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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린

안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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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1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12월 05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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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38.94MB)
ISBN 9791141608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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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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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박상륭상 수상 작가 안윤 신작 소설집
2024 이효석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담담」 수록
모린 007
핀홀Pinhole 047
담담 091
작은 눈덩이 하나 127
또, 155
하지夏至 179
틈 215

해설|안서현(문학평론가)
시간 관찰자 시점 259

작가의 말 277

미란씨는 무언가를 나중에 잃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없는 게 나은 것 같다고 했었죠. 나중에 잃게 되는 건 너무 가슴 아프다고요.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난 나중에 잃는 것을 선택할 거예요. 그건 두 세계를 살아보는 거잖아요. 어쩌면 세 세계인지도 모르죠.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 나는 나한테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고 싶어요.(「모린」, 25쪽)

쥐약을 먹은 집쥐는 도망칠 기력도 없는지 사람이 다가가도 움직이지 않았다. 둥글납작하게 몸을 말고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었다. 집쥐의 숨통이 끊어지면 원장은 사체를 모아 녹슨 드럼통에 넣고 쓰레기와 함께 태웠다. 아이들은 먼발치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쥐가 불쌍하다고 울먹이는 아이가 있으면 원장은 무심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어. 사람이랑 쥐는 한집에서 살 수 없는 거야.
그럼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 어린 보라는 궁금했다.(「핀홀Pinhole」, 87쪽)

가끔 생각한다. 내게 수윤은 무엇이었고 그애를 사랑했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수윤을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굳게 믿었던 그 시절이 내게 무엇으로 남았는지. 내 안에서 정리가 된다면 은석에게 모든 과거를 털어놓는 날이 올 수도 있을까.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털어놓는 일과 서로를 이해하는 일, 한 사람을 아는 일 간에 정확히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그것이 관계에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지 갈수록 알 수가 없어진다. 서로를 이해하는 일, 한 사람을 아는 일이 과연 무엇인지조차도.(「담담」, 120~121쪽)

나는 준수와의 일, 둘만의 만남이나 빌려준 돈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나는 준수와 나 사이의 일을 누군가가, 그게 세진이라고 해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돌려받지 못한 돈, 백만원. 과연 그것은 내게 옳고 그름만의 문제인가. 나는 이 문제를 다른 이가 납득하도록 설명할 수 없었다. 때때로 나 자신에게도 그랬다. 백만원, 백만원 되뇌다보면 그것은 돈의 액수가 아니라 돌려받지 못한, 대답조차 듣지 못한 내 마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그 일을 그저 내 안에 가만히 놓아두기로 했다.(「작은 눈덩이 하나」, 150~151쪽)

자신의 인생에서 치완은 계속 나쁜 놈으로 기억되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수진은 생각했다. 이따금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만취해 욕할 수 있는 전 애인으로 기억되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고. (……) 그건 치완이 어디에선가 평범한 남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수진은 그날 이후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했다. 편백나무 큐브가 든 베개를 베고 누워 눈을 감은 채 되새겼다 치완의 바람처럼 그가 회사를 관두기 전,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가 퇴직하기 전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또,」, 173쪽)

우리 어릴 때 이 일대가 온통 쓰레기 더미였다더라. 쓰레기를 산처럼 버려놓고는 그 위에 방수 처리를 하고 흙을 쌓고 나무를 심어서 이런 숲이 있는 공원을 만든 거지.
그런 공원에서 또 장작불을 피우고. 인간은 모순 그 자체네.
불길이 사그라지고 하얗게 탄 장작에 남은 잔불이 은은한 붉은빛을 냈다.
난 그래서 인간이 좀 서글프고 아름다운 거 같아.
지언이 쇠 집게로 잔불을 들추었다. 반짝, 불똥이 튀었다. 꺼져가던 잔불이 일순간 환해졌다.
누군가는 망가뜨리는데 누군가는 망가지게 내버려두지 않잖아. 그 둘 다를 할 수 있는 게 인간이고. 징그러운데 사랑스럽달까.(「하지夏至」, 210쪽)

인애야.
인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자신이 납득할 만한 서사로 바꿔서라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동물인 것 같아. 불가해하고 모순적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보다 그편이 훨씬 덜 고통스러우니까.
오래전, 내가 네게 하지 못했던 말들은 사실 나 자신에게도 할 수 없는 말들이었어.
그거 아니? 자기 집 현관에서 낯선 신발을 목격한 사람은, 닫힌 방문 앞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여본 사람은, 귀를 기울이면서도 차라리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본 사람은, 식은땀이 흥건한 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채 영원을 살아본 사람은 그뒤로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걸.(「틈」, 252~253쪽)

“그림자와 나란히” 쓰겠다는 조심스럽지만 단단한 결의를 밝히며 박상륭상 수상작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로 세상에 나온 작가 안윤의 두번째 소설집 『모린』이 출간되었다. 퀴어앤솔러지 『팔꿈치를 주세요』(큐큐, 2021)의 제목이 된 문장으로 뭇 독자들의 지지를 얻은 「모린」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부단한 대화”라는 평과 함께 이효석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담담」을 비롯해 지난 사 년간 공들여 써낸 일곱 편의 작품을 엮었다. 십 년 전 독립출판으로 펴낸 산문집 『수기水記』가 눈 밝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2020년 개정증보판 『물의 기록』으로 재출간되었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기로 정평이 난 안윤의 문장이 올겨울의 첫눈처럼 우리 앞에 도착했다.
낯선 궁금증을 일으키는 제목이 붙은 이번 소설집은 저마다의 모린, 즉 ‘유일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안윤 소설의 인물들은 어긋나고 교차하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어간다. “지진이자 해일, 사막이자 극지, 거스를 수 없는 중력”(96쪽) 같은 누군가를, “다른 이가 납득하도록 설명할 수 없”(150쪽)고 심지어는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일. 그것은 나 자신 또한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단독자라는 깨달음 이후에 가능하다고 안윤은 말한다. “그의 이해가 내가 예상하는 이해와 일치”(105쪽)하기를 바라는 대신 ‘나’와 ‘너’를 오롯이 받아들이기 위해 안윤 소설이 경유하는 길고 느리고 먼 시간이 “어김없이 찾아올 새봄으로”(258쪽)으로 번져간다.


상실한 후에야 비로소 이어지는 조각들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틈에서 차오르는 온기

모린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일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9쪽)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표제작 「모린」의 첫 문장이다. ‘모린’은 이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책 『보이지 않는 것들Invisible Things』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책에서 모린의 이름은 “딱 한 번 등장”하며 “나이나 인종, 성별 등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9쪽). 누구든 될 수 있는 미지의 이름인 것이다. 「모린」의 주인공 ‘영은’은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갖기로 한 애인 ‘미란’을 떠올리며, 그를 모린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생각한다. 곧이어 덧붙는 영은의 고백─“하지만 난 알고 있어요. 미란씨가 그 이름일 필요도, 그렇게 불릴 필요도 없다는 걸요”(45쪽)─은 그것이 어느새 자신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어버린 미란을 호명하는 하나의 방식임을 짐작게 한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 그리고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핀홀Pinhole」에서 바느질 공방을 운영하는 ‘보라’는 결혼을 앞둔 애인 ‘승원’에게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의문사를 당한 형이 있다는 비밀을 알게 된다. 그리고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과 함께 승원의 형 ‘정원’이 감내해야 했던 삶을 반추한다. 가장 내밀한 것을 공유한다고 생각했던 애인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맞닥뜨리는 순간, 눈앞의 사랑하는, 혹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한없이 낯설어진다.
「담담」은 11년이라는 긴 연애 끝에 헤어짐을 택한 ‘혜재’와 안타까운 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은 ‘은석’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과정을 그린다. 혜재는 오랜 연인이었던 ‘수윤’을 끝내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사랑했다고 할 수 있을”(96쪽)지 궁금해한다. 첫 만남에서 ‘바이섹슈얼’과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을 밝히며 시작된 혜재와 은석의 관계는, 그것이 서로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100쪽)인 동시에 각자의 모습을 구성하는 수많은 조각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시간을 거치며, 막연한 내일이 아닌 담담한 오늘을 거듭해나간다.

끝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한순간이나마 닿으려 애써온 시간의 흔적

「작은 눈덩이 하나」에서 삼십대 후반에 이른 ‘의선’은 못나고 볼품없던 이십대 초반,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었던 단 한 사람 ‘준수’를 회상한다. 의선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준수가 운영하는 카페를 찾아가 문 앞에 작은 눈덩이 하나를 놓고 온다. “설령 흔적조차 남지 않”(153쪽)고 녹아버릴지언정 분명히 존재했던 진심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 한편, 「또,」의 ‘수진’은 어느 날부턴가 머리카락이 ‘또’ 하는 소리를 내며 끊어지는 증상에 시달린다. 그리고 부사수였던 ‘민주’가 사직서를 내기 위해 회사에 방문한 날, 그에게서 비슷한 소리를 듣는다.
완전하게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없다는 근원적인 한계 앞에서도 작가는 한순간이나마 누군가를 이해하려 애쓰는 마음을 헤아린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응시하고, 들리지 않는 것에 귀 기울이며 그 너머에 있는 당신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소설의 인물들이 “물어보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방이 알아차리게 하는 방식으로”(18쪽) 안부를 묻고 “밀도 높은 침묵이 되어 내려앉”(248쪽)은 긴 침묵을 듣는 이유다.
「하지夏至」는 서울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수림’이 폐업 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오랜 친구 ‘지언’과 노을공원으로 이별 캠핑을 떠나는 이야기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짐작”(187쪽)만으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한 애정어린 거리감으로 성립된다.

너는 잘 지내.
서울을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지언에게서 몇 장의 사진과 함께 메시지가 왔다.
매일 늦잠을 자고 땀흘리며 청소하고 밥도 맛있게 먹어. 저녁마다 바닷가에서 해지는 걸 봐. 그 어느 때보다도 너는 잘 지내.
꼭 보이는 것처럼 말하네? 잘 지내냐고 물어야지.
뭘 물어, 안 봐도 아는데.
(……)
너는 잘 지내. 그건 마치 지언이 내게 거는 주문 같았다. 너는 잘 지내. 그 주문에 단단히 걸려들고 싶었다.(213쪽)

이 소설에서 수림이 해질녘 노을을 바라보면서 브람스의 인테르메초를 여러 피아니스트 버전으로 반복해 듣는 모습은, 그가 고여 있는 시간을 매번 다른 방식으로 되풀이하며 내일을 맞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안서현은 이처럼 “길고 느리고 먼” 안윤의 소설을 “시간을 바라보는 이야기”(263쪽)라고 명명한다. 더불어, 길고 완만하게 사건을 전개하는 동시에 인물의 내면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서술자의 그 시선이 곧 관계를 맺는 태도가 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는 감정의 크기로 상대를 옭아매기보다는 각자와 서로가 지닌 “정체성의 모든 국면을 존중하는 태도”(275쪽)를 견지함으로써 “사랑하면서도 각자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268쪽) 용기를 주는 것이다.


‘너’와 ‘나’ 사이의 틈이 메워질 때
뚜렷하게 떠오르는 겹겹의 세계

마지막 수록작인 「틈」은 ‘너’와 ‘나’ 사이의 틈을 메우는 길고 긴 이별의 방식을 보여준다. 소설은 이혼 후 연락이 끊긴 친구 ‘사희’를 찾아간 ‘인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가며 진행된다. 사희는 상실의 시간을 겪는 동안, 흠집이 난 그릇을 수선하는 도예 기법인 킨츠기를 배우고 가르친다. 균열의 흔적을 되짚고 더듬으며 자신의 시선과 손끝에서 태어나는 ‘온전함’을 빚어나간다. 인애는 구 년 만에 사희를 재회한 후에도 그간 몰래 피어난 응어리와 그리움을 이해하기까지 또다시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한다. 늦겨울의 저수지에서 얼어 있던 수면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를 들은 인애가 때늦은 이별을 고요히 맞이하는 장면은 일곱 편의 소설과 함께 켜켜이 쌓인 시간을 관통한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순간이다.
첫 수록작 「모린」에서 시각장애인 ‘영은’은 ‘미란’과의 첫 만남에서 이렇게 말한다. “팔꿈치를 주세요. (…) 이제 미란씨만 믿을 거예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눈앞의 상대를 오롯이 신뢰하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뒤이은 여섯 편의 소설은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무턱대고 믿어보는 “도무지 알 수 없”고 “흔들리고 부서지기 쉬운”(57쪽) 그 마음에 대한 저마다의 대답이다. “사랑했고 증오했고 끝내 헤어졌지만, 그래서 앞으로 영영 보지 않을 완전한 타인이 되기를 바랐지만”(172쪽) 그럼에도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그걸 반복하”(113쪽)는 이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다. 유일한 사람과 맺는 유일한 관계가 아닌, 여러 겹의 세계를 꿈꾸게 하는 안윤의 소설. “책장을 넘기면 영은과의 시간이 고스란히 거기에 있다”는 「모린」의 한 문장처럼, 우리의 시간도 이 책 속에서 겹칠 것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안윤

2021년 제3회 박상륭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방어가 제철』, 장편소설 『남겨진 이름들』, 산문집 『물의 기록』이 있다. 이효석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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