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에 빚을 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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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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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128
작가의 말 144
* “란아.”
“어떡해?”
“찾아야지.”
“석이를?”
“응, 석이를.”
불가능할 것 같은 일에 매달리는 것. 출구 없는 불행에 몸을 던지고 보이지 않는 희망에 마음을 내맡기는 것. 그것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12-13쪽
* 그때까지도 우린 전혀 몰랐다. 온종일 배가 침몰하는 과정을 생중계로 보며 처음 경험해보는 끔찍한 무력감을 느끼게 될 줄은. 나아가 배가 끝끝내 믿기지도 않게 침몰한 뒤 수많은 학생들이 다 신 돌아오지 못하게 될 거라고는. 그 한 주 동안 우 리는 간간이 설마, 사실일까, 아닐 거야를 각자 중얼거렸다.
-33쪽
* “얘들아, 누구를 섬긴다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혜란은 한국에 있는 애인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거지.”
“그래? 그것 말고 다른 건 없을까?”
나는 고민 끝에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뭔가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두 손이 떠올라.”
“두 손?”
“그러니까, 너희들이 신을 섬기듯이 말이야.”
-45쪽
* 우리는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참 세상일이라는 게 신기하다고, 전혀 신을 믿지 않을 것만 같던 사람이 신을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석이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믿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고. 죽은 사람이 좋은 곳에 간다고 믿어야만 산 사람이 살 수 있는 거라고. 나는 그 말이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다
-93쪽
* 그 당시 우리는 상실을 다루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누구와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다만, 그냥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만을 꼭 쥔 채로 부디 그 사람의 마음이 크게 다치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절실한 만큼 쉬쉬하기에 바빴다. 훗날의 관계를 위해서는 우리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됐음을 그때는 몰랐다.
-110쪽
* 왜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지우려고 할까. 또 어떤 죽음은 거룩하게 포장되고 어떤 죽음은 조용히 잊힌다. 그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 걸까?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경험했던 그 거대한 상실을 떠올렸다. 엄마의 죽음. 나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갈라지고 쪼개지고 으깨지고 녹아내렸다.
상실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많은 상실을 겪은 채 슬퍼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거고 그것은 나와 관계 맺은 이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112-113쪽
등단 5년차, 앞으로가 가장 기대되는 소설가!
202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예소연은, 서사의 완결성,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등장인물, 주제의 보편성과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의 특수성, 정교한 플롯 등 “소설 속 인물의 뛰어난 형상화와 단편소설의 덕목을 두루 갖추고 있다”(김미월)는 극찬을 받으며 대형 작가의 탄생을 일찍이 예고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사랑과 결함』, 장편소설 『고양이와 사막의 자매들』을 상자하며 〈황금드래곤문학상〉과 〈문지문학상〉을 수상했고, 2025년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 작가로도 선정되는 등 자신만의 확고한 문학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특히나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이질적이기까지 한, “폭력적이고 가혹한”(소유정) 사랑의 세계를 그려낸 『사랑과 결함』은 동시대 독자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예소연을 명실 공히 대세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영원에 빚을 져서』는 세상이 가하는 폭력에 노출되고 때로는 상처 입은 인물 군상을 진솔하게 그려내며 독자들에게 기시감마저 불러일으키는 대세 작가 예소연이 그려내는 또 다른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 작가 예소연
때로는 잊히지 않는 것이 바로 영원!
혜란과 나(동)와 석이는 프놈펜 바울학교로 해외 봉사 프로그램을 함께 떠나며 친구가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셋은 바울학교의 개교기념일을 맞아 모처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중, 한국에서 배가 침몰하는 사건을 보게 된다. “대상 없는 배신감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이 수시로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밀어”(33쪽)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진 셋은 ‘봉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신들의 4개월간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 과정에서 혜란은 그 괴로움을 종교에 심취해 풀고, 석이는 바울학교의 학생 ‘삐썻’과 마음을 나누며 상처를 치유하려 애쓴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각자의 삶을 사느라 서로에게 소홀하던 어느 날, 동이와 혜란은 석이가 실종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석이를 찾기 위해 무작정 캄보디아로 떠난다. 실종의 단서를 찾기 위해 만난 ‘삐섯’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 둘은 석이의 흔적을 찾아 피피섬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열심히 미래를 향해 달려 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단지 과거에 사로잡힌 여정에 불과했음을, 그것을 미래라고 착각해왔을 뿐임을” “다시 말하자면, 내가 이곳에 온 게 아닌, 이곳이 내게 당도하고야 만 것이라는…….”(111쪽) 깨달음을 얻으며 잊었다 생각했던 자신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지 않은 일에는 쉽게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94쪽)이었던 동이와 혜란은 다른 이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서로에게 빚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를 속절없이 무너뜨린 상실의 경험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루된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위무하는 이야기이다.
“슬픔은 저마다의 무게를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무겁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워서 도무지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그런 슬픔은 바다를 압도한다. 그래서 가라앉을 수도 없다. 그것만이 침몰하지 않을 유일한 진실이다. (……) 그러니까 이들의 여행은 되돌릴 수 없는 배를 ‘다시’ 수면 위로 띄우는 재연再演이다. 기억의 머리맡으로 떠밀어 올려 영원토록 가라앉지 않게 언제까지고 되-살려야 할 슬픔의 무게가 그저 무겁다. 이 소설은 잊지 않을 결심이며, 슬픔의 무게를 헤아리는 배려의 윤리학, 그 빚진 마음이다.” (황유지)
상실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극복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공감은 분명 타인과 나를 이어주지만, 그 확장의 범위는 내 시야와 마음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이 소설은 이러한 한계를 문제 삼으며, 우리의 상상력과 공감이 어떻게 ‘나’ 혹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 “영원”에 닿을 수 있는지 묻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공허하고 추상적인 당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내 일과 남의 일, 가까운 것과 먼 것, 현재와 과거의 관성적 구분을 흐리면서 그것들이 결코 구분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 한다. 현재의 사건과 과거의 사건이, 가까운 슬픔과 먼 슬픔이, 개인의 번민과 집단적인 애도가, 자국의 참사와 외국의 참사가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서 베를 짜듯 엮인다.
-이희우, 「작품해설」 중에서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핀 소설〉, 그 쉰네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분기별 출간하는 것으로,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현대문학 × 아티스트 윤석남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깃든 표지 작업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된 독창적인 소설선, 즉 예술 선집이 되었다. 각 소설이 그 작품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예술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소설과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이다.
윤석남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과를 중퇴하고, 프랫 인스티튜트 1년 과정과 아트 스튜던트 리그 오브 뉴욕을 수료했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을 개척했으며, 회화, 설치, 조각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이루었다. 서울, 베니스, 뉴욕, 토리노, 시드니, 상하이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졌으며, 영국 테이트갤러리, 서울 88올림픽공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호주 퀸즈랜드 아트 갤러리, 일본 후쿠오카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중섭미술상〉 〈국무총리상〉 〈김세중 조각상〉 〈이인성 미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국민훈장모란장〉을 수훈했다.
작가정보
작가의 말
『영원에 빚을 져서』는 실종된 친구를 찾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라진 사람의 흔적을 떠나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연루된 존재임을 알게 되는 이야기이죠. 연루되는 일은 불가항력이지만 연루된 모든 존재를 놓치지 않고 톺아보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잠깐이라도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일을 계속해서 해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차창 너머 말간 하늘을 바라볼 때, 새가 아주 높이 날고 있을 때, 앞으로는 강건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다짐을 할 때…… 저는 마음속으로 죽은 사람을 호명합니다. 그래야 산 사람도 살고 죽은 사람도 산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점점 더 희미해지겠죠. 그래도 끝끝내 붙잡고 있어보려고 합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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