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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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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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 곤충학자이자 사이언스 아트계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그림을 방패 삼아 밀려오는 슬픔, 분노, 우울, 두려움에 맞선 에드바르 뭉크, ‘부부싸움’이라 칭했지만 신체 권력을 앞세워 아내에게 ‘폭력’을 행한 에드워드 호퍼, ‘중립’이라 주장하지만 ‘방관자’로서 가해했던 에밀 놀데 등. 예술가들 역시 보통의 인간일 때가 많았다. 어떤 이들은 시대적 한계와 고통스러운 개인사를 딛고 일어나 경이로운 창작력을 보였고, 어떤 이들은 ‘위대한 예술가’라는 트로피 이면에 굴욕적인 모순의 흑역사를 남겼다.
모순과 위선, 방황과 실패, 외로움과 고통…. 그들도 나와 같이 부족한 인간이었다는 사실, 나와 같이 한계와 좌절을 겪어냈다는 사실에서 오는 묘한 위안이, 작품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이 겪어온 시행착오를 딛고 일어나 건네는 조심스러운 조언이기도 하며, 세상의 모든 ‘어른아이’에게 보내는 애정 어린 초대장이기도 하다.
1. 생의 빛깔
빛은 부서진 마음, 그 틈으로 들어온다
: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삶, 그리고 결단하는 용기
필 때도 질 때도 아름다운
: 제임스 휘슬러의 떨어지는 불꽃
맑은 날만 계속 되면 사막이 되고…
: 절망에 붙잡히지 않았던 뭉크의 작품 세계
우리는 모두 조금은 약하고 조금은 위선적이다
: 제임스 엔소르를 통해 본 인간의 위선과 가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의를 잃지 말라
: 반 고흐, 그의 삶에 친절과 선의가 함께했다면
사랑할 때 우리는 모두 위험해지지
: 페릭스 발로통과 삶의 예측불가능성
우정은 돌로 된 벽보다 강하다
: 조지아 오키프와 애니타 폴리처가 보여준 우정의 힘
2. 생의 민낯
딸들에게 씌워진 이중의 굴레
: 착한 딸과 불쌍한 엄마라는 잘못된 신화
언제나 그곳에 존재했던 여성들
: 도예와 자수 장인들을 통해 본 지워진 여성 예술가들
중립과 침묵, 그리고 방관자들
: 에밀 놀데의 삶을 통해 본 중립의 함정
나에게 붙어 있던 가짜 훈장
: 메두사는 정말 끔찍한 괴물이었는가
그것은 부부싸움인가, 폭력인가
: 호퍼와 조세핀이 서 있던 기울어진 운동장
당신의 무심함을 정당화하지 말라
: 동굴에 숨은 남자들 - 앤드루 와이어스를 통해 본
3. 생의 깨침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
: 모순의 혁명가들 - 키르히너와 다리파를 통해 본
어른이 되기 전의 삶은 삶이 아닌 것인가
: 어른이 보듬어야 할 어린이의 세계
생명에는 계급이 없다
: 그림 속 지적 장애인, 그리고 지금의 이야기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
: 동물권에 대해, 인간의 폭력에 대해
사랑하라, 뜨겁게. 상처를 각오하며
: 오스카어 코코슈카, 나를 파괴하지 않는 사랑
춤은 계속되어야 한다
: 삶이라는 캔버스 속, 부모로 산다는 것
예쁠 필요가 없단다, 그건 네 의무가 아니야
: 우리가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아야 할 것들
참고 문헌
‘보통 사람’인 그들이 그려낸 그림의 메시지는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묘하게 마음을 달래주는 힘이 있었다. 코코슈카의 그림은 “사랑이란 우리 삶을 마구 할퀴기도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가져다주는 슬픔과 고통을 마치 항복하듯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고, 키르히너의 그림은 “내가 추구하는 자유와 해방이 타인의 사회적 약점을 이용할 수 있는 허울이 될 수 있기에 경계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죽음을 다룬 뭉크의 그림은 “과거의 상흔은 더 나은 현재와 미래를 꾸리기 위한 재료로 삼을 수 있다”고 속삭여주었고, 메리안의 그림은 “넘어지는 게 실패가 아니라 넘어지는 곳에서 머무르는 게 실패”라고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렇게 이 책의 제목처럼,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
-15쪽, 작가의 말 중
한때 메리안도 스스로를 어떻게 변신할지 모르는 볼품없는 애벌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네덜란드행 마차에 몸을 실었던 그날, 자신의 세계에서 쌓아놓았던 모든 걸 버리고 칩거를 선택해야만 했던 그날. 그녀는 참혹한 결혼생활로 인해 마음이 부서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책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의 저자 파커 J. 파머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 부서진 사람들. 한데 그들의 마음은 부서져 조각난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린 것입니다.”
진정 이 말이 옳다는 것은 메리안의 용감한 삶이 증명한다. 독이 되는 관계를 단호히 끊고 레테의 강물을 마신 결과, 그녀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나비로 변신해 레테의 강을 날아서 건너갔다. 그리고 비로소 세상을 향해 열릴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잘 부서지긴 하지만 “빛은 부서진 그 틈으로 들어온다”(소설가 헤밍웨이)는 진실을.
-35쪽, 〈빛은 부서진 마음, 그 틈으로 들어온다〉 중
그러나 뭉크는 어린 시절에 마냥 머무르기를 거부했다. 그에게는 ‘그림’이 있었다. 뭉크는 공학 공부를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6세 때인 1879년 기술학교에 들어가지만, 이듬해에 그만둔다. 그 후 1881년, 크리스티니아(현재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왕립미술학교에 기어이 입학했다. 그리고 그림을 방패 삼아 밀려오는 슬픔, 분노, 우울, 두려움에 맞섰다. 캔버스에 생채기를 남기듯 거칠게 그린 〈병든 아이〉는 바로 뭉크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다는 증거다.
-51쪽, 〈맑은 날만 계속 되면 사막이 되고…〉 중
엔소르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1892년, 친구인 외젠 드몰데가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했다. “엔소르는 너무나 독창적이어서 그의 작품을 본 관람객들은 역겹다며 아우성쳤다. 마치 달을 보고 짖는 한 무리의 배고픈 개들처럼.”
엔소르는 의기소침해졌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엔소르 자신은 ‘핍박받는 천재’였다. 돌이켜보면 늘 그랬다. 브뤼셀 왕립아카데미에서 엔소르를 가르친 선생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석고상 얼굴을 특이하게도 분홍색으로 칠하고 머리카락은 적갈색으로 칠한 그를 ‘무식하다’고 비난했고, 가족들도 “기념품 가게에서 팔 수 있는 무난한 그림만 그리라”며 강요했다. 평론가는 그의 그림을 ‘쓰레기’라고 혹평했고, 여성과의 연애도 순탄치 못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전시회를 열면 사람이 얼마나 그림을 보러올지 불안해하기도 했다.
-60쪽, 〈우리는 모두 조금은 약하고 조금은 위선적이다〉 중
세상에 회의하고 냉소하는 것은 너무도 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의를 잃지 않는 태도야말로 사람됨의 증거라고. 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가 《예술과 문명》에서 이렇게 짚었듯이 말이다. “13세기 수도자 성 프란체스코에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아마도 ‘순결, 복종 그리고 빈곤’이라고 대답했을 것이고, 15~16세기를 살았던 미켈란젤로에게 물었다면 ‘비열과 부정에 대한 경멸’이라고 대답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18~19세기 초 인물인 괴테에게 물었다면 ‘전체와 미 속에서 사는 일이다’라고 말했을지언정 결코 ‘친절’ 같은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타인에 대한 ‘친절’이야말로, 오랫동안 인간 문명이 진보한 결과로 건져낼 수 있었던 소중한 결실이라는 것이다.
‘나는 친절한 사람이다’. 친절을 놓으니 내 인격의 한 부분이 소리 없이 닳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알겠다. 가부장 사회가 휘두르는 주먹에 내가 맞았다는 이유로 내가 그동안 정성껏 가꿔온 나의 ‘선함’을 외면하는 건,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꼴이라는 것을.
-7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의를 잃지 말라〉 중
우리네 인생에서 설계가 가능한 부분은 아주 조금밖에 없다는 것, 그 깨달음을 아무도 피해갈 수 없다. 단지 그걸 언제 깨닫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발로통이 이 긴장감 넘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그림을 그린 것도, 그 사실을 이미 어릴 적에 알았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잔인하게도 발로통 그 자신이 거미줄을 끊어버린 손이었다는 사실까지도.
발로통은 스무 살이 된 1885년, 자화상을 그린다. 그런데 그의 표정에서 이제 막 성인이 된 이의 싱그러움과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비스듬하게 선 채로 앞을 보는 그의 눈길에선 두려움마저 엿보인다. 어찌 보면 방금 운 것처럼 두 눈이 충혈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81쪽, 〈사랑할 때 우리는 모두 위험해지지〉 중
그 다음에 폴리처는 무엇을 했을까? 놀랍게도, 폴리처는 친구의 소묘 뭉치를 옆구리에 낀 채 집 밖으로 나갔다. 1916년 년 새해 첫날, 그것도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 친구의 재능을 알아봐 줄 사람이 당장 필요했다. 그 사람은 바로 앨프리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 미국 미술계에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갤러리 291’을 경영하던 화상이자, 예술잡지 〈카메라 워크〉의 발행인, 이미 그 자신이 명성이 드높았던 사진작가였기에 적격이었다. 폴리처는 스티글리츠가 머물던 갤러리 291의 문을 무작정 두드렸고, 전날의 송년 파티로 엉망이 된 머리와 구깃구깃한 옷을 입은 채 문을 열어준 스티글리츠의 손에 오키프의 그림을 직접 쥐어주었다. 그러곤 폴리처는 집에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오키프에게 편지를 보냈다.
-93쪽, 〈우정은 돌로 된 벽보다 강하다〉 중
잔느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카미유 피사로는 딸의 초상을 그렸다. 〈잔느의 초상〉 속 그녀는 화사한 옷을 입었지만, 표정은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잔느는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어쩌면 아버지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 것도 ‘화가가 되고 싶다는 허영을 자극할 수 있다’며 엄마의 성화를 샀을 수도 있다. 이때 잔느는 이미 죽은 언니의 나이를 넘어섰다. 특별히 사랑했던 딸을 잃은 엄마의 슬픔을 대신 갚기 위해서라도, 엄마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됐을 것이다. 그녀는 ‘착한 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을 터. 잔느를 제외한 다섯 명의 아들은 엄마의 반대 없이, 아버지의 격려를 받으며 화가 수업을 이어갔고 화가, 에칭화가, 풍자만화가, 다양한 장식품 디자이너로 아버지의 명성을 이어갔으니 말이다. 잔느의 공허한 눈동자는 마치 작별인사를 하며 서서히 멀어지는 꿈을 좇고 있는 것만 같다.
-107쪽, 〈딸들에게 씌워진 이중의 굴레〉 중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미국의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은 1971년 〈아트뉴스〉 잡지에 이 같은 도발적인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노클린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여성에게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교육의 제약을 꼽고 있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서양의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역사화를 최고의 장르로 쳤다. 미술 장르 중 가장 우월한 ‘그랜드 장르’로 일컬어진 것이다. 이 역사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인체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필수였고, 그러려면 인체의 형태를 해부학적으로 정확히 그리는 데 필요한 누드 드로잉 수업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여성은 누드 드로잉이라는 중요한 수업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됐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누드모델이 될 수는 있어도 누드모델을 보며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금지당했다. 즉 처음부터 남성과 동등한 미술가로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던 셈이다.
-112쪽, 〈언제나 그곳에 존재했던 여성들〉 중
대놓고 행동하는 가해자와는 달리 악의를 은근히 드러내는 방관자들의 모습은 역사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37년 년 7월 독일 뮌헨에서는 ‘퇴폐 미술’이라는, 이름도 희한한 전시회가 열렸다. 당시 독일을 장악하고 있던 나치 정권이 독일의 미술관들을 뒤져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술작품들을 압수해 모은 뒤 ‘사회의 미덕을 오염시킨다’며 퇴폐 미술이라고 규정짓고 전시회를 연 것이다. 개막식 연설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야만적이고 국제적인 엉터리 낙서”를 그만두고 “떠버리들, 아마추어, 사기꾼 미술가들”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이 ‘떠버리들, 아마추어, 사기꾼 미술가들’이 누구였냐면, 지금은 미술사에서 위대한 화가들로 일컬어지는 피카소, 뭉크, 칸딘스키, 샤갈, 키르히너, 콜비츠 등이었다.
-124쪽, 〈중립과 침묵, 그리고 방관자들〉 중
하지만 미국 최초의 여성 조각가 해리엇 호스머Harriet Hosmer, 1830~1908의 〈메두사〉는 다르다. 호스머는 메두사를 끔찍한 괴물이 아니라, 이제 막 이마 쪽 머리칼이 뱀으로 변하는 순간 그것을 아직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호스머가 굳이 메두사 묘사 관례를 깨뜨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호스머가 활동하던 당시 그녀의 고향이었던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성폭행을 법으로 고발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아내에게는 남편이 요구하는 성관계를 거부할 법적 권리가 전혀 없었고, 수없이 많은 백인 남자들이 흑인 여자들을 강간하고도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 호스머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괴물이 아닌 무고한 여성 메두사를 표현함으로써, 호스머는 이 같은 폭력적인 남성문화에 항의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140쪽, 〈나에게 붙어 있던 가짜 훈장〉 중
“내 속치마는 무릎에서 찢어졌고 새 드레스는 더러워졌다. 그가 무릎으로 나를 마루에 눌러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는 길게 두 개의 긁힌 자국이 생겼다. 다른 때엔 내가 좋아하던 얼굴이다. 그리고 내 넓적다리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_1938년 5월 10일
“키 큰 남자는 항상 근사하지만 긴 팔로 나를 때릴 때는 아니다.”_1941년 7월 8일
155cm도 안 되는 키, 45kg 몸무게의 아내와 195cm 키에 거의 100kg에 육박하는 거구의 남편이 ‘부부싸움’을 한 기록이다. 확연하게 차이 나는 신체 권력을 앞세워, 아내를 손쉽게 제압한 뒤 무지막지하게 구타한 이 남성은 누구일까. 놀라지 마시라. 바로 현대 도시인의 고독과 상실감, 단절을 무심하게 포착한 ‘미국의 국민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대기업이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광고를 만들어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화가다. 그는 현대인이 겪고 있는 쓸쓸함과 무기력을 화폭에 잘 포착해 명성을 얻었지만, 정작 옆에 있는 아내의 우울함은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 속에서 아내는 당연히 내조를 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47쪽, 〈그것은 부부싸움인가, 폭력인가〉 중
남자들이 ‘철이 없는’ 이유는 철이 없어도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내에게 미안해하던 와이어스는 이후 점점 대담해져서,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헬가를 불러 노쇠해진 자신을 돌보도록 했으며, 2007년 와이어스의 90세 생일파티에도 헬가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한 인터뷰에서 와이어스는 헬가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헬가는 이제 가족의 일원입니다. 나는 그것이 모두에게 충격을 준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와이어스는 헬가 시리즈를 끝낸 후인 1993년에 의미심장한 작품을 하나 그린다. 역시 〈대낮의 꿈〉처럼 잠든 사람의 모습이다. 와이어스는 이 작품에 대해 어느 날 아침 이웃집에 들렀다가 그 집 노부부가 창백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고, 그 인상이 강하게 남아서 그림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부부의 모습은 좀 으스스해 보인다. 침대 속에서 그들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목만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163쪽, 〈당신의 무심함을 정당화하지 말라〉 중
아마도 키르히너는 프랜지가 기댈 곳 없는 가난한 가정의 아이라는 것을 바로 파악했을 것이다. 만약 프랜지가 중산층의 딸이었다면, 과연 키르히너는 ‘탈문명과 해방’이라는 대의를 자신 있게 내걸며 아이의 옷을 당당하게 벗길 수 있었을까? 다리파는 반 부르주아를 예술의 비전으로 삼고 있었지만, 정작 여성을 대하는 태도와 시각은 부르주아 남성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그것도 부르주아 사회 속 대표적 피해자였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소녀에게 말이다.
-175쪽,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 중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가 15세기 말에 그린 〈바보 배〉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바보 배〉는 중세 독일의 인문주의자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t의 1494년 풍자시 제목이기도 하다. 112명의 바보를 등장시켜 중세 후기의 도덕적 해이를 풍자한 브란트의 시는 당시 여러 나라 언어로 옮겨지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보스 역시 브란트의 시를 읽었을 것이다. 그는 브란트의 〈바보 배〉를 실마리 삼아, 바보 배를 탄 사람들의 면면을 그림으로 묘사했다.
작품을 보자. 돛대에 그리스도교의 십자가 대신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초승달이 그려진 깃발을 매단 배가 출항한다. 이교도의 배를 탄 사람들은 다름 아닌 수녀와 수사. 그들은 기도하는 대신 악기를 연주하며 목청껏 노래만 부를 뿐이다. 배 앞쪽 농민은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토악질을 하는데, 물속 사내는 술을 더 따라 달라고 잔을 들고 있다. 한마디로 난장판이다. 즉 보스가 말하는 ‘바보’란 이성이 결여된 사람이다.
-191쪽, 〈생명에는 계급이 없다〉 중
코코슈카는 애초 이 그림의 제목을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지었다. 둘의 사랑이 시작됐던 날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게르만 신화에 등장하는 ‘날씨의 악마’의 이름인 〈바람의 신부Windsbraut〉로 바꾼다. 독일어로 ‘회오리바람’을 뜻하기도 하는 ‘바람의 신부’는 그림 속 남녀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고 있다. 사방에 미친 돌풍이 휘몰아치는데도 편안히 잠든 여자와 대조적으로, 남자는 혹여나 푸른 바람이 여자를 빼앗아갈까 봐 두 눈을 홉뜬 채 불안해한다. 이 두 사람은 바로 코코슈카 자신과 알마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216쪽, 〈사랑하라, 뜨겁게. 상처를 각오하며〉 중
그러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이미지도 스스로 창조하기 시작했다. 검은 터틀넥 스웨터에 청바지와 가죽점퍼, 첼시 부츠, 선글라스를 자신의 패션 코드로 삼고, 머리엔 은빛 가발을 써서 20대부터 현저히 줄어든 머리숱을 감췄다. 그는 이 모습이야말로 ‘미국 팝아트의 제왕’이라는 화려한 명성에 걸맞은 외모라고 생각했으리라. 워홀의 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구절 가운데 하나가 “나는 나 자신을 모아 붙였다I glued myself together”였다. 그는 매일 카메라 앞에 나설 준비가 된 ‘완성품 앤디’를 조합하는 작업을 했다. 울긋불긋한 피부와 여드름 자국을 감추기 위해 공들여 화장한 후,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가발을 머리에 붙이면 비로소 공공 버전 앤디가 되었다. 과연 미국의 철학자 스티븐 샤비로가 다음과 같이 평가할 만했다. “워홀이 예술 분야에서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은 바로 그 자신이다. 공허하고 매혹적인, 그래서 카리스마 있어 보이는 인물로 스스로를 완전히 재탄생시켰으니 말이다.”
-237쪽, 〈예쁠 필요가 없단다, 그건 네 의무가 아니야〉 중
“그림을 보기 전과 후,
우리 삶의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기울어진 미술관》 등
예술작품 속 약자와 여성들의 이야기를 채집하고 발굴해온
이유리 작가의 사유의 미술관
우리는 왜 그림을 보는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림을 통해 소외된 존재들과 지워지길 반복해 흔적조차 없어진 여성들의 삶을 채집하고 발굴하는 작가 이유리는 “그림을 보기 전과 후, 우리 삶의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기울어진 미술관》,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등의 책을 펴낸 그는 그림 속에 숨겨진 욕망과 권력, 사회 모순, 공고한 성벽처럼 둘러쳐진 가부장제, 돌봄과 가사 노동자나 뮤즈로서로만 존재했던 여성들의 삶을 우리 앞에 꺼내 펼쳐놓았다.
그는 새 책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를 집필하며, 보다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했다.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소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갖춰야 할 것들에 대해. 그간 예술작품을 탐닉하며 깨치고 체득한 ‘삶의 기본 소양’에 대해. 어쩌면 너무 기본이라 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대적 배경과 예술가의 삶, 한 번쯤 봐야 할 미술 작품과 자신의 삶을 엮어 다채롭게 풀어낸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내면에 심어둬야 할 친절과 배려의 가치에 대해, 진정한 우정과 사랑에 대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염두에 둬야 할 동물권에 대해,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방관에 대해, 여성에게 행해지는 남성의 폭력과 그 무형의 이득을 보는 사람들에 대해, 장애인 인권과 아동권에 대해, 세상의 잣대와 무관하게 지켜내야 할 자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작가 자신이 겪어온 시행착오를 딛고 일어나 건네는 조심스러운 조언이기도 하며,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보내는 애정 어린 초대장이기도 하다. ‘내가 본 것들이 나를 만든다’는 믿음으로, 예쁘고 약하고 순한 것들만 본다고 삶이 어여뻐지는 건 아니라는 깨침으로 그는 글을 써나갔다. 그림을 보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굳건한 내면의 힘을 키우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깨끗하고 맑기는커녕 오히려 가까운 이와의 이별, 착취, 차별, 불행했던 어린 시절 등 생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초점을 맞춘 그림들이 내 책의 주인공이었다. 가뜩이나 세상에는 불안과 고통이 가득한데, 굳이 나는 아름다운 그림을 놔두고, 비탄이 가득한 작품을 찾아보는 게 맞는가? 게다가 멀쩡해 보이는 그림 속에 숨겨진 어두운 의도를 구태여 캐내어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옳은가. 삶의 고단함에 지친 이들은 위안과 휴식을 갈구할 텐데 그림 속에서 슬픔과 허무함을 찾아낼 필요가 있을까. 고백하자면 역시나 이런 혼란과 고민도 뜬금없다. 오히려 나는 그 슬픔과 허무함에서 황홀한 아름다움을 찾곤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본문 중에서
불안할 때, 생각이 많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이유리 작가가 건네는 스무 가지 인생의 진실
시대와 작품과 예술가의 삶을 각각 떼어놓고 감상할 수는 없다. 이유리 작가는 이 책을 “위대한 대가들의 발자취를 더듬은 후,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그들을 호출해낸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예술가들은 ‘위대한 인물’로 박제되기 이전에 뜨거운 피와 살을 가진 보통의 인간일 때가 많았다. 어떤 이들은 시대적 한계와 고통스러운 개인사를 딛고 일어나 경이로운 창작력을 보였고, 어떤 이들은 ‘위대한 예술가’라는 트로피 이면에 굴욕적인 모순의 흑역사를 남겼다. 우리 보통의 인간이 그러하듯.
이 책은 ‘생의 빛깔, 생의 민낯, 생의 깨침’, 이렇게 3부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생의 빛깔’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예술로 승화한 화가들의 이야기, 나아가 그들이 함께하길 염원했던 ‘사람됨의 증거-다정함과 선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최초의 여성 곤충학자이자 사이언스 아트계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무책임한 술주정뱅이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두 딸을 키우며 기록적인 창작력을 발휘한다. 이유리 작가는 그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넘어지는 게 실패가 아니라 넘어지는 곳에서 머무는 게 실패”라는 메시지를 건넨다고 말한다. 곤충의 변태를 믿지 않던 시절, 진흙에서 벌레가 생긴다고 믿던 그 시절, 알, 애벌레, 번데기, 성충의 과정을 발견하고 그림으로 남긴 그는 그 자신 역시 아름답게 변태해 역사에 새겨진 것이다. 에드바르 뭉크는 또 어떤가. “나의 모든 작품은 질병에 대한 사색에서 비롯되었다. 두려움과 아픔이 없었다면 나의 삶은 방향키가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림을 방패 삼아 밀려오는 슬픔, 분노, 우울, 두려움에 맞섰다.
두 번째 ‘생의 민낯’에서는 인간이라면 숨기고 싶은 ‘모순과 위선’을 예술가의 삶과 작품 속을 헤집어 꺼내든다. 현대 도시인의 고독과 상실감, 단절을 무심하게 포착한 ‘미국의 국민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아내 조세핀으로 하여금 ‘키 큰 남자는 항상 근사하지만 긴 팔로 나를 때릴 때는 아니다’, ‘내 넓적다리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등의 일기를 쓰게 만든다. 이들 부부는 ‘부부싸움’이라 칭하지만 확연하게 차이 나는 신체 권력을 앞세워 남성이 여성을 제압한 ‘폭력’일 뿐이다. 나치에 의해 괴롭힘당하던 유대인들을 조롱하는 그림을 그린 에밀 놀데는 다른 측면으로 비겁했다. 나치 편에 선 가해자에 가까웠던 놀데는 이후 나치에 의해 ‘퇴폐예술가’로 탄압받자 곧바로 불행한 희생자로 탈바꿈한다. 그는 나치 주동자도 아니었고, 그저 ‘중립’에 선 ‘방조자’였을 뿐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의 진짜 의도가 어떠했든 그의 작품은 소극적이고 비겁한 방식의 가해였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세 번째 ‘생의 깨침’에서는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것, 사랑과 자존, 인간의 존엄과 나아가 생명권을 이야기한다.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어 코코슈카와 알마 말러의 강렬한 만남을 통해 사랑이 가져다주는 슬픔과 고통의 깊이를, ‘미국 팝아트의 제왕’ 앤디 워홀의 일생을 통해 진정한 자존의 의미를 톺아본다. 때론 하나의 작품으로 이야기가 풀려나가는데, 프랑스 화가 장-프랑수아 밀레의 작품 〈새 사냥〉을 함께 보며 동물권에 대해,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작품 〈바보 배〉를 면밀히 살피며 장애인 인권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오랜 시간 사랑받은 작품, 역사 속에서 존경받아온 예술가들의 삶도 아름다움과 완벽성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순과 위선, 방황과 실패, 외로움과 고통…. 그들도 나와 같이 부족한 인간이었다는 사실, 나와 같이 한계와 좌절을 겪어냈다는 사실에서 오는 묘한 위안이, 작품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아름다움만 삶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처절한 아픔을 겪으며 마침내 아름다움을 관통하는 깊은 시선이 생기는 법이니까.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
이유리 작가는 역사를 전공하고 기자로 일했었다. 하지만 나침반 바늘이 잠시 흔들리다 자리를 되찾듯 그림으로 향한 열정이 미술에세이스트의 자리로 이끌었다. 집요하게 그림을 보고, 그 뒤에 숨겨지고 소외되고, 때론 방치되고 학대된 존재에게 한 줄기 조명을 비춰주는 작업을 해온 그는 한결 깊어진 내공을 담아 독자에게 건넨다. 이 책은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보다 사랑하며 살기 위한 작가 자신의 다짐문이기도 하다.
작가정보
그림이 던지는 삶의 질문들에 답을 구하는 작가. 그림에서 생의 부조리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찾는 작가. 그림에서 시대를 읽고 세상을 재해석하는 작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신문사 기자로 일했다. 어학연수를 위해 갔던 영국에서는 공부 대신 갤러리만 찾아다녔고, 경찰출입기자로 일하면서도 미술 서적을 놓지 않았다. ‘몰입하면 중요한 것들만 남는다’는 말이 증명하듯, 그림에 대한 몰입은 그를 미술에세이스트의 길로 이끌었다.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에서 오랜 시간 미술 칼럼을 썼고,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예술사, ‘을의 편’에 선 예술가들 등을 주제로 인문학 강의를 하며 미술 작품을 바라보는 또 다른 통로를 제공하고 있다. 《기울어진 미술관》,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화가의 마지막 그림》, 《화가의 출세작》, 《왜 유명한 거야, 이 그림》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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