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트러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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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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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에 미국에서 초판이 출간된 이후 사반세기가 훌쩍 넘는 3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학계를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한 변화를 겪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더 트러블』이 영향력은 여전하다. 이는 이 책이 품은 문제의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페미니즘의 과제와 쟁점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백래시 현상이 점점 거세지고, 페미니즘 담론이 사회 변화를 추동하려 할 때마다 이에 대한 반격도 잇따르지 않는가.
이럴 때 떠오르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젠더란 무엇이며, 젠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젠더가 왜 문제가 되는가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통해 기존의 관행적 의미로 한정된 젠더의 의미에 자유를 주고자 했다. 더 나아가 “젠더 가능성의 장을 여는 것”을 목적으로 “젠더소수자 및 성소수자의 행위를 불법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진리 담론을 휘두르려는 모든 시도들을 뒤흔들어보고자” 젠더의 고정성에 의문을 던졌다. 따라서 다른 성별, 다른 젠더, 다른 섹슈얼리티를 혐오하는 오늘날의 페미니즘 백래시 시대에, 젠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려는 버틀러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중요하고 유효하다.
그간 국내에서도 주디스 버틀러의 여러 다른 저작들과 관련 해설서들이 다수 출간되어 더욱 풍부한 이론의 장이 형성되면서 그의 사상이 밟아온 궤적과 논점의 변화 과정 또한 추적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럴수록 버틀러 이론의 정수인 『젠더 트러블』에 대한 이해는 필수불가결한 가치를 지닌다. 이번 개역판에서는 『젠더 트러블』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핵심 개념과 용어를 정리한 ‘버틀러의 주요 개념들’ 내용을 보충했고, 개역판 출간에 맞춰 현재의 관점에서 풀어쓴 옮긴이 해제를 추가로 수록했다.
2008년에 번역했던 책을 16년 만에 다시 잡았다. 상식적인 것에는 급진성이 없다는 저자의 신념에 따라 이 책 원문이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하면 가독성을 조금 더 높이고 기존의 부족함을 바로잡아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고전으로서 이 책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세우자는 것이 개정판을 출간하게 된 취지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원문의 sex를 ‘섹스’로 옮기는 대신 맥락에 따라 성 혹은 성별로 옮겼다. sex, gender, sexuality 모두 우리말로 성에 해당하지만 타고난 성sex은 성별을 의미하는 반면, 한글로 쓴 섹스는 관용적으로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어서다. 가독성을 위해 matrix는 모태에서 기반으로 바꿨고, 철학적 개념의 정확성을 위해 substance는 본질에서 실체로 바꿨다. 젠더를 대체할 역어도 고심했으나 결국 젠더는 그대로 두었다. 그 단어가 전하는 의미가 다의적으로 파생되어 젠더의 문화번역이라는 파급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젠더는 여전히 젠더로 남고, 여전히 트러블을 일으키며, 앞으로도 일으킬 것이다. _‘개정판 옮긴이 해제’에서
초판 옮긴이 해제
개정판 서문(1999)
초판 서문(1990)
1장 성별/젠더/욕망의 주체
페미니즘의 주체로서 ‘여성들’
성별/젠더/욕망의 강제적 질서
젠더-당대 논쟁에서 순환하는 잔존물
이분법, 일원론, 그 너머를 이론화하기
정체성, 성별, 실체의 형이상학
언어, 권력, 전치의 전략
2장 금지, 정신분석학, 이성애적 기반의 생산
구조주의의 비판적 교환
라캉, 리비에르, 가면의 전략
프로이트와 젠더 우울증
젠더 복잡성과 동일시의 한계
금기를 권력으로 변형하기
3장 전복적 몸짓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몸의 정치학
푸코, 에르퀼린, 성적 불연속성의 정치학
모니크 비티크-몸의 해체와 허구적 성
몸의 각인, 수행적 전복
결론-패러디에서 정치로
버틀러의 주요 개념들
찾아보기
* 『젠더 트러블』은 어떤 습관적이고 폭력적인 전제 때문에 젠더화된 삶에서 무엇이 가능한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배제되는 방식을 보여주려 했다. 또한 이 책은 젠더소수자 및 성소수자의 행위를 불법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진리 담론을 휘두르려는 모든 시도들을 뒤흔들어보고자 했다. 그것이 모든 소수자의 행위를 용인해야 한다거나 치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어떤 결론을 내리기 전에 그런 행위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은 맞다. 내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이런 행위에 직면했을 때 너무 놀란 나머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방식이었다. _47~48쪽
* 『젠더 트러블』이 어떤 이유에서건 젠더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하려 한 것인지를 놓고 몇몇 독자들이 질문을 했다. 이들은 이런 새로운 젠더 배치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지는지, 또 이러한 배치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이 질문은 종종 기존 전제, 즉 이 책이 페미니즘 사상의 규범적 차원이나 처방적 차원을 말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포함한다. ‘규범적’이라는 말은 페미니즘 비평에서 분명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나도 이 단어를 종종 쓰는데, 주로 특정한 종류의 젠더 이상이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기술하는 데 쓰기 때문이다. 나는 보통 ‘규범적’이라는 말을 ‘젠더를 지배하는 규범과 관련된’이라는 의미로 쓴다. 하지만 ‘규범적’이라는 말은 윤리적 정당성과 관련되고, 이 윤리적 정당성이 어떻게 확립되고 거기서 어떤 구체적 결과가 나오는지와도 관련된다._65쪽
* 겉보기에 스스로 토대를 갖춘 남성의 자율성은 자신의 토대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비토대의 가능성이기도 한 억압을 감추려 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 구성의 과정은 여성에게 그런 남성적인 힘을 반영할 것을 요구하고, 어디서든 그런 망상적 자율성과 관련된 현실적 힘을 보장하라고 요구한다. 여성에게 남성적 주체/기표의 자율적 힘을 반영해달라는 요구가 여성의 자율성을 구성하는 핵심이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기능을 사실상 약화시키는 근본적 의존성의 기초가 된다면, 이 문제는 최소한으로 줄여 말해도 혼란스럽다. 그런데도 이런 의존성은 남성 주체가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기도 한데, 확증의 기호인 여성은 위치를 바꾼 어머니의 몸이자 개체화 이전의 주이상스를 회복하겠다는 헛되지만 끈질긴 약속이기 때문이다. _171쪽
* 환상을 문자 그대로 의미화한다는 주장은 무슨 의미인가? 젠더 차별화가 근친애 금기와 그에 앞선 동성애 금기를 따른다면, 어떤 젠더가 ‘된다becoming’는 것은 자연스럽게 된다는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고, 그것은 젠더화된 의미에 기초해 몸의 쾌락과 신체 각부를 차별화할 것을 요구한다. 쾌락은 음경, 질, 젖가슴에 있거나 거기서 나온다고 말해진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이미 젠더 특정적으로 구성되거나 자연화된 몸에 맞추어져 있다. 다시 말해 신체의 어떤 부분은 젠더 특정적인 몸의 규범적 이상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쾌락을 상상할 수 있는 중심 요건이 된다. 쾌락은 어떤 의미에서 우울증적인 젠더 구조에 따라 결정되며, 그로 인해 어떤 기관은 쾌락에 무감해지고 또다른 기관은 쾌락에 민감해진다. 어떤 쾌락이 살고 어떤 쾌락이 죽을지는, 때로 무엇이 젠더 규범의 기반 안에서 발생하는 정체성 형성에서 합법적인 실천을 하는지의 문제가 된다. _216~217쪽
* 젠더는 여러 행위가 뒤따르는 안정된 정체성이나 행위성의 장소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젠더는 시간에 맞춰 희미하게 구성되고,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 외부공간에 제도화되는 정체성이다. 젠더 효과는 몸의 양식화를 통해 생산되고, 따라서 몸의 제스처, 동작, 다양한 양식이 고정되고 젠더화된 자아라는 허상을 구성하는 일상적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공식화된 젠더 개념은 실체적 정체성 모델의 토대에서 빠져나와, 구성된 사회적 일시성으로서의 젠더 개념을 요구하는 토대로 이동한다. 의미심장하게도, 젠더가 내부적으로 연속되지 않는 행위를 통해서 제도화된다면, 실체의 외관은 바로 그 구성된 정체성, 즉 배우를 포함해서 평범한 사회의 관객이 신념의 양식을 믿고 행한 수행적 성과물이다. _345쪽
기존 페미니즘의 패러다임을 단숨에 전복시킨 세기의 문제작이자
현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을 대표하는 영원한 고전
현존하는 가장 도전적이면서 영향력 있는 사상가 주디스 버틀러 이론의 정수
『젠더 트러블』은 페미니즘 내부의 가부장적 이성애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성별과 젠더의 이분법적 틀을 허물면서 기존 페미니즘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담아낸 책으로, 전 세계 다양한 언어로 번역 출간되며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책으로 인해 버틀러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페미니즘 학계의 스타로 떠올랐고, 현존하는 가장 도전적이면서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초판 서문에서 ‘젠더’라는 규정 자체가 ‘트러블’임을 밝히면서 시작하는 이 책은 페미니즘 담론에서 트러블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버틀러 스스로 최대한 트러블을 잘 일으키고, 최고로 멋지게 트러블에 빠지려고 한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이러한 저자의 의도대로 『젠더 트러블』은 출간 직후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 급진적 사고는 페미니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을 뿐 아니라 퀴어 이론, 사회학, 정치학 등 학계 전반에 파급력을 증명했다.
젠더의 불확정성을 주장하면 결국 페미니즘이 실패하기라도 할 것처럼, 젠더의 의미에 관한 당대의 페미니즘 논쟁은 여러 번이나 트러블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트러블에 부정적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릴 적 위세를 떨치던 담론에서는 트러블이란 일으켜선 안 될 어떤 것이었는데, 트러블을 일으키면 트러블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반항과 그에 대한 질책이 같은 말에 휘말리는 것 같았고, 그런 현상을 보고 나는 처음으로 권력의 미묘한 책략을 꿰뚫어볼 비판적 통찰을 갖게 되었다. 지배적인 법이 우리를 트러블로 위협하기도 하고 트러블에 빠지게도 하는데, 이 모두가 트러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트러블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내가 할 일은 최대한 트러블을 잘 일으키고, 최고로 멋지게 트러블에 빠지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_74쪽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 철학자인 버틀러는 이 책에서 프로이트, 라캉, 데리다, 푸코 등 후기구조주의자라 불리는 쟁쟁한 철학자들의 이론을 끌어와 페미니즘의 이론에 맞게 변형시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다. 그리고 1960~1980년대 이른바 제2물결 페미니즘이 집중했던 가부장제의 억압 구조와 여성 해방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되짚어보고자 시몬 드 보부아르, 뤼스 이리가레, 쥘리아 크리스테바, 모니크 비티그 등의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조망한다.
푸코가 명확히 밝힌 대로, 문화적으로 모순적인 억압기제라는 기획은 금지하는 동시에 생성적인 것이며, 특히 ‘해방’의 문제에 날을 세운다. 아버지의 법의 족쇄에서 해방된 여성의 몸은 전복적인 위치를 가장하지만, 아버지의 법이 자기 확대와 확산 작용을 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법의 또다른 구현이라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피억압자라는 이름으로 억압자가 해방되는 것을 피하려면 법의 전체적 복잡함과 미묘함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며, 법을 넘어선 진정한 몸이라는 환상을 우리 스스로 고쳐야 한다. 만약 전복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법이 스스로에 반하는 작용을 하면서 법이 예측하지 못한 순열을 생산할 때 생기는 가능성을 통해서 법의 내부에서 온 전복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적으로 구성된 몸은 그 몸의 ‘자연스러운’ 과거도, 기원적인 쾌락도 아닌, 문화적 가능성이라는 열린 미래로 해방될 것이다. _259~260쪽
성별, 젠더, 섹슈얼리티에 강제된 질서를 뒤집는 전복적 상상력
패러디, 수행성, 우울증적 정체성 등에 나타난 젠더의 양상을 고찰하다
보부아르가 말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성별)과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성(젠더)이라는 개념을 사회적 통념으로 고착화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젠더는 생물학적 성별과 구분되는, 성별의 문화적 해석이거나 성별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해된다. 버틀러는 강제적 이성애 규범 아래에서 유지되어온 성별/젠더/섹슈얼리티라는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며 젠더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즉 성별/젠더/섹슈얼리티는 구분되지 않으며, 제도와 권력에 의해 생산된 허구적 구성물이자 담론의 효과라는 것이다.
젠더의 고정성에 의문을 던진 이러한 논지는 페미니즘의 ‘주체’ 문제와도 이어진다.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의 본문을 열면서 처음으로 던지는 질문이 바로 페미니즘에서 ‘여성들’이라는 집단적 범주를 가정해야 하는가이다. 범주로서의 여성에 대한 인식은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에 기반하고 있고, 이성애 제도라는 전제하에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젠더 및 젠더 위계를 가정해야만 성립된다. 하지만 버틀러는 페미니즘 정치의 실천 주체이기도 한 여성 범주를 비판의 중심에 두고 강제적 이성애와 젠더 위계, 젠더 이원론을 전제하는 페미니즘에 반대하면서 여성 범주의 ‘통일성’에 반기를 든다.
버틀러의 사유가 보여준 또다른 획기적인 지점은 젠더의 작동 방식을 ‘수행성’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버틀러의 정체성 논의에 따르면 행위 뒤에 행위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행위 속에서 행위자는 가변적으로 구성된다. 모든 행위자는 행위의 반복된 수행을 통해 구성되므로 그가 말하는 주체는 담론적 구성물이다. 즉 젠더는 “존재의 자연스러운 외관을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응결된 매우 단단한 규제의 틀 안에서 반복된 몸의 양식화이자 반복된 여러 행위들”이다.
젠더의 구성적이고 수행적인 차원을 설명하기 위해 버틀러는 드랙drag의 사례를 들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젠더의 현실이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폭로하고, 젠더의 표현적 양식과 젠더 정체성 개념의 빈약함을 주장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젠더 패러디 개념을 설명하며 젠더 정체성 자체가 기원 없는 모방, 원본 없는 모방본임을 밝힌다. ‘젠더 패러디’에 관한 논의는 수행성, 반복 복종, 그리고 우울증이라는 여러 이론적 비판과 재검토, 재의미화의 과정을 거쳐 ‘퀴어 이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버틀러는 젠더의 양상에 관한 기존의 통념을 전복시키고 그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 레비스트로스와 구주조의 인류학에 대한 비판,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주제와 우울증에 대한 분석, 가면으로 여성의 정체성을 의미화하려는 이론의 한계, 크리스테바의 모성 담론 비판 등 다각도로 접근하며 면밀히 짚어나간다.
‘통일성’이 효과적인 정치 행동에 꼭 필요한가? 오히려 통일성이라는 목표에 대한 성급한 고집이 위계 사이에서 훨씬 더 심각한 파편화를 가져오는 원인은 아닌가? 여성 범주의 ‘통일성’은 필요조건도, 요구사항도 아니기 때문에 특정 형태의 공공연한 분열이 연합의 행위를 촉진할 수 있다. 정체성 개념의 경계를 해체하거나, 그런 해체를 분명한 정치적 목적으로 달성하려는 일련의 행동 가능성을 제거하는 정체성의 층위에서, ‘통일성’은 배타적인 결속의 규범을 만드는가? 둘 중 어느 쪽이든 언제나 개념 층위에서 형성되는 ‘통일성’의 전제나 목적이 없다면, 일시적 통일성은 정체성 표명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구체적 행동의 맥락에서 나타날 것이다. 페미니즘적 행동이 안정적이고 통일적이며 합의된 정체성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강제적 기대가 없다면 이런 행동은 더 빨리 시작될 것이고, 이 범주의 의미가 영원히 쟁점인 많은 ‘여성들’에게 더 적합해 보인다._112~113쪽
이 책의 구성, 각 장별 주요 쟁점들
이 책의 본문은 전체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주로 ‘여성 없는 페미니즘’, 정확히 말하면 여성이라는 범주가 없는 페미니즘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도발적 문제 제기의 장이다. 2장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데 할애한다. 3장은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모성적 몸과 기호계 논의를 비판하고, 비티그나 푸코의 이론에서 인정하는 부분과 모순점 및 한계를 각각 지적하면서 버틀러만의 젠더 논의를 정리해나간다.
1장 「성별/젠더/욕망의 주체」는 페미니즘 주체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모색하며 뤼스 이리가레나 모니크 비티그의 문제의식을 끌어와 이들의 기여와 한계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리가레는 프로이트식의 결핍이나 결여로서의 여성성을 극복하려 했지만, 여성을 다시 남근로고스중심주의적 언어 안의 재현 불가능성으로 고정한다는 혐의로 비판받는다.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모니크 비티그는 강제적 이성애와 남근로고스중심주의에서 여성도 남성도 아닌 레즈비언을 제3의 대안적 성으로 고정했고 이상화했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핵심적인 사상은 페미니즘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아무리 복수 형태를 띤다고 해도 범주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 성별/젠더/섹슈얼리티를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 문화적으로 구성된 성, 근본적이고 기원적인 욕망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강제적 질서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2장 「금지, 정신분석학, 이성애적 기반의 생산」은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페미니즘의 틀 안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비판한다. 여성을 교환 대상으로 바라보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뿐 아니라 조앤 리비에르 이래로 여성을 가면으로 의미화하려는 정신분석학적인 논의들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특히 결핍을 가리기 위한 가면으로서 여성의 상징적 위치를 ‘남근 되기/갖기’로 본 라캉의 논의는 비판의 핵심에 있다. 게일 루빈이나 뤼스 이리가레도 또다른 방식으로 여성성을 물화한다는 혐의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버틀러는 여성 젠더의 일의성을 주장하며 젠더 정체성의 이분법에 의지하는 모든 논의들을 비판하면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우울증의 방식으로, 즉 사랑했던 대상이 주체의 자아 안에 ‘불완전하게 합체’되는 방식으로 젠더가 형성되는 과정을 논의한다. 정신분석학은 욕망을 전제한 뒤 그 욕망을 금지하는 법을 말하지만, 버틀러는 이러한 규범, 즉 욕망을 선험적으로 원인으로 가정하는 문제를 보여주고자 한다. 푸코의 『성의 역사』에 나타난 억압가설 비판처럼, 금지의 구조나 사법적 구조는 원래 억압해야 할 욕망을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욕망 역시 당대의 지배적 권력 구조가 만들어낸 구성물임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영혼을 가두는 감옥인 것이 아니라, 영혼이 몸의 감옥이 된다.
마지막 3장 「전복적 몸짓」은 쥘리아 크리스테바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크리스테바는 기본적으로 모든 섹슈얼리티를 이성애로 상정했고, 동성애는 정신병에 가까운 것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버틀러에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의 이론은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이성애를 중심에 두고 모성을 특화하고 있으며, 라캉을 극복하려던 저항의 시도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코라나 기호계, 혹은 어머니의 몸은 상징계의 언어로 발화되지 않으면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서 저항의 전복적 실천력을 상실했으며, 오히려 크리스테바의 논의는 모성의 재생산을 강화하고 어머니를 이상화하여 가부장제를 공고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이다. 보편적 주체의 관점에서 논의를 진행했던 푸코는 남성을 보편 주체로 인식할 뿐 여성이라는 성차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간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받아왔는데, 버틀러는 여기에 더해 푸코가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에 부치는 서문에서 『성의 역사』와 달리 양성인간 에르퀼린이 제도 규범하에서 겪었던 사회적 비극보다는 특정 섹슈얼리티의 낭만화와 이상화에 초점을 둔다고 비판한다. 3장 후반부에서 버틀러는 메리 더글러스와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논의를 끌어와 몸의 경계와 표면은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몸의 범주를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만들면서 새로운 의미화의 장으로 열어낼 때, 성별과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이분법을 넘어서 모든 고정된 범주를 파괴하며 전복적 재의미화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다.
버틀러는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글의 제목을 「패러디에서 정치로」라고 썼다. 이는 드랙이나 복장전환 등의 ‘젠더 패러디’에서 출발한 젠더 논의가 수행성, 반복 복종, 그리고 우울증이라는 여러 이론적 비판과 재검토, 재의미화의 과정을 거쳐 ‘퀴어 이론’이라는 정치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며 복잡한 철학적 층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있다.
작가정보
미국의 페미니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
1956년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나 자랐다. 1984년 예일대학교에서 프랑스 철학에서의 헤겔 해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비교문학과 석좌교수이다.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 학자로서 젠더 수행성 이론을 개진했고, 최근에는 퀴어 이론 및 페미니즘 담론에서 더 나아가 정치철학, 윤리학,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인간으로서 삶의 가능성과 공동체 윤리를 성찰하는 실천적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1990년에 출간한 『젠더 트러블』은 페미니즘 내부의 가부장적 이성애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성별sex과 젠더gender의 이분법적 틀을 허물면서 기존 페미니즘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담아낸 책으로, 전 세계 다양한 언어로 번역 출간되며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책으로 인해 버틀러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페미니즘 학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젠더 및 성소수자 권리운동,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인권운동, 인종차별 반대운동, 신자유주의 저항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는 버틀러는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2012년에는 아도르노상을, 2022년에는 카탈루냐 국제상을, 2014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 공로 훈장인 슈발리에 훈장을 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전쟁의 프레임들』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혐오 발언』 『비폭력의 힘』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권력의 정신적 삶』 『위태로운 삶』 『젠더 허물기』 『안티고네의 주장』 등이 있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인문중핵교과 교수.
지은 책으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허물기』 읽기』 『개인의 탄생』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역사』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젠더는 패러디다』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젠더 정체성은 변화하는가?』 『젠더 허물기』 『안티고네의 주장』 등이 있다. 최근에는 이성의 폭력성을 벗어날 가능성으로서의 감정 연구, 백래시 반젠더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시대 개인과 공동체의 공존 방식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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