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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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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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라곤 없는 자신만의 삶으로.”
조경란 소설세계의 기원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두 작품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데칼코마니
1. 식빵/ 2. 브리오슈/ 3. 크루아상/ 4. 화이트케이크/ 5. 꽃잎/ 6. 창/ 7. 소보로빵/ 8. 소금/ 9. 편지/ 10. 외출/ 11. 사과파이/ 12. 흑백사진/ 13. 동물원/ 14. 크레이프/ 15. 낫/ 16. 다시, 식빵
가족의 기원
변명들/ 거짓말의 여운 속에서/ 식물의 눈/ 저녁의 지도
해설|가족의 ‘양막’을 찢어내고 홀로서기
염승숙(문학평론가)
당신. 이제 당신에게 식빵 이야기를 하고 싶어.
식빵은 모든 빵의 기초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식빵을 잘 만들면 다른 종류의 빵들도 비교적 손쉽게 만들 수 있다고 해. 식빵은 다른 첨가물이 전혀 안 들어간 유럽풍의 정통 빵으로서 포근한 느낌이 그 특징이야. 자른 표면의 기포 구성이 자잘하고 크기가 일정해야 하며 껍질이 부드러우면서 부위별로 고른 색깔이 나야 잘 구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어. 다가오는 이 계절만 지나면 나는 꼭 서른 살이 되지. 더이상 어리지 않다는 거, 그건 참으로 말할 수 없이 야릇한 기분일 거야. (『식빵 굽는 시간』, 9쪽)
그 무렵의 어머니는 삶에 대해 그 어떤 미련도 없는 성싶어 보였다. 어머니와 나는 간혹 거실에서 마주치고는 하였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에게서는 내가 함부로 소리 내어 물어볼 수 없는 비장한 슬픔 같은 게 느껴지고는 했다. (…)
어머니는 몸속에 번지고 있는 암세포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늘상 이곳이 아닌 저기 어디 먼 곳에 시선을 두는 시간이 많았다. 마치 자신의 모든 생生을 부정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올라가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가장 선명한 모습이다.(『식빵 굽는 시간』, 30쪽)
일 년 전 여름에 만났던 우리는 그해 여름에 헤어졌다. 스물일곱번째 여름이었고 나는 내년 여름이면 또 어떤 식으로든 지금과는 다르게 변해 있을 내 모습을 낯설게 상상하고 있었다. 사루비아꽃처럼 활활 타오르던 여름이었다.(『식빵 굽는 시간』, 106쪽)
이제 곧 나는 서른 살이 될 터였다. 마치 열아홉이나 스물아홉처럼 서른이란 나이는 그렇듯 아무렇지 않게 찾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이제, 혼자가 되어서. 사람들은 모두 걸어가야 한다. 지도라곤 없는 자신만의 삶으로.(『식빵 굽는 시간』, 160쪽)
사람들은 언제 무슨 일로 집을 떠나게 될까. 나는 그동안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연스러운 때가 있을 거라 무턱대고 믿어온 사람처럼.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두 가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 첫번째는 내가 가족과 사는 집을 언제 떠나야 하는지 알지도 결정하지도 못한 것이고, 두번째는 내가 선택한 사랑일 것이다.(『가족의 기원』, 163쪽)
나는 한마디 말도 없이 물을 마시고 식사를 했다. 식사중에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다가도 그만 입을 다물게 돼버렸다.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고 누구도 웃지 않았다. (…) 그러나 우리 가족 모두, 밥을 챙겨 먹는 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불을 켜지 않는 어두운 거실과 육중한 침묵 속의 식사에 익숙해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식탁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언제나 엄마였다. 엄마는 가족들이 흩뜨려놓은 음식과 식기들을 정리했고 의자를 나란히 밀어놓았다. 엄마는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럴 때의 엄마는 언제 경매로 넘어갈지 모르는 이 집을 그 무거운 체중으로나마 고집스레 꾹꾹 누르고 있는 성싶어 보였다.(『가족의 기원』, 201~202쪽)
“큰언니, 우린 가족이잖아. 게다가 언닌 맏딸이기도 하고.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느냔 말야.”
“……”
나는 다시 마음이 일렁이는 것을 느낀다. 한집에 기거하고 한방에서 같이 잠잔다고 해서 모두 가족이라 부를 수는 없다. 오랜 기간 한 공간 안에서 함께 먹고 잠자는 죄수들은 그들 스스로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걸 너는 아니, 정수야?(『가족의 기원』, 259쪽)
마지막으로 사이드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탁상용 달력을 접어넣는다. 유월의 달력 그림은 푸른 새 한 마리였다. 날개를 반쯤 펼친. 이제 그와 나는 같은 달력을 보고 있지 않다. 서로의 앞에 펼쳐진 새로운 날짜들이 있을 뿐. 그것만큼은 옥탑방을 떠나올 때와 확연히 다른 한 가지 사실이다.(『가족의 기원』, 332쪽)
2024년 이상문학상 그리고 김승옥문학상을 거머쥔 등단 28년 차 소설가 조경란의 초기 대표작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을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제33권으로 엮어 선보인다. 『식빵 굽는 시간』은 1996년 제1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으로, 바로 그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갓 데뷔한 신인이었던 작가가 써낸 첫 장편소설이다. 그로부터 3년 후, 두번째 장편소설 『가족의 기원』을 세상에 내놓은 그는, 첫 장편소설에 주어졌던 “독자를 사로잡는 작가 특유의 아우라를 경험케 한다” “‘생략과 속도’의 기법 활용이 탁월하다” “문체가 안정되고 세련돼 있다” 등의 찬사를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한번 체감케 하는 동시에, 첫 장편의 연장선상에서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해나갔다.
“누가 나를 신세대 작가라고 규정하면 나는 싫어할 것”(문학동네작가상 수상 인터뷰)이라고 답했던 패기 넘치는 신인 시절을 지나, 조경란은 삼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하나의 수식어로 고정되기를 거부하며 작가적 역량을 갱신하는 중이다.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두 작품은 서른을 앞둔 일인칭 여성 화자가 ‘나’를 둘러싼 세계와 투쟁하고 불화하며 자기 자신을 탐구해가는 여정을 그린다.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의 장정을 입은 두 소설을 다시 그리고 함께 읽는 일은 가족에서 파생한 자아 찾기에 천착해온 작가의 뿌리에서 출발해, 한 소설가가 착실히 축적하고 확장해나간 세계의 지형도를 가늠하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식빵 굽는 시간』에는 베이커리 창업을 꿈꾸는 주인공 ‘여진’이 빵을 굽는 장면이 삽화처럼 끼어 있다. 작품 전반에 은은하게 배어 있는 달콤한 빵냄새는 가족을 잃고 홀로 남겨진 ‘여진’의 상황과 대비를 이루며 그 황량한 내면을 부각한다. 그러나 알맞은 온도에 이르렀을 때 부풀어오르는 식빵의 시간처럼, 여진의 쪼그라든 자아 또한 “인생의 불안한 한 시기”(75쪽)를 통과하는 사이 서서히 부피감을 띠게 된다. 『가족의 기원』은 경제적 몰락으로 와해되어가는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기만의 방’을 갖고자 하는 ‘정원’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가 집을 떠나 머무는 ‘호수장 삼백육호’ ‘한신연립주택 이백팔호’는 안주하지 못하고 떠도는 정원의 처지를 대변하지만, 자신이 의탁하고 있던 대상에 하나씩 이별을 고하는 서사 속에서 언젠가 스스로의 힘으로 서게 될 미래를 예감할 수 있다.
*
각각의 소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일인칭 화자 ‘여진’과 ‘정원’은 서른을 앞둔 미혼 여성으로, 음울하지만 예리한 시선으로 세계 한가운데에 위치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깊고 어두운 내부로부터의 침잠 끝에 다시금 뜻밖의 방향을 찾아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그들 곁에 있는 가족 또는 연인이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에 기여하는 동시에 ‘나’를 완전히 파괴하려 드는 익숙한 타자라는 사실과 처절히 대면하고 있다. 지극히 사사로운 애정을 주고받으며 질기고도 억센 고통을 수반하는 관계, 끊으려야 끊어지지 않는 불완전한 사랑의 굴레에서 그들은 매달리고 신음하다가 기어이 탈주한다. 그러니 서른의 초입에 다다른 여진과 정원의 서사는 그 자체로, 물리적인 성장이 멈춘 이후 또 한번의 정신적인 성장을 도모하여 ‘자기만의 방’을 찾아 떠나는 모험담에 대한 은유다. _염승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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