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2024년 11월 27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10월 3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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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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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 동안 중앙은행가로 일하면서 일본의 고도성장기와 버블 붕괴 이후 30년이라는 긴 침체를 목도한 전 일본은행 총재 시라카와 마사아키의 유장한 회고록인 이 책은 한국 경제의 앞날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때 일본은행은 소극적 대응으로 일본의 장기 불황을 초래한 당사자로 지목되곤 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오히려 세계 각국 중앙은행이 참고해야 할 정책 실험실로 재평가받고 있다. 한 국가의 경제가 각 주체의 행위, 정책, 사회 분위기라는 다면적인 역학관계 속에서 어떻게 도저하게 흘러가는지를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역작이다.
조윤제 전 주미대사 | 고승범 전 금융위원장 | 김영환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장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1부 일본은행에서의 성장기
1장 커리어의 시작
2장 일본의 버블 경제
3장 버블의 붕괴와 금융위기
4장 일본은행법 개정
5장 제로 금리와 양적 완화
6장 대안정기의 환상
2부 총재 시절
7장 일본은행 총재 취임
8장 리먼의 파산
9장 디플레이션 논의의 부상
10장 인구 구조 변화와 생산성 문제
11장 유럽 부채 위기
12장 포괄적 금융 완화 정책
13장 동일본 대지진
14장 육중고와 통화 전쟁
15장 재정의 지속 가능성
16장 금융 시스템 안정을 목표로
17장 정부ㆍ일본은행의 공동 성명
3부 중앙은행의 역할
18장 거대한 통화정책 실험과 일본화의 확산
19장 일본 경제의 경험이 주는 교훈
20장 우리는 중앙은행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21장 중앙은행의 국제 협력
22장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책임성
23장 조직으로서의 중앙은행
맺는말
감사의 말 |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 주 | 찾아보기
흔히들 “잃어버린 30년”이나 “디플레이션에 빠진 일본 경제”와 같은 말을 많이 떠올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흔히 “일본화”라고 한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중앙은행은 디플레이션의 위험에 대해 적극적인 금융 완화를 실시해야 한다는 교훈이 함께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식은 해외의 저명한 경제학자나 국제기구 사이에 정설처럼 회자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나는 이러한 일본 경제와 일본은행의 통화정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해외 각국의 통화정책, 나아가 세계 경제에도 큰 악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물가가 안정되어 있어도 버블이 발생해 경제의 큰 변동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일본의 경험을 2007~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 배웠더라 면 해당 시기에 유럽과 미국의 통화정책은 다르게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022년 이후 글로벌 인플레이션만 보더라도 디플레이션에 대한 과도한 우려가 지나치게 적극적인 재정정책, 통화정책의 집행을 가져왔고, 일본의 경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여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_〈본문 12쪽〉
저출산에 따른 인구 감소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 한 일본 경제는 성장력을 높이기 어렵다. 그렇지만 저출산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떤 대책이 효과적이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두고 끝없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흥미로운 점은 세계적으로 볼 때 일 본, 한국, 중국, 대만 등 유교 문화권 국가들이 출산율 저하가 특히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의 저출산 대책, 나아가 외국인 노동자 수용 대책과 그 영향에 대해 일본에서 참고할 수 있는 사례가 특히 많을 것이다. _〈본문 13쪽〉
1985년 9월부터 1988년 11월까지 통화정책 수립을 담당하는 총무국(현재 기획국)의 중간 관리자로 근무했다. 그 후 1990년 5월까지 조사통계국에서 통화정책 결정을 뒷받침하는 경제 전망 업무를 담당했으니 버블 기간 대부분을 통화정책과 관련된 분야에서 일한 셈이다. 버블 경제만큼 거시경제와 통화정책 운용에 대한 나의 생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경험은 없을 것이다. _〈본문 52쪽〉
지금은 믿기 어렵지만 1980년대 후반에는 일본 전역에 걸쳐 낙관적인 기대감이 팽배했다. 이는 일정 부분 일본 경제의 거시적 성과가 국제적 기준에서 매우 양호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일본 경제는 연평균 3.8퍼센트 성장한 반면 인플레이션은 1.0퍼센트에 그쳤다. _〈본문 57쪽〉
정확한 날짜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버블이 꺼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1989년 마지막 거래일 닛케이 지수가 3만 8915포인트로 정점을 찍은 후 급격하게 하락했다. 6개월 후 3만 2817포인트, 다시 6개월 후 2만 3848포인트를 기록했고, 1992년 10월 18일에는 1만 4309포인트를 기록해 최고점 대비 60퍼센트 이상 하락했다. _〈본문 80쪽〉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는 물가 안정을 추구하는 통화정책을 통해 거시경제 안정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주류적인 사고였다. 이 견해는 1980년대 후반 정책 당국자들과 학계에서 서서히 등장해 1990년대에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_〈본문 182쪽〉
일본은행 총재가 되면서 국회 출석 빈도 또한 늘어났다. 이사 임기 중에도 국회 질의에 답변한 경험이 있었지만 총재가 된 후에는 더 많은 기회가 있었다. 총 117일, 연평균 약 24회 정도 국회에 소환되었다. 경제 상황에 따라 빈도는 크게 달랐는데 2012년 2월에는 한 달 동안 9회까지 출석한 적도 있다. 가장 빈번한 회의는 중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의 재정위원회와 양원의 예산위원회였다. _〈본문 205쪽〉
2009년 봄, 전 세계 금융 시장의 흐름이 바뀌면서 금융 시스템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는 큰 안도감을 주었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길로 돌아가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이는 한동안 지속될 “거짓 여명”의 시작이었다. 2009년 9월 일본 민주당이 집권 여당이 되었고, 11월에는 디플레이션을 공식 선언했다. 디플레이션을 둘러싼 논쟁은 갈수록 격렬해졌고 2013년 나의 일본은행 총재 임기가 끝날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_〈본문 250쪽〉
일본은 디플레이션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완만하게나마 물가 하락이 지속된 것은 사실이다. 왜 장기간에 걸쳐 물가가 계속 하락했을까? 많은 정치인과 학자는 단순히 통화 완화가 불충분했다고 주장한다. 18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일본을 제외한 많은 선진국에서도 중앙은행이 통화 여건을 공격적으로 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인플레이션 또는 심지어 물가 하락이 관찰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속적인 물가 하락 기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앞서 언급했듯이 명목 임금의 유연성이다.26 일본과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살펴보면 제품과 관련해서는 큰 차이가 없다. 주로 노동 집약적 서비스 가격에서 차이가 관찰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정규직 근로자들이 고용주가 최대한 일자리를 유지하는 대가로 제한된 임금 인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경제가 침체되는 동안에도 실업률 증가가 제한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다른 선진국에서 관찰된 실업률의 급격한 증가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 대신 임금 하락에 따른 완만한 물가 하락에 직면해야 했다. _〈본문 273쪽〉
일본은행의 입장 공개는 일본 경제가 직면한 중장기 과제를 가능한 한 철저하게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급속한 고령화와 출산율 하락이었다.3 일본 인구는 2008년 1억 2800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계속 감소해 2019년에는 1억 2600만 명으로 2008년 이후 연평균 0.1퍼센트씩 감소해왔다. 동시에 15세에서 64세 사이의 생산가능인구는 14년 전인 1995년 8730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약 12퍼센트 감소해 2012년에는 8020만 명, 2019년에는 7520만 명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감소세는 처음에는 완만했지만 전후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가 2012년경 65세의 은퇴 연령에 도달하면서 가속화되었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생산가능인구는 연평균 약 94만 9000명이 감소했으며, 이는 연간 1.2퍼센트의 감소율에 해당한다. _〈본문 293쪽〉
유럽 부채위기의 심화로 일본에서는 일본이 이 위기에서 배워야 할 교훈에 대해 활발한 논쟁이 벌어졌다. 재정 건전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위기가 그리스의 재정위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일본은 그리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재정 개혁을 촉구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번 위기가 재정 적자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 통합 없이 통화 동맹에 나설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한 경제에 자체 통화와 중앙은행이 있다면 금리 인하나 통화 가치 하락을 통해 재정위기에서 회복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_〈본문 323쪽〉
일본은행은 대규모 자연재해 발생 시 신속하고 적절한 대응의 중요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특히 1995년 일본을 강타한 고베 대지진 이후 업무 연속성을 위한 계획과 필요한 인프라를 갖추는 데 상당한 자원을 투자했다. 이러한 준비 덕분에 일본은행은 많은 어려움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도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은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의 멜트다운과 그 여파였다. _〈본문 365쪽〉
선진국의 많은 경제정책 당국자들은 “통화 전쟁”이라는 용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했지만 이미 경제 전문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내가 참석한 국제회의에서도 현 상황을 “통화 전쟁”으로 보는 인식에 대한 비판을 많이 들었다. 국경을 넘나드는 무역과 자본의 흐름은 당사국들뿐 아니라 글로벌 경제가 함께 발전하는 데도 기여한다. 이런 무역과 자본의 흐름으로 인한 환율 변동을 전쟁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해 보였다. 만테가의 발언은 브라질의 정책 실패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다른 나라로 돌려 회피하려는 시도로도 보였다. _〈본문 405쪽〉
거시건전성 관점에서 일본 금융 시스템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금융기관의 낮은 수익성이다. 노동력 감소로 인해 잠재 성장률이 점차 낮아지면서 모든 금융기관은 국내 대출 기회가 줄어들어 수익 창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인구 감소가 가장 두드러진 도쿄 외곽의 지방 은행과 신용협동조합이 가장 큰 영향을 받아 대출 기회가 급격히 감소했다. _〈본문 485쪽〉
2012년 12월 16일 총선에서 야당인 자민당은 294석을 차지한 반면 여당인 민주당은 57석에 그치며 역사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이번 투표가 일본은행의 통화정책에 대한 명시적인 국민투표는 아니었지만, 아베 신조 총리가 통화정책에 대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해왔고 그의 정당이 압승을 거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_〈본문 513쪽〉
나는 통화정책에 대한 아베 총리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베 총리가 총선에서 일본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새 정부에서 새로이 중앙은행 총재를 임명해 새 부총재와 함께 일본은행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3월 19일 자로 총재직을 사임하기로 결정한 나는 2월 5일에 총리를 찾아가 내 결정을 직접 알렸으며, 그날 저녁 기자들에게 이 사실을 발표했다. 기자들과 마주한 자리에서 나의 사임은 신임 총재와 부총재가 동시에 취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3월 19일까지 총재로서 내 책임을 다할 것임을 강조했다. 기자들은 내가 항의 차원에서 사임한 것인지, 아니면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것인지 물었지만 나는 2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_〈본문 533쪽〉
일본 경제를 묘사하는 데 “잃어버린 수십 년”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내 견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크게 변화했다. 처음에는 일본 경제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실 대출 문제에 대해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데 공적 자금 투입이 지연되는 상황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완벽하게 표현해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 표현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잃어버린 수십 년”이라는 표현이 점차 디플레이션이 근본 원인이며 적극적인 통화정책 완화가 해결책이라는 주장을 대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진단과 정책 처방에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2007~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의 초기 경험과 다른 선진국 경제의 위기 이후 상황 간에 많은 유사점이 있음을 관찰하면서 내 견해는 더욱 굳어졌다. _〈본문 554쪽〉
“중앙은행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플레이션이 너무 낮아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라는 교훈이 일본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디플레이션은 일본 경제 저성장의 원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일본 경제의 과거 성과가 아니라 미래의 지속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 급속한 고령화로 인해 더 적은 노동자가 더 많은 노인을 부양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는 현재의 1인당 소득 증가세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_〈본문 560쪽〉
사회 계약과 경제 구조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전통적인 경제 활동의 척도인 GDP 이외에 사회 후생이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행 총재 재임 시절 내 사무실을 방문한 다수의 외국 정책 당국자들과 경제학자들은 디플레이션과 같은 전형적인 주제에 대해 논의한 후 종종 솔직한 소감을 털어놓았다. “도쿄 거리를 보면 일본이 ‘잃어버린 수십 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디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 틀린 걸까요?” 그들의 관찰은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지만 핵심을 짚은 것이었다. _〈본문 570쪽〉
일본은행 총재가 된 후에는 총리, 재무장관과 직접 대화하고 국회 위원회에서 질의에 답변할 기회가 많았다. 이를 통해 일본은행과 정부,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일본은행과 정부의 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고 총리, 재무장관, 총재의 성격에 따라 자연스럽게 달라지기 때문에 총재 시절의 경험이 전임 총재들과 어느 정도 같았는지는 모르겠다. 정치 환경만 놓고 보면 재임 기간 동안 여당이 2번 바뀌었고, 5년 동안 총리가 6명, 재무장관이 10명이나 바뀌었다. 장관 임기가 짧은 것이 특징인 전후 일본의 관례에 비추어 보더라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_〈본문 624쪽〉
중앙은행은 말과 글로 표현하기 힘든 신기한 존재다. 이 불가사의한 존재에 대한 매력에 이끌려 국내외 많은 사람이 중앙은행에 관한 다수의 책을 썼다. 저자는 중앙은행 관계자와 경제학자뿐 아니라 언론인, 역사학자, 정치학자 등 다양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더 많은 책이 출간되고 있다. 내가 일본은행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중앙은행을 논하는 책을 집필하기로 결심한 지 최소 4년, 일본은행을 떠난 지 5년이 지났다. 원고 집필을 마친 현재, 일본은행이라는 조직을 진정한 의미에서 졸업한 기분이다. _〈본문 670쪽〉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점, 이전에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출된 권력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중앙은행에 동의할 수 없는 정책을 강제할 때 중앙은행은 독립성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저자가 다른 매체에서 말한 것처럼 하지 않아야 할 것은 하지 않아야겠지만 그렇다고 중앙은행이 ‘나라 안의 또 다른 나라’가 아니라면 두 주장의 접점은 어디일까? _〈본문 681쪽〉
《파이낸셜타임스》의 마틴 울프는 2001년 〈벼랑 끝에서 선 일본〉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과감한 통화 팽창을 주장했으나 2017년 〈일본에 대한 통념은 틀렸다〉라는 칼럼에서 주류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정책 처방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저명한 경제학자 마크 거틀러도 2017년 일본은행 연례 콘퍼런스에서 “더 이상 일본의 침체를 잘못된 통화정책 탓”으로 돌릴 수 없으며 중요한 문제는 일본의 지속적인 저물가와 저성장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아베노믹스의 설계자라 불렸던 예일대 하마다 고이치도 2016년 한 인터뷰에서 “과거에 디플레이션은 화폐적 현상이라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라고 말했다. _〈본문 6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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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잃어버린 30년’
한국의 반면교사인가, 평행이론인가
이제는 한국의 차례인가?
2023년 일본은 실질 GDP(국내총생산) 성장률 1.9%로 25년 만에 연간 경제 성장률에서 한국(1.4%)을 추월했다. 닛케이 평균 주가지수는 2024년 7월 최고점 42,426포인트를 기록해 34년 만에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30년 장기 침체를 빠져나오는 국면이다. 반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 추락, 부동산 버블, 세계 4위 수준인 GDP 대비 가계부채율, 고령화와 인구 감소의 심각한 압력에 직면해 마치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초입을 연상케 한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일 간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한 이 민감한 시점에 일본이 지나온 길과 한국이 놓인 상황 그리고 앞으로 돌파해야 할 사회적 과제를 대차대조표처럼 꼼꼼하게 대조해볼 수 있는 책이 출간되었다.
과연 우리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반면교사로 삼아 당면한 위기를 슬기롭게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평행이론처럼 그들이 걸었던 어두운 침체의 터널을 오래도록 걸어갈 것인가?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이 질문에 의미심장한 답을 제공하는 책이다.
침체의 근본 원인은 산업 경쟁력 하락
섣부른 금융 대응이 오히려 회복 늦춰
중앙은행은 발권력과 금리 인하 및 인상을 통해 통화량을 조절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경제가 침체하고 디플레이션 상황이 우려되면 정치권, 매스컴, 학계, 기업 할 것 없이 중앙은행에 발 빠르고 적극적인 대처를 주문한다. 통화량 조절과 환율 조정 등 중앙은행의 적극적 개입으로 당면한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에 빠진다는 것이다. 사회 저변에 깔린 이러한 분위기를 저자는 ‘시대의 공기’라고 표현한다. 모두가 이 분위기에 젖어 들면 중앙은행의 건전한 선택 범위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점은 경기 침체의 근본 대책인 제품 경쟁력, 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과제가 뒤로 밀린다는 것이다. 저자의 일본은행 총재 재직 시절 일본 기업들은 구조조정과 제품 질 개선으로 국제 경쟁력을 갖추기보다는 엔고 현상에 모든 경기 부진의 원인이 있는 양 비판 일색이었다고 한다.
일본 전자 산업의 몰락은 엔고 때문이 아니라 삼성전자나 LG전자에 뒤진 경쟁력 때문이라는 게 그의 시각이다. 문제의 근원을 그대로 두고 금융 대책만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 누구도 이를 반박하거나 거스르기 매우 어렵게 된다. 저자는 일본은행의 신중한 대응으로 이 압력을 버텨보려 했지만, ‘시대의 공기’를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정치적 압력, 특히 ‘아베노믹스’의 등장이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침해하면서까지 적극적인 양적 완화 공세를 폈던 아베노믹스는 결국 실패했고, 당시 ‘잃어버린 20년’이던 일본 경제 상황은 ‘잃어버린 30년’으로 10년이 더 연장되었다. 일본 사회 각 부문의 문제가 개선되기까지는 양적 완화라는 금융정책과 상관없이 이후 10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재난의 퍼팩트 스톰
격동의 시기를 관통하는 숨 가쁜 여정
저자가 일본은행 총재로 재직한 시절은 가히 한 국가의 경제가 직면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난이 총집결된 시기라고 부를 만하다. ‘잃어버린 30년’의 진통이 한창이던 2008년 4월 총재에 임명되자마자 리먼 브러더스 사태와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쳐왔다. 2009년에는 그리스의 과도한 국가 부채 위기가 대두되면서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으로 연쇄 파급되는 유럽 부채위기가 발생했다.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그 여파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면서 일본 경제는 약 440조 원(3,60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퍼펙트 스톰’처럼 몰아치는 예기치 않은 사건과 재난에 맞서 일본은행이 펼친 여러 가지 대처, 그리고 세계 각국 중앙은행가들과 긴밀한 협조 체제를 마련하는 국제적 대응 과정을 저자는 담담히 그려낸다.
작금의 한국 실정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예기치 않은 사건이나 재난보다 사회와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다. 예컨대 저자가 일본의 장기 침체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한 인구 구조 변화는 한국에서는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건들과 진행 속도는 전혀 다르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는 그 시기 일본에서 인구 구조 변화가 눈에 띄게 가속화된 점이다. 일본의 총인구는 2010년 정점을 찍었다. 생산가능인구(15~64세 인구-옮긴이)는 이미 1995년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돌아섰지만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연령에 도달하면서 더욱 빠르게 감소하고 있었다. 총재 재임 기간 중 줄어든 생산가능인구는 320만 명에 달했는데, 매년 전체 인구의 0.8퍼센트인 70만 명씩 감소한 것은 의심의 여지 없는 경제적 역풍이었다.”
결코 마법 지팡이일 수 없는 금융정책
결국 경제 각 주체의 역할과 인구 대책이 좌우
이 외에도 한국 사회가 경청해야 할 시사점이 가득하다. 금융 완화, 환율 조정 등 중앙은행의 개입이나 금융정책을 통한 경기 부양은 한때 마법 지팡이처럼 여겨졌다. 그렇지만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것이 문제의 근본 개선과는 거리가 있는 대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기업의 끊임없는 구조와 체질 개선, 기술 혁신 등 경제 각 주체의 노력이 결국 경제의 활력과 글로벌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점, 인구 감소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없이는 장기적인 성장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 등, 중앙은행가로서의 경험과 경제학자로서의 신중한 성찰을 동시에 제공하는 저자의 시각은 오늘날 한국 경제와 사회를 돌아보는 데 매우 유용하다.
이 책은 가장 가깝고 우리와 뗄 수 없는 관계인 일본의 경험을 통해 한 국가의 경제라는 강물이 어떻게 각 주체와 부딪치고 소용돌이치며 도저하게 흘러가는지를 보여준다. 한국 경제의 시름이 깊어가는 상황에서 나온 이 역작이 우리에게 깊은 통찰의 시간을 제공할 것이다.
작가정보
(白川方明)
일본의 중앙은행가이자 경제학자다. 30대 일본은행 총재를 역임했으며, 현재 아오야마가쿠인대학(青山学院大学)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도쿄대학(東京大学)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72년 일본은행에 입행했으며.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은행 신용기구국 신용기구과장, 기획국 기획과장, 오이타 지점장, 뉴욕 사무소장, 금융연구소장, 국제국 심의역, 기획국 심의역에 이어 2002년부터 2006년까지 통화정책 담당 이사를 지냈다. 이후 2006년부터 2008년 3월까지 교토대학(京都大学) 대학원 공공정책교육부(공공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임하면서 도쿄대학 금융교육연구센터 객원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8년 3월 일본은행 부총재로 임명되고, 같은 해 4월 30대 일본은행 총재에 올라 2013년까지 재직했다. 2011년에는 국제결제은행(BIS) 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 2012년 프랑스의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Chevalier de la Léion d’Honneur) 훈장과 미국의 외교정책협회(Foreign Policy Association, FPA) 메달을 받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새로운 경제위기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글로벌 리더”, 《비즈니스위크》는 “일본은행 130년 역사상 가장 대담한 총재”라고 평가했다. 2008년 《뉴스위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6위, 2011년 《블룸버그마켓(Bloomberg Markets)》 매거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0인’에 선정되었다. 저서로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中央銀行: セントラルバンカーの経験した39年)》 외에 《버블과 통화정책: 일본의 경험과 교훈(バブルと金融政策-日本の経験と教訓)》(공저), 《현대 통화정책: 이론과 실제(現代の金融政策-理論と実際)》가 있다.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아사히신문》 선정 헤이세이 시대(1989~2019년) 대표 도서 30선 중 15위에 올랐으며, 2019년 와쓰지데쓰로문화상(和辻哲郎文化賞)과 니혼게이자이신문사의 닛케이경제도서문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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