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
2025년 01월 30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12월 26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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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문턱에서 ─ 37
숲과 밀밭 ─ 41
튀르키예 멧비둘기 ─ 49
못, 갈대, 거품 ─ 53
보이지 않는 새들 ─ 67
5월의 풀밭 ─ 75
뱀, 산문 ─ 79
저녁 ─ 91
같은 장소, 다른 순간 ─ 97
두 빛 ─ 101
“꽃들은 아름답기만 해도……” ─ 107
“상들이 그토록 단순하고, 그토록 성스러워……” ─ 127
잠시 갠 하늘 ─ 147
옮긴이의 말 ─ 165
따라서 여기서 겨울이 찬양하는 힘은 굉음과 함께 신속하게 승리하는 힘이 아니다. 깃발과 트럼펫과 깃털 장식과 전리품과 함께 들이닥쳐 쓸어버리고 밟아버려, 위에서 승리하는 힘이 아니다. 수갱과 회양목 색을 띠고, 겸손과 침묵으로, 밑에서, 인내하고 가만히 집중하는 힘이다. 그것은 두터운 과거이다. 짙은 어둠, 기억에도 없는 아득한 옛날이다. 그것은 석조 기념비 같다. 압도하기 위해 높이 세워진 게 아니라 아래로 내려온, 기리기 위해 몸을 숙여야 하는 넓고 깊은 반석(그리고 올라가지 않고, 땅에 붙은, 그래서 ‘토관土冠 ’이라는 이름이 붙은 넝쿨).
_14쪽
정말 살아 있는 진실은 도식으로 축소될 수 없다. 도식은 여권일 뿐이니, 어떤 나라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여권이 필요하지만, 그 나라를 제대로 발견하는 일은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건대 결국, 핵심이 되는 본질적인 것은, 어떤 우회를 통해 알게 된다. 그러니까 약간 비스듬하게, 거의 달아나듯, 피하듯. 아니, 이 핵심이 되는 본질적인 것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항상 달아나는 것, 피하는 것일 수 있다. 누가 알겠는가, 심지어 죽음을 피해 달아나는 것인지도.
_23~24쪽
여명이란 다른 게 아니다, 채비하는 자, 여전히 순수하게, 불타오를 채비를 하는 자. 여명은 이렇게 말하는 자이니. “조금만 기다려줘요, 나 불타오를 거예요.” 어떤 큰불의 싹.
그러나 여명은 불이 멀리서만 닿을 수 있는 것. 거리나 시간, 추억에 의해 불에서 떨어져 있는 것. 열기와 거리의 혼합, 끝나지 않고 우리 안에 흐를지 모를 사랑의 기억.
_51쪽
걷는다, 다가간다, 멈춘다. 여전히 아무도 없다. 숲의 문을 여는 이가 없다. 모두 살기를 멈춘 걸까? 움직이지 않는 갈대는 하나도 없다. 재빠른 속삭임이, 땅보다 약간 높은 데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간다. 새들의 흩어지는 소리. 적조해 짐작할 뿐인. 하늘과 그 반사광 사이. 거의 부동의 공간밖에 없다. 이 속삭임 한가운데서, 영원한.
_81쪽
나는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그것은 우선 그리스인들에게는 질서 및 정연을 뜻했다. 이어 세상을 뜻하다 여성들의 장신구라는 의미도 갖게 된다. 시의 원천은 바로 섬광 속에서, 때론 천천히 배어드는 과정을 통해 이 세 가지 의미가 동시에 발생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 저열한 것만큼이나 틀림없이 존재하는(슬프게도 저열한 것이 더 가시적이고 더 격렬하지만) 아름다움, 그 정연한 세계가 솟구친다. 지독한 의심을 거쳐, 결국은 시인들이 다시 돌아오고 마는 이 특이한 미끼, 함정.
_111쪽
자코테의 글은 자연이라는 주제를 전면적으로 다룬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유럽 작가들이 전쟁의 참혹함을 그리며 인간 조건에 대해 회의했던 것을 고려했을 때, 1925년에 태어나 전쟁 직후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이 주로 자연을 그렸다는 사실은 다소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자코테에게 자연의 ‘풍경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피난처, 혹은 현실을 가리기 위한 공상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과 비참함만큼이나 실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 삶의 근본적인 조건이었다. 그렇기에 20세기를 관통한 시인에게 자연은 ‘단지 아름다운’ 공간 이상의 것이었으며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수년 전부터, 나는 내 체류지이기도 했던 이 풍경들 속으로 부단히 되돌아왔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세상을 피해, 아니 고통을 피해 이런 피난처를 찾는다고 비난할까봐 두렵다. 인간들과 그들의 (기쁨보다 훨씬 눈에 잘 보이고, 집요한) 아픔이 내 눈에 그렇게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할까봐 두렵다. 그렇지만, 이 글을 잘 읽어보면, 이러한 비난이 거의 다 반박됨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글은 (비록 그 파편에 불과할지라도) 실재만을, 인간이라면 다 포착할 수 있는 것(마을 속으로 들어가거나, 길을 우회하거나, 지붕 너머를 보거나)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간에게 인간의 비참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큼은 유용할지 모른다. 비참함을 벗어날 출구가 없다고 설득하는 것보다, 아니면 거기서 눈을 돌려 비현실적인 것에만 현혹되게 하는 것(신문이나 최근의 많은 책이 바로 이 상반된 유혹, 그러나 똑같이 위험한 유혹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보다 차라리 이게 훨씬 나을지 모른다.(9~10쪽)
*
생생한 자연 앞에서 자코테는 가능한 가장 정확한 표현을 찾는다.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느끼는 기쁨과 서정을 감동적으로 그리면서도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가리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 덕에 자코테는 대상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는 동시에 과도한 묘사에 탐닉하지도 않으며 정확한 균형을 통해 자신만의 미학을 완성한다.
요컨대 실재하는 자연 대상을 포착한 자코테는 그것을 글로써 이미지화하는 동시에 그 결과로서 이미지 자체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드러난다.
상은 실재를 감춘다. 시선을 흩어지게 한다.(68쪽)
단어들은 그것을 포착하지 못한다. 도리어 거기서 멀어지거나 그것을 변질시킨다. 상들은 때론 벽의 한 면만을 밝게 비춘 채 나머지를 어둡게 놔두기도 한다.(71쪽)
즉, 실재하는 대상에 비교했을 때 이미지는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 “사실에 가까스로 부합”하는 이미지는 대상을 대체할 수 없다. 이미지는 오직 살아 있는 대상에 다가가는, 다가가게 해주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그 결과 자코테의 글에는 직전의 묘사를 취소하고 수정하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이미지를 바로 글로 옮기지 않으려는 시인의 신중한 태도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절제와 묵시의 미학”으로 불리는 이러한 접근을 통해 시인은 살아 숨쉬는 대상에 고스란히 빛을 비춘다. 그의 글은 언제나 ‘거의 다다른’ 상태에 머물 뿐 사물 자체를 대체하지 않고 우리를 자연의 아름다움에 이르는 문턱까지 안내한다.
*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은 그 제목부터 화두를 던진다. 무엇이 부재하는가? 부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풍경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표제작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자 자코테 스스로가 자신의 시 창작의 과정을 그 토대에서부터 되짚은 시적 산문, 혹은 산문으로 쓰인 메타시이다. 시인은 우선 겨울 풍경을 환기한다. 시인이 본 겨울 풍경은 모든 화려한 외양(꽃, 초록 등)을 벗고 “잿빛과 음영으로 덮여” 있다. 그것은 곧 “은밀함”을, “죽음”을 상기시킨다. 종국에 이 풍경은 “두터운 과거” “짙은 어둠, 기억에도 없는 아득한 옛날”을 환기한다. 즉, 겨울 풍경에 부재하는 것들은 과거를 불러일으키는 상관물로 전환된다.
이때 시인은 그 과거의 요체로서 ‘천국’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시인은 이 ‘천국’이 기독교적 개념과는 상관없는 것임을 밝힌다. 그는 이 인상을 “고양, 완벽, 빛”과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것, 더 나아가 “차분해지고, 마음이 놓이고,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혹은 살아봤자 헛것이라는 불안감이” 덜해지는 시공간과 연결 짓는다. 즉, 많은 것이 부재하는 풍경은 도리어 “태곳적의 신성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안정적이며 기원적인 공간으로 인식된다.
‘천국’을 환기하며 기독교적 개념으로의 환원을 거부했듯 자코테는 이때 줄곧 어떠한 종교나 도덕 체계로 자신의 인상을 제한하여 해석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는 일차적으로 이미지(관념)로 실재하는 대상을 대체하길 거부하는 그의 미학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현대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즉, 그에게 현대는 기원을 느낄 수 있는 신성이 존재한다는 객관적인 “신적 표식”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 탈종교화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으로서 자코테에게 이러한 부재와 단절은 도리어 시적인 가능성으로 탈바꿈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되어 그것을 거둬들이고, 새롭게 다시 눈에 보이도록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신성이 그곳에서 그토록 확고부동하게, 순수하게 하지만 소리도 없이, 번득이는 빛도 없이, 증거도 없이, 그저 흩어진 것들로 말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신적 표식이 더이상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33쪽)
시인에게 많은 것이 부재하는 겨울 풍경은 어렴풋하게나마 기원적 공간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러한 인식을 ‘정당화할’ 신적 표식이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시인은 자신이 기적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던, 하지만 너무나 까마득하여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형상들을 자신의 언어로 지금 이곳에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인의 언어를 통해 이 형상들은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자코테에게 시는 단순히 기원에 대한 경험을 담은 사후 기록이 아니라 그 기원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능동적이고 동시적인 창조 동인으로 작동한다. 형상이 부재하는 풍경은 시를 통해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이 된다.
*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은 다양한 성격의 시적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턱에서」 「튀르키예 멧비둘기」 같은 작품은 그 자체로 산문시적인 성격을 보이는가 하면 표제작을 포함하여 「못, 갈대, 거품」 같은 작품은 시가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하기에 논증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전자는 “시의 싹”, 후자는 “시-담론poème-discours”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때 discours은 담론이라는 뜻을 가지기 이전에 어원적으로 ‘종잡을 수 없이 흩어지는 말’을 뜻한다는 점에서 선형적이지 않고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자코테의 문체를 잘 반영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문체는 다시 ‘빛의 시인’으로 불리는 자코테가 포착하고자 하는 빛의 성격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 높이에서 우리에게 도달할 빛은 잠시 갠 빛, 흩어져 이리저리 일렁이는 빛, 어쩌다 드리운 섬광 같은 빛이지, 우리가 꿈꾸는 지속성을 띤 빛이 아니다.”(162쪽))
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산문 이외에 자코테는 렘프란트와 클로드 로랭의 그림을 비교하며 분석하거나(「두 빛」), 독일의 대표적인 두 시인 횔덜린과 릴케에 대해 이야기한다(「“상들이 그토록 단순하고, 그토록 성스러워……”」 「잠시 갠 하늘」). 이는 비평가와 번역가로서의 자코테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특히 자코테는 횔덜린의 프랑스어 플레야드 전집 출간에 역자로서, 최종 편집 책임자로서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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