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이 이끄는 자리
2025년 03월 06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02월 13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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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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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자본 대신 돌봄이 의료를 이끄는 희망의 풍경들
1장 침상 위의 발
2장 병원이 정부와 같다면
3장 기다리는 힘
덧붙이기 공공 의료의 몇몇 구성 요소들
4장 존재를 새겨넣기
5장 여린 삶, 어린 죽음
6장 집에서의 투쟁
7장 인간 너머의 돌봄
8장 지금 여기 함께의 정치
감사의 말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나는 이주민, 난민, 미등록 체류자, 무국적 아동으로 분류되는 이들을 사회보장제도의 특수한 예외로 파악하기보다는, 보편적 접근이라는 가치의 실질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이자 새로운 형태의 분배 정치를 상상하기 위한 기본형으로 삼고자 하였다. (18쪽)
타인의 삶에 관여해야 한다는 정동적 요구를 감지하였을 때, 역으로 병들고 쇠약해진, 다치고, 죽어가는 구체적 존재들이 생의 지속에 필요한 상호성의 관계를 끌어내고자 할 때, 이에 대한 응답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돌봄이 이끌고 이끌리는 과정이자 결과라는 것, 주고받는 일이 아니라 서로 이끌어내는 일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돌봄은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 제 것처럼 마음대로 가져다 쓰거나,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 혹은 억지로 견디어내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돌봄은 공동 활동이다. (30~31쪽)
지역의 공공 병원은 의료기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종 시련과 빈곤, 추방과 같은 악조건에서도 삶을 가능하게 하는 돌봄의 다른 회로망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병원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은 의료의 틀을 넘어서서,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생겨나는 여타의 층위들, 특히 가족과 종교적 믿음에 관한 서사로 확장된다. (31쪽)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이끌어내기elicitation’라는 개념은 돌봄이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관계 안으로 이끌고 이끌리는 정동적이고 물질적 상태를 통해 생겨난다는 것을 파악하고, 겉보기에는 수동적인 상태가 어떻게 존재와 정치의 근본적인 양상을 구성하는 요소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41쪽)
따라서 이끌어내기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돌봄이 ‘제공자’와 ‘수용자’ 사이의 이원적 관계에 국한되지 않으며, 다양한 관계와 삶의 형태, 제도, 장소, 기술, 힘이 뒤얽힌 폭넓은 집합체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 돌봄은 서로 무언가가 되어가는 과정 즉 상호 생성의 과정이며, 여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준다. (45쪽)
이 책이 공들여 그려내고자 하는 돌봄의 풍경들, 무언가 일어나기를 애써 기다리고, 어리고 미약한 생명을 키우고, 다른 삶을 꿈꾸고, 그리하여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는 모습들은 돌봄의 대상이 생을 내려다보며 통치하는 힘의 산물로서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인간, 비인간 행위자들이 돌보도록 이끄는 힘의 작용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50쪽)
나는 국가, 병원, 의료진, 부모, 이방인, 혼령 등 매우 상이한 행위 주체와 단위들이 돌봄이라는 삶의 지속을 위한 회로망 안에서 서로 연관되는 양상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각 장에서는 이 각기 다른 힘들이 보살피고 다스리는 일상의 장면들을 어떻게 채우고 있는지, 어떻게 문제를 고쳐나가고, 바라고, 적응하고, 급한 대로 헤쳐나가며, 관계를 형성하고 또는 끊는지, 즉 삶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여타의 일들을 어떻게 해나가는지를 조명한다. 이 문화기술지에서 나의 목표는 변화하고 생성하는 돌봄의 잠재력을 포착하는 것이다. (59쪽)
반팻 병원은 국가행정의 한 지역 단위이지만, 다스리고 돌보려는 열망을 기관 내부에 통합함으로써 주어진 기능 이상의 일을 하기도 한다. (…) 위기에 처한 취약한 삶에 대응하는 것, 자원을 최적화하고 아끼는 대신 오히려 돌봄의 대상을 확대하는 것과 같은 일이 외려 정부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를 이행하는 수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68~69쪽)
태국 국민인 르언과 샨 이주민인 피이는 국적과 시민권의 여부도 다르고 처한 상황도 크게 달랐지만, 그저 내쳐지기보다는 이 불완전한 지원의 영역에 어떻게든 한 발이라도 얹겠다는 굳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받아야 하는 수동적 상태라고 하더라도 기다림 속에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필요를 끈질기게 알림으로써 버티어나갔다. 이들이 보여주는 돌봄을 이끌어내는 힘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서 국가의 지원과 사회적 지원이 구체화되는 중심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애씀은 상호 의존이 그저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 분투의 한 형식이라는 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123쪽)
태국에서 의료인이 된다는 건 어쨌거나 자신의 선호와 관계없이 의료인이 필요한 곳에 가서 일해야 하는 제약을 받는 경험에서부터 시작한다. (135쪽)
의료진과 환자 모두 철저하게 타산적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고통을 겪고 다루는 일에서 모든 사람들이 단기간에 더 많은 돈을 버는 일을 유일한 이득으로 여기고 당연하다는 듯이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돈으로 따져볼 때 나만 이득을 보면 그만이라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모르는 체하지 않을 수 있다. (143쪽)
“보험이 있든 없든 간에, 우리는 모두를 똑같이 돌봐야 해요. 만약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지 못한다면 그건 다 국가의 책임이니까요.” 간호사들의 일상 업무 전반에서 이주 여성들이 과연 공공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권리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전한 출산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의무이며, 간호사들은 이러한 이상적인 통치, 즉 돌보며 다스리기를 가능하게 하는 전달자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164쪽)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의료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는 누가 돌봄을 받을 자격이 있는 합당한 대상인가를 정하는 게 아니라 지극히 연약한 타자들을 위해 소속의 공간을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이다. 위중한 신생아를 둘러싸고 관계의 가닥들이 어떻게 모이고 흩어지는지를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의료가 돌봄의 의무와 실천에 이끌릴 때 어떤 힘이 생겨나는지를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188쪽)
모든 인간은 아직 그 누구도 잘 모르는 낯선 타자로 태어난다. 바로 그 낯선 이의 존재감을 이끌어내고 필요를 살피는 일이야말로 환대의 첫 실현이자 돌봄을 구성하는 밑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205쪽)
바로 이 ‘어떻게 돌볼 것인가’의 영역에서부터 낯선 타자들의 삶과 죽음은 의료진의 책임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지극히 의존적인 타자의 즉각적인 필요를 알아차리고 응하려는 사람들의 체화된 실천들이 모여 환대의 순간들이 생겨났다. (207쪽)
이 모든 실망스러움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녹은 이곳들에 끊임없이 도움을 구했다. (…)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녹은 자신을 무시할 수 없게, 사회적 존재로 실재하게 만들었다. 병들고 소외된 이주 여성으로서 녹의 사회적 존재감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녹은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를 놔두지 않았다. (237쪽)
센, 녹, 그리고 펨과 피이는 각기 다른 도전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들 모두 고립된 상태로 남아 있기를 거부했고, 임시적 관계라도 맺기 위해 애쓰는 걸 멈추지 않았다. 자신과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끌어내는 이들의 능력은 취약함이 어떻게 살기 위한 저항과 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250쪽)
센이 그러했듯이 스스로를 보살피고, 녹이 해냈던 것처럼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잊지 못하게 나서고, 또 펨과 피이처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이 모든 일들은 이들이 취약함을 강제하는 틀에 팽팽히 당겨진 줄을 단단히 짜 엮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250쪽)
구조적 취약성을 관통하며 살아온 너이와 톤이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놓지 않으려고 한 것은 선한 삶을 이끌려는 의지였으며, 신령들은 이들의 열망을 공유하고 확인해주는 가장 친밀한 동반자가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너이와 톤에게 수호 신령들은 그 어떤 인간보다 중하다. 그것은 신령이 모든 종류의 재난과 불안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줄 위력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감 그 자체로 이들 부부에게 현재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잠재력을 느끼고 발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289쪽)
이 책에서 나의 목표는 이처럼 평범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강력한 사람들, 돌봄을 이끄는 사람들의 힘을 전면에 드러내고 그리하여 돌봄의 회로를 구성하는 주요 관로와 배선망을 사람들이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제시하는 것이었다. (294~295쪽)
돌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더 강하고 능력 있는 쪽에서 약하고 무능력한 쪽으로,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자원의 흐름에서 받는 쪽에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쓰는 방식이 어떻게 관계의 물길을 트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타자들이 어떻게 서로를 마주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296쪽)
반팻 병원이 보여주는 사회적, 정치적 창발성은 우리에게 돌봄의 의무가 단지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적 관계 내에서 지속적인 협상과 협력을 촉진하고 조직화하는 실용적인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태국 전체의 차원에서 볼 때 반팻 병원의 성장은 지극히 작은 변화에 불과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거점 병원의 성장사와 고유한 철학은 돌봄의 의무가 의료 서비스 제공에서 중심이 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현실적 희망을 제공해준다. (301쪽)
부정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사람이 이미 바로 여기에 우리 가운데 있다는 현실에서부터 출발할 때 시민과 비시민, 국민과 비국민, 적격자와 부적격자, 보험 수혜의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구별이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307~308쪽)
돌보는 힘을 키우는 일이 사회의 변화, 삶의 변화를 위한 기초로 여겨져야 한다. 자신과 타자에 대한 돌봄의 의무는 때로는 매우 무겁지만 이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기보다는 활성화하며, 돌봄의 대상이 되는 일 역시 생명의 성쇠와 삶의 부침을 긍정하고 승인하는 과정으로 인식될 수 있다. 돌봄의 일상적인 성취와 실패에는 크나큰 정치적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다. (308쪽)
제65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작가
『휘말린 날들』 서보경 신작
그저 죽게 내버려두기만 하는 정부/국가 앞에서
나는 이 단단하고 곡진한 돌봄의 수행에 깊이 감응하며,
돌봄으로 공진화하는 우리 모두의 내일을 뜨겁게 꿈꾼다.
-김영옥(노년인권문화 연구자,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저자)
보살피기와 다스리기, 버티며 나아가기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궁금하다면
그의 전작 『휘말린 날들』과 함께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조한혜정(문화인류학자, 연세대 명예교수)
치료비와 보험이 없어도, 시민권과 이름이 없어도
아픈 사람은 누구나 필요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곳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병원의 미래를 경험한 이들
지역의 한 응급실, 구급차에 실려온 환자가 7시간 대기 끝에 결국 의사를 만나지 못하고 사망한다. 아이의 열이 40도를 넘겼지만 근처 소아과는 최근 폐업했고, 다른 곳으로 ‘오픈런’을 해도 진료를 받기까지 6시간이 걸린다. 9000명의 전공의가 병원을 떠나자 한 달 넘게 기다려야 하는 수술이 속출하고 예정되어 있던 수술도 취소된다. 남은 의사들은 과로로 쓰러지고 환자들은 몇 배의 시간을 기다린다. 지금 당장 교통사고를 당한다면 수술할 수 있는 의사가 없을지도 모른다. 국민건강보험 제도를 통해 보편적 건강보장을 달성했고 뛰어난 기술로 해외 환자를 유치하는 ‘의료 선진국’의 현주소다. 지금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전례 없는 붕괴를 겪고 있으며, 의료 대란은 가정이 아니라 이미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파국은 2024년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확대 발표라는 단일한 사건으로 촉발된 것이 아니며, 징후는 오래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의료가 시장 논리에 따라 제공되는 서비스에 가까워진 지금의 방식이 과연 최선인가. 병원과 의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의료인류학자 서보경의 『돌봄이 이끄는 자리』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미래를 현실로 경험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건강권과 의료를 둘러싼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HIV/AIDS 인권운동의 현장에서 함께하며 감염인들의 삶을 기록하여 제65회 한국출판문화상, 2024 ‘한국에서 가장 지혜로운 책’ 대상, 제18회 무지개인권상을 수상하고 2024 국제앰네스티 추천 인권도서로 선정된 『휘말린 날들』의 저자 서보경은 이 책에서 다시 한번 질병과 건강,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를 파고든다. 태국은 아시아 금융 위기의 여파 속에서도 2002년 의료보험 개혁을 단행해 전 국민에게 포괄적인 혜택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특히 가난한 이들의 의료 서비스 접근성을 개선하면서 공공 의료 시스템을 탄탄하게 구축한 국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이곳 태국 북부 치앙마이의 지역 거점 병원을 중심으로 2년간 현장연구를 진행한 저자는 ‘누구나 조건 없이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상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가까이에서 관찰한다. 전작에서 연구 대상과 객관적인 거리를 두기보다는 기꺼이 ‘휘말리는’ 방식을 택한 것처럼 저자는 병원에서 마을로, 환자의 집으로 걸음을 옮기며 치유와 돌봄의 현장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모두를 위한 무상에 가까운 의료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각각의 주체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돌봄을 주고받는지 섬세하게 기록한다. 따라서 이 책의 인물들은 정책 분석서 속의 환자나 의료진, 보호자라기보다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거나 타인의 그러한 요구에 마땅히 응답하는 구체적인 존재로서 조명된다. 저자는 의료가 지금 여기 함께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그 핵심에는 결국 기술과 자본 대신 돌봄이 자리해야 한다는 전제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에서는 타인의 돌봄과 의료적 처치를 필요로 한다. 인간의 근본적 취약성과 의존성으로부터 비롯된 이 이야기들은 외국의 특별한 사례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어줄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 먼저 소개된 이 책에 한국어판 서문을 더하여 이러한 논의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밀착해 살펴볼 수 있도록 했고, 더욱 깊은 이해를 위해 한국과 태국의 의료 시스템을 비교하는 장을 추가했다.
자본이나 기술이 아닌 돌봄이 의료를 이끌 때 벌어지는 일들
치앙마이 시 근교,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 위치한 ‘반팻 병원’에서는 누구도 치료의 자격을 심사받지 않는다. 보험이 없어도, 시민권은커녕 신분을 증명할 서류조차 없어도 누구든 무상에 가까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입원과 수술에 앞서 지불 능력이 되는지 확인받지 않으며, 퇴원 때 병원비가 부족해도 훗날 갚겠다고 약속하는 것만으로 수속이 마무리된다. 설령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에도 병원은 채권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환자의 회복 자체를 성과로 여긴다. 병원 담장을 넘어서도 살리고 보살피는 일은 이어진다. 만성질환자나 첫 출산을 한 산모, 노인 환자처럼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경우에는 퇴원 후에도 간호사들이 집으로 방문해 건강 상태를 살피고 주거 환경을 점검한다. 이것은 이 병원만의 일시적이고도 특별한 실험이 아니다. 태국 전역의 지역 거점 공공 병원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1인당 명목 GDP가 한국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쿠데타가 일어났고 극심한 빈부 격차가 커다란 문제인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시장의 수요-공급 논리 대신 ‘사회의 필요에 따른 공급’을 기초로 한 태국의 의료 철학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태국은 각 지역의 공공 병원을 의료 시스템의 중추로 설정하고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맡기면서 이를 지속 가능한 체계로 유지해왔다. 의료는 개인의 선택과 책임에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필요한 형식과 실천의 방식을 정하고 공적 자원을 통해 제공한다. 의료인의 양성과 교육 단계부터 의료 서비스는 거래 대상이 아닌 사회적 책임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강조되고, 재정의 운용 방식 역시 이에 따라 결정된다. 그 결과 의료 행위의 중심에는 기술과 자본 대신 돌봄의 책무가 놓인다. 의료진은 그저 병원에 고용된 기술 전문가가 아니라 공무원으로서 국가의 책임을 구현하는 대리인을 자임하며 사람들을 보살피고, 공공 병원은 지역사회의 구심점으로 기능하게 된다.
여기서 저자는 돌봄이라는 힘의 흐름을 이해하는 개념으로 ‘이끌어내기’를 제안한다. 돌봄과 의료가 그저 특정 전문가나 기관의 선의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지역사회의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필요한 자원이 스스로에게 도달하도록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이끌고 이끌리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돌봄과 의료를 이해할 때 ‘공급자(의료진)’와 ‘수혜자(환자)’의 이분법은 해체된다. 빈곤과 이주, 성역할에 따른 구조적 불평등에 내몰린 이들은 그저 무기력하게 상황을 수용하는 대신 자신에게 필요한 의료적 조치가 스스로에게 도달하도록 이끌어내는 주체로 떠오른다. 달리 갈 곳이 없는 가난한 환자들은 공공 병원의 응급실과 대기실에서 차례를 끈질기게 기다림으로써 시스템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낸다. 미등록 이주민 임산부는 병원에서 권고하는 산전 검진을 빠짐없이 받으며 자신을 사회적 존재로 실재하게 한다. 태동 시간을 꼼꼼히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곧 태어날 아기의 존재 역시 그 관료제의 시스템에 각인시킨다. 삶을 억누르는 그 모든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붙드는 이들의 노력에 주목할 때, 의료는 거래 관계 속에서 제공되는 상품도 특별히 선한 누군가의 헌신에서 비롯된 자선행위도 아닌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이끌고 이끌리며 엮어내는 돌봄의 그물망 속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보다 총체적인 시각에서 파악된다.
돌봄의 회로망이 확장될 때 열리는 새로운 희망의 풍경
저자가 소개하는 이들은 모두 “주변적이고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타자들”로, 특히 난민과 등록 및 미등록 이주민의 경우 한국 사회가 이제껏 외면해왔던 문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치앙마이는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중요한 국경지대로서 주변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따라 모여든 난민과 미등록 이주민, 출생증명이 없어 국적을 부여받지 못한 소수종족민의 비중이 높은 곳이다. 책에서 등장하는 반팻 병원은 국가와 공공 병원의 도덕적 책임을 우선하여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의 구분을 따지지 않고 이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최전선으로 기능한다. 한국에서는 극히 취약한 상태에 처한 이들이 가장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지금 여기 함께 있는’ 존재들의 존엄한 삶의 조건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 지금 태국의 방식은 이들에게 의료 접근성을 보장하면서도 안정적인 시스템을 유지할 방안을 구체적으로 탐색하는 데 유효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병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환자의 집으로, 마을 공동체로, 나아가 인간 너머의 존재가 관장하는 내세로까지 뻗어나간다. ‘돌봄’은 흔히 아동의 양육이나 노인 혹은 환자의 수발처럼 특정 행위에 한정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저자는 “자신과 타자, 공동체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몸과 마음을 쓰는” 모든 활동으로 그 범위를 확장하여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신생아 환자가 무탈히 이번 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끝까지 보살피는 것, 공덕을 쌓아 이제 막 태어난 아기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육식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의 영혼을 위해 제를 올리며 남은 가족의 안녕을 비는 것 역시 돌봄의 실천으로 제시된다. 주어진 상황에서 끈질기게 관계를 만들고 그로부터 돌봄을 이끌어내 어떻게든 존엄한 삶을 지키려는 이 모든 분투는 깊은 울림을 안긴다.
태국의 의료 시스템도 나름의 한계를 안고 있으며, 저자는 태국을 유토피아로 이상화하거나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할 모범답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료를 상품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조건으로 이해하고 그로부터 출발해 제도를 확립, 적용해나가는 방식은 한국 사회가 마주한 위기를 넘어설 사회적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나 생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누구나 돌봄을 필요로 한다. 가장 위태로운 자리에 서 있는 이들에게까지 가닿는 돌봄이 이끄는 곳은, 결국 희망일 것이다.
작가정보
인류학자. 대전에서 태어나 속리산 깊은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도서관이 매우 훌륭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 캔버라, 치앙마이,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일했으며, 현재는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 다닌다.
이주여성의 출산과 출생 등록 경험에 관한 연구로 미국의료인류학회에서 수여하는 루돌프피르호상을,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돌봄의 미시정치에 대한 논문으로 미국문화인류학회의 컬처럴호라이즌스상을 받았다. 현장에서 함께하며 기록한 한국의 HIV/AIDS 이야기 『휘말린 날들』(2023)로 제65회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부문, 2024 ‘한국에서 가장 지혜로운 책’ 대상, 제18회 무지개인권상 콘텐츠 부문을 수상했고 2024 국제앰네스티 추천 인권도서, 세종도서 교양 부문에 선정되었다.
감염병의 이동성에 대한 국제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생명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인류학의 기반 위에서 새롭게 해명하고자 한다.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실에서 일한 뒤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세상과 나 사이』, 『공감 연습』, 『리커버링』, 『등대지기들』, 『거기 눈을 심어라』, 『숄』, 『자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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