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일록 작전
2025년 02월 25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02월 24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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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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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휴먼 스테인》에 이어 국내 세 번째로 소개되는 필립 로스의 펜/포크너상 수상작 《샤일록 작전》이 비채에서 출간된다. 이야기는 작품 속 ‘필립 로스’가 자신의 사칭범에 대한 소식을 들으며 시작된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인물이 이스라엘에서 정치활동을 편다는 소식을 듣고, 작중 필립 로스는 이스라엘로 떠나 그곳의 정치적 분쟁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샤일록 작전》은 첩보소설의 문법을 빌려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포스트모던 문학실험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고, 당대의 문학계와 유수 언론의 쏟아지는 찬사 속에 필립 로스가 남긴 또 하나의 명작으로 자리매김했다.
킹 데이비드 호텔의 스위트룸 511호에서 나와 통화했던 필립 로스, 절대 나일 수 없는 그 필립 로스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내 이름을 물었을 때 내가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애당초 전화를 하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어. 당황하지 마. 웃기잖아. 모르긴 몰라도, 아마 동명이인일 거야.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예루살렘에서 그자가 내 행세를 하고 있다 해도, 굳이 뭘 어떻게 해보려고 할 필요는 없어.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테니까. 이미 앱터와 아하론이 알아챘잖아. 이스라엘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많으니, 결국 놈은 정체가 들통나서 체포될 거야. 놈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_29쪽
“물론입니다. 홀로코스트 직후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이 그 참혹한 일의 충격에서 회복할 수 있는 유대인 병원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 때 워낙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일을 당했으니, 유대인의 정신과 유대인들 자신이 분노, 굴욕, 슬픔의 유산에 완전히 무릎 꿇었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회복했거든요. 아직 1세기도 지나지 않았는데. 기적, 아니 기적보다 더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유대인의 회복이 기정사실이 되었으니, 우리의 진정한 삶과 진정한 고향, 조상들이 살던 유럽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고향?” 내가 이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퍽이나 진정한 고향이네요.”
“내가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하는 게 아닙니다.” 놈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대다수 유대인은 중세 이후 유럽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 문화라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은 유럽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함께 살던 수 세기 동안 생겨난 거예요.”
_50쪽
그는 삼십 분 동안 일산화탄소를 뭉클뭉클 흘려보내면서 비명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살아 있는 사람들을 들여보내 죽은 자들을 끌어내고 다음 사람들을 위해 방을 치우게 했다. “그 쓰레기들 빨리 치워.”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실려 오던 시절에는 하루에 열 번, 열다섯 번씩 이런 일이 되풀이되었다. 술기운 없이 정신이 맑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항상 활기가 넘쳤다. 기운차고 건강한 청년. 훌륭한 일꾼. 한 번도 아픈 적이 없고, 심지어 술을 마셔도 재빠른 움직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빨라졌다. 쇠파이프로 남자들을 후려치고, 임신한 여자의 배를 칼로 가르고, 눈을 파내고, 채찍질을 하고, 귀에 못을 박았다. 한 번은 송곳으로 누군가의 엉덩이에 구멍을 뚫기도 했다. 그날은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고함을 지를 때는 우크라이나어로. 우크라이나어를 모르는 사람의 머리에는 총알을 박아주었다. 정말 굉장한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겨우 스물두 살의 나이로 그는 그곳의 주인이었다. 아무나 붙잡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채찍이든, 권총이든, 칼이든, 곤봉이든 아무거나 휘두르면서 젊고 건강하고 강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_76쪽
“내겐 아무도 없소. 난 수용소에서 나와 뉴욕으로 갔지. 이스라엘에 나를 바쳤어. 그게 내 자식이오. 아무것도 없이 브루클린에 살면서 일만 했어요. 그렇게 1달러를 벌면 90센트를 이스라엘에 보냈어. 그러다 나이를 먹어 퇴직하면서 내가 갖고 있던 보석상을 팔고 여기로 왔소. 그런데 여기서 사는 동안 매일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어. 폴란드에 있는 우리 유대인들이 생각난다오. 폴란드의 유대인에게도 무시무시한 적이 있기야 하지. 그래도 무시무시한 적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유대인의 영혼을 지킬 수 없는 건 아니야. 그런데 여기 유대인들은 유대인 나라에 사는데도 유대인의 영혼이 없소. 성경 속 일이 또 벌어지고 있어요. 영혼이 없는 이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이 재앙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소. 혹시 성경에 새로운 장이 하나 더 생긴다면, 하느님이 죄를 지은 이스라엘 민족을 파괴하려고 일억 명의 아랍인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거기 실릴 거요.”
_150쪽
완전히 잠에서 깬 나는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나 어둠 속에서 책상 앞의 아치형 창가로 갔다. 저 아래 거리에서 내 방을 계속 감시하는 놈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내 눈에 보인 것은 호텔 쪽의 좁은 거리가 아니라 거리 두 개를 사이에 둔 곳에서 빛나는 가로등 아래에 버스 여러 대가 서 있는 모습이었다. 수백 명의 군인이 각자 어깨에 소총을 메고 버스에 오를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홧발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움직이라는 신호가 떨어지면 그 군인들이 워낙 편안하고 느리게 차례로 걸어가기 때문이었다. 거리 맞은편을 따라 높은 담장이 쭉 뻗어 있고, 이쪽 편에는 한 블록 길이의 석조 구조물 위에 골함석 지붕이 얹어져 있었다. 틀림없이 차고나 창고일 텐데, L자 모양이라 거리가 숨은 막다른 길이 되었다. 버스는 여섯 대. 나는 마지막 군인이 무기를 메고 버스에 오른 뒤, 버스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까지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_298쪽
그들이 나를 어떤 자동차 안에 밀어 넣은 뒤 누군가가 운전석에서 차를 출발시켰다. 두 남자는 내 온몸을 거칠게 툭툭 두드리며 무기가 있는지 수색했다.
“엉뚱한 사람을 붙잡은 거야.” 내가 말했다.
운전석의 남자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잘됐네. 엉뚱한 사람을 잡고 싶었는데.”
“아.” 자욱한 안개 같은 두려움 속에서 내 목소리가 들렸다. “재미있는 경험인가?”
“우리한테?” 운전석 남자가 대꾸했다. “아니면 당신한테?”
“당신들 누구야?” 내가 소리쳤다. “팔레스타인인? 유대인?”
“이런.” 운전석 남자가 말했다. “우리가 당신한테 묻고 싶은 게 바로 그건데.”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이라는 말은 지금 내 정신이 작동하는 과정에 적합한 말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속을 게우기 시작했다. 날 붙잡아 온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나는 중앙시장 바로 뒤편의 무너져가는 동네에 있는 석조건물로 끌려갔다. 전날 조지와 우연히 만난 곳에서 멀지 않고, 앱터가 사는 곳과는 아주 가까웠다.
_440쪽
“내 이름은 필립 로스. 어서 와서 나를 잡아봐.”
허구와 현실을 넘는 필립 로스의 급진적 문학 실험
필립 로스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여러 편 집필했는데, 《샤일록 작전》은 그중 가장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필립 로스’라는 인물을 활용한다. 소설은 작중의 필립 로스가 기이한 소식을 들으며 시작된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자신을 사칭하며 돌아다닌다는 것. 사칭범은 예루살렘의 전범 재판을 방청하고, 유력 정치인을 만나 정치적 주장을 공표한다. ‘유대인은 유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른바 ‘디아스포리즘’을 주창하며 이스라엘 우파 정치인들의 심기를 거스르기도 한다. 소식을 들은 진짜 필립 로스는 사칭범의 연락처를 찾아내 전화를 거는데, 사칭범은 뻔뻔하게도 그 순간에도 스스로를 ‘필립 로스’라고 소개하며 각종 파격적 발언을 이어간다.
결국 진짜 필립 로스는 이스라엘로 가서 사칭범을 대면하기로 한다. 예루살렘에서는 나치 집권기의 수용소 간수로 의심받는 인물의 재판이 한창이고, 팔레스타인인의 봉기는 점차 격화되고 있다. 필립 로스는 이스라엘에 있는 다양한 인물과 만난다. 필립 로스의 친척 ‘앱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겪은 폭력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점령지 라말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팔레스타인 출신 ‘조지’는 이스라엘 압제에 관해 열변을 토하고,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유대인 노인 ‘스마일스버거’는 이제 유대인이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며 ‘성경에 새로운 장이 하나 더 생긴다면, 하느님이 죄를 지은 이스라엘 민족을 파괴하려고 일억 명의 아랍인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거기 실릴 것’이라고 말한다. 필립 로스를 사칭하는 수수께끼의 인물은 스스로 반유대주의와 싸우는 투사라고 한다. 그렇게 예루살렘을 떠돌던 중, 필립 로스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그 이면의 첩보작전에 휘말리게 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정면으로 다룬
필립 로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장편소설
유대인 정체성은 필립 로스가 천착해온 주제였다.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성장한 필립 로스는 자전적 작품을 다수 집필했으나, 자신이 ‘유대인 작가’로 한정되기를 경계하며 ‘유대인으로서의 경험을 한 미국 작가’로 이해되기를 바랐다. 유대인과 유대인 사회에 관한 작품을 쓸 때도 그 주제에 매몰되지 않고 입체적 이야기를 펼쳤다. 1969년 작품 《포트노이의 불평》에서는 성적 죄의식에 얼룩진 미국 유대인을 풍자하면서 ‘욕망과 죄악, 자유와 억제’라는 보편적 주제로 다가갔다. 《유령작가》에서는 ‘만약 안네 프랑크가 살아남았다면?’이라는 도발적 상상력으로 ‘안네 프랑크’라는 상징을 한 명의 인간으로 되살려, 유대인에게 덧씌워진 희생자 이미지를 해체했다. 즉 필립 로스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이야기를 출발하면서도 역사가 인간 개개인에 미치는 영향력이라는 보편적 고민거리를 파고들었다.
필립 로스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 정면으로 다룬 최초이자 마지막 소설인 《샤일록 작전》은 더욱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유대인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억압받은 민족 혹은 소수자는 어떤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가. 작중 필립 로스는 사칭범과 격렬한 대화를 나누는데, 분열된 자아가 대화를 나누는 듯한 이 장면은 유대인의 복잡한 정체성에 관한 심도 있는 탐구처럼 보인다. 분쟁 지역을 떠돌며 다양한 입장과 이해관계에 놓인 당대 인물들, 심지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개입하는 정보기관 요원과 나누는 대화는 흡사 현실 정치에 관한 현대 플라톤의 《대화》를 연상시킨다. 《샤일록 작전》은 이처럼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가면서, 특정한 민족 혹은 소수자 집단이 항상 피해자이거나 가해자일 수 없는 세계의 복잡성을 올올이 드러낸다.
포스트모던 문학의 정점이자 생생한 역사적 증언
오늘의 세계적 갈등을 직시하는 필립 로스의 통찰
《샤일록 작전》은 작중의 필립 로스가 이스라엘에서 겪는 여러 사건을 서술하는데,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서두에서 화자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썼음을 밝히며 사건의 주요 관계자들을 위해 몇몇 이름은 실명과 다르게 바꾸었다고 한다. 화자는 작중에서 첩보작전에 가담하게 된 경험을 《샤일록 작전》이라는 책으로 펴내려 하는데, 정보기관 관계자에게서 ‘이곳에서 겪은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 책으로 쓰려거든 일부 내용을 지우고 소설의 형태로 발표하라’는 협박을 받는다. 따라서 《샤일록 작전》이라는 소설은 작가가 전부 실제로 겪은 일일 수도, 혹은 전부 허구일 수도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게 된다. 현실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지움으로써 《샤일록 작전》은 소설 형식을 뛰어넘는 포스트모던 문학으로서의 매력을 지닌다.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샤일록 작전》은 지금 읽기에 오히려 시기적절하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더 격화되었다. 집권 전부터 반전시위 진압을 보며 ‘아름다운 광경이었다’라며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대를 미국에서 추방하자’라는 등 극단적 발언을 쏟아냈던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가자지구를 미국이 점령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하게 밝혔다. 역사의 폭력은 계속되고 피해자와 가해자는 수시로 뒤바뀐다. 필립 로스는 허구와 현실, 개인과 역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세계의 복잡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정치적 현실이라는 발톱이 개인에게 얼마나 깊은 흉터를 남기는가를 탐구했다. 《샤일록 작전》에서 제시하는 질문들, 즉 역사와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고민은 오늘날 갈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준다. 1993년 현지 출간되어 이듬해 펜/포크너상을 수상한 《샤일록 작전》은 삼십 년이 더 흐른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시대를 아우르는 불후의 문학 작품으로서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길 것이다.
작가정보

Philip Roth
1933년 3월 19일 미국 뉴저지 뉴어크에서 이주민 2세대 부모 베스와 헤르만 가정의 둘째 자녀로 태어났다. 향후 자신의 글에서 수차례 언급한 유대인 공동체 위쿠아익에서 자랐으며 1950년 위쿠아익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버크넬 대학교에 진학, 시카고 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9년에 발표한 첫 번째 소설 《굿바이, 콜럼버스》로 이듬해 전미도서상을 수상하여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69년에 출간한 《포트노이의 불평》으로 비평적, 상업적 성취를 높이 이뤄내 세계적 명성을 획득했다. 자신의 이름을 본뜬 가상의 화자 ‘필립 로스’를 내세워 20세기와 21세기 미국 생활상을 탐구하는 작품과 ‘네이선 주커먼’의 일생을 그린 작품들을 포함하여 31권의 책을 저술했다.
문학계에 기여한 업적과 공로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전미도서 비평가협회상과 전미도서상을 각각 두 번, 퓰리처상과 인터내셔널 맨부커상, 백악관에서 수여하는 국가인문학훈장과 미국문학예술아카데미 최고 권위의 상인 골드 메달 등을 수상했다.
필립 로스는 일흔이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집필을 계속하다가 2012년 돌연 절필을 선언했고, 2018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번역 김승욱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 패거리》 《킹덤》 《고양이에 대하여》 《푸줏간 소년》 《진주》 《완전한 구원》 《네타냐후》 《카탈로니아 찬가》 《들끓는 꿈의 바다》 《스토너》 《19호실로 가다》 《동물농장》 《듄》 등 다수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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