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곤잘레스의 기독교 사상사
2024년 12월 10일 출간
- eBook 상품 정보
- 파일 정보 ePUB (3.42MB)
- ISBN 9791192914473
- 지원기기 교보eBook App, PC e서재, 리더기, 웹뷰어
-
교보eBook App
듣기(TTS) 가능
TTS 란?텍스트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술입니다.
- 전자책의 편집 상태에 따라 본문의 흐름과 다르게 텍스트를 읽을 수 있습니다.
- 이미지 형태로 제작된 전자책 (예 : ZIP 파일)은 TTS 기능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쿠폰적용가 31,500원
10% 할인 | 5%P 적립이 상품은 배송되지 않는 디지털 상품이며,
교보eBook앱이나 웹뷰어에서 바로 이용가능합니다.
카드&결제 혜택
- 5만원 이상 구매 시 추가 2,000P
- 3만원 이상 구매 시, 등급별 2~4% 추가 최대 416P
-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추가 최대 200원
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서론
제1부 초대부터 칼케돈 공의회까지
제1장 기독교의 요람
유대 세계
그리스-로마 세계
제2장 사도 교부들의 신학
로마의 클레멘트
디다케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스미르나의 폴리갑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
바나바 서신
헤르마스의 『목자』
사도 교부 시대의 다른 기독교 문헌
개관
제3장 그리스의 변증가들
아리스티데스
순교자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
아테나고라스
안디옥의 테오필루스
헤르미아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서신
사르디스의 멜리토
개관
제4장 초기의 이단: 도전과 반응
기독교의 “유대화”
영지주의
마르키온
몬타누스주의
단일신론
반응
제5장 초대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 학파: 클레멘트와 오리겐
제6장 3세기의 신학
히폴리투스
노바티안
키프리안
오리겐 이후의 동방 신학
사모사타의 바울
올림푸스의 메토디우스
오리겐주의 신학
제7장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 공의회
제8장 니케아 공의회 전후의 신학
아타나시우스의 신학
위대한 카파도키아 교부들
카이사레아의 바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닛사의 그레고리
서방의 삼위일론
제9장 기독론 논쟁
기독론의 세 가지 유형
아폴리나리스
네스토리우스 논쟁과 에베소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
제10장 사도적이었는가, 배교였는가?
제2부 중세 신학
제11장 어거스틴의 신학
마니교
어거스틴의 회심
도나투스 논쟁
펠라기우스주의
인식론
하나님
창조
악
자유의지
원죄와 타락한 인간 본성
은혜와 예정
교회
성례전
역사의 의미
종말론
제12장 어거스틴 이후의 서방 신학
어거스틴의 신학과 관련된 논쟁: 은혜와 예정
오로시우스와 프리실리아누스주의
보에티우스, 그리고 보편개념의 문제
카시오도루스
대 그레고리
세빌랴의 이시도루스
제13장 제4차에서 제6차 세계공의회까지의 동방 신학
기독론 논쟁의 계속
위-디오니시우스
고백자 막시무스
네스토리우스 신학의 발달
단성론의 확장
이슬람의 진격
제14장 카롤링거 르네상스
예정론 논쟁
성찬 논쟁
“성자에게서”(Filioque)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개별 참회의 발달
교황 권력의 성장
제15장 12세기: 어둠이 걷히다
11세기
12세기 르네상스의 선구자 캔터베리의 안셀름
아벨라르
생 빅토르 학파
피에르 롱바르
12세기의 그 외의 신학자들과 학파들
12세기의 이단과 분파주의
제16장 이슬람 정복 이후의 동방 신학
제4차 십자군 시대까지의 비잔틴 신학
초기 러시아 신학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의 비잔틴 신학
후기 러시아 신학
비-칼케돈 기독교
제17장 13세기
총론
대학의 발달
아리스토텔레스 및 아랍 철학과 유대 철학의 도입
13세기 어거스틴 전통
도미니크 학파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제18장 중세시대 후기의 신학
둔스 스코투스
유명론과 공의회 수위설
중세 말의 신비주의
그 외의 개혁 시도
제19장 새벽인가, 황혼인가?
제3부 종교개혁 시대부터 현재까지
제20장 한 시대의 끝
민족주의 정서의 성장
교황권의 권한 쇠퇴
신비주의: 하나의 대안
유명론의 영향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자들
제21장 마틴 루터의 신학
신학자의 임무
하나님의 말씀
율법과 복음
인간의 상태
새 창조
교회
성례전
두 왕국
제22장 울리히 츠빙글리와 개혁주의의 시작
섭리와 예정
율법과 복음
교회와 국가
성례전
제23장 재세례파와 급진 종교개혁
초기 재세례파 운동
혁명적 재세례파
재세례파 운동의 후기 현상
유심론자들과 합리주의자들
제24장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인간의 상태
율법의 기능
예수 그리스도
대속(代贖)과 칭의
예정
교회
성례
교회와 국가
칼빈의 신학의 의의
제25장 영국의 종교개혁
성공회 개혁
제26장 가톨릭 종교개혁 안의 신학
개신교 반대 논쟁
도미니크회의 신학
예수회 신학
은혜와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
트렌트 공의회
제27장 개신교 정통신앙과 경건주의
필립 멜란히톤의 신학
루터파 내의 논쟁
루터파 정통신앙
루터교 정통신학에 대한 간략 설명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
칼빈파 정통주의
프랑스의 칼빈주의
스코틀랜드의 칼빈주의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운동
제28장 19세기 개신교 신학
배경: 변화하는 철학 환경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헤겔의 철학
키르케고르의 신학
리츨의 신학
옥스퍼드 운동
역사 강조
제29장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가톨릭교회 신학
교황권 문제
교회와 현대 세계
제30장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의 동방교회 신학
그리스정교회의 신학
러시아의 신학
네스토리우스주의 신학과 단성론 신학
제31장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의 신학
새 출발: 칼 바르트의 신학
루돌프 불트만과 비신화화
그 외의 유럽 개신교 신학의 조류
미합중국의 개신교 신학
가톨릭 신학의 새로운 지향
제3 세계 신학
마지막 개관
제1부
초대부터 칼케돈 공의회까지
제1장
기독교의 요람
누가복음에 반영된 전승에 의하면, 기독교가 구유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우리는 종종 이 장면을 차분한 색조의 그림으로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그 구유의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평온하지 않았다. 요셉과 마리아는 고향의 경제 상황과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구 조사령 때문에 다윗의 동네로 갔다(눅 2:1). 이 인구조사의 목적은 세금 징수에 있었고, 구유 주변의 세계에는 불평이 비등했다.
간단히 말해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일부가 되려 하신 하나님의 메시지로서 존재해왔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천상의 영원한 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상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이다. 기독교 신앙은 성육신이며,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구에서는 간략하게나마 기독교가 태어나서 첫걸음을 취한 세계를 묘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유대 세계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의 유대 사회에서 발흥했다.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과 함께 살다가 죽었다. 그분의 가르침은 유대인의 세계관 안에서 형성되었고, 그의 제자 역시 유대인으로서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후일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여행할 때 회당에서 유대인들 가운데서 사명으로 시작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독교가 태어난 유대 사회의 상황과 사상을 개관하면서 기독교 사상사를 시작해야 한다.
팔레스타인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그곳을 약속의 땅이라고 생각한 민족은 많은 불운을 겪었다.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에서 아시리아, 아라비아에서 소아시아로 가는 통로였기 때문에 항상 근동 지방에서 발흥한 대국들의 제국주의적 탐욕의 대상이 되었다.
수 세기 동안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이 좁은 땅을 둘러싸고 싸웠다. 아시리아 다음의 바빌론도 팔레스타인을 물려받아 결국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일부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페르시아의 키루스(Cyrus)는 바빌론을 정복한 후에 포로들의 귀환을 허락하고, 팔레스타인을 제국의 일부로 삼았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페르시아 제국을 합병했는데, 마케도니아 총독들이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게 되었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가 사망한 후 20년이 넘도록 불안한 시대가 지속했다. 그 시기가 끝날 무렵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은 힘을 합쳤지만, 백 년 이상 알렉산더의 장군들에서 생겨난 두 가문이 팔레스타인 및 인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결국 셀류커스 왕조가 우위를 차지했지만, 마카비 왕조나 하스모니아 왕조의 주도하에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획득했고, 얼마 후에 정치적 독립을 얻었다. 그러나 독립은 시리아의 내분 때문에 가능했고, 새로운 강대국 로마가 등장하면서 독립은 사라졌다. 기원전 63년에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성전을 더럽히고 지성소에까지 들어갔다. 그 이후로 팔레스타인은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주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
로마 지배하의 유대인들은 매우 다스리기 어려웠는데, 이는 만군의 주 앞에서 다른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의 종교의 배타성 때문이었다. 정복한 민족의 국가적 특징을 존중하는 정책을 추구한 로마는 유대인의 종교를 존중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의 많은 당파가 로마에 반역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총독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인기를 얻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애국 투쟁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유대인 민족정신의 상징이요 울타리가 되었다. 예언 운동이 쇠퇴하면서 율법이 종교 현장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성전에서의 예배와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기 위해 제사장들이 법제화한 율법은 새로운 종교적 계급제도 발흥의 근원이 되었다. 서기관들에게는 율법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여러 학파에 기질의 차이점에 따라 구분되었지만, 다양한 상황에서 율법을 적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매우 많은 판례를 배출했다. 이 일은 히브리 종교가 점점 더 개인적으로 되어갔으며, 성전에서의 의식에 대한 관심이 쇠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리새인들은 오랫동안 투쟁하면서 사두개인들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개인적인 행위의 종교가 희생제사와 의식의 종교를 대체하고 있었다.
후일 심하게 오해받은 바리새파는 공정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종종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바리새파는 개인적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까닭에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그들을 율법의 멍에를 풀어놓은 혁신적인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성전 예배의 활력이 감소하고 있던 시기에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종교를 위한 매일의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율법을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를 일상생활의 일부로 만들려 했다. 사두개파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종교는 율법에 중심을 두었지만, 성문법뿐만 아니라 구전의 율법에도 중심을 두었다. 수 세기 동안 전해져 내려온 이 전승과 해석의 구전 유산은 성문화된 율법을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데 기여했다.
사두개인들은 1세기 유대교 보수파였다. 그들은 유대 전통에서 발달한 구전의 법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성문화된 법만 종교적 권위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들은 부활, 장래의 생명, 후기 유대교의 복잡한 천사론과 귀신론, 그리고 예정론을 부인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 바리새파를 반대했고, 그렇기 때문에 탈무드에서는 사두개파를 “쾌락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들의 종교는 회당과 그 가르침에 중심을 두지 않고 성전과 그 의식에 중심을 두었다. 따라서 성전이 멸망하고 나서 곧 그들이 사라진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이 사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1세기 내내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에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서로 타협하지 않았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거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수히 많은 분파와 집단이 있었다. 그중에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 에세네파인데, 다수의 저자는 유명한 사해 사본을 그 집단의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이들이 다른 집단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처럼 유대교 안에 매우 다양한 강조점과 분파와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이 다양성 때문에 성전과 율법과 종말론적인 소망에 중심을 둔 유대 종교의 본질적 통일성이 흐려져서는 안 된다. 만일 백성들의 신앙생활에서 성전의 위치나 율법의 범위에 대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의견을 달리했어도,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성전과 율법 모두가 유대교의 근본적인 측면이라는 사실을 가려서는 안 된다. 비록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가능하지만, 성전 예배는 예루살렘에서만 거행할 수 있다는 중요하지는 않지만 실질적인 차이점이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은 없었다. 이런 까닭에 유대인의 종교 생활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이 성전 예배를 대치하게 되었고, 그 결과 70년에 성전이 멸망했어도 유대 종교의 핵심은 파괴되지 않았다.
한편 이 분파들은 모두 유대교의 두 가지 주된 교리를 취했다: 윤리적 유일신교와 종말론적인 소망. 일찍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공의와 자비의 하나님으로서 백성들에게 예식적 의미에서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에서도 의롭고 깨끗한 행동을 요구하셨다. 분파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 윤리적 유일신론은 계속 유대 종교의 주임이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에 의존하게 하는 많은 고난을 겪음으로 말미암아 소망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종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어쨌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정치적·도덕적 불행에서 구해주실 것을 기대했다. 이 구원의 소망은 때로는 메시아에 중심을 두고, 때로는 “인자”(Son of Man)라는 거룩한 존재에 중심을 두면서 의미상의 미묘한 차이를 둔다. 메시아 소망은 일반적으로 다윗 왕국이 이 세상에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와 결합했고, 메시아의 임무는 다윗의 보좌를 회복하고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반면에 종말론 집단에서 더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자는 메시아보다 더 보편적인 인물이었고, 이 세상에 다윗의 통치를 세우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러 오실 것이었다. 인자는 메시아와는 달리 천상의 존재였으며, 그의 기능에는 죽은자들의 부활과 최후 심판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두 경향이 결합했고, 1세기에는 메시아의 통치가 현시대의 마지막 단계이며 그다음에 인자가 세울 새 시대가 올 것이라는 중도적 입장이 등장했다. 어쨌든 유대인들은 여전히 소망의 민족이었다. 그들의 종교를 법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유대 종교에서 후일 삼위일체 신학의 기본 중 하나로 발달하게 될 또 다른 것은 지혜(Wisdom)라는 개념이었다.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는 지혜를 완전히 위격화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또는 성령)가 지혜라고 불린다는 후대 기독교의 주장을 위한 기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팔레스타인 안에서만 신봉된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 로마 등지에 중요한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 유대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과 함께 디아스포라(Diaspora)를 구성했는데, 그것은 1세기 유대교의 매우 중요한 현상으로서 초기 기독교의 형성과 확장에 기여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새로 정착한 지역 주민들과 동화되지 않고 정부 내에서 어느 정도의 자치를 누리는 독립 집단을 형성했다. 이집트에서처럼 대규모의 디아스포라 중심지의 유대인들은 강요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도시 내의 특정 지역에서 생활했다. 그들은 그곳에 자체의 지방 정부를 설립하고, 율법을 공부할 수 있는 회당을 세웠다. 제국은 그들을 어느 정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유대인에게 안식일에 일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과 같은 것을 존중하는 법을 마련해주었다. 그리하여 유대인 공동체는 자체의 법과 행정부를 소유하는 도시 내의 도시가 되었다. 이것은 로마 제국 내에서 다소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한편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과 성전에 의해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고 느꼈다. 비록 그들 중 다수가 팔레스타인에 발을 딛지 못한 채 죽었지만,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성은 매년 성전에 헌금했다. 최소한 이론상으로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들은 전 세계 모든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거의 초기부터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와 디아스포라의 유대교 사이에 차이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언어였다. 디아스포라와 팔레스타인에서 히브리어 사용이 감소하고 있었고, 성경을 히브리어로 이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 사회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에서 더 급속히 히브리어가 사라지고 있었다. 곧 팔레스타인의 유대 사회에서 구약성경이 아람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구두로 번역되었으나 나중에는 성문화된 형태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 번역 과정은 디아스포라에서 한층 더 빠르고 완전하게 진행되었다. 이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세대들이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 지방의 언어, 특히 교역과 통치의 언어인 그리스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대교의 언어적 그리스화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정점에 달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이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그 지역의 유식한 주민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하려 했다. 이런 목적에서 칠십인역(Septuagint, LXX)이라는 그리스어 구약성경 번역이 이루어졌다.
칠십인역은 그리스 문화권의 유대 사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대 히브리 개념을 번역하려면 성경의 사상과 맞지 않는 함의를 지닌 그리스 용어를 사용해야 했다. 한편 유식한 이방인들은 이제 구약성경을 읽고 유대인들과 그 정당성과 의의에 대해 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 시대의 철학적 문헌을 더 잘 알아야 했고, 성경의 우월함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도록 해석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들이 성경에서 그들의 가장 훌륭한 지혜를 모방했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칠십인역 성경은 말할 수 없이 중요했다. 칠십인역 은 최초로 알려진 기독교 저자들의 성경, 거의 모든 신약성경 저자들이 사용한 성경이었다. 따라서 칠십인역은 신약성서의 언어가 형성된 모태였으며, 현재 우리가 그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소유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 중 하나이다.
칠십인역은 디아스포라, 특히 알렉산드리아 디아스포라에 거주한 유대인들의 정신 상태를 보여준다. 그리스화하는 경향이 그들을 사로잡았고, 그들은 유대교가 사람들의 생각처럼 야만적이지 않으며 진정한 그리스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의도의 가장 큰 표현은 자기들의 전통을 예수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유대교 성경을 아카데메이아의 가르침과 양립할 수 있도록 해석하려 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에서 발견되는 그리스 문화에 맞추는 것이었다. 필로에 의하면, 성경은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플라톤이 가르친 것과 같은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현명한 해석자의 임무는 성경의 알레고리의 배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원한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필로는 성경의 계시가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플라톤주의에 맞추기 어려운 측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필로가 율법의 역사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유대교로부터 배교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문자적 의미에 더하여 율법도 풍유적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했음을 지적해야 한다.
필로의 하나님은 플라톤의 미(美)라는 개념과 족장들과 선지자의 하나님을 결합한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분이시므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창조주 하나님은 선과 미라는 개념을 초월한다. 하나님은 본질적인 분이시며, 시간과 공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시간과 공간이 발견된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초월적이시며, 필로는 하나님을 감정이 없는 냉정한 분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에는 매개자가 필요하다. 주된 매개자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 지으신 로고스 또는 말씀이다. 이 로고스는 신적인 것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창조 도구이다.
필로는 전형적인 플라톤주의 방식으로 인간의 목적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해는 특정의 소유 방식을 함축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는 결코 무한한 것을 소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영혼이 정화되는 오랜 상승 과정의 목표와 정점은 엑스터시이다. 몸은 영혼의 바닥짐이며, 이성은 감각을 반대한다. 그러므로 정화는 영혼을 몸의 노예로 삼고 있는 육체적인 정념에서 해방하는 데 있다. 여기에서 필로는 정념의 부재 또는 냉담(무감각, apathy)이 모든 인간의 목표라는 스토아 교리를 도입한다. 그러나 필로에게 냉담은 스토아 철학자의 경우처럼 윤리의 목표가 아니라 엑스터시로 안내하는 수단이다.
마지막으로 1세기 유대교에 대한 묘사를 완성하려면 유대교 내에 유포되어 있던 원-영지주의적(proto-Gnostic) 동향에 관해 언급해야 한다. 이 영지주의적 경향은 종말론적 이원론에서 발달한 듯하다. 이 사상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종말론적 기대가 성취되지 않았을 때 역사를 초월한(trans-historical) 보편적 구원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이 영지주의적 경향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그중에서 유대교 자체의 종말론에서 발달한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페르시아의 사고방식이 도입되었는지, 그리고 유대교 외부에 기인하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결론지을 수 없다.
세 권으로 된 이전의 [기독교 사상사] 시리즈와 한 권으로 요약한 이 책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첫째, 다소 방대한 성경학적 각주가 삭제되었다. 각주가 아무리 상세하고 최근의 것이라도 인터넷 검색을 하면 인쇄된 책보다 더 최근의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생략했다. 따라서 더욱더 상세한 성경적 자료를 원하면 인터넷에서 검색하기를 바란다.
둘째, 더욱더 중요한 인물과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 다소 모호한 문제와 논쟁, 그리고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인물은 생략했거나 최소로 다루었다.
셋째, 몇 개의 장을 통합함으로써 다양한 신학자와 신학적 문제에서 주요한 동향과 관계를 쉽게 추적할 수 있게 하였다.
나는 이 과정에서 생략된 것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학과 교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달해왔는지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 사상의 발달사에 더 폭넓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 서언 중에서]
인물정보
저자(글) 후스토 곤잘레스
후스토 곤잘레스는 은성출판사에서 네 권으로 번역 출간한 『교회사』(The Story of Christianity)의 저자이다. 저자는 또한 세 권으로 된 『기독교 사상사』(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를 집필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방대한 이 시리즈를 모두 읽은 여유가 없는 독자를 위하여 한 권으로 축약 및 재편집했다.
저자는 예일대학에서 석사(M. A.) 학위를, 그 후 가장 연소한 자로서 기독교 교회사(historical theology) 부분의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Evangelical Seminary of Puerto Rico, Candler School of Theology of Emory University in Atlanta 등에서 가르쳤다.
번역 엄성옥
이 상품의 총서
Klover리뷰 (0)
- - e교환권은 적립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 - 리워드는 5,000원 이상 eBook, 오디오북, 동영상에 한해 다운로드 완료 후 리뷰 작성 시 익일 제공됩니다. (2024년 9월 30일부터 적용)
- - 리워드는 한 상품에 최초 1회만 제공됩니다.
- - sam 이용권 구매 상품 / 선물받은 eBook은 리워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 도서나 타인에 대해 근거 없이 비방을 하거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리뷰
- 도서와 무관한 내용의 리뷰
- 인신공격이나 욕설, 비속어, 혐오 발언이 개재된 리뷰
- 의성어나 의태어 등 내용의 의미가 없는 리뷰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100원 적립
문장수집
- 구매 후 90일 이내에 문장 수집 등록 시 e교환권 100원을 적립해 드립니다.
- e교환권은 적립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 리워드는 5,000원 이상 eBook에 한해 다운로드 완료 후 문장수집 등록 시 제공됩니다. (2024년 9월 30일부터 적용)
- 리워드는 한 상품에 최초 1회만 제공됩니다.
- sam 이용권 구매 상품 / 선물받은 eBook / 오디오북·동영상 상품/주문취소/환불 시 리워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구매 후 문장수집 작성 시, e교환권 100원 적립
신규가입 혜택 지급이 완료 되었습니다.
바로 사용 가능한 교보e캐시 1,000원 (유효기간 7일)
지금 바로 교보eBook의 다양한 콘텐츠를 이용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