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끝
2024년 11월 13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10월 1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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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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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끝』의 이름 없는 화자는 오래전 지나간 연애에 대한 기억을 소설로 재구성하려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매번 불확실한 스케치에 그치고 끝끝내 과거와 착각은 분간되지 않는다. 실패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복원하려는 글쓰기, 이 두 가지 궤적은 서로 얽혀들며 기억이 어떻게 지나간 사랑의 고통스러운 지형을 보존하고 변형하는지를 그린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짧은 ‘이야기(story)’ 형식으로 독창적인 목소리를 보여주며 미국 문단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한 작가이다. 『이야기의 끝』은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로,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원래 이 소설을 짧은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형식을 확장한 사례로 언급하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기존에 짧은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었던 특유의 따끔한 유머와 간결한 문체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장편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에 대한 섬세한 통찰까지 모두 담아내고 있다.
이것이 이야기의 끝인 것 같았고, 잠시나마 긴 소설의 끝이기도 했다. 그 씁쓸한 차 한잔에는 아주 최종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이야기의 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 차를 시작 부분에 놓아보았다.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계속 이어가려면 끝을 먼저 말해야 할 것처럼.
누가 이 소설에 대해 물으면 잃어버린 남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대답한다.
_16~17쪽
그 첫날 저녁의 순간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게 즐거웠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테이블에 앉아 있고, 내 옆에도, 그의 옆에도 친구들이 앉아 있던 저녁. 공연의 소음이 커서 아무도 대화할 수 없던 저녁.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던 그때가 왜인지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느껴졌다.
그가 나를 떠난 후, 시작은 이후 찾아올 무수히 많은 행복의 처음만이 아니라 끝 역시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던 그날 저녁, 나를 거의 알지 못하던 그가 내게 몸을 기울여 속삭이던 공간의 공기에까지 이미 끝이 퍼져들어가 있던 것처럼. 그 공간의 벽이 이미 끝으로 만들어져 있던 것처럼.
_31~32쪽
소설 속에서 그를 뭐라고 부르고 나 자신은 뭐라고 부를지 오랫동안 정하지 못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의 실제 이름처럼 단 한 음절로 이루어진 영어 이름이었지만, 알맞은 이름을 찾다보니 번역하기 까다로운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겪는 아이러니에 부딪혔다. 원래의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번역어는 원래 단어 그 자체뿐이었다.
_50쪽
그가 열두 살이나 어리다는 생각이 내게는 흥미로웠다. 내가 그와 있기 위해 그 12년을 거슬러올라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나와 있기 위해 그 시간을 앞질러 오는 것인지, 내가 그의 미래인지, 아니면 그가 나의 과거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은 내가 오래전에 했던 경험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_98~99쪽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상상해봤다. 현재는 곧 과거가 될 테니까, 현재의 한가운데에 있는 와중에도 미래에서 지금을 돌아보는 걸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나는 현재와 나 사이에 거리를 두었고 비로소 현재를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_260쪽
나는 스스로를 딱히 여자로 보지 않았다. 내가 어떤 성별을 딱히 가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음식점에서 샌들을 신은 채로 의자 가장자리에 발을 올리고 앉아 있는데 한 낯선 남자가 와서 말을 걸더니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잠시 후 나가는 길에 내 앞을 지나가며 몸을 숙여 맨발의 발가락을 만졌다. 충격에 사로잡힌 그 순간, 나는 존재의 한 방식에서 튕겨나가 다른 방식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 내가 존재하던 방식으로 돌아왔을 때도 예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_266~267쪽
미국 문단의 독보적 존재 리디아 데이비스의 유일한 장편소설
리디아 데이비스는 한 인터뷰에서 『이야기의 끝』의 집필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며 본래 이 작품을 긴 소설이 아닌 짧은 이야기로 구상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내 데이비스는 자신이 그 모든 것, 이야기 속 인물이 보고 느꼈을 그 모든 것에 사로잡혔고 그것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야기의 끝』은 지나간 사랑을 회고하는 화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화자는 번역가이자 소설가로 과거 만났던 연인과의 기억을 소설로 재구성하려 한다. 이때 화자는 사건 하나하나의 세부 요소와 상대방을 이루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빠트리지 않고 있었던 그대로 소설에 담는다. 마치 지나간 시간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그 시간을 다시 살아내고 보존하려는 듯 화자의 글쓰기는 집착적으로 오랜 시간 이어진다.
소설의 이야기는 두 가지 층위로 전개된다. 첫번째 층위는 작중 소설가인 화자의 회고를 통해 전개되는 과거의 이야기로 일종의 연애소설의 형태를 띤다. 두번째 층위는 이 연애소설을 쓰려는 소설가 화자의 이야기를 담으며 그 소설의 창작 과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소설은 이렇게 실패로 끝난 사랑을 이야기하다가 또 그 사랑을 소설로 재구성하는 과정 자체를 이야기하며 두 층위를 넘나든다.
이러한 독특한 형식 덕분에 소설은 줄곧 과거에 실패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결코 감상적인 태도에 빠지지 않고 그 과정을 매우 명철하고도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소설 속에서 사랑의 시작 혹은 끝이라는 강렬한 경험 속에 놓인 주체와 그것이 모두 지나간 뒤 그 밖에서 그것을 차분히 회고하는 화자의 시선이 교차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인식은 뒤섞이며 차분하고 이성적인 현재의 시선이 과거의 강렬한 순간을 다시 체험하는 듯하다. 그 결과 『이야기의 끝』은 실패로 끝난 사랑을 이성적이면서도 동시에 생생하게 재현하는 데에 성공한다.
*
이야기가 쓰이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독특한 형식으로 말미암아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시키며 다양한 기억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소설은 소설 속 화자가 쓰고 있는 이야기의 ‘끝’과 함께 시작한다. 화자가 마지막으로 ‘그’를 봤던 기억, 시간이 지난 후 여행중 ‘그’의 주소지까지 찾아갔다가 허탕을 친 후 ‘그’를 찾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기억 등, 이야기의 잠재적인 끝을 서술하며 시작된 소설은 전개 과정 내내 다양한 ‘끝’을 의식하고 묘사하고 드러낸다.
그가 나를 떠난 후, 시작은 이후 찾아올 무수히 많은 행복의 처음만이 아니라 끝 역시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던 그날 저녁, 나를 거의 알지 못하던 그가 내게 몸을 기울여 속삭이던 공간의 공기에까지 이미 끝이 퍼져들어가 있던 것처럼. 그 공간의 벽이 이미 끝으로 만들어져 있던 것처럼. (31~32쪽)
동시에 화자는 쉽사리 어떤 결말에 도달하지 않고 기억을 더듬으며 있을 수 있었던 다양한 가능성의 세계를 펼친다. 소설에는 ‘어쩌면’ ‘~도 모른다’ ‘~이었을 것이다’ 같은, 사태를 짐작하면서도 완벽한 결정은 미루고 모든 것을 잠재적인 상태로 놔두는 문장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어떤 경우에는 위와 같은 형태의 문장이 연이어 등장하며 일어났거나 일어나지 않았던, 어쩌면 일어날 수 있었던 무수한 일들이 동시에 펼쳐진다. 그렇게 화자는 독자와 함께 밑도 끝도 없는 ‘심연’을,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의 심연”을 내려다본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그의 글에서 있었던 것과 있을 수 있었던 모든 것은 하나의 이야기 안에 머물고 이야기는 한없이 길어진다. 끝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끝은 부단히 유보하는 글쓰기, 이처럼 『이야기의 끝』은 현재와 과거의 구분 너머 여러 가능성의 세계를 넘나들며 지나간 사랑의 고통스러운 지형을 보존하고 또 변형한다.
작가정보
작가, 번역가. 1947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서 태어났다. 독창적이고 대담한 글쓰기를 통해 자신만의 문학적 영역을 공고히 하고 있다. 『분석하다』 『거의 없는 기억』 『새뮤얼 존슨은 분개한다』 『불안의 변이』 『우리의 이방인들』 『못해 그리고 안 할 거야』 등의 작품집을 냈고 장편소설 『이야기의 끝』과 두 권의 산문집을 냈다. 플로베르, 프루스트, 블랑쇼 등 여러 프랑스 작가의 작품을 영어로 옮겼다. 2013년에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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