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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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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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촌 제17구역 - 아마릴리스의 노예 030
아버지의 영화 050
악귀 일기 068
작가의 말 274
원고를 편집하는 일 말고도 편집자로서 이새콤 씨가 해야 하는 업무는 또 있었다. 바로 원고의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는지를 확인하는 팩트 체크였다. 처음 이 업무를 선배에게 설명 들었을 때는 사실 여부를 가리는 일이라는 말에 왠지 설레기도 했다. 노란 포스트잇에 ‘오로지 진실만을 간수하고자 하는 교정’이라고 적은 뒤 모니터 한쪽에 붙여놓기도 했다. 왠지 진실을 가리는 문장의 법관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으나 막상 업무를 시작한 뒤로는 그리 호락호락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_7쪽,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새콤 씨는 습관처럼 팩트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여부와 다른 구석이 있지는 않을까? 진심이 담겨 있을까? 진심을 담아도 되는 걸까? 사실과 너무 가까운 것은 아닐까? 숨겨야 할 것은 숨기고 보여줘야 할 것은 드러내는 것이 이야기라면, 나는 무엇을 숨기고 또 무엇을 드러내야 하는 걸까. 나는 누군가에게 읽힐 만한 이야기였을까? 해발 3,800미터와 코카콜라와 펩시, 산 중턱에서 만난 상인. 그중에 정말 구원이 있었을까?
_27쪽,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우리 인간으로 삽시다. 짐승이 되지는 맙시다.”
단상에 서 있던 안전관리자는 다시 말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인간이 아닌 짐승이 되어야만 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현장에서 성화를 부려 쫓아낸 일용직 인부들은 많았다. 작업이 많은 날에는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일용직 인부를 불러야 하는 날들도 있었다.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껴지는 날이면 그는 아침부터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다. 가장 만만해 보이는 한 명을 붙잡고 이런저런 트집을 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_41쪽, 〈무촌 제17구역-아마릴리스의 노예〉
공장이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가던 날, 아버지는 밤중 차를 달려 홀로 시골의 한 선산으로 찾아간다. 이 장면의 연출은 액션 영화의 자동차 추격 신과 닮아 있었는데 입으로 우우우우웅~ 소리를 내 빠른 속도감을 나타내며 다른 자동차들을 이리저리 제치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 봐도 조금은 과잉된 연출이 아닌가 싶다. 차를 몰고 아버지가 도착한 곳은 아버지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의 산소였다. 아버지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었다. 이건 가족들 누구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어머니마저 눈을 반짝였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일까. 원망일까. 누구에게든 무슨 말이든 듣고 싶었을까. 기대고 싶은 어깨가 필요했을까.
_65쪽, 〈아버지의 영화〉
색은 빛을 받아들여 그것을 반사시킴으로써 자기 고유의 특성을 뽐내는데 이 색은 그저 빛을 빨아들일 뿐입니다. 빛이 비쳐 생기는 그림자를 통해 사람은 깊고 낮음을 판단할 수 있다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그저 검을 뿐인 이 색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것은 어떠한 공포를 넘어서는 경외감까지 느껴지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의 눈동자는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검었고 깊이를 알 수 없어 두려웠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너무나도 숙여 바닥에 닿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는 순간 이윽고 흘러내리듯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벌레가 기어가듯 조금씩 꿈틀거리며 그는 계속해서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없어.
_70쪽, 〈악귀 일기〉
세상이 아무 의미 없게 느껴진 것이 저뿐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TV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대학생은 저희와는 조금 다른 존재인 것 같았습니다. 저 사람들은 진짜. 우리는 가짜. 실제로 살아서 숨을 쉬는 것은 우리인데도, 정작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상상되어 짜인 극본으로 훈련받은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을 뿐인 화면 속 인물들이 진짜 대학생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 의미 없다고 느끼는 건 어쩌면 세상 속에서 제가 아무 의미 없는 존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소주잔에 우연히 떨어진 파 조각처럼. 단 한 가지라도, 나를 잔에 불태울 만한 일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을 향해 저를 던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_74쪽, 〈악귀 일기〉
츄파춥스와 새콤달콤을 모아 집을 구하고 살아가는 일은 꿈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차라리 지금 받는 월급을 모아 전부 츄파춥스와 새콤달콤을 사서 그걸로 집을 짓는 게 빠르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물론 집을 지을 땅을 구할 것도 큰 문제일 것이고 그걸로 집을 짓는다고 해도 개미와 벌레들의 습격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그래도 완공만 한다 치면 과자로 만든 집이니 헨젤과 그레텔 정도는 홀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숲속에서 길을 잃은 불쌍한 아이들을 잡아먹으려는 못된 계획을 세우다 되레 화로에서 활활 타오르는 저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가난이 인간을 마녀로 만드는 걸까요?
_91쪽, 〈악귀 일기〉
“은미야, 너는 왜 화를 안 내?”
“나는 마음에 화가 없어. 불가에 귀의한 이후로 마음의 평정을 찾았어.”
동료들은 종종 묻고는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그럴듯한 대답들을 지어내서 하고는 했습니다.
“전화를 받을 때 나는 내가 돌멩이라고 생각해.”
“돌멩이?”
“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아무런 감정도 마음도 없이 그냥 가만히 있는 돌멩이.”
“그러다 길 가다 누가 발로 차면 어떻게 해?”
“무게를 가져야지. 무게를. 발로 찬 발이 더 아프게. 발가락이 팅팅 붓게 아주.”
_130쪽, 〈악귀 일기〉
아프니까. 아픈 사람이니까. 저는 사람이 힘든 상황에 가서야 비로소 본모습이 나온다는 말을 싫어합니다. 술을 마셔야만 본성이 보인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가난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악독하다는 말과 같은 말로 들렸어요. 힘들 때 보이는 건 그 사람의 본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그냥 힘든 거예요.
_170쪽, 〈악귀 일기〉
어쩌면 세상 어두운 모든 것들에 내 책임이 있는지도 몰라. 대학 시절 수연이가 용기 내서 건넨 돈가스를 입에 물지 못했다는 생각. 혼자 밥을 먹던 유정이가 옥상에서 내민 삼각김밥을 보고도 2만 원을 먼저 얘기했던 일. 저는 왼손을 들어 제 왼쪽 얼굴을 가려보았습니다. 한쪽 눈을 가려 사라진 원근으로 누구의 마음 깊은 곳에도 닿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저 저의 그늘을 가리는 데만 급급했던 것은 아닐까요. 속죄를, 저는 속죄를 해야만 했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의 그늘을 가릴 수만 있다면, 저는 끝없는 죄인이어야만 했습니다.
_251쪽, 〈악귀 일기〉
“그 아픔들은,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들은
어떻게 해야 가릴 수 있는 걸까요.”
독립출판물 《30대 백수 쓰레기의 일기》로
‘김봉철’이라는 장르를 만든 김봉철의 첫 소설집
《30대 백수 쓰레기의 일기》로 독립출판계에 강렬하게 입문하여 독자들을 만나 온 김봉철의 첫 소설집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이 출간되었다. 첫 책을 선보인 이후 쓰기를 멈추지 않고‘김봉철’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내며 단단히 자신의 세계를 다져온 그가 소설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찾아왔다. 이 책의 장르도 역시 김봉철이다. 평범한 인간의 내면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그의 시선은 소설이라는 틀 안에서 더욱 풍성하게 빛나며 오직 김봉철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책에는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 그 어딘가에 자리한 이야기 네 편을 담았다. 책 한 권을 단숨에 읽게 하는 김봉철만의 필치와 상상력을 따라가며, 그가 선보이는 허구의 세계를 마음껏 누비기를 권한다. 소설 틈 사이사이에 비집고 넣어둔 작가의 진심과 마음이 당신에게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시원에 돌아와 누워 제가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던 미래를 떠올렸습니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던 그 꿈같은 날들을요. 다시 왼손을 뻗어 천장을 향해 내밀었습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왼쪽 얼굴을 손으로 덮어 한눈을 가렸습니다. 원근이 사라진다면,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없어진다면 모든 것은 결국 같아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진짜도 가짜도 내가 꿈꾸던 미래와 현실도, 어떤 식으로도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세상도 결국에는 평평해져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
-〈악귀 일기〉 중에서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 그 사이에서
김봉철이 손 틈새로 끌어올린 허구의 세계들
첫 단편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은〉은 4년 차 출판 편집자 이새콤의 이야기다. “노란 포스트잇에 ‘오로지 진실만을 간수하고자 하는 교정’이라고 적은 뒤 모니터 한쪽에 붙여놓기도” 한 그는 팩트 체크하는 일에 유독 신경을 쓴다. 그런 그가 매일 거짓말을 지어내는 한 작가를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뻗어나간다. “새콤 씨는 습관처럼 팩트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여부와 다른 구석이 있지는 않을까? 진심이 담겨 있을까? 진심을 담아도 되는 걸까? 사실과 너무 가까운 것은 아닐까? 숨겨야 할 것은 숨기고 보여줘야 할 것은 드러내는 것이 이야기라면, 나는 무엇을 숨기고 또 무엇을 드러내야 하는 걸까. 나는 누군가에게 읽힐 만한 이야기였을까?”
두 번째 단편 〈무촌 제17구역 - 아마릴리스의 노예〉는 노동 현장에서 일했던 작가의 경험이 녹아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자신을 약점을 숨기기 위해 타인에게 위악을 부리는 직영 반장 이순철과 자신의 직업에, 맡은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아마릴리스의 노예’ 김성환이 노동 현장에서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써냈다. “그렇게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것이 무촌의 검은 빠루 64세의 이순철이었고 이순철은 직영 반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현장을 한 바퀴 둘러본 뒤 크게 한숨을 내쉰다. 그때 그에게 현장을 소개하던 김성환은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 예감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2일이 지난 일이 뒤였다.”
마지막 단편 〈아버지의 영화〉는 과거 사업체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실패를 겪고, 경비 일에서도 나이를 이유로 실직한 아버지와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어머니가 가정 경제를 책임지게 되면서, 수십 년간 봐왔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은 뒤바뀐다. 요가 영상을 보기 위한 태블릿을 구해줄 수 있냐는 어머니의 말로 듣도 보도 못했던 아버지의 그림 작업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지 못한 한 편의 영화로 완성된다.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작품활동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안방에서는 뭔가를 그리거나 자르고 가끔 무언가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으며 내게 제작비를 요구해 오셔서 지갑을 열어야 했으나 나도 일상에 바빠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두 달 뒤 어느 일요일, 상영회를 열겠다며 그는 온 가족을 소집했다.”
중편 소설 〈악귀 일기〉는 ‘이야기꾼’ 김봉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곳곳에 그의 경험을 녹여 글의 몰입도를 더한 이 작품은 TV 속 대학생이 ‘진짜’ 사람들이고 실제 존재하는 ‘우리’는 오히려 ‘가짜’처럼 느끼는 주인공 김은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영부영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려 하지만, 부유하는 부표처럼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둥둥 떠다닐 뿐이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함께라면 ‘진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은미는 다시 정착하는 삶을 꿈꾸며 텔레마케팅 회사에 들어가 일을 시작한다. 이후 여러 사건을 통해 고시원에 갇혀버린 히키코모리로, 희대의 악플러로, 자신의 글을 쓰는 작가로, 주인공의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들과 인간의 외로움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룬다. “한쪽 눈을 가려 사라진 원근으로 누구의 마음 깊은 곳에도 닿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저 저의 그늘을 가리는 데만 급급했던 것은 아닐까요. 속죄를, 저는 속죄를 해야만 했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의 그늘을 가릴 수만 있다면, 저는 끝없는 죄인이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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