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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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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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시인은 ‘다정’이란 “좋은 기억에도 정을 주지만 나쁜 기억에도 정을 주”는 일이자 “살아 있는 존재에게도 마음을 주지만 죽은 존재에게도 마음을” 주는 일이 아닐까 하고 정의한 바 있다. 그 말마따나 정다연 시인이 기록하는 ‘다정’은 단순히 좋았던 기억들에 국한되지 않고, ‘서로를 잃을까봐 하지 못했던 말들’이나 우리를 “가볍고 연약하게 흔들”리게 만드는 순간들에도 온기를 내어주면서 “일상이 우리를 짓누르는 누름돌이 아니라 세상으로 뻗은 힘센 닻이라는 비밀”(우다영)을 전하며, 우리 삶을 반짝이게 해주는 사랑의 순간들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속삭인다. 이것이 『다정의 온도』가 전하는 진정한 ‘다정’이다.
“서로를 잃을까봐 하지 못했던 말들 때문에
오히려 서로를 잃게 된 거라면
이제는 마음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싶어”
사랑하려고 한 게 아닌데 사랑하게 된다면
빈티지
시인은 어딘가 좀 슬픈 사람
겨울을 건너가는 법
윤주에 대하여
일상의 권리
꽃 한 송이
딸과 엄마
계수나무
중림동 시절
선물하는 기쁨
그래도 그래도
그림 그리러 가는 길
괜찮아 나도 그랬는걸
시 창작 교실
서유리 찾기
분갈이
여름 식탁
블루베리 따기
진심으로 순수하게
버리는 마음
손끝 물들이기
1989년 3월 5일
굳는 자세
내가 사랑하는 문진
뒤돌아보기
봉기의 결혼식
내 글은 공룡
거꾸로 입은 바지
루루와 콜린
사랑하는 것을 아끼는 사람의 이야기
미니어처 하우스
좋아한다고 해서 믿는다는 건 아니야
경주 산책
경주 산책-3323년
지하철 작업실
은행나무
내가 사는 동네
내 글은 공룡
영원히 자고 싶어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꽉 잡으며 나아갔다
몸의 용도
엽서들
꽃님과 나
괜찮다는 느낌
크리스마스의 기억
조금 더 껴안아줄걸
고요한 집
한 그루와 두 그루
생일 축하해, 미린 언니
남천나무
같이 살자는 마음
닫으며 첫 눈뜸
슬픔이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슬픔과 걸어갈 방향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런 날이면 슬픔이 한 겹 덧씌워진 눈으로 세상에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_「시인은 어딘가 좀 슬픈 사람」, 23-24쪽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것이 불확실해지지만 여전히 내가 믿고 있는 하나의 진실이 있다. 한 사람의 불완전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의 불완전함도 사랑해줄 수 있다는 것.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몰찬 사람들을 수없이 봐왔으니까.
_「윤주에 대하여」, 32-33쪽
엄마는 화장실에서 양치질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대체 왜! 엄마는 화장실을 가장 세균이 많은 곳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부엌에서 양치질을 고수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중심에 상대방을 끌어들이기보다는 다름을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곳에 같이 있지 않고 늘 따로 부엌과 화장실에 놓인 칫솔처럼. 위태롭지만 재밌기도 한 엄마와의 동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다.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많이 싸웠지만, 그 다름으로 인해 웃고 기뻐하는 날이 곱절은 많길 바라본다.
_「딸과 엄마」, 50-51쪽
끝으로 잊고 싶지 않은 유리의 말을 이곳에 나누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 나여야만 한다는, 유일한 말이다.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당신도 들었을지 모르는 바로 그 말.
(……) 사랑해. 나의 단짝. 나 말고 다른 단짝 생기면 안 돼. -유리가
_「서유리 찾기」, 93쪽
촛농이 타고 스스로 꺼진 자리. 매끄럽지만 울퉁불퉁한 표면을 만져보았다. 뜨겁지 않을까 싶었는데 따뜻한 온도가 느껴졌다. 이제 막 새로운 모양을 다 만든 참이라는 듯이. 하나의 사물이 만들어낸 끝. 그 끝이 따뜻했다는 게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면 허무맹랑해 보일까. 어떤 일의 끝이, 무언가가 떠나고 딱딱하게 굳은 자리가 매번 따뜻할 리 없지만, 이토록 따뜻하기도 하다는 것.
_「굳는 자세」, 134-135쪽
믿음이란 얼마나 많은 계절을 견딘 단어인지, 밤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불 위에서 장난치기도 하고 먹음직스럽게 익은 고구마를 나누어 먹기도 하는 그 평범한 일상과 수많은 밤과 낮이 모였을 때 마침내 우리는 같이 걸을 수 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먼 곳까지. 그곳이 가본 적 없는 길이라 해도.
_「좋아한다고 해서 믿는다는 건 아니야」, 177쪽
사실 선생님도 사는 거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아직도 가끔 영원히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해. 그렇지만 자꾸 깨어나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 궁금한 게 하나 생겼거든.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온전히 기쁠 수 있는지,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지 기다려보고 싶어. 잠으로 도망치지 않고 삶과 대면하면서.
_「영원히 자고 싶어요」, 213쪽
이삿날 엄마는 오늘을 기념하고 싶다며 케이크를 사 왔다. 조각마다 맛이 다른, 그래서 콕 집어 어떤 맛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케이크 하나를. 어수선한 거실에 둘러앉아 우리는 어둠 속에서 초를 밝혔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가 혼자서도 오롯이 설 수 있길 기도했다. 블루베리 맛, 치즈 맛, 고구마 맛, 생크림. 색도 맛도 다른 그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_「고요한 집」, 247쪽
아직은 누군가와 함께 살기로 했다는 게 실감이 나지는 않는다. 대단한 결심이 섰다거나 완전하게 한 사람에 대한 확신이 들어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불완전한 우리이지만, 함께 있을 때만큼은 아슬아슬한 세상 위에서 균형을 잡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중심을 잃어도 붙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는 걸 떠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앞으로 윤주와 맞이할 날들이 기대된다. 한 사람이 넘어져도 그 사람을 일으키고 먼지를 툭툭 털어줄 두 손이 우리에게는 있으니까.
_「같이 살자는 마음」, 266쪽
윤주는 과일을 사러 잠시 외출했고, 함께 베개를 베고 잠들었던 밤이가 눈을 떴다. 검고 깊고 투명한 눈. 밤이를 품에 안고 콧잔등에 입맞춤하다가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볕을 쬐는 잠깐이 행복해서 밤이에게 무심코 말했다. 밤이야, 살아 있어서 참 좋지. 그치?
_「닫으며 : 첫 눈뜸」, 267-268쪽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 채로도 꽤 괜찮다는 느낌,
내가 나여서 온전히 기쁜 날들
정다연 시인은 자신을 ‘세상에 사랑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그에 반해, 사랑하는 것들에 다정했던 것과 달리 스스로에게는 그러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잊고 싶은 게 많”아 “누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엎드려” 자곤 했으며, 깨어서는 “마음이 너무 시끄러워” 차라리 “영원히 자고 싶”다고 꿈꾸기도 했다고, 지금도 종종 “사는” 걸 “좋아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고. 그때 시인을 붙잡아준 것은 앞서 달려 나가다 가만히 뒤돌아 자신을 기다려주는 반려견 밤이, 가느다란 온기를 건네며 담담히 곁에 머물러준 이들이었다. 자신조차 몰랐던, 자기 안의 가능성을 믿어준 이들. 너는 너이고 나는 나여도 괜찮다고 조곤조곤 속삭이며 온기를 나눠주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은 다시 설 수 있다는 것을 시인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릴 적의 자신처럼 “영원히 자고 싶어요”라고 털어놓는 학생에게 시인은 이제 이렇게 말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온전히 기쁠 수 있는지” “그런 날이 올지 기다려보고 싶”다고.
이는 다정한 누군가가 내어준 온기에 의지하는 데서 나아가, ‘다정의 온도’를 자기 자신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다짐의 말이자, 시인이 사랑하는 온갖 사람들, 동식물들, 사물들에게 더 다정하기 위한 선언의 말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더 많은 슬픔과 기쁨을 허락할 때라야 타인에게도 세상에게도 좀 더 친절해질 수 있”으며, 내가 나 자신인 채로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을 허락할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도 다정해져야 하니까. “한 사람의 불완전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의 불완전함도 사랑할 수 있”듯이 말이다.
『다정의 온도』는 시인이 건져낸 온갖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기록임과 동시에, 사랑하는 것들이 시인을 어떻게 성장시켰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이들이 있기에 시인은 “슬픔이 다가”와도 멈춰 서지 않는다. “슬픔과 걸어갈 방향”만큼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여기며 “신발 끈을 고쳐” 매고 다시 걸어갈 준비를 한다. 그 씩씩한 뒷모습에서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슬픔의 미래 또한 작고 빛나는 일상일 것이라는 사랑스러운 믿음으로”(안미린).
작가정보
작가의 말
친애하는 친구들, 까마득히 잊고 있던 과거를 되찾아준 사물들, 세상을 고유한 몸짓으로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존재들……. 덕분에 오늘 내 자리에 빛이 든다는 걸 안다. 때때로 삶이 차갑고 쓸쓸하게 느껴질 때조차 그 온도를 받아들일 수 있다. 바라건대 나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좀 더 다정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의 단 한 줄이라도 그 일에 요긴하게 쓰인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_「시작하며 : 다정의 온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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