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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자리

먹히지 않고 늙어가는 동물들을 만나다
김다은 , 정윤영 지음
돌고래

2024년 11월 20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10월 2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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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상품 정보
파일 정보 ePUB (73.05MB)
ISBN 979119885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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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동물과 인간이 새롭게 만나는 곳, 세 여자의 한국 생추어리 탐방기!
인제 꽃풀소 달뜨는 보금자리 · 화천 곰 보금자리 · 제주 곶자왈 말 보호센터 · 새벽이생추어리
ㆍ 프롤로그 1: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더 나은 방법을 찾아서 ·········· 정윤영
ㆍ 프롤로그 2: 생추어리, 동물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는 공간 ·········· 김다은
ㆍ 동물도 집을 갖고 싶다|인제 꽃풀소 달뜨는 보금자리 ·········· 글 정윤영|사진 신선영
ㆍ 야생의 숲과 철제 사육장, 그 사이에|화천 곰 보금자리 ·········· 글 김다은|사진 신선영
ㆍ 알고자 하는 마음이 사랑이 되려면|제주 곶자왈 말 보호센터 마레숲 ·········· 글 정윤영|사진 신선영
ㆍ 먹히지 않고 늙어가기를|새벽이생추어리 ·········· 글 김다은|사진 신선영
ㆍ 에필로그: 어떤 동물은 죽고, 어떤 동물은 산다 ·········· 신선영
ㆍ 주

소들이 알았고, 그래서 열었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창포를 모두 따라나섰고,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도로를 걸어 신선한 풀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갔다. 그랬을 걸 생각하니 책에서 봤던 문장들이 떠올랐다. 동물들의 ‘행위력’, ‘생을 즐길 줄 아는 고유한 능력’ 같은 것들. 그래서 소들의 마실 소동 혹은 탈출 시도 이야기를 꼭 쓰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이 얘기를 써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밤중이긴 하지만 소들이 도로를 누비고 이웃 주민의 밭에 들어가 풀을 뜯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겁이 났다. 멧돼지가 사람들이 사는 곳까지 내려왔을 때, 고라니가 밭에 들어와 농작물을 먹었을 때, 비둘기나 까치가 창문에 똥을 싸기만 해도 야생동물은 유해동물이 되고 ‘합법적으로’ 사살되는 일이 꽤 자주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물며 소들은 야생동물이 아니라 농림축산식품부에 등록된 ‘가축’이고 ‘주인’이 있다. (57)

부들, 머위, 메밀, 창포, 엉이의 귀에는 네모난 플라스틱 인식표가 달려 있었다. 귀에 달린 번호는 꽃풀소들이 농장에서 육우로 살았다는 증거였다. 미나리까지 여섯 명의 소들이 그날 농장을 나오지 않았다면 다른 소들과 마찬가지로 도살장으로 끌려갔을 것이고 그런 다음에야 인식표가 떨어졌을 것이다. (77)

“저희는 동물을 사육하는 분들에 비해 동물에 대해 모르는 게 많고, 소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분들은 소를 키우는 분들인 거예요. 갈등 구도로만보면 길을 만들 수 없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보금자리가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목표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살림을 어떻게 전환할 수 있을지, 그러니까 동물살림과 마을살림, 지구살림이 같이 연결되는 살림을 보여주고 싶고, 또 축산업 종사자들과 어떻게 협력해야 할지까지 생각하게 됐어요. 세상을 바꾸는 건 결국 사랑이고요. 어떻게 보면 꽃풀소들이 저희한테 선물을 준 것 같아요.” (80)

곰숲이라 부르는 약 330제곱미터 규모의 방사장에 나간 덕이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무관심한 채, 해먹 위에서 엉덩이를 비비며 편하게 누울 자세를 잡는다. 좁은 우리보다 시원해서인지 쉽사리 몸을 움직일 생각이 없다. TV와 선풍기를 켜놓고 소파에 누운 내 모습 같기도 하고. 덕이는 뭘 구경하는 걸까? 자신을 우리로 돌아오게 하려고 땅콩을 던지며 말을 거는 사람들? 땅에서 올라오는 더운 입김에 감겨 맥없이 꼬리를 흔드는 박새들? 단내를 풍기며 곰숲 안에서 대롱거리고 있는 장난감? (94)

국내에 있던 사육곰 농장 스무 곳 중 한 곳이 문을 닫았다. 덕이와 소요가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의 공간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다. 한 마리당 200만 원. 그리고 업종 전환 지원금도 농장주에게 지급했다. 한때 웅담용 어린 곰은 마리당 1500만원에 팔리곤 했다. 농장주 역시 그만큼의 수익을 기대하고 곰을 매입해 수십 년간 키워왔다. 기대했던 비용을 생각하면 농장주로서는 ‘아쉬운 장사’를 한 셈이다. 하지만 80대인 그는 웅담 채취용 사육곰 농장주라는 직업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사육곰협회에서는 2~3년만 기다리면 (정부가) 곰값을 쳐줄 거라고 했지만 애들이(곰들이) 나이도 먹고 사료값은 계속 들어가는데 수입도 안 되고, 기약없이 계속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곰 돌보는 단체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고민 끝에 “나도 키우는 데 힘에 부치고, 이제 얘들도 좋은 데 가서 잘 살았으면 해서” 농장에 남은 두 마리 곰을 보내기로 했다. 농장주는 활동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구조 현장을 멀찍이서 바라봤다. (114~115)

이 공간의 백미는 단연 벽면에 걸려 있는 커다란 모니터다. 곰 우리와 방사장 등을 비추는 스물네 개의 CCTV 화면이 쉬지 않고 돌아간다. 우리마다 곰들이 뭔가를 먹고, 눕고, 어슬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안에 있는 내실에는 카메라가 달려 있지 않아 어두운 그 안에선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외의 모습은 언제나 활동가들이 주의 깊게 지켜볼 수 있다. CCTV는 활동가들 각자의 휴대전화 앱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래서 잠깐의 휴식시간에도, 식사시간에도, 휴일에도 손에서 휴대전화를 놓는 법이 없다. 활동가들의 이야깃거리도 언제나 곰의 일거수일투족이다. (132)

2023년 9월 25일, 가을비가 무겁게 떨어지던 오전 8시. 내리는 비를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상근 활동가 세 사람은 아침 돌봄을 시작했다. 돌봄은 종합운동이다. 온몸의 근육을 이용해 썰고, 들고, 끌고, 당긴다. 화천 활동가의 전완근과 이두근이 단단해지는 만큼 이들의 돌봄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바뀌었다. 한두 마디의 외침으로도 서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 흐르듯 안다. 십수 마리 곰과 함께 있는 공간 안에서는 작은 실수가 큰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상기한다. 곰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화천의 돌봄수행에 다정한 수식어나 격식이 끼어들지 않는 이유다. 업무의 정확성과 효율성은 동료들 간의 신뢰로 이어진다. (140)

김민재 활동가는 풍부화물을 다루는 곰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취향과 개성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엔 어떻게 먹을까, 이렇게 하면 음식이 잘 안 나오는구나,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방법을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각자 다르게 행동하는 모습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145)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과거보다 현재, 더 많은 사람들이 동물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다. 현재보다 미래에 동물을 사랑하고 곁에 두는 사람들은 더 많아질 것이다. 에버랜드 푸바오의 귀여운 모습이 SNS를 통해 확산되면서 대단한 인기를 모으기도 했듯이 사람들은 귀여운 동물들을 언제나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푸바오의 무엇을 사람들이 사랑하는지 질문하게 된다. 동시에 ‘푸바오스럽지 않은 동물’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묻게 된다. (172)

"마마마마마마마"
밥 먹으라고 말들을 부르는 소리다. 김 대표가 부르는 소리에 멀리 있는 말들도 차량을 따라온다. 식욕이 왕성해 보이는 말들이 차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그 뒤를 임신한 말들과 몸이 약한 말들, 서열이 낮은 말들이 따라 걷는다. (188)

말의 수명은 23년에서 35년으로 알려져 있다. 할머니라고 불러 야 마땅한 서른아홉 살의 말은 얼굴이 매우 크고 다리가 짧았다. 한눈에 봐도 토종 제주마였다. 야생마의 큰 얼굴이 하얗게 셌다. 하얗게 센 털은 하얀 털과는 달랐다. 하얗게 센 털 아래로 거뭇한 피부가 얼룩덜룩했다. 눈가의 살들이 늘어졌고 쭈글쭈글했다. 코에는 가로로 몇 겹씩 주름이 졌고 입술도 처지고 헐렁거렸다. 할머니가 된 말은 이마갈기가 짧았다. 생추어리에서 본 말들의 갈기는 앞머리를 내린 것처럼 얼굴과 목까지 내려와 마치 머리카락 같았는데 어떤 말은 가위로 자른 듯 갈기가 반듯했고 어떤 말은 눈을 가릴 정도로 갈기가 길었다. 할머니 말은 갈기가 있던 흔적만 남았고, 목부터 등까지 길게 뻗은 갈기의 털도 아주 짧고 꼬불꼬불했다. (198)

이제 한 살이 된 로에나는 제이시의 새끼다. 제이시는 김 대표가 처음으로 구조한 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제이시는 오른쪽 대퇴골이 탈골돼 잘 걷지 못했다. 제이시를 본 수의사는 단번에 안락사를 권했다. 그 말을 들은 김 대표의 지인이 자신이 살릴 수 있다며 안락사를 말렸다. 몽골에서 온 지인은 평생을 말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제이시의 배에 밧줄을 감았다. 김 대표에게 말의 목을 잡게 하고 배에 감은 밧줄을 한 번에 잡아당겼다. 밧줄이 조여들자 말이 크게 뒷발질을 했다. 대퇴골에서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탈골된 뼈가 들어갔다. 그는 몽골에서는 이렇게 한다며, 한국 사람들은 너무 책으로 배운 대로만 한다는 말을 보탰다. 수의사 입장에서는 잘못된 의료행위로 볼 수도 있고, 그래서 제이시의 상태는 더 나빠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이시는 금세 회복했다. 뼈밖에 없던 제이 시는 제법 살이 쪘고 2년 뒤 로에나를 낳았다. (203)

생추어리의 말들은 왜 지붕이 없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햇살과 바람을 맞고, 풀의 이름 따위를 고민하지 않으면서 풀을 뜯는다. 말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하지 않으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현재를 산다는 감각과 자연에서 노는 법 따위를 잊어버렸음을 깨닫는다.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말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우리에게도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 (216)

얼룩말이었을 동물의 가죽과 내장이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경운기 짐칸에는 플라스틱 바구니와 비닐 자루가 있었고 그 안에는 말의 뼈와 살이 분류되어 담겨 있었다. 경운기 옆에는 임신한 말 두 마리가 올가미에 목이 묶여 있었다. 임신한 두 마리도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말이 도축당하는 걸 봐야 했던 게 분명했다. 지자체와 파출소에 불법 도축을 신고한 뒤 김 대표는 두 마리를 생추어리로 데려왔다. 다른 말이 도축되는 걸 보고 공포에 질린 말들을 어렵게 컨테이너에 태웠다. 생추어리에 도착한 뒤 두 마리는 안심했는지 곧바로 흙바닥에 몸을 뒹굴어가며 휴식을 취했다. (229)

한라마는 제주도 재래종인 제주마와 해외에서 온 경주마인 서러브레드종의 교잡으로 태어난 혼종이다. 농사에 쓰이던 제주마가 1980년대 들어서면서 쓰임이 줄어들었고, 정부는 개체수를 확대하기 위해 제주마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경마용 제주마를 보급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제주마는 평균 체고가 116센티미터 정도로 작아, 서러브레드와 교잡하여 한라마라는 덩치가 크고 빠른 경마용 말을 만들었다. 제주마 육성을 이유로 생겨난 한라마는 목적대로 경주마로 활약했지만, 30년 만에 경주마에서 제외되었다. 이번엔 ‘순수 혈통 제주마’를 보존한다는 이유였다. (235)

허밍이 아까보다 더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댄다. 허밍과 눈이 마주쳤다. 육상 포유류 중에 말의 눈이 가장 크다고 하던데, 정말 크다. 말의 눈은 머리 양쪽에 있어 시야가 아주 넓고, 그래서 바로 코앞에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한다. 대신 코의 후각과 수염의 촉각이 뛰어나 가까이 있는 걸 감지할 수 있다. 정말, 허밍의 수염이 내 뺨에 닿는 게 느껴졌고 허밍의 커다란 눈동자 안에 내가 보였다. 나의 눈이 허밍의 눈동자에 또렷하게 비치고, 허밍의 목을 쓰다듬을 때 천천히 규칙적으로 뛰는 맥박이 손바닥에 닿는다. 허밍과 눈을 마주치고 그의 뺨을 쓰다듬은 30분, 시간이 또 한 번 멈춘다. 이 마주침이 내가 살아온 시간, 내 소비 습관부터 오래 묵은 편견들을 무너뜨릴 거라는 걸 알았다. 이 순간, 그러니까 다른 존재와 마주하면서 내가 살던 세계가 무너지는 걸 확인하는 순간들이 좋았다. (243)

‘공장형 돼지농장’은 전국에 퍼져 있다. 당연하다. 한국에서만 하루에 돼지 5만 마리를 도축해 취식한다. 이러한 공장형 농장들은 내부가 철저히 가려져 있어 화재든 무엇이든 사건 사고가 발생하지 않으면 드러날 일도 없다. ‘돼지의 생애’ 혹은 ‘돼지를 다루는 일’이 외부로 잘 알려지지 않는 까닭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데 있다. (270)

돌봄하우스 안의 수돗가를 이용하려고 하면 거위 여럿이 다가와 이 인간이 뭘 하나 지켜본다. 혼자 다니지도 않는다. 꼭 골목길에 서넛씩 무리지어 어울리고 있다가 불쑥 다가와 말을 거는 식이다. 그러다 뭔가가 내키지 않는지 부리로 종아리를 쿡쿡 찌르면서 내 귓가에 대고 뭔가를 말하기 시작한다. 관심의 표현일까? 경계하는 걸까? 알 수 없다. 다만 큰소리에 울렁증이 있는 나로서는 상당히 진땀을 빼야 하는 상황이 된다. 부리로 장화를 찍어대면 꽤나 아팠다. 허리를 숙여 수도를 쓰면 거위 무리가 마치 깐깐한 감시관들처럼 내 옆을 빙 둘러쌌는데 나는 매우 움츠러들었다. 억울한 마음과 함께 괴팍한 마음이 든다. 거위를 향해 심술궂은 표정을 짓거나 “이것 참 너무하는군.” 하며 어깨를 으쓱거리게 된다. (316)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과정에서 내 안의 불균등한 애정 전선 아래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묻기도 했다. 동이는 사랑스럽지만 거위는 싫다.(심지어 거위는 여러 마리라서 그런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새생이와 보듬이들은 몇몇의 이름을 부르고 이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좋고 싫음의 이유는 단순했다. 동이는 온순했고 거위는 거칠었다. 동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포유류지만 거위는 그보다 조금 더 먼 조류다. (316)

젖은 공기에는 미풍의 단내보다 진득한 삶과 죽음 사이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마주친 두 눈에 붉은 핏발이 서 있다. 한 마리만 그런 게 아니다. 어딜 보나 그 눈을 보게 된다. 지독한 피로가, 오래되고 낡은 절망 같은 것이 그 안에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눈은,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이 어느 정도 미쳤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쳤다’는 말을 떠올리고는 참혹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수긍하고 만다. 다시 그 눈을 빤히 봤다. 오늘 들어온 돼지들은 모두 모돈들이었다. 감금틀에 갇혀 임신과 출산만 반복하다 여기까지 왔다. 그래, 3년간 그렇게 갇혀 지냈는데 미치지 않았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도축장 입구에 선 1톤 트럭이 천천히 소독약이 방사되는 출입구로 출발했다. (330~331)

함께 비질을 다녀오고 며칠 후, 혜리에게 연락이 왔다. ‘새벽이생추어리 비질 모임’이 여성환경연대 임팩트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비질 기록집을 제작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한 달에 두 번씩 흑염소 경매장, 도살장, 전통시장, 동물체험장 등을 다닐 거라고도 했다. 활발하게 외부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사실 “웬만하면 집에서 나가지 않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내가 밖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고 하면 그건 나라꼴이 이상하다는 거다.”라고 농담인 듯 진심인 말을 하며 그는 자신의 변화에 새벽이생추어리와의 만남이 있었다고 말했다. 일러스트레이터인 그는 2022년 기획 중이던 전시에 새벽이를 그림에 담고 싶어서 새벽이생추어리에 연락을 했고, 이후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333)

홍은전, 김소영 추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조정해야 하는 시대,
네 곳의 생추어리에서 엿본 서로돌봄의 가능성

반려동물 수의 급속한 성장, 축산업의 대규모 공장화, 야생동물 서식지의 파괴, 종 다양성 파괴, 먹거리의 대량생산 및 유통, 인수공통 감염병의 유행, 도시에 적응한 야생동물 종…… 동물에 관한 논의들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이루어지는 시대다. 국내에서도 보호와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물권을 위해 싸우는 단체들, 야생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들에게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는 보금자리를 제공하려는 생추어리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는 오늘날 동물과 인간의 관계가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중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지구 생태계를 희생시키며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던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겠지만, 동시에 인류가 인간 중심적인 사고와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적·정서적·기술적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생추어리(sanctuary)는 안식처, 보호구역이라는 뜻이다. 1986년 미국의 동물보호 운동가 진 바우어가 동료들과 함께 ‘가축수용소’ 근처 사체 처리장에서 살아 있는 양 힐다를 구출해 ‘생추어리 농장(Farm Sanctuary)’을 만들었다. 힐다는 생추어리에서 1997년에 자연사했고 그의 묘비에는 “영원히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킬 친구”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생추어리에는 인류의 폭력적인 도구화(사물화)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이 살아간다. 간혹 구조된 야생동물들도 있고 유기된 반려동물들도 있지만, 대다수가 축산업, (의료적·미용적) 실험, 경주 등 오락산업에서 착취당해온 ‘산업동물’들이다. 애초에 인간의 필요에 의해 개조되었기 때문에 야생에서와는 전혀 다른 몸과 경험을 지닌 생명체들이다. 이들은 생추어리에서 인간들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를 맺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들의 착취당하지 않는 삶을 보며 동물이 원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인간이 이들과 어떻게 관계맺을 수 있는지 느끼고 배운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동물권, 생명, 돌봄이라는 가치의 증인이자 선생인 셈이다.
한국의 첫 생추어리는 2019년 DxE(Direct Actions Everywhere)가 종돈장에서 공개구조한 돼지 새벽이와 함께 시작되었다. 현재 한국에는 총 다섯 곳의 생추어리가 운영되고 있는데 이 책에는 새벽이생추어리, 인제 꽃풀소 달뜨는 보금자리, 화천 곰 보금자리, 제주 곶자왈 말 보호센터 네 곳을 취재하고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다.(2022년 개소한 카라의 미니팜 생추어리는 담지 못했다.) 김다은, 정윤영 작가와 신선영 사진가는 한국에 생추어리들이 생기기 시작한 2019~2020년경부터 관심을 가지고 활동에 참여하다가, 2023년 초 정식으로 기록을 결심하고 취재를 시작했다. 계절이 두 바퀴를 돌며 바뀌는 동안 생추어리에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혹은 평범한 돌봄의 나날들을 기록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이 네 곳의 생추어리들은 설립 목표, 운영 주체, 운영 방식이 모두 다르다. 동물을 좋아하는 개인이 시작한 곳(말 생추어리)부터 지역과 협업하며 운영하는 곳(달뜨는 보금자리), 또 수의학적 지식이 풍부한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곳(곰 보금자리), 또 급진적인 슬로건을 걸고 치열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곳까지(새벽이생추어리). 어떤 곳에서는 동물을 ‘명’(이름 名이 아닌 목숨 명命을 쓴다.)으로 세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마리’로 세고, 어떤 곳에서는 인간이 동물을 관습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일반인들의 방문과 체험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기도 한다.
작가들은 이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는 어떤 맥락에서 그러한 선택과 결정과 실행이 이루어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쪽을 택했다. 각각의 생추어리들은 상황과 자원에 맞춰 저마다 없던 길을 만들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지며 만들어가는 모든 자취가, 실패와 성과들이 모두 우리에게 커다란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생추어리들을 마냥 천국처럼 아름다운 곳인 듯 포장하지도 않고 간혹 아슬아슬한 질문들을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생추어리에서 느낀 깊은 감동과 설렘이 축소되거나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선영 사진가가 포착한 200여 컷의 장면들은 그런 감동과 설렘을 독자들에게 극대화하여 전달한다.

인제 꽃풀소 달뜨는 보금자리 / 동물해방물결

달뜨는 보금자리는 동해물(동물해방물결)이 운영하는 소 생추어리다. 불법 개 농장에서 개를 구조하다 발견한 소 열다섯 명(이 책에서는 동물을 셀 때 각 생추어리의 원칙을 따랐다.)을 데려오기 위해 농장주에게 구입했다. 이를 위해 동해물은 SNS모금을 시작함과 동시에 소들이 지낼 거처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기적처럼 두 달 동안 1648명의 후원자, 4600만 원의 후원금이 모였지만, 춘천에서 울릉도까지 전국을 돌며 찾아 헤맸던 보호처에서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와중에 불법 농장의 처분 시일이 예상보다 앞당겨져 급히 소들을 데리고 와야 했다.
또다시 기적처럼 정성헌 이사장의 소개로 인제의 소 농장에 맡기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또 크기가 문제였다. 최대 여섯 마리만 수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미 열다섯 명의 소들과 얼굴도 익히고 이름도 짓고 관계를 맺은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절망했다. 결국 먼저 나오는 순서대로 머위, 메밀, 미나리, 창포, 엉이, 그리고 부들이가 구조되었고, 나머지 소들은 처분 기일에 맞춰 도축장으로 향했다. 이들의 이름은 꽃다지, 달래, 둥글레, 들콩, 박하, 봄동, 백도라지, 겅퀴, 완두다. 활동가들이 들풀과 들꽃에서 따와 강인하게 살아남으라는 마음을 담아 붙인 이름들이었다.
임시보호처의 농장주는 처음에 6개월 예정으로 부탁했던 돌봄을 1년 반 동안 해주었다. 인제 내에서 거처를 찾던 동해물은 신월리에서 마침내 소들의 집을 구했다. 신월리는 로컬 사업의 하나로 폐교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중이었고, 마을 이장, 반장, 사무처장 등 신월리 주민들은 젊은 활동가들과 그들의 비거니즘 운동에 우호적이었다. 이렇게 동해물은 ‘신월리 달뜨는 마을’ 공동체와 협약을 맺어 폐교된 신월분교를 중심으로 ‘비건청년마을’을 만들기로 했다. 열심히 ‘달뜨는 보금자리’를 지으며 입주를 코앞에 두고 있을 때 미나리가 죽었다. 활동가들은 소들의 죽음과 삶 사이의 지나치게 가느다란 경계선을 경험하며 이전이라면 (동물권 운동의) ‘적’이라 불렀을 농장주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받고 기꺼이 그들에게 배웠다. 이 독특한 협업이야말로 ‘달뜨는 보금자리’의 가장 큰 특징이다.
다섯 명의 소들이 이사오는 날, 활동가들과 마을 주민들은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상태로 이들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발 한 발 엉이가 먼저 내딛기 시작하고 뒤따라 다른 소들이 따라내렸다. 머위는 갑자기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평생을 좁은 축사에 갇혀 지냈지만 달리는 법을 잊지 않은, 아니 스스로 알고 있었던 이 커다란 산업동물들을 보며 사람들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달뜨는 보금자리의 돌봄활동가들은 가야, 솔, 현욱, 타샤다. 이들은 가족이고 가야와 솔은 어린이다. 현욱은 생태농업(퍼머컬처)를 지향하며 소의 똥을 이용해 풀을 기르고 그 풀을 소와 함께 나누어 먹는다.
어느날 현욱이 자물쇠 채우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머위가 긴 혀로 문고리를 열었다. 고민하던 사이 창포가 먼저 용감하게 문을 나섰다. 그 뒤를 엉이가 따르고, 유순한 모범생 메밀이는 고민 끝에 마지막으로 이들을 따라나섰다. CCTV에 고스란히 찍힌 ‘비밀 밤마실 사건’의 전말이다. 소들은 가출을 해서 인근 학교 쓰레기통을 다 뒤집고 도로로 직진해 행진을 한 후 밭으로 가서 새싹들을 맛보았다고 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이장님과 현욱을 따라 돌아온 소들은 집의 소중함을 깨닫고 현욱에게 한층 더 다정해졌다. 소들은 이제 다섯 살이 된다.

화천 곰 보금자리 /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한국 사육곰의 수난사는 반달가슴곰을 해수(害獸) 사냥을 권장했던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토종 곰이 1000마리 넘게 죽었다는 보고도 있다. 이후 한국전쟁과 급속한 근대화를 거치며 곰 서식지가 파괴되고 보신문화에 의한 밀렵이 횡행했다. 1972년 곰 사냥이 금지되었지만 곰 농장은 늘어났다. 1981년 농가 소득 증대 방안으로 곰 사육이 장려되는 한편 1982년에는 반달가슴곰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 1983년 설악산국립공원에서 마지막 야생 반달가슴곰이 밀렵되었는데 정부는 이 곰의 웅담을 경매에 부쳤다.(그리고 당시 서울 아파트 값에 맞먹는 금액에 낙찰되었다.) 1993년 CITES에 가입하며 곰 수출이 금지되었지만 웅담은 국내에서 계속 팔렸다. 1990년대에 이후에도 정부는 국내 사육곰의 ‘용도변경(도살)’을 줄곧 인정해왔지만, 2000년대 이후 시민단체들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드디어 2023년 12월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야생생물법)’ 시행령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2026년 1월 1일부터 누구든 사육곰을 소유·사육·증식할 수 없고 사육곰과 그 부속물(웅담)을 양도·운반·섭취할 수 없다.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는 뚜렷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는 단체다. 2018년 국내 사육곰 문제 해결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280여 마리 곰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이들은 2019년 전국의 사육곰 농장 조사해 『사육곰 현장조사 및 시민인식조사 보고서』를 발간했고, 여러 단체들과 연합해 사육곰 산업 종식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화천에 이미 구조된(농장주들에게 구입한) 사육곰 열다섯 마리를 돌보는 생추어리를 운영하고 있고, 2026년 이후 갈 곳이 없어지는 곰들을 수용할 생추어리들(구례 생추어리와 서천 생추어리)을 준비하는 한편 수용되지 못하는 곰들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화천 곰 보금자리 활동가들은 곰들이 곰답게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을 시도하는 일에 주력한다. 활동을 최대한 다양하게 할 수 있는 행동풍부화물을 설치하고 물놀이를 좋아하는 곰들을 위해 수영장을 마련했다. 우투리라는 혈기 넘치는 곰은 이 커다란 고무대야를 매번 종잇장처럼 찢어놓지만, 그래도 다른 곰들은 방마다 마련된 개별 수영장 덕분에 무더운 여름을 한결 시원하게 날 수 있었다. 또 방사장(곰숲)은 곰들이 함께 더 넓은 공간을 누리며 놀 수 있도록 꾸며두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공을 들인 것은 곰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합사’와 자연의 리듬을 따르는 ‘동면’ 프로젝트다. 방사장(곰숲)으로 놀러나갔던 덕이가 리콜 사인을 잊고 자기 우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든지, 친해 보여서 합사를 시도했다가 싸움이 나 소화기를 동원해 떼어놓는다든지…… 하는 자잘한 실패의 에피소드들이 있지만, 그런 실패들을 통해 이들의 돌봄은 더 단단하고 정교해진다.
화천 곰 보금자리를 이끌어가는 이들은 대부분 수의학적 지식이 풍부한 전문가, 동물원 사육사, 수의테크니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전장비인 곰 스프레이부터 넓은 보금자리 안에서 활동가들의 소통을 위한 무전기, 곰들이 규칙들을 잊지 않도록 훈련할 때 쓰는 땅콩 한가득, 뭐든지 자를 수 있는 전지가위와 각 우리의 수영장 물을 뺄 때 밸브를 푸는 렌치 등으로 완전무장한 활동가들이 건강 상태 체크, 일상적인 먹이주기나 방사장 유도, 합사, 동면 등을 철저하게 계산하고 정연하게 시행한다. 곰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검은색 옷으로 맞춰 입고 각종 장비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활동가들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멋지다고 감탄하게 된다.(신선영 사진가는 후기에서 이들의 모습을 「피지컬 100」에 비유했다.)
곰 보금자리에서는 곰들이 사고나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수의학적인 판단에 근거해 안락사를 시행하기도 한다. 더 이상 치료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고통이 극심해져 삶의 질이 현격히 떨어지는 경우가 기준이 된다. 곰들을 보내는 부담감과 책임감을 인간의 몫으로 가져와 기꺼이 감당하고 곰들의 생을 더 낫게 만드는 것이 이들의 목표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봄바도 그런 경우다. 가장 나이가 많고 활동가들에게도 추억을 많이 안겨준 봄바는 어느날 곰숲(방사장)에서 놀다가 구조물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쳤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된 봄바는 적극적인 여러 치료에도 나아지지 않았고 상태가 점점 나빠졌다. 결국 활동가들은 봄바가 가장 좋아했던 꿀을 마지막 식사로 준비한 후 2023년 10월 24일 오후 2시 안락사를 실행했다.

제주 곶자왈 말 구조보호센터 / 김남훈 대표

말 생추어리에서 가장 먼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세 가지 장면들이 있다. 일단 신비롭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야생의 숲. 곶자왈(곶은 나무숲, 자왈은 자갈이라는 뜻)은 화산이 분출할 때 만들어진 용암 지대로 크고 작은 바윗덩어리가 많아 사람이 살기에는 어려운 덕분에 더더욱 다양한 온갖 생명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이곳에서 40여 마리의 말들이 안장도 굴레도 없이 자유롭게 먹고 쉬고 달리고 교감한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누워서 자는 말들이다. 말들은 옆으로 눕거나 엎드려 눕거나 혹은 배를 내보인 채 훌렁 드러누워 잔다. 세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말들이 항상 함께 무리지어 다닌다는 점이다. 쉴 때도 무리를 떠나지 않고 서로 얼굴과 목을 맞댄 채 눈을 감고 쉰다.
이 말 생추어리는 독특하게도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다. 김남훈 대표는 ‘동물권’이라는 단어도 낯설고 동물보호나 구조와 관련된 활동을 해본 적도 없다며, 동물과 관련해서 어떤 ‘권위있는’ 타이틀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솔직하게 내세운다.(물론 동물권 활동가나 단체의 도움은 많이 받았다.) 말과 함께하고 싶어서 프로골퍼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왔고 원래는 승마장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한국 경주마들의 불법 도축 실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외국에서 호스맨십 교육을 받을 때 동료들에게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속담까지 알려주며 우쭐댔던 일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개인이 이렇게 큰 규모의 생추어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할아버지 대부터 이곳에서 살며 마을 공동 목장을 운영했던 기억이 힘이 되었다. 그는 꼬박 2년 동안 포클레인과 트랙터 모는 법을 배워 자갈이 많은 곳을 다듬고 가시덤불 숲을 초원으로 만들었다. 지자체와 싸워가며 수도도 끌어왔다. 저녁에는 골프레슨을 해서 비용을 충당한다.
생추어리의 하루는 길고도 노동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새벽 5시부터 일정이 시작되어 근처 라이그라스 목장에서 풀을 베어다가 말들에게 밥을 준다. 드넓은 생추어리 공간은 매일 손볼 곳이 생긴다. 생추어리에 와서 밥을 먹고 가는 야생마들도 챙겨야 하고, 또 사랑을 찾아 밖으로 나간 말을 찾아다녀야 하는 일도 종종 있다. 임신한 말들을 돌보고 새끼가 나올 때를 놓치지 않고 엄마 말의 오줌을 자기 몸에 묻혀 새끼와 관계를 쌓으려 노력한다. 또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정형행동을 하는 말들이 따로 모여 있다. 주로 퇴역한 경주마들이 있는 곳인데 경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트럼펫도 있고, 맨날 꼴찌만 하던 캄모르도 있다. 다쳐서 간단한 치료를 해야 했지만 치료비 때문에 도축될 뻔했던 스노우도 있다. 사연 없는 말이 없다는 김남훈 대표의 말이 딱 맞다. 이들은 다양한 스트레스를 ‘정형행동(끙끙이)’으로 표현한다. 쇠붙이를 잡아당기거나 고개를 쉬지 않고 흔들거나 사람들에게 발길질을 하는 것이다.
말들을 불법도축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합법적으로는 도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병이 들어 죽어가는 말들, 고기로 유통되어서는 안 되는 말들의 뼈와 내장을 누군가 팔고, 누군가 산다. 1년 동안 퇴역하는 경주마는 평균 1400마리. 그중 승마, 번식 등 목적이 바뀌어 신고하는 경우는 절반도 되지 않고 그마저도 허위인 경우가 많다. 퇴역한 뒤 말들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사는지 전혀 알 수 없다. 한국마사회는 말의 등록 정보, 혈통과 우승 이력, 잘 달리는 말의 유전자 정보까지 가지고 있지만, 퇴역한 말들에 대한 정보는 없다. 생추어리와 경마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축장이 있다.
김남훈 대표는 말들에게 직업을 주고 싶다고 한다. 사람들이 와서 자유로운 말들을 바라보며 얻는 것이 승마체험에서 얻는 것보다 훨씬 더 크리라 믿기 때문이다. 말을 괴롭히지 않고도 말들과 더 깊이 교류할 수 있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실제로 말 생추어리에 와서 말과 교감을 경험한 이들은 모두 자진해서 봉사자가 되거나 후원자가 되거나 혹은 말들의 양부모가 되었다. 이곳은 얼마 전 이사를 마치고 ‘곶자왈 말 보호센터 마레숲’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새벽이생추어리 / 새벽이생추어리 새생이 + 보듬이

돼지는 익숙하지만 베일에 싸인 존재다. 돈사는 우사보다 더 눈에 띄지 않고 사람들의 인식도 좋지 않다. 돈사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은 매우 험하고 대체로 이주노동자의 손을 거친다. 싸게 많이 공급되는 고기로서 돼지의 지위는 돼지 사육장 노동자의 지위도 결정한다. 하지만 ‘고기’로서 생산되는 돼지가 아니라 야생의 돼지라는 동물에 대해서 밝혀진 여러 과학적 사실들은 이런 인식과 매우 다르다. 돼지는 사회적인 능력과 공감 능력, 인지 능력 모두 뛰어나다. 독립적이고 길들이기 쉽지 않고 고집이 세다. 또 후각적인 능력이 매우 발달했기 때문에 사실 매우 깔끔하다.(지하 700미터까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돼지는 자기네 생활공간을 꽃과 나뭇잎 등으로 장식한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새벽이생추어리는 한국 최초의 생추어리다. 이곳에는 종돈장에서 공개구조된 새벽이(새벽이생추어리는 얼마전 SNS룰 통해 새벽이의 이름을 ‘새벽’으로 변경한다는 내용을 공지했다.)와 의약회사에서 ‘실험동물’로 길러진(것으로 추정되는) 잔디가 살고 있다. 2020년 첫 발을 뗀 새벽이생추어리는 2023년 말 새로운 터전인 ‘그믐달’로 이사했다. 새벽이는 생추어리 안에서만 생활하지만 잔디는 활동가들과 함께 자유롭게 인근을 산책하기도 한다.
새벽이생추어리의 활동가들은 축산업 완전 철폐를 외치며 동물해방과 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가장 급진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교육’을 통한 인식 개선에도 그래서 더 힘을 쏟는데, 특히 돌봄활동을 위한 교육에서는 돌봄의 방법이나 안전 등의 이슈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동물을 대할 때 지양해야 할 표현들이나 태도에 대해서도 다룬다.(동물들에 대해 ‘귀엽다’고 표현하거나 돌봄활동을 ‘봉사’라고 표현하는 것 등) 또 보안에도 민감해 생추어리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지 않는다. 돌봄활동에 참여하려면 교육을 이수하고 동의서를 작성해야 한다. 동의서에는 생추어리 위치나 활동가들의 신원이 드러나지 않도록 약속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들이 보안에 특별히 더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무엇보다 ‘돼지’라는 종의 특수성 때문이다. 돼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싼값에 대량으로 거래되는 축산 동물인 만큼 특별히 더 취약한 지점이 있다. 소와 돼지에게 공통으로 발병하는 구제역은 폐사율이 높지 않지만, 돼지만 걸리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은 백신도 없고 폐사율이 100퍼센트에 이른다. 2019년 첫 발병 이후 (2024년 5월 기준) 농장에서 40여 건이 터졌고 살처분 규모는 6만 4000여 두에 달한다. 야생멧돼지에게서는 총 4000여 건 이상 검출됐다. 발생 범위 역시 점점 넓어져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문제는 객관적 기준 없는 ‘예방적 살처분’ 조치다. 최근 제정된 ‘아프리카돼지열병 방역실시요령’에 따르면 발생농장 반경 500미터 내 예방적 살처분 명령은 시장 및 군수가 한다. 전문적인 역학 검토가 권고되기도 하지만 필수는 아니다. 2019년에는 반려돼지까지 살처분 대상이 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새벽이생추어리 인근 농장에서 발병할 경우 새벽이와 잔디는 확진 여부와 무관하게 살처분을 당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이유는 고작 저렴한 ‘돼지고기’에 불과한 ‘새벽이’라는 존재가 동물권 운동의 주체가 된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혐오 세력 때문이다. ‘공개구조’란 활동가들이 신원을 감추지 않은 채 농장에 직접 들어가 농장동물을 구조했다는 뜻이다. 이런 ‘구조’ 활동은 현행법상 ‘절도’로 표현된다. 21대 국회에서 정청래, 이탄희 의원 등이 민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해 동물을 물건과는 다른 생명체로 보자는 목소리를 냈고, 2021년 7월 19일 법무부가 같은 내용의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동물의 법적 지위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새벽이생추어리 활동가들이 새벽이를 ‘동물권 운동의 최전선에 선 생존자’로 호명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혐오 세력은 새벽이를 ‘불법적’이고 ‘불편한’ 존재로 여기며 위협을 가한다.
새벽이생추어리를 통해 동물들이 처한 위험에 대해, 동물권 운동의 지향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되고 더 긴밀히 연루된 이들은 활동 범위를 점차 넓혀가게 되었다. 한국의 동물권 운동의 씨앗을 심고 있는 이들의 투쟁은 ‘새벽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아직은 어두운 동물해방의 새벽을 연다는 의미를.

작가정보

저자(글) 김다은

《시사IN》 기자. 유튜브 「2050 생존TV」와 팟캐스트 「혼밥생활자의 책장」을 제작 및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혼밥생활자의 책장』(나무의철학), 『마음은 굴뚝같지만』(공저, 문사철), 『20대 여자』(공저, 시사IN북), 『2023 기후 전망과 전략: 10인과의 대화』(공저, 착한책가게)가 있다.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 생태농업 관련 주제로 취재와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저자(글) 정윤영

이러저러한 일로 밥벌이하며 르포를 쓰고 있다. 『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한겨레출판), 『당신은 나를 이방인이라 부르네』(후마니타스), 『숨을 참다』(후마니타스), 『달빛 노동 찾기』(오월의봄), 『마음은 굴뚝같지만』(문사철), 『416 단원고 약전: 짧은, 그리고 영원한』(굿플러스북), 『숨은 노동 찾기』(오월의봄) 등의 책에 공저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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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의 자리
    먹히지 않고 늙어가는 동물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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