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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

에디토리얼

2025년 01월 21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9월 23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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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23.46MB)
ISBN 9791190254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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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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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의 초석을 놓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에르빈 슈뢰딩거
물리학, 철학, 역사를 아우르는 명강연의 한국어 초역
추천사 - 장회익
서문 - 로저 펜로즈

1부 자연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1장 왜 고대 사상으로 돌아가는가
2장 이성과 감각의 경쟁
3장 피타고라스학파
4장 이오니아의 계몽
5장 크세노파네스의 종교,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
6장 원자론자들
7장 과학적 세계관의 특수성
◦ 참고문헌

2부 과학과 인문주의
◦ 서문 143
삶에 대한 과학의 정신적 의미
과학의 진정한 의미를 말살하는 과학의 성취
물질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일어난 근본 변화
근본 개념은 실체가 아니라 형상
우리가 만든 ‘모형’의 본질
연속적인 서술과 인과성
연속체의 복잡성
임시변통으로 만들어낸 파동역학
주체와 대상 사이의 장벽이 붕괴됐다는 주장
원자 혹은 양자-연속체의 복잡성을 피하기 위한 오래된 주문
물리적인 미결정성으로 자유의지에 기회가 생길까?
닐스 보어가 말하는 예측의 방해물
◦ 참고문헌

옮긴이 해제

내가 보기에 지금 관념의 역사에 연관된 강한 회고적 성향을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하는 두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류가 대체로 지성적이고 감성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의 모든 기초과학 분야가 엄청나게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초과학은 기초과학에서 파생하여 고도로 발달한 분야들, 예를 들면 공학, 응용화학(핵화학을 포함한), 의료 기법 및 외과 처치술에 전례 없이 완전히 포위된 상태입니다. _22쪽

전체적으로 보아 근대 기초과학의 현재 위기는 가장 이른 시기의 지층으로 내려가 기초과학의 토대를 고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 사상으로 돌아가 끈기 있게 탐구하도록 독려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 짚은 바와 같이, 매몰된 지혜의 발굴뿐 아니라 지혜의 근원에 자리 잡은 뿌리 깊은 오류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근원에서는 이를 알아보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_38쪽

우리는 위대한 원자론자인 데모크리토스를 나중에 다시 다룰 것입니다. 지금은 데모크리토스가 물질적인 세계관에 이끌렸고 우리 시대의 여느 물리학자만큼이나 그것을 확고히 믿었다는 것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물질적 세계관에 따르면,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아주 작은 입자가 빈 공간 안에서 일직선으로 움직이다가 충돌하고 튕기는 등의 운동을 하면서 물질세계에서 관찰되는 무수한 다양성을 빚어냅니다.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현상이 순수하게 기하학적인 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의 믿음은 옳았습니다. _54쪽

처음에 언급했던 보편 관념, 즉 모든 것 뒤에는 숫자가 있다는 관념으로 잠시 돌아가보겠습니다. 이 관념은 명백히, 진동하는 현의 길이에 대한 음향학적 발견에서 비롯했다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공정을 기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논리적 전개이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장소에서 수학과 기하학의 최초의 위대한 발견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실제의 혹은 상상의 물질적 대상들에 적용되었다는 것입니다. _62~3쪽

아낙시메네스는 추상적인 환상에 빠져들지 않았고, 자신의 이론을 구체적인 사실들에 적용하려 했습니다. 이는 그가 몇몇 사례에서 획득한 놀랍도록 정확한 통찰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우박과 눈의 차이와 관련해(둘 다 고체 상태의 물, 즉 얼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우박은 구름에서 떨어지는 물(즉 빗방울)이 얼어서 형성되는 반면 눈은 수분이 많은 구름 자체가 고체 상태가 되면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상학 교과서에도 이와 거의 비슷하게 쓰여 있을 것입니다. _91쪽

원자론은 긴 역사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는 이 임무, 즉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물체를 사고할 수 있게 하는 일을 수행해 왔습니다. 한 조각의 물질이 우리의 사고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그러나 유한한 수의 구성 성분으로 분해됩니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해당 구성 성분들을 셀 수 있지만, 직선 1센티미터를 이루는 점들이 몇 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몇 개인지 머릿속으로는 셀 수 있습니다. 수소와 염소가 결합해 염산을 만들 때, 우리는 두 종류의 원자들로 짝을 짓고 각 쌍이 새로운 작은 물체, 즉 분자 화합물을 구성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_124쪽

과학적 세계상은 우리로 하여금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일종의 기계적인 시계 장치로 상상하게 만들죠. 이런 장치는 과학이 아는 모든 것에 대해 마찬가지 방식으로 계속 가동될 것이며, 이 장치와 연결되는 의식, 의지, 노력, 고통과 기쁨과, 책임 따위는 없습니다. 실제로는 이런 것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당황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외부 세계에 대한 상을 구성하려고 우리가 자신의 인격을 도려내고 제거하여 매우 단순화하는 장치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인격)은 사라져버렸고, 증발해버렸고, 불필요해 보이게 되었습니다. _136~7쪽

나는 어떤 환경 속에서 태어납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내가 누군지 나는 모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상황과 동일한 나의 상황입니다. 누구나 항상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라는 사실이 내게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 는 우리의 강렬한 의문, 이 의문에 대해 우리 스스로 관찰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환경이 전부입니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우리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고 싶어 합니다. 이런 목표를 이루는 수단 이 과학, 배움, 지식이고, 인간의 모든 정신적인 노력의 진정한 원천입니다. _149쪽

연속적인 범위라는 개념은, 우리 시대의 수학자들에게 아주 익숙하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것이고 우리가 실제로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추정한 것입니다. 연속적인 범위, 예를 들어 0과 1 사이에 있는 모든 점에 대해 어떤 물리적인 양-온도, 밀도, 퍼텐셜, 장의 세기, 혹은 뭐든지 간에-의 정확한 값을 정말로 지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과도한 추정일 뿐입니다. _179쪽

고대 원자론자들은 어떻게 물질에 대한 원자론을 수립하게 됐을까요? 이는 이제 역사적인 관심 이상의 의미를 띤 질문이 되었고, 인식론과 연관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때로 다음과 같은 형태로-대단히 놀랍다는 느낌으로-제기됩니다. 이런 사상가들은 물리 법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고, 이와 관련한 실험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는데, 어떻게 그들은 물체들의 조성에 대한 올바른 이론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요? _207~8쪽

양자역학의 초석을 놓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에르빈 슈뢰딩거
물리학, 철학, 역사를 아우르는 명강연의 한국어 초역

『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이하 『강의』)는 슈뢰딩거의 전설적인 시리즈 강연들 중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두 강연의 전문을 완역한 책이다. 「자연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과학과 인문주의」는 이뤄진 후 각각 1954년과 1951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에디토리얼에서 펴내는 한국어판은 1996년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가 저명한 수학자이자 블랙홀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로저 펜로즈의 서문을 붙여 합본으로 출간한 판본을 번역했다.


명강연자가 남긴 과학 고전

에르빈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시대를 열어젖힌 이론물리학자다. 1926년 ‘슈뢰딩거 방정식’을 포함한 논문을 비롯해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파동역학을 정식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1933)을 받았다.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대중 과학서로 널리 읽힌 그의 책은 양자역학이나 일반 물리학과는 거리가 멀다. 세계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오랫동안 과학 고전으로 사랑받은 『생명이란 무엇인가』(1944)가 대표적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근원을 궁구하는 물리학자의 태도도 엿볼 수 있지만 아무튼 그 책은 생명과 유전 현상을 다루며, 살아 있는 세포의 핵심을 “비주기적 결정”(aperiodic crystal)으로 상정하고 그 구조를 물리학적으로 추론하면서 생명 현상의 특성과 유전물질에 관해 독특한 설명을 제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후, 이 책의 내용 중 명백한 오류들이 지적되었지만 강연과 출판이 그 전에 이뤄졌음을 감안해야 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활자화되어 호평을 얻고 여러 언어로 번역된 슈뢰딩거 책들은 강연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자연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과학과 인문주의」

『강의』에 수록된 두 편의 강연 중 「자연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하 「철학자들」)은 1948년5월24, 26, 28, 31일 런던 유니버시티칼리지에서 진행된 네 차례의 대중 강연이 토대가 되었으며, 책으로 출간된 해는 1954년이다. 「과학과 인문주의」는1950년2월 더블린고등연구원에서 4회에 걸쳐 진행된 시리즈 강연 ‘인문주의의 구성 요소로서의 과학’의 출판본이다.

슈뢰딩거는 「철학자들」에서 과학적 세계관의 근본적인 특성을 도출하고자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과 과학이라는 사고체계의 특수성과 연관된 몇몇 학파의 학설을 조사한다. 과학(물리학)에서 그러한 역사적 연구가 필요한 이유는 기초과학이 당면한 위기의 근원이 고대의 철학과 과학에 닿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슈뢰딩거는 당시에 유럽 학술계에 형성된 이러한 회고적 연구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물리학자의 시각에서 포착해낸 포괄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과학과 인문주의」도 「철학자들」의 기본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그런 바탕에서 고대의 자연철학 이래 수천 년간 물리학이 다뤄 온 ‘물질’이란 개념의 기본 특성을 내용을 설명하고, 그 개념에 내포된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논제들의 난점과 모순 등을 자세히 다룬다. 2부의 한 절에서는 자신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파동방정식을 ‘임시변통’의 산물이라고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다.


과학은 그리스인의 발명품이다

슈뢰딩거가 여러 고전학자의 주장과 다양한 문헌을 검토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들을 가져와보자.

근대과학을 주조한 사상가들이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음을 […] 고대 과학과 철학을 진심으로 되살리고 계승했습니다. _37쪽

다음 구절은 존 버넷(John Burnet)의 『고대 그리스 철학(Early Greek Philosophy)』의 서문에서 가져왔습니다. “… 과학은 ‘그리스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_40쪽

원자론을 근대과학에 도입한 가상디와 데카르트의 삶과 글을 보면, 우리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습 니다. 그들은 원자론을 도입하면서, 자신들이 열심히 공부했던 고대 철학자들의 이론을 (스스로) 이어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점은, 고대 이론의 모든 기본 특성들이 대단히 강화되고 폭넓게 정교해져서, 그러나 변하지 않은 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현대 이론에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_118쪽

“과학은 그리스인들의 발명품이다.” 과학은 그리스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벗어나서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 곰페르츠(나는 그를 아주 많이 인용했습니다)는 우리의 현대적인 사고방식 전체가 그리스인들의 사고에 기반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의 사고는 특별하고, 수세기에 걸쳐 역사적으로 자라왔으며,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연에 대한 사고방식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거의 저항할 수 없는 마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특수성에 대해 인식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_128쪽

슈뢰딩거는 근대과학, 특히 물리학은 고대 과학과 철학의 직계 후손이란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논점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는 데 있지 않다. 그가 신중하게 선택한 고전학자들의 견해에 드러나 있듯 “그리스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 사고하는 것”,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연에 대한 사고방식으로 가능한 것”이라는 지적에 동의하며 그리하여 그것이 물리학 이론 안에 어떤 방식으로 흔적과 영향을 남겼는지를 밝히는 데로 향한다.


원자 혹은 입자 그리고 연속체라는 개념

슈뢰딩거가 말하는 기초과학의 위기는 물리학의 위기와 동의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양자역학도 완벽하지 않았으며 그 상황은 지금까지도 진행형이다. (슈뢰딩거는 1961년에 타계하여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하려는 여러 이론적 시도를 보지 못했다. 가령 로저 펜로즈가 서문에서 언급하는 끈이론이 196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 통일장, 대통일장, 만물이론, 최종이론 등 여러 제목으로 물질의 근원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이론 후보가 나왔지만 실험적으로 입증되지 않고 있다.) 슈뢰딩거는 파동방정식을 고안하여 양자역학의 이론적 기틀을 놓는 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바로 그 1920년대는 1900년 막스 플랑크가 흑체복사로 방출된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나타난다는 광양자 가설을 주창하며 시작된 양자역학의 중심 이론이 결정되려던 시기였다. 경합을 벌이던 양 진영의 한편에는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있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은 1927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5차 솔베이 회의의 승자는 닐스 보어였다. 보어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 슈뢰딩거와 아인슈타인이 코펜하겐 해석에 끝까지 반대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불확정성 원리의 확률론적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연속체와 결정론을 고수하는 통일장 이론을 만들려고 오랜 기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이 책에서 이야기되지 않는 사건을 상술한 이유는 슈뢰딩거가 논하는 ‘위기’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슈뢰딩거는1부 1장에서(34쪽부터)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이 일으킨 사유의 혁명보다 자신이 더 주목하는 것을 밝힌다. 물질의 근원을 밝히고자 하는 양자물리학도 실은 근대과학이 계승한 고대 과학과 철학의 기본 개념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런데 그 바탕에는 미처 발견되지 못한 “선입견이 포함된 관념들과 부적절한 가정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요소들을 분명히 인식한 슈뢰딩거는 이론학자로서 어떤 한계에 봉착했음을 자각했으며 물리학의 위기는 정교한 이론 속에 고착되어버린 고대의 유산을 파악하고 고치는 작업을 통해 출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양자라는 개념을 비롯해 양자론의 대두 이후 발견된 ‘기본 입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긴 해도 고대 원자론이 상정한 ‘원자’의 개념이 수정을 거치며 확장된 것이다. 고대 원자론을 완성한 데모크리토스가 설명하는 원자의 주요 특징은 109~112쪽에 걸쳐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으며, 여기서는 몇 가지만 간추려보겠다. 세계는 빈 공간(허공)과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는 모두 동일한 물질이거나 동일한 성질을 띠며, 엄청나게 많고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다. 원자는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서로 뭉치고 밀어내며 우리 눈에 보이는 다양한 물체와 현상을 만든다. 실재와 맞지 않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만 대체로 보아 고대 원자론은 굉장히 평범해서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무리가 없고 당연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설명을 들어보면 고대 그리스인에게 ‘빈 공간’이라는 것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관념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있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기에 비어 있는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레우키포스-데모크리토스-에피쿠로스로 이어지는 고대 원자론의 계보에서 공통적으로 전제하는 ‘원자’와 ‘빈 공간’이란 개념은 어떻게 해서 도입되었을까?

‘연속체’(continuum)라는 수학 개념이 있다. 수학이 아니어도 일상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예컨대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연속성을 갖는다. 간단한 예시로 자연수0과1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소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연속체라는 개념을 몰라도 이런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배운 적이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 모를 정도로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처럼 너무도 자명한 연속체 개념이 그리스인들에게는 심각한 난제였다.

한 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에 대응하는 ‘수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우리는 이것을 √2라고 부릅니다) 이들이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아킬레스와 거북의 달리기, 날아가는 화살에 대한 제논(엘레아학파)의 잘 알려진 역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래에 대한 다른 역설도 있고, 점들로 이루어진 선에 대해 계속 제기되는 문제도 있습니다. _91~92쪽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인들은 부피가 고무풍선처럼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과 같은 연속체의 상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물체들이 따로 떨어진 개별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방식”으로 부피를 이해해야 했다. 데모크리토스는 매우 뛰어난 기하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밑면에 평행하게 원뿔을 두 개로 잘랐을 때 위아래 단면에 생기는 두 원이 크기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선으로 연결된 원뿔의 표면도 엄밀하게는 매끄럽지 않다. 데모크리토스는 극소량의 개념, 수학의 미적분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원뿔의 부피를 구하는 방법을 기하학적으로 증명한 장본인으로 수학적인 연속성과 순수한 기하학의 엄밀성이 일치하지 않는 해법으로서 원자와 빈 공간이라는 원리를 재발견했다.

원래 원자와 빈 공간은 그의 스승 레우키포스의 아이디어이며, 희박화와 조밀화 원리는 밀레토스학파의 아낙시메네스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아낙시메네스의 견해도 알고 있었지만 그 논리 중 맞지 않다고 여긴 것을 수정했다. 아낙시메네스는 기본 물질을 ‘공기’로 보았고, 모든 물질은 적절한 환경에서 조밀해지거나 희박해지면서 고체, 액체, 기체로 변화한다고 보았다.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 하나하나가 희박해지거나 조밀해졌는데도 물질 자체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변하지 않는 작은 물체(즉 원자)가 그 성질은 유지하면서 희박해지거나 조밀해지려면 작은 물체들 사이의 공간이 비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했던 것이다.


실재와 이론 사이의 간극이라는 문제

이제 남는 문제는 수학적 사고의 구성물인 연속체(결정론과 짝을 이룬다)를 계속 껴안고 있는 이론의 실재와의 정합성이다. 이것이 진정 근원적인 모순이라서 이론의 불완전함을 지속으로 야기하는데도 우리의 뿌리 깊은 사고 습관 탓에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잘 알려져 있듯 슈뢰딩거는 파동방정식을 만들고 양자얽힘 현상을 예측한 후로 자신의 이론에서 뚜렷한 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론물리학보다는 형이상학 연구, 더 나중에는 베단타철학으로 기울어졌다. 아마도 그는 이 책의 곳곳에서 피력하듯 어떤 통합적인 길을 모색했던 듯하다. 그의 생각을 더 알지 못하지만, 그리고 그도 정답을 말하지 못하지만, 이 책에 자신의 ‘파동역학’에 관해 의미심장한 논평을 남겨 놓았다.

관찰 사실들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연속적인 서술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최소한 여러 사례에 서 정말로 불가능해 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완전한 서술 즉 공간과 시간에 틈이 있는 그림으로부터는 명 확하고 모호하지 않은 결론들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서술은 흐릿하고 임의적이고 불명확한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_190쪽

파동역학의 이런 그림에는 틈이 전혀 없습니다. 인과관계에도 틈이 전혀 없습니다. 파동의 상은 완전한 결정론에 대한 고전적인 요구에 부합합니다. […]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관측 가능한 사실들이나 자연이 정말 어떤 모습인지 알려준다고 믿을 수 없는 그런 서술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_191쪽

파동의 상에서 제거된 틈은 파동 그림과 관측 가능한 사실들 을 연결하는 지점으로 물러나버렸습니다. 관측 가능한 사실들은 파동 그림과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습니다. 모호한 것이 많이 남아 있고, 앞에서 말했듯이 몇몇 낙관적인 비관론자들 혹은 비관적인 낙관론자들은 이러한 모호함이 필수적이며 피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논리적인 상황입니다. _192쪽

첫 단락은 ‘불확정성 원리’를 가리키는 내용이고, 둘째 단락은 자신이 고안한 파동방정식이 아이러니하게도 고전역학의 원리 위에 고안된 것이라는 고백이고, 셋째 단락은 예측력이 좋기로 이름난 파동역학이 ‘임시변통’일 뿐이라는 냉철한 현실 인식이다. 슈뢰딩거가 제기한 문제들에 두고 어떤 후속 토론과 논쟁이 펼쳐졌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이론을 매만지고 고도의 수학을 다루는 연구자에게도, 과학을 인문주의의 필수 요소로 인식하는 독자에게도 오래도록 곱씹을 만한 생각거리다.

작가정보

188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빈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191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1년 정교수 직위에 올라 폴란드, 스위스, 독일, 영국 등지의 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다. 슈뢰딩거는 독일 예나 대학에 재직 중일 때 초기 양자론을 접하고 1921년 양자이론에 관한 첫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이름은 ‘슈뢰딩거 방정식’과 ‘슈뢰딩거의 고양이’란 사고실험의 제목에 남아 오늘날에도 널리 기억되고 있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1926년 발표된 논문을 통해 제안되었는데, 전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게 했다. 슈뢰딩거는 이 논문 이후 세 편의 논문을 더 발표하여 양자화된 입자의 상태와 에너지를 다루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이 업적으로 193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938년 아일랜드 정부 수반의 개인 자격 초청을 받아 더블린으로 이주하여 고등과학연구소 설립을 도왔다. 아일랜드로 귀화했으나 오스트리아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1956년 빈 대학으로부터 물리학과 교수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갔지만 1961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향년 73세. 슈뢰딩거의 대중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생명이란 무엇인가』와 『정신과 물질』은 이 책과 마찬가지로 강연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특히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그들의 주저에서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 영감을 준 책으로 언급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유작으로 『나의 세계관』이 있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물리학 기초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 초빙교수, 서울대 기초교육원,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등을 거쳐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물리학의 역사와 철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상대성이론의 결정적 순간들』, 공저로 『정보혁명』 『양자, 정보, 생명』 등이 있고, 역서(공역 포함)로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전기자기론』, 피터 갤리슨의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피터 하먼의 『에너지, 힘, 물질』 등이 있다.

부산대학교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에서 환경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환경정책평가연구원(현 한국환경연구원), 국토연구원에서 일했다. 저서로 『달팽이 널뛰기』, 역서로 『작은 것은 가능하다』가 있다. 현재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와 제자들이 만든 녹색아카데미에서 자연철학 세미나, 녹색문명 공부 모임을 꾸리고 있다. 녹색아카데미 웹진을 통해 기후위기와 기타 환경 관련 기사를 소개하고, 과학과 환경, 문학 등 다양한 주제의 독서 모임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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