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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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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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이래 매년 하나의 작품을 발표하며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노통브는 잔인함과 유머를 탁월하게 다루며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로 이름이 높다. 그러나 아버지 파트리크 노통브의 삶을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이 책, 『첫 번째 피』에서는 평소의 노통브와는 조금 다른 문장을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은 노통브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바치는 가장 개인적이고 애틋한 애도와 같은 책으로, 그 방식은 매우 특별하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어서〉, 즉 일인칭 관점으로 이야기를 쓴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아버지 파트리크 노통브의 삶을 이어나가는 이 책은 글쓰기 속에서 상실한 존재의 삶과 기억, 존재를 가장 빛나는 방식으로 되살리며 우리에게 또 다른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소설은 아버지 파트리크 노통브가 머리에 들이밀어진 총구 앞에서 지나온 삶의 풍경을 회고하면서 시작된다. 외교관인 그는 1964년 콩고 인질극 사건에서 1천5백 명이나 되는 인질들과 자기 자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죽음의 위기 앞에 서 있다. 그가 돌아보는 인생은 폭력과 사랑, 농담과 눈물, 그리고 찬란할 정도로 강력하고 격렬한 생명력 그 자체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은 언제나 삶 속에 매복해 있는 상실과 죽음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관한 노통브의 경쾌한 화답이자, 삶을 향한 눈부신 용기가 되어 줄 것이다.
아니, 나는 내 죽음이라는 불의를 거부한다.
- 9면
열두 명의 집행자가 총을 들고 나를 조준한다. 눈앞에 지난 삶의 각 순간이 줄지어 지나가는 게 보이느냐고? 내가 느끼는 유일한 것은 하나의 놀라운 혁명,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각 순간은 한없이 분할될 수 있다. 죽음은 나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현재의 단단한 핵 속으로 뛰어든다.
- 9면
나는 절망적인 사랑으로 내 어머니를 사랑했다. (……) 나는 그녀를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분석해 내지 못한 상냥함과 실망감이 동시에 묻어나는 표정을 지으며 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녀가 내게서 죽은 남편의 모습을 되찾길 원했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 17면
어머니가 나를 두고 집을 나섰을 때, 나는 슬픈 만큼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어머니도 나처럼 이런 이중적 감정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슬펐다. 어머니는 날 안아 주고는 나를 향해 낙담의 눈길을 던진 다음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어머니의 하이힐이 나를 사랑으로 병들게 하는 멋진 소리를 내며 점점 멀어져 갔다.
- 20면
큰 아이들이 돌풍처럼 몰려와 공동 침실을 점령했다. 도대체 몇 명인지, 그들의 수가 엄청 많게 느껴졌다. 그만큼 그들은 시끄러웠고 부산스러웠다. 마치 방문객의 혼을 빼놓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겉늙고, 야위고, 거칠고, 누더기를 걸친 노통브 집안의 아이들은 나를 보고는 사냥개들이 사냥감을 덮치듯 달려들었다.
- 45면
나는 운 좋게 손에 넣은 빵 조각을 갉아 먹으며 할아버지를 관찰했다. 그는 우아한 정장을 차려입고 자신에게 매료된 부인과 장성한 자식들에게 아주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그는 극단적인 다윈주의 외에는 어떠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누더기를 걸친 채 식탁 반대편에 앉아 있는 비쩍 마른 아이들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 51면
바로 그때, 아주 가까운 숲에서 올빼미 한 마리가 울어 댔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 울음소리는 내 가슴을 찢어 놓았다. 만일 그곳에 도착한 이후로 느낀 것을 표현해야 한다면, 황홀감과 구조 요청을 섞어 외치는, 너무나 순수한 그 울음소리를 택했을 것이다. 나 역시 구분하기가 불가능한 똑같은 감정들을 느꼈으니까.
- 56면
그 책을 읽고 또 읽다가 「취한 배」라는 제목이 붙은 장시(長詩)에서 내 영혼을 비틀어 놓는 일련의 시구들을 찾아냈다.
내 하나 탐하는 유럽의 물이 있다면,
향기로운 석양 무렵, 깊은 슬픔에 잠긴
한 아이가 쪼그려 앉아 5월의 나비처럼 가냘픈
배를 띄우는 검고 차가운 플라슈야
그 물웅덩이,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숲속에 감춰진 이름 없는 실개천이었다. 가물지 않을 때라 아르덴 숲 곳곳에 개천이 흘렀다. 하지만 느리고 슬프게 흐르는 그 개천, 내가 홀로 찾아가곤 했던 그 개천은 나의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플라슈〉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 106면
8월 6일, 20세기에 가장 큰 규모의 인질극으로 남을 사건이 시작되었다. 반군들이 도시를 점령하고 그곳에 거주하던 백인 1천5백 명을 인질로 잡았다. 스탠리빌의 새 주인들은 킨샤사 정부에 그들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질을 모두 처형하겠다고 통고했다. (……) 결단코, 절대 담판 중에 침묵이 자리 잡게 내버려둬서는 안 되었다. 내가 입을 다물면 그들도 입을 다물었고, 거의 곧바로 방아쇠의 악마가 깨어났다. 천성적으로 오히려 말이 없는 편인 나는 수다쟁이가 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새로운 셰에라자드였다. 나의 말재주에 내 동포들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 161~162면
전날 받았던 모진 학대를 면제받기만 해도 나는 나를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묘하게도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인 마조히즘과 뒤섞여 더 복잡해질 수 있는 색광증의 변종이다. 사랑에 빠지는 인질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으로 편집증적인 장애를 일으키는 사람이다.
- 172면
그베니에 대통령이 그 책을 한창 다시 읽고 있는 나를 보고는 물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읽고 있소, 영사 선생?」
나는 그에게 표지를 보여 주었다.
「『위험한 연민』이라…… 아름다운 제목이로군.」 그베니에가 말했다.
「그렇죠?」
「안심하시오. 때가 오면 우리에게 연민은 없을 테니까.」」
- 174면
사람들은 우리 모두에게 그 유명한 〈카르페 디엠〉을 가르친다. 우리가 아무리 고개를 끄덕여도 부질없다.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스탠리빌에서 그것을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을 청하고, 숨을 쉬고, 시큼한 새똥 냄새를 맡고, 실재하는 세계를 바라보고, 허공에 귀를 기울이며 기뻐하는 기회가.
- 179면
나는 가끔 털어놓기 어려운 환상을 품었다. 그베니에가 와서 모든 게 연극이었고, 이제 그 연극은 끝났다고, 우리는 모두 자유고, 단 한 번도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형이상학적인 게임을 한 것뿐이라고 말하는 환상을. 하지만 내 눈앞에서 사살된 인질들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내 몽상을 무참하게 깨버렸다.
- 184면
나는 죽음을 철저히 겪고, 그것을 내 젊음으로 안아 줄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경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지에 도달했다. 나아가 운명을 사랑하는 경지까지. 나는 내게 닥치는 것을 사랑한다. 절대적인 나의 무지(無知)까지도 사랑한다. 그게 죽음으로 들어가는 올바른 방식이 아닐까?
- 190면
나는 살아 있고,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얼마나? 2분, 두 시간, 50년?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 나는 그 의식을 영원히 간직하길 희망한다.
- 190면
◆ 프랑스 4대 문학상 〈르노도상〉 수상
◆〈프레미오 스트레가 에우로페오상〉수상
◆ 전 세계 40만 부 판매 베스트셀러
아멜리 노통브의 독자들도 읽어 보지 못한 종류의 소설이자,
독자들이 기다려 온 가장 핵심적인 책. - 「라 그랑드 리브레리」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질극 실화를 바탕으로
유쾌하게 삶의 아이러니를 파고드는
〈블랙 코미디의 대가〉 노통브가 그려 낸 빛나는 걸작
아니, 나는 내 죽음이라는 불의를 거부한다. - 9면
살아 흐르는 〈피〉를 보면 정신을 잃는 독특한 약점을 지닌 스물여덟의 벨기에 외교관 파트리크 노통브. 그는 1964년 콩고의 한 호텔에서 인질극 참사를 지연시키기 위해 셰에라자드처럼 끝없이 말을 늘어놓아야 하는 위기를 맞게 된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어째서 〈피〉를 보면 정신을 잃는 것일까? 마침내 그의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지자, 지나온 삶의 풍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기 시작하는데…….
『첫 번째 피』는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질극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기상천외하고 기묘한 시트콤 같은 에피소드와 긴장감 넘치는 극적인 역사 사건을 짜임새 있게 가로지른다. 파트리크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의 아이러니한 쾌감인 〈불손한 기쁨〉을 느낀다. 아버지의 죽음과 마치 맞바꾸듯 태어났기 때문이다. 기억 속 가장 괴이하고 강렬한 시기는 일찍이 전쟁 중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가 나고 자란 곳, 바로 노통브 가문의 가족이 거주하고 있는 퐁두아성에서 보낸 유년 시절이다. 그곳에서는 가장 나이 많은 이가 가장 많은 음식을 차지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거의 굶는 지경에 이른 기이한 〈다윈주의〉속에서 거칠게 〈살아남아야〉만 한다. 마치 사냥개들처럼 먹을 것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에게 달려드는 괴팍하고 우스꽝스러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될까?
속도감 있게 넘어가는 전개 속에서 노통브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삶의 아이러니를 〈블랙 코미디의 대가〉답게 유쾌하게 파고든다. 또한 잔인함과 부드러움, 폭력과 사랑, 농담과 눈물을 교차시키는 가운데 〈피〉에 얽힌 기묘한 상징을 의미심장하게 엮어 나가며 독자의 흥미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웃음이 날 정도로 부조리한 폭력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노통브는 특유의 간결하고 경쾌한 문체와 유머로 깊숙이 찔러 우리에게 또 한 번 놀라움을 선사한다.
옮긴이의 한마디
작가가 글쓰기를 통해 상실의 아픔을 준 존재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멜리의 경우에는 위에서 말했듯 방식이 독특하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어서〉, 다시 말해 일인칭 관점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쓴다.『갈증』에서 예수에 빙의해 이미 실험한 바 있는 이 방식은, 열두 살 때 겪은 비극적 사건 이후로 죽음에 사로잡힌 작가가 사라진 존재와 나누려는 〈영적인 소통〉의 열망,
그리고 역설적으로 삶이 주는 쾌감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장치로서 작동한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성향은 대개 검은색을 띠는 유머와 함께 작가의 작품 세계를 특징짓는 주요한 기제 중 하나다.
지금 바로 살아 숨 쉬는 〈현재〉를
감각하는 가장 생생하고 강렬한 시간
나는 살아 있고,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얼마나? 2분, 두 시간, 50년?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 나는 그 의식을 영원히 간직하길 희망한다. - 190면
〈살아 있음〉의 감각은 언제 가장 생생해질까? 수많은 이들이 〈카르페 디엠〉을 외치지만, 삶 속에서 〈현재〉를 느낀다는 것은 쉽지 않지 않다. 작품의 후반부는 인질극의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한 〈현재〉로 돌아온다. 그는 어느 때보다 복잡한 아이러니에 처해 있다. 평생 말수가 적었던 그가 〈말〉을 무기로 하는 외교관으로 부임해 오로지 끊임없이 〈말〉을 반복하여 참극을 막아야만 하는 아이러니와, 인질과 반군 사이의 묘한 역학 관계가 만들어진 나머지 〈모진 학대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역설적인 마조히즘의 쾌감을 느낀다는 또 다른 아이러니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아이러니는 머리에 겨누어진 총구 앞에서 〈삶〉을 향한 애정이 팽창한다는 것이다. 〈스탠리빌에서 그것을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을 청하고, 숨을 쉬고, 시큼한 새똥 냄새를 맡고, 실재하는 세계를 바라보고, 허공에 귀를 기울이며 기뻐하는 기회가.〉(179면) 노통브는 실제 역사적 사건을 활용하여 극렬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자유롭게 사실과 허구를 가로질러 이야기를 넘나들며, 재기 넘치는 역설과 유머를 놓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삶과 현재, 살아 있음의 시간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삶 속의 중요한 현재라는 시간을 눈앞에 다시 펼쳐 보인다. 〈살아남고자 하는 격렬한 열망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전언처럼, 죽음만큼이나 확실하고 맹렬한 〈살아 있음〉의 힘에 주목하는 이 책은 다시 〈현재〉를 살아갈 우리에게 〈살아 있음〉그 자체의 의미를 찬란하게 되돌려준다.
작가정보
Amélie Nothomb
잔인함과 유머가 탁월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현대 프랑스 문학계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벨기에 출신의 작가. 본명은 파비엔 클레르 노통브로, 1967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으며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중국, 미국,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스물다섯 살에 발표한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1992)이 〈천재의 탄생〉이라는 비평계의 찬사를 받으며 단번에 10만 부가 판매되는 성공을 거뒀고, 이후 노통브의 작품은 발표될 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1999)으로 프랑스 학술원 소설 대상을 받으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그 외에도 르네팔레상, 알랭푸르니에상, 자크샤르돈상, 르노도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해마다 하나의 작품을 발표해 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2015년 벨기에 왕국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현재 브뤼셀과 파리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 가는 중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 프랑스어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릴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출강한다. 『측천무후』로 제2회 한국 출판문화 대상 번역상을, 『베스트셀러의 역사』로 한국 출판 평론 학술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아멜리 노통브의 『비행선』, 『갈증』, 『너의 심장을 쳐라』, 『추남, 미녀』, 『느빌 백작의 범죄』, 『샴페인 친구』, 『푸른 수염』, 『머큐리』,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 델핀 쿨랭의 『웰컴, 삼바』, 파울로 코엘료의 『11분』,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지옥 만세』, 조르주 심농의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 『교차로의 밤』, 『선원의 약속』, 『창가의 그림자』, 『베르주라크의 광인』, 『제1호 수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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