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아
2025년 01월 15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12월 0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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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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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고딕소설의 문법과 분위기로 흘러가는 《사생아》는 애거사가 스스로 창조한 존재에 대해 모든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는 듯 행동한다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게도 한다. 《사생아》는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비라고 모던 클래식’에 포함되었고 2021년 대영도서관에서 20세기 초반 여성 작가의 소설을 새롭게 발굴했을 때 포함되며 다시금 회자되었다.
부록 에세이
책 쓰기 _153
설명 불가능한 것들 _164
해설 | ‘노처녀’의 상상 속 친구 _174
새삼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도 혼자, 소녀 시절에도 혼자, 그리고 서른두 살 여자가 된 지금은 더더욱 혼자였다.(9쪽)
클러리사는 진짜 살아 있는 형제자매처럼 생생하되 그들보다 훨씬 더 유순했으며, 그 애 덕분에 애거사는 유년을 외롭게 보내지 않았다.(11쪽)
춤추는 불꽃을 붙잡으려다 그 불에는 실체가 없음을 뒤늦게 깨닫고 살갗에 화상만 남은 느낌이었다.(16쪽)
자신의 먼지투성이 삶에 비쳐 든 빛이 바로 ‘클러리사’라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18쪽)
상황이 자신의 통제를 넘어서고 있었다. 클러리사가 바깥세상에 드러난다면 그 존재가 해명되어야 한다.(28쪽)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해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 하물며 어떻게 누군가에게 다른 사람의 존재를 해명하기를 기대한단 말인가?(41~42쪽)
자신이 곁에 있어야만 클러리사의 존재가 유지될 거라는 불안감을 마음에서 완전히 떨칠 수 없었다.(44쪽)
“어떤 별이 아주 살짝 더 움직여서, 태양이 끌어당기는 힘에서 벗어나버리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47쪽)
그 애에게 불멸의 영혼이 있기는 할까? 상상의 편린에 불과한 그 애 안에 영원한 삶을 부여받을 만한 무언가가 있을까?(69쪽)
클러리사는 현재만 살았다. 과거는 회상하지 않았다.(76쪽)
기억에 관한 소설이자
기억 속에서 전개되는 소설
어머니의 “장례를 마쳤을 때” 애거사는 남들과 “한두 발짝 물러나” 무덤 앞에 혼자 서 있다. 결혼하지 않았고 형제도 없었던 터라 이제 정말 홀로 남겨진 것이다. 사교성이 없는 성격인 데다 극심한 외로움이 덮치자 언젠가 지금처럼 “동반자를 잃은 적이” 있었음을 떠올린 애거사는 “멍하니 과거를” 훑는다. 그러다 이름 하나를 번개처럼 떠올린다. “클러리사!”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클러리사가 “마음속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클러리사는 애거사만의 친구, 애거사만 만날 수 있는 친구, 그러니까 애거사가 빚은 환상 속 친구였다. 애거사는 클러리사와 대화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 속에서만 클러리사가 살 수 있고 또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그날 밤, “클러리사가 돌아왔다”.
이전과 다른 문제가 생긴다. 오직 애거사에게만 보였던 클러리사가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먼 친척이라고 둘러댔지만 당국에 제출해야 할 서류 작업을 하러 온 경찰에게 “아동의 이름. 출생 장소와 일시. 아동을 양도한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대지 못하고 급기야 구빈원으로 보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에 울부짖듯 대꾸한다.
“사생아예요. 제가 낳은.”
그 말과 동시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사생아예요.”(57쪽)
애거사와 클러리사는 서로를 돌보고 상상 놀이를 즐기며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로 가득 찬, 무한한 세계 속을” 살아간다. 그런데 클러리사가 또래인 ‘키티’, ‘데이비드’와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엄마’의 품을 벗어나려 하고, 급기야 클러리사를 향한 데이비드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깨달은 애거사는 점점 클러리사에게 집착하게 되는데…….
외로움에서 사랑으로
집착에서 독립으로
진짜 삶, 진짜 행동, 진짜 현실
어느 날 클러리사는 “어떤 별이 아주 살짝 더 움직여서, 태양이 끌어당기는 힘에서 벗어나버리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라고 말한다. 애거사는 “재빨리” 그럴 일은 없다고 말을 물리치지만 고개를 든 불안이 애거사를 잡아먹는다. 자신이 클러리사와 떨어진다면, 그것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클러리사가 사라져버릴 거라는 불안.
이를 알 리 없는 클러리사는 방금 고안한 ‘별 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비밀스러운 끈을 서로에게 묶고 클러리사가 애거사 주변을 빙빙 도는 게임이었다. 신난 클러리사는 갑자기 원래의 항로에서 재빠르게 벗어났고, 그러다 실이 끊어지고 만다. “애거사는 진심으로 괴로워”하며 소리치지만, 클러리사는 “날 불러도 소용없어. 난 사라졌어. 비밀스러운 끈은 끊어졌다고”라고 말할 뿐이다.
클러리사는 갑자기 나타난 만큼 갑자기 사라질 수 있었다. 애거사는 둘만 살아갈 수 있는 “무한한 세계”를 만들고 클러리사와 영원히 살고 싶어 하지만 “상상만 하는 건 허무하잖아”라고 말하는 클러리사는 자기만의 세상으로 나가려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클러리사가 데이비드와 사랑에 빠지자 ‘모녀’ 관계가 깨질 가능성은 더욱 커지는데, 이때 나타나는 애거사의 소유욕과 불안감이 신비롭지만 위태롭게 그려진다.
‘연약한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올리비어는 감동적으로 때로는 슬프게 구축했다. 김지현 번역가가 해설에서 짚어주듯 《사생아》는 “자식을 자신의 복제물로 대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어머니와 그 시도를 벗어나려 하는 딸의 관계에 대한 유비”로도 읽을 수 있다.
클러리사는 그 놀이에서 진짜 모험의 세계와 가장 가까이 접촉할 수 있는 통로를 발견했다. (……) 바깥 세계를 한번 조우하니 자신이 원하는 것은 삶 자체라는 사실을 깨달은 셈이었다.(85쪽)
당대의 ‘잉여 여성’과 애거사
애거사는 악한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사랑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자기가 창조한 존재를 잃게 될 위기에 처했을 때 느끼는 고통을 보여줄 뿐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다수 남성이 사망하면서 영국 내 미혼 여성의 수는 급증했다고 한다. 1921년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보다 무려 170만 명 더 많았고 사회는 그들을 ‘잉여 여성’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오늘날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 공고한데 《사생아》가 발표된 1920년대에는 어땠을까. 책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애거사는 당대의 ‘잉여 여성’ 중 한 명으로 보인다. 애거사를 세심히 따라가면 “규범적 삶에서 소외되고 그 밖의 인간관계를 구축하기 어려워하는, 그리고 전쟁의 암운 가운데에서 고립된 미혼 여성의 곤경”을 살펴볼 수 있다. 클러리사를 ‘창조’한 것부터 극심한 외로움과 공허함의 표현이다.
하지만 애거사는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는다. 자신이 창조한 존재를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한다. 사회적 평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낳은 사생아라고 소리치고, 세례도 직접 준다. 자신은 내키지 않지만 클러리사가 운전, 춤, 테니스 등을 배우게 하는 등 사랑으로 보살피고 책임진다. 상상 속 존재가 현실에 나타났다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지만, 그저 함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해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41쪽)
50대에 시작한 소설 쓰기와
‘설명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애정
올리비어는 50대에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소설 창작을 시작했다. 아끼던 동생 밀드러드가 사망한 이후였다. 한밤중에 착상이 떠올라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제멋대로 굴러가는 듯했던 그 열에 들뜬 시간 동안” 《사생아》의 첫 두 장을 완성했다고 한다. 애거사가 클러리사를 불러냈던 것과 유사하게. 《사생아》는 올리비어의 첫 소설이며 그 전까지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사생아》와 함께 작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작가와 작품, 그리고 등장인물까지 모두 “비밀스러운 끈”으로 묶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
올리비어는 자전적인 에세이 〈설명 불가능한 것들〉에서 가끔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한다고 밝힌 바 있다. 어느 여름밤 난데없이 침대 옆에서 오래된 라켓 하나를 발견했는데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창문과 방문도 모두 닫혀 있었으며 자신의 집에 있을 법한 물건이 절대 아니었다고 말한 뒤 만약 “지나가던 어떤 혼령이 장난삼아 남긴 물건이었다면, 저승의 유머 감각은 우리와는 많이 다른 모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라고 덧붙인다. 설명할 수 없는 대상과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저승의 유머 감각”을 운운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사생아》는 이처럼 ‘설명 불가능한 것’에 대한 올리비어의 관심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환상소설이기도 하다.
작가정보
Edith Olivier | 1872년 영국 윌트셔에서 성직자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보수적이며 통제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 윌트셔의 농업 지원 부인회 창설을 도운 공로로 1920년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윌턴 시의회에서 일한 최초의 여성이었으며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윌턴 시장을 역임했다. 올리비어가 본격적인 소설 창작을 시작한 건 50대에 접어들어 아끼던 동생 밀드러드가 사망한 이후였다. 《사생아》(1927)는 그의 첫 장편소설로 한밤중에 착상이 떠올라 쓰기 시작했으며, “해가 밝기 전에 두 장을 완성했다”라고 한다. 존재 자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시대에 풍부한 상상력으로 맞서는 ‘애거사’가 어린 시절 상상 속 친구였던 ‘클러리사’를 다시금 불러내는 것으로 시작되는 《사생아》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올리비어의 깊은 믿음을 보여주는 작품인 동시에 당시 영국 사회가 독신 여성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각을 그 이면에 담았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는 《제인의 할머니만큼 멀리》(1928), 《왜소증 환자의 피》(1931) 등이 있다. 만년에 작가로 활동하면서 그 시대의 ‘총명한 젊은이들’과 어울렸는데 화가인 렉스 휘슬러와 특히 친하게 지냈다. 올리비어의 삶은 그가 60년 이상 쓴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1948년 윌트셔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소설가이자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2002년 대산청소년문학상 동상, 2018년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상, 2020년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는 《레딩 감옥의 노래》, 《흉가》, 《조반니의 방》, 《끝내주는 괴물들》, 《인센디어리스》, 《프랭키스슈타인》, 《기억의 빛》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는 소설집 《로드킬》, 장편소설 《너라는 이름의 숲》, 산문집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사랑, 편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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