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섭 평전
2024년 11월 20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12월 15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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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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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원규는 소설가로 등단해 1990년대 이후 생생한 문체로 민족혁명가 김원봉, 조봉암, 김경천, 김산 등의 평전을 써왔다. 인천 출신 작가가 이번엔 인천이 낳은 석학 『고유섭 평전』을 펴낸 것이다. 저자는 3년 전 인천문화재단 요청으로 고유섭의 약전을 집필했는데, 그가 구축해낸 거대한 업적에 비해 연구서와 논문이 예상보다 적고 점차 대중에게 잊혀지고 있다고 느꼈다. 고유섭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다시 펜을 잡았다.
『고유섭 평전』은 고유섭의 학문, 인천·경성·개성 등에서의 생활을 두루 다룬다. 부친 고주연의 생애부터 그려지는 조선의 풍경이 인상적이다. 통문관·열화당 전집과 그 당시 신문 및 『진단학보』 『조광』 『신동아』 『문장』 등에 실린 1차 자료를 충실하게 담았고, 어려운 한자어는 풀어서 설명했다. 1910~20년대 인천시가지 지도를 실어 그 당시 실제 모습을 보는 듯하다. 미공개 자료인 고유섭 가문의 호적, 족보와 부모 및 고유섭의 졸업장 등을 수록했다. 고유섭의 일기와, 가족과 선후배의 증언, 동국대 중앙도서관 귀중본실에 있는 우현의 육필원고와 답사노트, 삽화 등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해 생애를 오롯이 복원했다. 그렇게 복원한 고유섭의 짧은 생애는 조선 민족은 열등하고 문화예술에 독창성이 없다고 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예술의 정체성을 찾는 일에 일관되어 있었다.
제1부 출생과 성장
민족수난기에 태어나다
기차통학생 문학소년
고미술사에 눈돌리다
제2부 젊은 날의 초상
경성제대의 사각모자
철학도의 삶
고독한 학문의 길
미술사 연구의 문
제3부 아무도 걷지 않은 길
박물관장이 되어
본격 연구의 중심으로
감성과 지성
생애의 절정기
제4부 최후의 열정
조선의 미는 구수한 큰 맛이다
생애의 위기가 다가오고
39년 생애, 유성(流星)처럼 지다
떠난 뒤에
주요 참고자료
우현 고유섭 연보
찾아보기
P.12 일제강점기에 고유섭이 없었다면 민족의 정신문화는 얼마나 더 황폐했을지 여러 번 생각했다. 그는 민족의 예술혼을 지키는 일에 매진하다가 힘이 다해 떠났으니 불멸의 혼이 되었을 것이다.
P.21 아호 ‘우현’(又玄)은 1930년대 전반부터 사용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제1장에 있는 말로써 ‘그윽하고 또 그윽하다’ 또는 ‘오묘하고 또 오묘하다’라는 뜻을 품었다.
P.49 우현이 집에서 쉬던 두 번째 해는 1919년이었고 3·1운동이 일어났다. 우현은 겁 없이 태극기를 여러 개 그려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만세를 부르며 골목길을 내달렸다.
P.52 우현은 태극기 사건 때문에 공립학교에 갈 수 없어 사립고보로 간 것이다. 만세시위와 경찰서 감방 경험은 우현이 민족정기를 높이기 위해 미술사 연구에 앞장서고 그것을 문화 독립운동으로 여겨 평생을 밀고 가는 정신 내면의 동인(動因)이 되었다.
P.64 고보에서 대학까지 이어졌던 기차통학은 우현의 문학적 소양을 한껏 높여주었다. 어머니가 쫓겨나고 서모가 들어와 집안 살림을 해나가는 불행한 현실에서 소년 고유섭은 문학으로 감정을 분출했다. 우현이 문학 습작을 쓴 계기는 기차에서의 독서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 멤버들과의 합평이었다.
P.160 1920년대에 경성은 폐결핵이 청년층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우현도 폐결핵을 두려워하면서도 요절하는 천재의 생애를 자기 인생에 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낙서처럼 쓴 네 가지 삶의 길 중 ‘짧고 굵은 일생’을 살았다. 뒷날 폐결핵이 아닌 다른 병에 걸려 요절하듯이 떠났고 세상은 천재를 잃었다고 했다. 마치 운명을 예감한 듯하다.
P.173 21일에는 71원 80전 6급봉 월급을 받았다. 대학교 연구실 조수가 후한 대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930년 공립보통학교 훈도(訓導, 교사) 초봉이 월 26원이었고, 은행원은 31원, 일반 관리직은 17~20원이었다.
P. 184 그러나 아들 병조가 다시 아팠고 11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인천 북망산에 아기를 묻었다. 현재의 인천 남구 도화동 옛 인천대 캠퍼스 북쪽 구릉을 북망산이라 불렀다. 첫 아이였으므로 관을 멘 인부를 따라 우현이 그곳까지 걸었을 것이다. 그가 1926년 3월 『조선일보』에 발표한 「경인팔경」 제7연 ‘북망 춘경’의 배경인 그곳, 10년 뒤 이태준이 쓴 단편소설 「밤길」에도 등장하는 묘지 산이다. 「밤길」의 주인공은 우중에 죽은 아기를 안고 주안 쪽으로 걷는다. 같은 길이다.
P. 189 동행한 사진사 엔조지 이사오는 소중한 협력자였다. 두 사람은 충남의 온양, 보령, 대천, 청양, 공주, 논산을 거쳐 전라도로 넘어가서 김제, 전주, 광주, 능주(오늘의 화순), 보성, 장흥, 강진, 영암, 구례를 답파했다. 문헌 기록을 눈으로 확인하고 거기서 빠진 유적과 유물 들을 찾아 실측하고 탁본하고 촬영했다. 탑이란 탑은 발품을 팔아서 모두 돌아보았다.
P. 216 위창은 우현보다 41세 위였다. 조혼을 하던 당시 관례로서는 할아버지뻘이었다. 유홍준은 “한국미술사의 할아버지는 위창이고 아버지는 우현이다”라고 했다. 나이를 따지지 않더라도 둘 사이에 위창의 제자이자 우현의 스승인 춘곡 고희동이 있었다.
P. 222 우현은 그렇게 쓰고 나서 “와서 보고 공부하고, 아이들을 보내야 많은 기부금을 내서 박물관을 지은 공덕이 살아난다”라고 호소하니 관람객들이 늘었다. 그의 친절하고 정성스러운 해설에 모두 고개를 숙이며 감사해했다.
P.237 1916년의 도난사건 뒤에 유점사 스님들이 목숨 걸고 막아서 45개 불상 낱낱은 도쿄제대와 교토제대 조사반도 촬영하지 못했고, 아마 총독부박물관도 하지 못한 터였고, 그래서 총독부박물관장이 사진 못 찍는다고 말리며 비웃었다는 것이다. (…) 우현은 기어이 촬영에 성공했다. 유일한 조선인 미술사 연구자로서 일본인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결의를 가졌던 것이다.
P.285 우현은 개성부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달려갔다. 농부가 웅덩이 물을 퍼내어 닦아낸 그것은 고려 때 석등(石燈)이 분명했다. 우현은 카메라로 촬영하고 개풍군수에게 우선 보존을 부탁한 뒤 박물관으로 돌아와 문헌자료를 샅샅이 훑어 고증해냈다.
P.355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근거로 논증을 펼쳐 미륵사지탑은 백제 무왕 때 것임을, 왕궁평탑과 정림사탑은 무난히 백제 말기 것임을 증명했다. 정림사탑이 통일신라 시기의 탑이라는 세키노 다다시 등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다.
P.433 이때 우현은 37세, 이중섭은 26세였다. 조선미술사 관련 우현의 글을 읽고 감화를 받고 찾아온 비범한 청년 화가가 우현에게 회화 기법을 배웠던 것이다. 이중섭의 특기인 은지화(銀紙畵) 기법이 이때 배운 고려청자의 상감 기법이나 금속공예의 은입사(銀入絲) 기법에서 터득한 것이라 하고, 고려청자에 그려진 동자(童子)의 모습을 연구해 작품에 반영한 것도 우현의 영향이라고 하니 우현의 가르침은 효과가 사뭇컸다.
P.448 우현의 태도가 인상적이다. 조선인 학자로는 처음으로 도쿄에서 열린 일본 최고 학술발표회에 초청되어 강단에 서서 조선탑파의 특색을 주제로 발표하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하며 그는 조국 고미술의 우수성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P.524 우현 관련 연구서나 논문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국립중앙도서관 자료를 보면 도서 97권, 학위논문 7편, 기사(신문기사, 연구논문과 잡지 글 포함) 158편이다. 보성고보 선후배인 염상섭·현진건·임화는 문인이니 연구서나 논문이 많겠지만 국어학자와 철학자였던 동기생 이희승·박종홍보다 우현 관련 자료가 적다. 학위논문이 적고 생애사 기술은 거의 없다. 비판의 글도 더 나와야 한다. 그래야 이 나라 문화예술사가 풍성해진다.
P.525 우현은 가장 비범했고 가장 열정적인 개척자였으며 가장 고독했던 문화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민족혼을 지킨 불멸의 혼이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의 평전
빼앗긴 조국의 미술사를 개척하라고 하늘이 내려보낸 인물 고유섭
소설가이자 전기 작가 이원규, 고유섭의 생애를 복원하다
인천의 첫 경성제대생 고유섭,
인천이 낳은 가장 비범한 인물이 되다
우현 고유섭은 1905년 인천 싸리재 한성길에서 축현역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의 끝자락 큰우물거리 중심(현 동인천길병원 자리)에서 태어났다. 인천이 국가 존망의 격랑에 휘말린 시기였다. 인천항에서 하선한 일본군 3,000여 명이 축현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성으로 이동해 황제를 겁박하여 한일의정서를 끌어냈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맺어 조선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 이 당시 인천은 특히 일본인들이 득세한 곳으로, 조선인 가구보다 일본인 가구가 많았다.
우현 고유섭은 혼란의 시기에 동서양의 문물과 사람이 들고나는 개항도시에서 자랐다. 인천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였다. 근대예술로는 협률사(현 애관극장)가 있어 연극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표관이라는 활동사진 극장도 고유섭의 집에서 멀지 않은 데 있었다. 양악은 내리교회에서 1919년 김영환과 홍영후(홍난파) 등이 연주한 것이 시작이었고, 근대문학은 1920년대 고유섭이 중심멤버로 활동한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의 앤솔러지가 처음이었다. 고유섭은 인천에서도 경성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여러 근대예술을 향유할 수 있었다.
우현 고유섭은 우각리에 있던 취헌 김병훈의 의성사숙에서 공부했고 1914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에 들어갔다. 이원규 작가는 여러 자료를 종합해 고유섭과 함께 공부했던 이들로 조진만 전 대법원장, 이승엽 북한 초대 사법상, 서예가 검여 류희강 등이 있었다고 밝힌다. 고유섭의 수필을 보면 그는 열 살이었던 이 시기부터 조선미술사를 소망하는 영특한 소년이었다. 3·1운동을 한 조선인 편을 들며 일본보다 우수한 조선의 미술을 찬양했던 일본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 신드롬과 더불어 인천 지식인들의 민족예술에 대한 자각에 세례를 받아 고유섭은 조선미술사를 조선인이 열어가야 할 미개척 분야라고 여긴 것이다.
우현 고유섭은 1920년 경성에 있는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에 들었다. 보성은 문인의 산실이었다. 염상섭, 현진건 등이 선배였고 마해송이 동기생, 임화, 이상, 김기림 등이 한두 해 후배였다. 고유섭은 활자화되어 남아 있는 첫 글인 소풍 기행문을 학생 잡지 『학생계』에 실었다. 보성에는 좋은 스승도 많았다. 황의돈은 제자들의 정신에 민족혼을 불어넣었고, 춘곡 고희동은 미술을 가르쳤다. 서화협회전시회도 매년 학교에서 열려 작품을 감상하고 고희동의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개성, 부여, 경주, 금강산 등으로 떠났던 여러 번의 수학여행으로 고미술과 고건축을 바라보는 안목도 길렀다.
우현 고유섭은 1925년 보성고보를 이강국과 함께 공동수석으로 졸업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고유섭은 학비가 싼 경성제대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조선인 차별로 44명밖에 입학하지 못하는 경성제대에 고유섭은 2회 입학생으로 당당히 합격했고 학교에서도 천재로 명성을 날렸다. 동기로 소설가 이효석, 국어학자 이희승 등이 있었다. 그곳에서 『문우』 등에 문학성이 짙고 문체에 서정과 슬픔이 깔린 시와 수필을 많이 발표했다.
경성제대생들은 느티나무 세 잎에 ‘대학’ 두 글자 모표가 달린 사각모자를 쓰고 교복 위에 망토를 걸쳤다. 조선인 44명에게만 허락된 교복이라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모여 구경할 정도였다고 한다. 고유섭은 인천에서 선망받는 첫 경성제대생이었고, 이제는 인천이 낳은 가장 비범한 인물, 민족자존을 지킨 학자로 평가받으며 새얼문화대상 1회 수상자가 되었으며 그 상금으로 인천시립박물관에 동상도 건립했다.
경성제대 최초의 미학 전공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다
1927년 23세가 된 우현 고유섭은 예과과정을 마치고 철학과에서 미학을 전공한다. 당시 미학 전공자는 고유섭 한 사람뿐이었다. 광복까지 20년 동안 미학 전공자는 고유섭 외 조선인은 단 둘뿐이었다. 조선에는 ‘미학’은 물론 ‘미술’이란 말도 없었다. 저자는 고유섭이 미개척 분야인 미학의 기초를 쌓고 조선미술사 연구를 개척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담당교수 우에노 나오테루 교수와 유일한 수강생인 고유섭이 미학 독일어 원서를 놓고 강독 수업을 하는 모습이 『고유섭 평전』에 생생히 그려진다.
고유섭은 졸업 후 미학연구실 조교로 일했다. 연구실과 도서관에 쌓인 수많은 미술사 자료에 파고들었다. 규장각 문헌 등 고문헌에서 미술사 자료를 속속들이 분석하고 필사하고 초록해서 자신만의 아카이브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미학을 떠나 미술사 연구로 직행했다. 근대적 미술사 연구 방법론으로 반가상의 양식과 흐름을 분석하는 논문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을 발표하자 원고 청탁이 빗발쳤다. 신문과 잡지에 다양한 글을 발표했다. 조선탑파의 기원을 고찰하고 분류하여 분석하고, 삼국~조선시대 미술을 미학적 방법론으로 분류하고 그 특징을 기술했다. 고유섭은 조선인 최초 미술사학자로 존재감을 선명히 드러냈고 많은 지식인이 탄복하며 그의 글을 읽었다.
1933년 우현 고유섭은 우에노 교수의 제안으로 미학연구실 조수직을 사직하고,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했다. 일본인들의 도굴과 골동품 수집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고려의 왕도 개성이었다. 고려 유적지와 유물을 수집·보존하기 위해 개성 유지들이 결성한 개성보승회가 박물관을 세웠고 고유섭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관장으로 초빙한 것이다. 고유섭에게도 수학여행과 답사로 왔던 개성이 낯선 곳이 아니었다. 고유섭은 박물관을 유물 보관소가 아니라 개성의 역사적 전통과 개성사람들의 역사적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 바꾸어갔다.
개성부립박물관에서 고유섭은 자기 학문을 쌓아가는 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미술사에 대한 지식을 확장했고 박물관 연구조사 예산으로 직접 탐사에 나섰다. 고유섭의 제자로 ‘개성삼걸’로 불린 황수영·진홍섭·최희순(최순우)이 박물관으로 자주 찾아와 답사하러 나가는 고유섭을 따라 주말 조수로 나서기도 했다. 고유섭은 진단학회 발기인으로 창립에 참여해 다양한 연구자들과 학술모임을 하며 미술사학자로서 실증성을 중시하고 사회경제사학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쏟아지는 청탁 속에서 써낸 신문·잡지 글로 명성을 얻고 다양한 기획연재에도 참여했다.
개성부립박물관장 고유섭
최후의 날까지 한국미술사를 남기다
1935년 이후 박물관장 고유섭의 삶은 본격 연구의 중심으로 흘러갔다.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철저한 현장 답사를 하며 개성의 고적들을 소개했다. 또한 고려 화적, 조선의 전탑과 그림, 고려의 도자, 골동품, 고서화 등에 대한 글을 발표해 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고유섭은 1,000년이 지난 고려 초의 철불 석가여래상을 총독부박물관에서 돌려받아 봉안식을 여는 큰 과업도 이뤘다.
경성제대 동기 이희승의 부탁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미학 및 미술사’를, 연희전문학교에서 ‘미학개론’을 강의했다. 잠시 학문 연구와 논문 쓰기를 옆으로 밀어놓고 어린 시절처럼 문학에 젖어본 시기도 있었다. 이때 발표한 「애상의 청춘기」 「정적한 신의 세계」는 감성 깊고 품격이 높아 자주 인용되는 한국문학의 명수필이다. 이후로도 문학적 서정이 깊은 기행문이나 「아포리스멘」 같은 철학적 화두를 담은 참신한 수필을 써내기도 했다. 자신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집약한 그 글의 일부는 고유섭의 생애 그 자체를 나타내는 듯하다.
“나는 지금 조선의 고미술(古美術)을 관조(觀照)하고 있다. 그것은 여유 있던 이 땅의 생활력의 잉여잔재(剩餘殘滓)가 아니요, 누천년 간(累千年間) 가난과 싸우고 온 끈기 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요, 창조요, 생산임을 깨닫고 있다. … 나는 가장 진지로운 태도와 엄숙한 경애(敬愛)와 심절(深切)한 동정을 가지고 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것이 한쪽의 ‘고상한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면, ‘장부(丈夫)의 일생’을 어찌 헛되이 그곳에 바치고 말 것이냐.”(고유섭, 「아포리스멘」)
학계에서는 고유섭이 남긴 연구성과 가운데 탑파 연구를 가장 크게 여긴다. 한국의 문화유산 중 탑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가장 우수한 특징이 있다. 고유섭은 탑이 생성된 삼국시대부터 1,000년의 변천 과정을 정확히 짚어 연구함으로써 빛나는 성과를 남겼다. 시대에 대한 고증과 탑파 양식을 철저하게 고찰해 일본 학자들과 다르게 시기를 비정했다. 고유섭은 최고 권위 일본인 연구자들을 넘어 우리나라 탑파 연구의 결정판을 써냈다.
고유섭은 여러 사전에 인물 열전을 쓰기도 했다. 일본 후잔바오가 펴낸 『국사사전』에는 안견, 안귀생, 윤두서의 열전을 써보냈고, 조광사가 간행한 『조선명인전』에는 김대성, 안견, 공민왕, 김홍도, 박한미, 강고내말, 고개지, 오도현 등의 열전을 썼다.
고유섭을 대표하는 글로 유명한 것은 「조선 미술문화의 몇 낱 성격」이다. 그 성격은 상상력·구상력의 풍부함과 구수한 특질, 이렇게 두 가지를 짚는다. 순박한 데서 느끼는 구수한 큰 맛, 단순한 색채에서 오는 적조미를 ‘조선의 미’라고 규정한 것이다. 당대 지식인들은 새롭고 탁월한 안목이라며 동의했겠지만 후학들에겐 ‘야나기의 영향을 떨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야나기의 관점을 넘어서려고 쓴 글이었다.
우현 고유섭은 오늘날 보통명사가 된 ‘분청사기’의 명명자다. 「고려도자와 이조도자」에서 고유섭은 일본에서 유행한 미시마테의 제조법과 유래를 분석하고 청자의 타락물이자 변화물이라고 규정한다. 일본의 다인들이 유래도 모르고 붙인 미시마테라는 명칭보다는 ‘분장회청사기’라고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을 줄인 말이 분청사기다.
“우리에겐 독창적이며 빛나는 문화예술이 있다.”
민족의 예술혼을 지킨 고유섭
1941년 우현 고유섭은 고추 무역의 수렁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다. 당시 월급이 100원이었던 고유섭이 아내 몰래 장인에게 돈을 빌려 고추 무역에 1만 4,000원을 투자했다가 4,000원을 손해 보면서 병이 났다. 의사는 간경변증으로 진단했으며 원인은 술이라고 했다. 고추 무역의 실패는 고유섭이 쓰러지는 직접적인 계기였을 뿐 그의 몸은 연구로 인해 지치고 거의 망가져 있었다.
병세 속에서 절필을 예감하면서도 고유섭은 절필하지 않고 원고 청탁을 받아들였다. 몸 상태가 좋아졌을 때 일본 문부성 초대로 일본제학연구진흥위원회 학술대회에 참석해 조선탑파를 주제로 발표하기도 했다. 조선인 발표자는 고유섭이 처음이었다. 고유섭의 병세는 금방 다시 나빠져 복수가 차오르고 회복하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조선미술사 완성이라는 생애의 목표를 위해 정신을 집중해 『조선탑파의 연구』 일본어 원고를 한 줄 한 줄 써내려갔다. 토혈하며 쓰러져 죽을 고비를 넘긴 후에도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면 초인적인 의지로 다시 원고지를 잡았다.
운명의 날은 1944년 6월 26일 화요일이었다. 39년의 생애가 유성처럼 졌고 곁에는 부인 이점옥 여사와 제자 황수영이 있었다. 저자 이원규는 이렇게 적었다.
“섬나라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던 1905년 역사의 질풍노도가 몰아치던 개항도시 인천에서 태어나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조국의 미술사를 개척하기 위해 외로운 길을 걸었던 우현 고유섭은 조국 광복 1년을 앞두고 그렇게 떠났다.”
『고유섭 평전』은 고유섭이 떠난 뒤에 제자들이 유고를 출간하고, 고유섭의 저술 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해석과 탐구가 이루어지는 과정까지 다룬다. 「경인팔경」의 출전이나 「애상의 청춘기」 「나의 잊지 못하는 바다」 제목 등 오류로 굳어져온 것들을 바로잡기도 한다.
고유섭은 우리 민족이 조선의 미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이 중국을 모방하지 않고 창조적 변용으로 독창성을 획득했으며 일본보다 우수하다는 걸 알게 해서 땅에 떨어진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했다. 조선의 문화예술은 독자적이지 않고 하찮은 것이라고 천대받아 모두가 열패감에 빠진 시절에 우현 고유섭은 짓밟힌 민족자존을 위해 민족미술사를 홀로 개척해나간 선구자였다. 저자 이원규는 고유섭은 가장 비범했고 가장 열정적인 개척자였으며 가장 고독했던 문화독립운동가였다고 말한다. 그는 민족의 문화예술을 지킨 불멸의 혼이다.
작가정보

1947년 인천에서 출생, 인천고와 동국대 국문학과를 나와 젊은 시절 교사로 일했다.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겨울무지개」가, 1986년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베트남 참전 경험을 쓴 『훈장과 굴레』가 당선되었다.
인천과 서해 배경 분단문제를 다룬 소설들을 주로 썼으며 민족분단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온건하게 표현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0년대 전반, 역사에서 지워진 의열단ㆍ조선의용대 등 민족혁명과 독립전쟁 자료를 찾고 중국ㆍ러시아 현장을 여러 차례 답사해 신문에 르포를 연재하고 민족운동가들의 평전을 썼다.
창작집 『침묵의 섬』, 『깊고 긴 골짜기』, 『천사의 날개』, 『펠리컨의 날개』, 장편소설 『훈장과 굴레』, 『황해』, 『마지막 무관생도들』, 대하소설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하랴 1-9』 등, 르포르타주 『독립전쟁이 사라진다 1-2』, 『저기 용감한 조선 군인들이 있었소』(공저), 평전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조봉암 평전』, 『김경천 평전』, 일제강점기 무관 15인 약전 『애국인가 친일인가』, 『민족혁명가 김원봉』 등을 출간했다.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 박영준문학상, 동국문학상, 한국문학상, 우현예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모교인 동국대 겸임교수로서 10여 년간 소설과 논픽션을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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