소설은 조금 나은 미래를 향한 문틈을 살짝 벌리고 우리에게 손짓한다.
이사 | 깃발 | 한 번의 비행 | 가을바람 | 무심(無心) | 돌먼지 | 비 온 뒤 | 재회 | 집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
처음이 아니기를 | 미정의 상자 | 수진 | 지도 위의 지희에게 | 현숙, 지은, 두부
작가의 말
부모님은 내가 뭘 사든 나무라지 않았다. 친구들한테 몇 번 작별 인사를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쉽다는 말 뒤에 지혜가 운이 좋다거나 우주선을 타보게 되어 좋겠다는 말이 꼭 따라붙어 듣기 싫었다.
p. 26, 〈이사〉 중에서
그의 고향 사랑은 유난스러웠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생명으로 충만한 곳. 그는 나달을 그렇게 묘사했다. 그를 통해 나의 나달은 우주선도 대학도 군대도, 진짜 공장도 동물도 없는 행성이 아니라 그가 있는 곳이 되었다. 아주 잠깐. 나달이 우주선도 대학도 군대도, 진짜 공장도 동물도, 그리고 내 곁의 그도 없는 곳이 되기 전, 아득히 먼 옛날에.
p. 95, 〈가을바람〉 중에서
“좋아했니?”
마침내 그가 물었다.
“괜찮았고?”
“아, 선생님, 지금 너무 ‘선생님’ 같아요.”
소금이 열 살 소녀처럼 웃더니, 뒤의 질문에 먼저 답했다.
“네, 괜찮았어요. 저는.”
그리고 늙은 스승의, 단 한 순간 우주비행사였던 늙은 남자의 눈을 보고 말했다.
“좋아했고요.”
p. 159, 〈돌먼지〉 중에서
아직은 정말 기쁘고 즐거웠던 일을 하나도 말할 수 없네. 밤에만 비가 오는 행성으로 도망쳐서 미안해. 비 온 뒤 아침마다 창밖을 보며 울어서 미안해. 네가 시켰던 많은 약속 중에 아직 단 한 가지밖에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p. 173, 〈비 온 뒤〉 중에서
남희가 어떤 고통을 받고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시꺼멓게 죽어가는 남희의 간이 떠올라 밤잠을 설쳤다. 나는 남희가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꿈을 꾸었다. 남희가 아이를 낳는 꿈을 꾸었다. 아기는 검게 쪼그라든 남희의 시체를 가르고 나와 내게 덤벼들었다. 나는, 남희에게 고백하는 꿈을 꾸었다.
p. 244, 〈처음이 아니기를〉 중에서
미정은 새하얀 오피스텔 천장을 보며 눈을 떴다. 좁은 원룸 여기저기에 잡동사니를 담은 커다란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상자 사이를 피해 다니려니 짜증이 났다. 미정은 인덕션을 보면서 양치질을 하고, 아침을 먹지 않고 출근을 했다. 출근하니 회사에는 유경이 있었다. 미정은 이삿짐 정리를 포기하고, 퇴근 후에 유경과 실컷 놀았다. 오랜만에 자정 넘어서까지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p. 281, 〈미정의 상자〉 중에서
네 사진을 더 많이 찍을걸. 아무 일도 없어도 찍을걸. 기념일이 아니라도, 둘 다 종일 집에서 지냈던 날이라도 사진을 찍을걸. 다른 사람들이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보고 수상히 여길까 봐 걱정하지 말고, 그냥 많이, 많이 찍을걸.
p. 318, 〈지도 위의 지희에게〉 중에서
“왜 날 잡지 않아?
왜 함께 떠나지 않아?
왜 날 사랑해?”
손 놓고도 헤어지지 않는 마음
각별하게 남겨진 당신의 작별 인사
정소연의 소설을 읽다 보면 왠지 모르게 머나먼 미래에도 어떻게든 사람이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작은 믿음이 생긴다. 한 사람의 마음속이 하나의 우주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아도 감각적으로 알게 해주는 작품을 읽었다. (소설가 구병모)
한국 여성 SF는 시공간을 뛰어넘으면서도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기쁨과 슬픔, 고민과 희망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정소연은 그 대표 선수다. 확실히 다른 책에서는 경험한 적 없는 따뜻함이 넘친다. (번역가 사이토 마리코)
2005년 제2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에서 스토리를 맡은 만화 〈우주류〉로, 2006년 제48회 서울대학교 대학문학상 소설 부문에서 〈마산 앞바다〉로 가작을 수상하며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은 정소연의 단편소설이 《앨리스와의 티타임》, 《미정의 상자》 두 권으로 모두 묶여 나왔다.
“조금 미래의 SF”(소설가 배명훈)이라 불리기도 했던 정소연의 소설은 SF의 신비를 충분히 발휘하는 동시에 탁월한 감수성과 섬세한 이야기 구성으로 과학소설을 어렵다고 느껴온 독자들과의 거리를 꾸준히 좁혀왔다. 그가 2010년대의 한국 SF 중흥기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담담한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읽는 이의 마음에 강한 진동을 전해 오는 정소연 소설의 매력은 이번 소설집 《미정의 상자》에서도 충분히 발휘된다.
우주여행 시대,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
함께 퇴근을 시작한 날. 함께 처음 차를 마신 날. 하정이 유나에게 가방을 선물한 날. 가방의 유래를 말해준 날. 소중히 가꾼 작은 박물관 같은 온실을 열어 보여주었던 날. 그 모든 날에 이미, 유나의 이주는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다. 유나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일어날 일이 아니었던 것은, 사랑에 빠진 것밖에 없었다. (〈깃발〉, p. 64)
자신의 꿈과 가족을 위한 선택 사이에서 고민하는 소년의 이야기로 화제가 되었던 단편 〈이사〉를 포함한 ‘카두케우스 이야기’는 세계 설정이 중요한 연작이다. 인류는 원거리 우주를 한순간 이동할 수 있는 일종의 웜홀과 같은 ‘비상점(飛上占)’들을 여러 개 발견하고 이 주변의 행성들을 개발했다. 이 비상점을 통해 ‘도약’하여 다른 항성계로 향할 수 있는 초광속 기술을 독점하고 있는 카두케우스 사. 그들의 유명한 슬로건은 “우주여행은 비매품”이라는 말이다. 효율과 자본의 3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회사의 생리답게 우주선 탑승은 개인의 희망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자신이 사는 지역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제한적이며, 자신의 이동 가치를 입증해야만 우주여행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각 항성계는 농업, 광업, 의학, 물자 운송 등을 맡아 유기적으로 기능하는데, 그러다 보니 지역 간 격차도 극단적이라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각자 바라는 미래를 위해, 옳다고 믿는 신념을 위해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래서 떠나거나 남겨지는 사람들이 우주 곳곳에 흩어져 별처럼 빛난다. 헤어지지만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멈추지 않아서, 이들의 작별 인사는 아프고 또 따뜻하게 계속된다.
무너진 세계, 잃는 사람과 구하는 사람
눈을 뜨고 싶은 것 같았지만, 눈가 주름 사이로 눈물이 조금 흘러나올 뿐, 현숙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지은은 상자의 매끄럽고 차가운 표면에 이마를 대고, 움켜쥔 현숙의 손과 상자에 대고 속삭였다.
“다음에는 실패하지 않을게.” (〈현숙, 지은, 두부〉, p. 338)
‘무너진 세계에서 우리는’은 2020년대 우리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팬데믹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단편들이 다수 묶였다. 하지만 해외에서 감염병에 걸린 친구를 찾으러 가는 〈처음이 아니기를〉은 코로나19 유행 10년 전에 쓰인 작품이고, 사회적 재난이 아닌 개인적 위기 상황에서 클론 산업에 뛰어드는 인물을 다룬 풍자소설 〈수진〉도 포함되어 다양하게 변주되는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다. 더하여 한국의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을 꼬집는 ‘남희(男禧)’와 레즈비언 ‘현아’의 우정을 다룬 〈처음이 아니기를〉을 비롯해 나머지 4편의 단편도 모두 동성 간 사랑을 소재로 삼아 차별과 편견, 소외, 아웃팅 등의 문제를 다루는 퀴어소설들이 모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모두가 함께 재난을 겪었다고 하지만 경험은 모두 달랐고 항상 더 취약한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과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채 위기 상황에 직면한 이들이 끝내 연인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절실함, 혹은 자신의 사랑을 희생해서라도 상대방을 구하려 하는 모습에서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다.
정소연은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결국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천천히, 망설이고 의심하며, 그러나 확실하게 한 걸음씩. 이 믿음을 말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정소연의 인물들은 지독한 상실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어깨를 한번 으쓱하듯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난다. 이별에도 잃지 않는 마음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그것이 자신을 이루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서로의 안녕을 빌며, 앞으로 나아간다.
작가정보
정소연은 서울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과 철학을 전공했고, 2005년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에서 스토리를 맡은 만화 〈우주류〉로 가작을 수상하며 활동을 시작한 이래 소설 창작과 번역을 병행해왔다. 《EPI》 《오늘의 SF》 편집위원,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초대 대표로 일했다. 《팬데믹》 《언니밖에 없네》 등에 작품을 실었고, 지은 책으로 《미지에서 묻고 경계에서 답하다》(공저) 《이사》 《세계의 악당으로부터 나를 구하는 법》 《앨리스와의 티타임》 《미정의 상자》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어둠의 속도》 《루나》 《이름이 무슨 상관이람》 《허공에서 춤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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