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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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사상 최초 두번째 부커상을 안겨준 대표작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남아프리카의 보이지 않는
균열에 대한 첨예한 사고
해설 |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얼음도끼 309
J. M. 쿳시 연보 323
그는 계속 가르친다. 생계를 유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를 겸손하게 만들어주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배우는 학생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데, 가르치는 교수는 가르치면서 가장 예리한 교훈들을 얻는다. (12p)
“인간이 갖고 있는 특권 일부를 동물들과 공유하려는 거예요. 저는 개나 돼지 같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 우리 밑에 사는 개나 돼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107p)
“루시, 정신 차려라.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가 멈췄던 곳에서 계속 살 수는 없다.”
“왜 안 되죠?”
“좋은 생각이 아니니까. 안전하지 못하니까.”
“안전한 적은 없었어요. 좋든 나쁘든 그건 생각이 아니에요. 전 생각 때문에 돌아가는 게 아니에요. 그냥 돌아가는 것뿐이에요.”
빌린 가운을 입은 그녀가 일어나 앉는다. 그녀는 목을 꼿꼿이 세우고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맞선다. 아버지의 어린 딸이 아니다. 더이상 아니다. (149p)
“아버지, 저한테 소리치지 마세요. 이건 제 인생이에요. 여기서 살아야 하는 건 저예요. 저한테 일어난 일은 제 일이에요. 저한테 하나의 권리가 있다면, 이런 시련에 휘말리지 않고 아버지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저를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187p)
그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잔인함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도살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영혼에 굳은살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습관은 사람을 굳어지게 만든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에게는 굳어지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 (201p)
저는 치욕스러운 상태로 떨어졌습니다. 거기서 저를 건져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제가 거부했던 건 처벌이 아닙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반대로, 날이면 날마다 그것에 따라 살아가며, 수치를 제 존재의 현상태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242p)
“그래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굴욕적이죠. 하지만 어쩌면 다시 시작하기 좋은 지점일 거예요. 어쩌면 그것이 제가 받아들이기를 배워야 하는 것인지도 몰라요.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것 말이에요. 아무것도 없이. 어떤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카드도 없고, 무기도 없고, 재산도 없고, 권리도 없고, 품위도 없고.” (287p)
항상 더 어려워져요. 베브 쇼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더 어려워지지만 더 쉬워지기도 한다. 사람은 어려워지는 것들에 익숙해진다. 여기서 더 어려워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데에 더이상 놀라지도 않는다. (307p)
“사랑, 성, 정치의 한계만이 아니라 인간성 자체의 한계를 시험한다.”
_보이드 톤킨(1999년 부커상 심사위원)
쿳시는 소설을 ”사유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인류 역사에서 이런저런 형태로 존재해온 제국주의, 식민주의, 권력, 성, 인종, 동물 등의 다양한 문제들을 심오하게 형상화해 차원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 작가다. 그의 소설에서 지적 향기와 품격이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다. 『추락』은 그가 쓴 소설 중에서 최고 중의 최고인 소설이다. 영국 BBC 방송이 선정한 ‘죽기 전에 읽어야 할 100권의 책’에 이 소설이 포함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라는 말이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예술에서 숭고미가 무슨 의미인지를 느끼게 할 정도로 잘 짜이고 잘 쓰였다. 비애와 비극의 정조가 배어 있는 장엄하고 숭고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소설이라고나 할까. _왕은철(번역가)
“존재의 중추신경을 건드리는 작가”이자 “종달새처럼 솟구쳐 독수리처럼 내려다보는 상상력을 지닌 작가”로 불리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꼽히는 J. M. 쿳시의 대표작 『추락』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6번으로 출간된다. 『야만인을 기다리며』 『철의 시대』 『마이클 K의 삶과 시대』 등 쿳시의 작품들을 꾸준히 번역하고 소개해온 왕은철 번역가의 번역으로, 2000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후 24년 만에 번역을 다듬어 새롭게 선보인다.
『추락』은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백인 정권에서 흑인 정권으로 권력이 이양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추문에 휩싸여 추락한 중년의 백인 교수가 자신과 딸의 명예를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쿳시는 이 작품으로 한 작가에게 두 번 수여하지 않는다는 전례를 깨고 사상 최초 두번째 부커상을 수상했다. 1999년 부커상 심사위원장 레럴드 코프먼은 “후기식민주의 이후 인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우화”라고 평했으며, 1999년 부커상 심사위원 중 한 명인 보이드 톤킨은 “사랑, 성 정치의 한계만이 아니라 인간성 자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오만한 자유주의 지식인의 몰락과 체념
후기식민주의 이후 인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우화
“저는 치욕스러운 상태로 떨어졌습니다. 거기서 저를 건져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제가 거부했던 건 처벌이 아닙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반대로, 날이면 날마다 그것에 따라 살아가며, 수치를 제 존재의 현상태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본문 242p)
52세의 이혼 남성이자 대학교수인 데이비드 루리는 제자와의 스캔들로 추문에 휩싸인다. 그의 스캔들은 일파만파 퍼지며 대학신문은 물론 지역신문에까지 기사가 나고, 그에게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는 여론이 들끓는다. 급기야 그에 대한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위원회의 동료 교수들도 그에게 참회를 요구하지만, 그는 끝내 거부하며 학교를 떠나게 된다. 일단 떠나기로 결심하자 그를 붙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곧장 딸 루시의 시골 농장으로 향한다. 그는 그곳에서 시인 바이런의 열정적인 사랑과 스캔들에 대한 글을 쓰며 자신의 치욕에 담긴 의미를 찾고자 한다.
루리 교수의 유일한 자녀인 루시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따라 남아프리카로 이주했다. 그녀는 코뮌의 일원으로 시골에 자리잡았고 공동체가 와해된 이후에도 그곳의 자작농지에 남았다. 이제 그녀는 소박한 드레스를 입고 흙땅을 맨발로 걸어다닌다. 그는 딸의 이런 모습에 낯설어하면서도 이해하고 적응하려 애쓴다.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한다. 흑인 괴한 세 명이 농장에 침입해 루시를 겁탈한 것이다. 루리 교수는 그 사건에 매우 분개하지만 정작 루시는 사건을 덮으려고만 한다.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남아프리카,
옛것과 새것이라고 희망했던 것 사이의 불안한 틈
“남아프리카가 진정으로 새로운 역사적 시기에 들어갔는지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생각에 우리는 현재 옛것과 새것이라고 희망했던 것 사이의 불안하고, 점점 더 편치 못한 틈에 끼어 있는 것 같습니다.”_J. M. 쿳시
『철의 시대』 『야만인을 기다리며』 『마이클 K의 삶과 시대』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모습을 담아냈다면 『추락』은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현실을 다룬다. 쿳시가 『추락』의 집필을 시작한 1994년은 남아프리카의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남아프리카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로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남아프리카에서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받던 흑인들은 비소로 인간이 되었다. 만델라 정부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발족시켰고,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에서 인권침해와 폭력을 저지른 자들이 청문회에서 자신의 범죄를 소상히 밝히면 사면해주었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화해와 용서의 정신이었다. 과거 청산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던 국가들은 남아프리카의 사례를 본받고자 했다.
쿳시는 이런 남아프리카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모두가 남아프리카의 행보에 찬사를 보낼 때, 그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필두로 정치계가 제안하는 강제적인 화해 방식에 의문을 품었다. 고통의 역사와 그것의 후유증이란 하루아침에 해소되지 못할 터였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청산해야 할 잔재와 새로운 시대의 희망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적인 틈을 예리하게 인식하며 남아프리카가 진정으로 새로운 역사적 시기에 들어섰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소설을 “사유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쿳시에게 『추락』은 과거의 옛것과 새것이라고 희망했던 것 사이의 불안한 틈에 대한 성찰적 사유인 것이다.
작가정보

J. M. Coetzee
194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케이프타운대학교에서 수학과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영국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기도 했다.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주립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고, 약 3년간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한 뒤 남아프리카로 돌아와 케이프타운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2002년 정년퇴임 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해 애들레이드대학교와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1974년 『어둠의 땅』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데뷔한 쿳시는 1977년 두번째 소설 『나라의 심장부에서』로 남아프리카 최고의 문학상인 CNA상을 받았고, 1980년 출간한 『야만인을 기다리며』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1983년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로 첫번째 부커상을 수상했다. 2003년 “정교한 구성과 풍부한 대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서구문명의 도덕적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했다”는 평과 함께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200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 훈장을 수훈했다. 에트랑제 페미나상, 예루살렘상, 아이리스타임스 국제소설상 등을 수상하며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추락』(1999)은 백인 정권에서 흑인 정권으로 권력이 이양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추문에 휩싸여 추락한 중년의 백인 교수가 자신과 딸의 명예를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린 쿳시의 대표작이다. 쿳시는 이 작품으로 한 작가에게 두 번 수여하지 않는다는 전례를 깨고 두번째 부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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